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진에 입문할 즈음에 나의 사진 주제는 행상이었다. 처음부터 행상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출퇴근길에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관심이 갔다.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풋과일이 잔뜩 담겨진 함지박을 인 아낙네와 어떤 노인은 어깨에 싸리비를 메고 또 어떤 이는 열쇠꾸러미를 가슴에 앞치마 두르듯 두르고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잘 기록해 두었다가 훗날 한 권 책으로 남기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주말이면 뛰쳐나갔던 곳이 바로 서울역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역전엔 사람들의 통행량이 많은 것은 변함없지만 한두 시간 가만히 서서 들여다보면 30여 년 전 내가 사진기를 메고 처음 드나들던 역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나를 보면 꾸벅 인사를 잘하던 풍선장수 소년도 보이질 않지만 역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차림새가 부티나게 달라졌다. 경부선, 호남선에서 내린 승객들의 모습도 이젠 화려하다. 그 옛날 객지에서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주려고 농사지은 쌀 몇 말을 메고 올라오는 영감님도, 채소까지 다듬어 머리에 이고 역전을 빠져나와 마중 나온 자식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던 노파도 이젠 보이질 않는다.

염천교 건너 수산시장도 노량진으로 옮겨간 지가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른 아침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받아 큰 양푼에 담아 머리에 이고 소매시장으로 달려가던 아낙네들도 만날 수가 없다. 역전 파출소부터 염천교 다리 위까지 옛날 시골 장날처럼 북새통을 이뤘던 장사꾼들, 좁은 길 양쪽으로 김밥, 인절미, 계피떡, 시루떡, 잡채, 돼지껍질볶음, 순대, 막걸리, 막소주, 냉차장수, 액세서리 장수 등 없는 게 없었다.

완행열차에 시달리다 역에 내린 승객들이 쭈그리고 앉아 꾸역꾸역 허기진 뱃속을 채우던 모습도 보이질 않는다. 추운 겨울 연말쯤이면 영화배우 얼굴이 찍혀진 달력도 팔고 솜사탕처럼 포근한 겨울모자도 팔았다. 염천교 다리 위엔 담배꽁초를 까서 쌀됫박에 담아 파는 노인도 있었고 참빗, 얼레빗, 양은 비녀, 심지어는 버둥거리는 두더지까지 끌고나와 팔러 다녔다.

처음에는 역전 광장을 떠나지 않고 찍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역전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염천교를 건너 수산시장, 중림동, 서부역 부근까지 돌아다니면서 행상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람 살아가는 얘기라면 무엇이든 다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의 가난한 삶을 좀더 인정적으로 차분하게 살펴보아야겠다는 것이 내 평생의 주제 ‘골목안 풍경’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역전을 떠나 골목으로 들어갔으나 역전은 늘 잊혀지지 않는 나만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만났던 자식사랑이 지극했던 노부부,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 내어놓고 돼지껍질 한 조각에 막소주 한 잔, 그래도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던 허름한 옷차림의 사나이, 비오는 날이면 비닐우산을 옆구리에 끼고 어디선가 나타났던 우산팔이 소년, 모두가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기에 요즘도 가끔 서울역전을 찾지만 왠지 허전하기만 하다. 서울 역사(건물)는 변함없이 서 있지만, 역전 분위기는 매우 달라졌다. 스산하고 살벌하다고나 할까? 대낮부터 깡소주에 두 눈이 벌겋게 풀려 버린 사람들의 시선은 두렵기마저 하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그렇게도 많이 변하고 보니 30여 년간 나의 사진 속 서울역전 시절을 회고하면서 깊숙이 묻혀 있던 원고를 정리하게 되었다. ‘눈빛’ 이규상 사장의 도움으로 한 권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을 감사한다.

2002년 9월

김기찬

역전 풍경(서울역 부근 | 1968-1983 김기찬 사진집), 작가의 말

나는 지금도 한국 최고의 영화평론가로 불리는 정성일과 허문영의 가장 인상적인 글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고 생각한다(정성일의 <해안선>과 <외출>에 대한 비평, 허문영의 홍상수 비평과 소년성에 대한 글들이 그렇다). 그들은 산업이 사회와 관객의 감각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저널리즘 비평은 이런 조건 속에서 가장 빛난다. 우리가 말하는 ‘비평의 위기’란 어쩌면 산업에서 비평이 멀어져버린 풍경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비평은 서울 중심으로 상영되는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보도자료에 가까운 형식으로 기울어 있다. 지금처럼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한국영화에 축복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축복은 동시에, 영화가 한때 감당하던 보편성을 내려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2010년대 페미니즘의 부상 이후, 관객과 독자의 의식은 영화와 문학이 지녔던 진부한 보편성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 영화 전반에서 남성적 주체의 보편성을 거부하는 제스처가 이어졌고, 그 정점이 2022년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설문에서 샹탈 아케르만의 <잔느 딜망>이 ‘역대 최고의 영화’로 선정된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위대함과는 별개로, 나는 이 선택이 영화사의 기존 정전을 재평가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의 역사 자체를 특수하고 개별적인 분과들의 집합으로 분해하겠다는 정치적 확언에 가까웠다고 본다. 큐레이션이라는 이름 아래 예술사의 남성적 시선을 거부하는 시도들은 그렇게 새로운 정전(혹은 대안적 정전)으로 제안되었다.

이론이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영화는 점점 신념의 문제가 되었고, 정치적 올바름은 영화 관람의 감각을 제약하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영화에서 진부함이나 보편성을 발견하는 일은 어느 순간 죄악처럼 취급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비평의 어휘사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따져보면, 하스미 시케히코를 중심에 놓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한국 영화광들에게 미친 영향은 사회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읽는 태도와 깊게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주체’나 ‘저항’, ‘돌파’로 불리던 것들은 이제 ‘숏’과 ‘운동’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그 과정에서 실제 집단으로서의 관객과 사회는 비평에서 점점 지워졌다. 나는 이 흐름이 영화 환경의 ‘미세화’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하나의 문화적 주기가 소진된 뒤, 아트하우스 전성기라 불리는 지금의 비평에서 ‘사회’라는 항은 거의 망각되었다고 본다. 정치에서 형식과 매체 연구의 시대로 이행한 이후, 영화비평은 더이상 사회와 길항하는 게임에 들어가지 못한다. 영화는 사회를 향한 질문이 아니라 형식이 얼마나 정교하게 닫혀 있는지를 평가받는 대상으로 읽힌다.

지금 한국 곳곳에서 훌륭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말도 덧붙여야겠다. 훌륭한 영화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과대평가되었다. 이 말은 상업영화를 다시 비평의 중심에 올리자는 제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를 동시대의 맥락으로 지금의 영화문화에서 상영되는 ‘다양한 영화’들을 보편성의 언어로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트롤링으로서 영화비평 – 비평이 잃어버린 보편성, 과대망상의 필요, gkd, 씨네21

흥미로운 글이다. 다른 생각이 많아진다. 물론 이 글에서 표현하는 보편성이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남성중심적 세계관이라는 특수성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유념하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새로운 보편성을 구축해 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페미니즘적 반성은 아직도 보편과 투쟁 중이고, 내적 분열도 겪고 있으며, 파괴와 대안 실험의 과정 속에 있는 것 같다. 보편성은 우리가 빠져 있는 공통된 착각, 환상이고, 이에 대한 투쟁은 정체성 정치라는 자기 모순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은 페미니즘적 문화 반성의 시기가 지난 것처럼 보지만 실은 아직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반성의 시간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 글이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공교롭게도 페미니즘적 문화 반성의 시기를 지나면서 영화 비평은 다양한 미세화의 국면으로 빠져든 것처럼 이 글은 진단한다. 그 공교로움이, 소위 보편성, 공통된 착각과 환상이 페미니즘적 해체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산업이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게 되는 시기적 조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문화 산업이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체제로 이행하는 조건을 문화적 보편성의 위기가 창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공용어로 소통할 필요가 없는 혼종과 이합집산의 시장은 사회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곤경은 영화 비평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고도로 정교해진 체제라는 외재적 유령은 모든 저항을 포섭해 버리고,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경험과 정체성의 미세한 심연으로 파고 들어가는 시대에 담론의 역할은 무기력해 보이기만 한다. 낡은 것은 해체되어 가고 새로운 것은 도래하지 않은 보편성 공백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마작>

영화 정보 사이트에서 <마작>의 장르를 코미디로 분류하고 있지만 이런 방식의 범주화가 얼마나 짓궂은 혼란을 야기하는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방식의 범주적 사전 지식이 때로는 영화적 경험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코미디에 가까워 보이는 것은 홍어를 추적하는 갱 듀오 뿐이다. 그 허술함과 장난스러움은 영화의 시작부터 홍어 무리를 따라다니는 위험의 기운을 진지하게 경계할 필요 없는 해프닝인 것처럼 바라보게 만든다. 갱 듀오는 큰 빚을 진 홍어의 아버지를 추적하다가 좌충우돌 끝에 홍어에게 총을 쥐어 준다. 겉멋이 든 자와 장난기 넘치는 허술한 자, 코미디 갱 듀오가 총을 들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장르적 관습 안에서 기능하는 기호에 불과해 보였지만, 홍어에게 넘어간 총이 결국 어떤 일을 벌였는지 우리는 보았다. 이 영화에서 총이 발사되는 순간 우리는 영화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도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총격의 순간에 미세하게 번쩍이며 진동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고 진짜 위험한 사건이 벌어졌음을 각인시키려는 영화 자신의 경련이다.

총기 규제가 엄격하기는 대만도 한국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비현실적 사물인 총이 영화에 가하는 충격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이것은 이야기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증한다. 이것은 <마작>이 대만의 1990년대를 현실적으로 다루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런데 실제로 총이 발사되는 순간 그 믿음은 영화가 그렇게 표현한 것처럼, 섬광과 함께 흔들린다. 이것을 환상이 현실을 향해 폭발하는 순간이라고 말해도 될까. 서로가 서로를 사기 치기에 혈안이 된 영화의 세계가, 세계 속 인물이, 그 증오를, 이야기 내부 핍진성의 원칙을 깨고서라도 현실 세계로 내뿜기 위한 도구로 총이 이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작>에서 총은 환상과 현실을 동시에 관통하는 충격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본다.

<마작>은 에드워드 양의 다른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두 영화에 같은 배우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미성숙한 인물들이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또 반응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닮았다. 그리고 인물들의 미성숙함에 영화는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두 영화에서 패거리를 이루는 소년과 청년들은 이를테면 전쟁놀이 같은 투닥거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폭력과 범죄를 벌인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그저 철없는 짓으로 치부할 수 없도록 두 영화는 중요한 살인을 인물의 손에 맡긴다. 나는 이 청춘들이 무엇 때문에 대립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기를 치고 해코지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들이 그 무언가 때문에 행하는 폭력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마작>에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아무도 몰라”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온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고,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 말을 하는 홍어와 홍어 아버지, 그리고 나중에 홍어에게 죽임 당하는 추 이사 역시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고사하고,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세 인물 모두 자신의 욕망을 확신하는 것 같지만 무지 안에서 각자 나름의 파멸을 겪는다. 이것은 어쩌면 거품의 시대에 올라탄 듯 자신한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일 것이다. 대만 경제의 거품. 거품은 그 분위기를 즐길 자유는 허용하지만 그 핵심에 접근하는 것까지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거품의 경제학은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이 정합성에 의해 작동한다고 믿는 한에서 유지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화는 사회적 억압과 징후가 이들에게 기입되어 있다는 사회학적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이미 사회에 위험한 존재가 되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의도한 것 이상을 행하고 말한다.

다만 두 영화는 청춘의 위험을 누구에게 할당할지에 대해 차이를 보인다. 두 영화에는 공히 무리에서 조금은 떨어져 지켜보는 편입생 인물이 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인물에 이입해서 영화를 따라간다. 샤오쓰와 룬룬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바로 그 인물, 샤오쓰가 살인을 저지른다. 반면에 <마작>에서는 무리의 리더 홍어가 살인하고, 이후 편입생 룬룬은 무리에서 이탈한다. 룬룬은, 진저가 표현한 것처럼 거친 서부극과 같은 대만에 홀홀단신으로 발을 들인 프랑스인 마르트를 구하고 사랑하기 위해 떠난다. ‘사랑하기 위해’라고 한 것은 룬룬의 마르트에 대한 감정이 결심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트에 대해서는 왜 마커스를 떠나 룬룬을 찾는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가 하는 의아함이 남지만 말이다. 섣부른 도식화이기는 하지만, 세기말의 룬룬이 1960년대의 샤오쓰보다 파국적이지 않은 이유는 사랑하기를 결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샤오쓰는 억압적 세계에 대한 울분과 증오를 쟁취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 밍에게 투사한다. 자기 혐오적 행위에 가까운 홍어의 살인도 내부 모순에 결박당한 자의 투사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파국이 우리에게 던지는 반영적 성찰이 분명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한편 반면에 다행히 온전히 무리의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룬룬은 그 바깥의 관계에 눈을 돌린다. 이 차이를 만드는 인물들의 태도를 더불어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두 영화에서 밍과 마르트, 그리고 앨리슨이 남자들의 대상으로 갇혀 있듯이, 이것은 20세기 망가진 남성의 일그러진 판타지가 그려내는 세계라는 점을 유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