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입체성을 억누르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구현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닌 ‘악의 평면성’이다. 영화는 나치 가족을 이미지로 전면화하면서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서 있는 곳은 이 가족의 구체적인 세부가 보이지 않는(실은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 담장 건너의 무수한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안위에 몰두하는 이들의 풍경만 피상적으로 스케치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동요 없는 중립지대, 객관적 목격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허락한다. 감독은 이 가족에게 중심을 맞춘 이유로 “우리에게 내재된 가해자와의 유사성을 보는 시도”라고 말하지만, 정작 영화는 가해자의 서사와 분리된 곳에서 피를 묻히지도, 벌벌 떨지도 않는 기계적인 눈으로 그 세계를 그저 쳐다본다. 이 영화는 비인간성을 현시한다는 미명으로, 자신이 빚은 인간의 개별성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가해자의 서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서사 자체를 무력화한다. 그 태도는 비겁하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구역질의 만용, 가장된 악몽’

2주 전 숭례문학당 영화 토론과 비평 읽기 수업에서 남다은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칠 뻔 했다. 남다은의 통렬한 비판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국한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인용할 때 우리는 악을 평면적으로만 다루는 어리석은 비겁을 흔히들 반복한다.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악이나 폭력 같은 것에 대해 보이는 평면적 적대감은 아주 간단하게 자신을 그 적대자들에게 연루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게 만든다. 관념적으로는 그것을 주체의 대립자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는 악이나 폭력을 생산하는 구조 안에 연루된, 그런 조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주체다.

<메이 디셈버>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묻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수신자가 잘못된 질문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를 경유하여 그레이시에 대해 질문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레이시의 내면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엘리자베스가 그토록 이해하기를 욕망하는가.

그러나 욕망의 대상, 그레이시보다 우리에게 그것을 매개하는 엘리자베스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미스터리한 대상으로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영화 속 엘리자베스의 말과 같이, 도덕의 회색 지대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그레이시라는 인물이 왜 그러한지 알아내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20여 년 전 36세의 그레이시와 13세 미성년 조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재현하는 영화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할 예정이며,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것이 자신이 할 연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엘리자베스는 재현이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집착적으로 수사하는 것은 그 사건을 잘 재현하는 연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그가 그레이시 자체가 되어 그때 그 사건을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엘리자베스에게 얼마나 강렬한 욕망인지는 그가 사건을 상상하며 연기 연습하는 두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과거 그레이시와 조가 정사를 벌이다 발각된 펫샵 창고의 현장 귀퉁이에서 성교의 몸짓을 연기하던 엘리자베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조가 전해 준 과거 그레이시의 편지를 낭독하는 연기를 하고 나서는 희열에 이른 듯 전율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낭독하는 나탈리 포트만-엘리자베스는 심지어 줄리안 무어-그레이시의 입술 모양까지 그대로 닮은 듯해 보인다.

이렇게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와 일치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영화는 희열적 장면으로 제시한다. 영화가 엘리자베스의 욕망에 우리를 끌어 들이려는 노력은 영화 속 시간의 간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건이 벌어진 1992년에 열세 살이었던 조는 이제 당시 그레이시와 같은 나이인 서른여섯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조와 같은 나이이며, 당시 그레이시를 연기하려 한다. 세 인물은 생물학적 나이로 과거의 시간과 그레이시를 향해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보인다.

시간적 구조도 엘리자베스의 욕망에 동참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그 욕망에 대해 반성적으로 보이는 것은, 도무지 그레이시의 내면이 어떠한지 알 수 없는 채로 끝나기 때문이다. 여러 각도의 중첩된 거울로 인해 공간의 구조를 분간하기 힘든 옷가게 장면의 모호함이 이를 탁월하게 은유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레이시를 담은 두 개의 이미지 중 무엇이 거울상이고 무엇이 직접적 실체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물론 직후에 카메라는 그레이시의 딸 매리를 따라 들어오면서 이 공간을 반추해 준다. 이때 그레이시는 오직 거울상으로만 제시되었음을 깨달으며 짧은 혼란이 지나간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사건의 다른 당사자 조의 내면도 묘사하기를 피하고, 그 사건에 대한 의미화도 완성하지 않는다. 영화는 금기를 어긴 인간의 내면적 실체가 무엇인지 파고들 것 같지만 결국 결론 내리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금기 너머의 심연은 없는 것처럼 이들을 보여 준다. 금기를 어긴 인물의 내면은 알 수 없고, 당사자와 이들을 둘러싼 다양한 양태의 금기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만이 도처에 잔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말미에 조는 집을 떠나 대학을 가는 쌍둥이 아들 찰리를 부둥켜 안고 운다. 대마를 하고 감정이 격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조는 나쁜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도 하고 우리가 나쁜 일을 하기도 한다며 찰리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억누른 감정을 터뜨리는 것 같기도 한 말을 한다. 나는 이 말이 영화가 그레이시와 조가 어긴 금기에 대해 암시하는 메시지의 전부인 것처럼 느꼈다. 그레이시와 조는 각자 과거의 사건이 야기하는 현재적 긴장 속에서 청교도적 규범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반대로 그들은 청교도적 삶의 방식을 통해 외상적 과거를 계속 현재에 소환하고 견디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금기를 위반하는 인간의 특별한 면모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엘리자베스의 욕망의 대상을 영화는 끝내 그에게 쥐어 주지 않는다. 그레이시의 실체에 대한 충실한 모방은 엘리자베스의 오인된 환상에 근거함을 영화는 반성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 드디어 촬영에 들어간 그레이시 사건의 재현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의 그레이시 연기가 그렇게 엉터리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재현은 현실의 충실한 모방이라기보다, 모방의 불가능함과 이것이 만드는 대안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라고, 엘리자베스의 연기를 보며 생각하게 된다.

나는 게임의 이런 스토리텔링 방식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어서 재미있다고 느낀다. 삶에는 많은 이야기 조각들이 있다. 원한다면 이것을 서사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굳이 그러지 않는다. 삶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조각들을 끼워 맞추려고 애쓸 때나 가능한 일이다(현실의 작가, 특히 내러티브 논픽션을 쓰는 작가는 이 조각들을 서사화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냥 살아간다. 도처에 있는 정보와 사건과 이야기를 스쳐 지나간다. 마찬가지로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도 이야기를 대충 흘려듣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심지어 그런 플레이가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발견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야기를 목격할 수 있다.

김초엽, 「세계를 경험하는 것」, 『아무튼, SF 게임』

내가 종종 망각하는 사실을 이 문단이 깨우쳐 준다. 나는 의미와 이야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을 깨닫지 않고도 삶은 경험으로 나아간다. 위 표현대로, 우리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삶에서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욕망이, 경험으로서의 삶을 자꾸만 간과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