<더 킬러>

영화 <더 킬러>의 세계는 안으로 꽉 닫혀 있다. 모든 장면이 잘 통제되고 조직된 이미지라는 느낌이 든다. 음향도 허투루 구성된 것이 없다. 킬러가 지겹도록 듣는 The Smiths의 노래가 생활 소음 속 이어폰의 미세한 소리에서 전경 사운드로 전환되는 것이, 파리 도시의 부감 쇼트가 킬러의 시선임을 규정하는 형식적 기호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관객이 이 가상 세계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의 중력장이 만드는 실제성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한 영화적 실제성이 킬러 인물을 소실점으로 향하기 때문에 영화 내내 읊어 대는 킬러의 독백을 그대로 믿기 쉽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이 킬러가 자신을 해치려는 세력의 정점, 살인을 의뢰한 자본가를 죽이지 않고 돌아선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킬러는 목표를 향해 최단거리로 직진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절대 망설이지 않고, 두려움 없이, 공감의 약점을 만들지 않고, 뒤돌아 볼 것 없이 계획한 대로 수행하는 것이 그가 지닌 원칙이 아니었나. 그런 원칙을 쉼 없이 말하던 그가 복수를 완수하지 않고 경고 몇 마디로 퉁치는 결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이를 이해할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자본가를 대면하고 킬러가 급작스럽게 마음을 바꿨다는 가설이다. 자본가는 육체적으로 대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 그러나 말 한마디로 이 청부 살인의 세계를 작동시키는 존재, 그러면서 자신의 말로 인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자기 세계의 토대가 보이는 이 순진무구함이, 또는 순진무구한 악이 냉혹한 킬러를 복수로부터 물러서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가정을 품고 영화를 두 번째 보고서야 나는 내가 그의 독백을 너무 믿었음을 알아 챘다. 근엄하게 되뇌는 완전무결한 철칙과 달리, 킬러는 (살인 의뢰를) 실패했고, (도주하면서는) 당황했고, (암살당할까봐 또는 결투에서 질까봐) 두려워 했으며, (복수 대상의 부탁에) 공감하고 응해 줬다. 그리고 종착지에서는 망설이거나 비굴해졌다.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면 킬러의 독백은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기 위한 자기 암시, 또는 약점을 드러내는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관객에게 던지는 위장된 거짓말은 아닐까. 이미지가 항상 진실을 담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이미지가 어떤 감각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독백 목소리가 장악하고 있는 영화 세계의 실제성이 눈으로 지켜보는 사실을 어떻게 가릴 수 있는지 보여 준다.

내가 킬러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은유하거나 암시하는 바를 더 궁구하고 의미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 냉혹하고 비굴한 살인마의 세계에 대해 과잉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럴싸하게 내뱉는 명상적 독백을 두 시간 동안 듣는 고행은 그의 독백이 조성하는 실제성이 결코 진실되지 않다는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 기억에 남는 진실된 말은 그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어느 남자의 농담 한 마디다. “시체 처리 도와 드릴까요?”

<괴인>

영화 <괴인>의 초반부는 공사 현장을 생활인의 감각으로 묘사한다. 불규칙하게 울리는 타카 소리,계단으로 피아노를 들어올리는 힘겨운 과정, 수고에 대한 답례일지도 모를 피아노 연주를 덤덤하게 응시하는 인부의 얼굴이 생활 세계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기홍이 테이블쏘에 합판을 올리고 무심한 듯, 그러나 완벽하게 능숙하지는 않은 듯 맹렬한 전기톱에 밀어넣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 나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직업과 생활 세계에 내재한 치명적 위험을 드러내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피아노 교습소의 공사 현장을 묘사하는 첫 시퀀스만 본다면 이 영화는 목수와 공사 인부의 노동에 대한 생활 감각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그러나 이후 이 영화는 추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눈 앞에 펼쳐지는 사태를 인지할 수는 있으나 사태들을 모아 총체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곤란한 부류의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보고 난 후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그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하기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런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을 <괴인>이라는 제목으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누가 ‘괴인’인가 하는 질문을 품고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당연히 목수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기홍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일삼고 이상하게 무례한 인물인데, 옥상에서 건넛집 남녀를 훔쳐보는 순간 앞으로 기홍의 기괴한 욕망과 인격을 묘사할 이 영화의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후 기홍의 집주인 남편 정환이 기홍의 차 지붕이 찌그러진 사건에 대해 과도한 관심으로 기홍의 세계를 침범하면서, 그 다음에는 보호종료 아동 하나가 그 사건의 범인으로 이들 사이에 등장하면서, 또 그 다음에는 집주인 아내 현정이 술을 들고 남편 몰래 기홍의 방을 찾으면서 ‘괴인’의 용의자는 연쇄적으로 확대된다. 마치 모든 인물이 일견 ‘괴인’의 면모를 지닌 것처럼 전개되는 이 영화는 영화의 제목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인물의 이상한 면모를 관통하는 통합적 의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들 인물의 기괴한 면모가 직업 또는 계급적 특징의 한 측면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뿐이다. 기홍은 목수 반장이라는 직업 세계의 성격을, 정환과 현정은 유한 계급의 권력과 허영을, 하나는 보호종료 아동의 취약함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위험을 내재한 정치적 환유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단지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각 인물을 정말 ‘괴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까지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각 인물은 ‘괴인’의 개념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가기 전에 멈춘다. 예컨대 기홍은 옆집을 훔쳐 보고 여성에게 아슬아슬한 플러팅을 하기도 하지만 마트에서 임산부에게 계산 순서를 양보하기도 하며, 더욱이 같이 일하던 친구 경준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현정의 친구가 의뢰한 인테리어 공사가 기약 없이 미루어지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에서 멀어지는 것은 정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마찬가지로 하나가 등장하면서 정환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심은 하나에게 옮겨 간다. 특히 현정이 기홍과 함께 사라진 다음 날 아침에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떨군 정환은 그저 측은한 인물이 된다.

앞서 이 영화가 계급적 특질에 따른 인간의 괴인적 면모 고찰로 이 영화를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급했지만,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이탈하는 방식은 계급적 위상 관계에 따른 개념적, 인과적 이행이라기보다 단지 새로운 다음 인물이 등장하면서 관심 대상이 전환됐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때 ‘괴인’으로 보였던 이전의 인물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인물로 달리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이 계급 적대의 환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동안 보호종료 아동 하나는 정환의 집에 몸을 의탁하는 데서 끝나는 이 영화는 내게 묘한 미결감을 남긴다.

‘괴인’이 누구인지 한 인물로 확정하지 못하고 다른 인물로 계속 미끄러져 가기만 하는 난감함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 가는 공간 전환의 과정이 영화에는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홍이 다세대 주택 옥상에서 옆집을 훔쳐보다 핸드폰을 벽 사이로 떨어뜨리고 난 다음 장면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기홍은 이미 이사한 새 집 자랑을 하고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기홍이 집주인 정환과 첫 대화를 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국면이 전환되고 본격적인 인물 사이의 미끄러짐이 시작된다는 징표를 영화는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밤길을 지나는 자전거 탄 두 남녀 장면은 반대로 무엇을 위해 공백 같은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의미의 단서를 던져 놓고 그것에 머무르는 것에는 저항하는 듯한 모순적 욕망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난감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당나귀 EO>

이 영화가 당나귀를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나귀 EO>는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밤 깊은 산 속에서 총성에 휩싸이는 당나귀의 모습은 특히 그렇다. 그러나 두 영화가 다르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발타자르의 얼굴이 마리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응시하는 타자의 것이라면, 이오는 오히려 인간이 조성하는 이야기의 층을 희박하게 만들고 당나귀의 시선을 재현하기 위해 애쓴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당나귀 EO>가 <당나귀 발타자르>를 연상시키는 것은 단지 세계 속 당나귀라는 존재가 담긴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둘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귀 EO>는 영화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인용일 법한 장면들이 분명 존재한다. 다른 예로 말 재활 공간의 한 장면에서는 마이브릿지의 말 연속 사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인용하면서 영화 자체를 떠올리고 반추하게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인상은 나아가 당나귀의 시선을 재현하려 애쓰는 이 영화의 노력을 카메라 시선에 대한 성찰의 맥락에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초광각, 일그러진 초점, 접사, 과장된 색과 대비가 어우러진 이미지를 통해 영화는 인간의 것이 아닌 시각을 재현하면서, 이것을 당나귀의 시선으로 상상하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감각을 수용하는 일일 것이다.

당나귀의 감각을 상상적으로 경험한다고 느끼는 비약을 나는 단지 인간 시선의 확장된 신체로 작동하는 카메라의 권능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카메라가 인간 신체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만드는 감각을 순수한 타자의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메라의 감각이 너무나도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은 기계 도구를 통해 감각과 인식을 확장해 온 존재이며 그것이 일으키는 낯섦이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것이 비기계적 타자의 영역에 속하는 낯섦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나귀가 사람 같이 운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린다. 당나귀는 애처롭게 절규하고 흐느끼듯이 운다. 그 안타까운 울음 소리, 말보다 왜소한 체격과 큰 귀가 만드는 연약한 느낌, 인간으로부터 착취당해 온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재갈, 그리고 무언가 익살스러워 보이는 정면 얼굴의 모습까지, 당나귀라는 존재의 특질에 대해 내가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표상적 속성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반응이, 카메라의 기계 감각을 당나귀의 것으로 상상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통로는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가 당나귀를 선택한 이유는 아닐까. 어쩌면 순수한 타자적 감각이란 인간의 표상적 인지 체계의 필터를 거쳐 만들어지는 착각은 아닐까.

표상 인식의 필터를 통해 기계의 감각과 시선을 당나귀의 것으로 상상하고 나면, 어쩌면 진정한 낯섦의 층위라고 할 만한 질문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나귀 이오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인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피상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오의 운명에는 왜 그렇게 결정적으로 작동하는가. 이는 인간의 동물 학대, 자연 착취에 대한 성찰적 질문에만 머물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이오에 대한 사랑이나 이오를 살라미 재료 취급하는 트럭 운전사의 탐욕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반향이 이오에게서는 그저 미끄러져 스쳐가는 것만 같고, 이오가 전개하는 불가해한, 어쩌면 충동적 선택에 따른 일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여정의 전환들은 왜 죽음을 연상시키는 일들의 반복으로 재현되는가. 달리 말해 이 영화에서 인간의 이야기는 왜 피상적 표면만으로도 타자에게 치명적인가. 또는, 카메라는 피사체의 표면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그것을 치명적 운명에 빠뜨리는가. 이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발걸음으로 도축장의 어둠 깊이 사라지고 나면 풀기 힘든 질문들의 잔상이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