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 의식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경쟁 의식과, `나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집단적 무의식에 압도되어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 연대를 향한 길이 개인의 존엄성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라면, 사회를 관통하는 연대 의식은 사회가 사회구성원들 각자의 존엄성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듯이, 단 한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이라도 무시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 의식은 정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국가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용인해선 안 되는 까닭은 그 사람의 인권 자체가 중요하거니와 그래야만 사회의 연대 의식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 의식은 사회정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최종길 교수 살해 사건과 수지 김 사건은 다시 국가기관이 사회구성원의 인권을 처참하게 짓밟는 범죄를 저질렀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워낙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이기 때문일까, 경악과 분노의 목소리,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강력한 장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가령, 탈세 혐의의 족벌 언론사주들을 옹호하기 위한 동원에 동참했던 이른바 한국사회의 원로들은 이 엄청난 사실 확인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정의나 연대 의식까진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은 죽어 말이 없다 한들 그들의 인권이 탈세 언론사주의 인권이나 언론 개혁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홍위병’이라고 불렀던 어느 문인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 비해 하찮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균형잡히지 않은 그들의 사회 인식이 안타깝다고 말하기엔 `사회 원로’나 이른바 `국민 작가’이라는 말이 안쓰럽고 `어두운 시기를 잘 보낸 기득권자’의 다른 이름이 아닌지 묻게 한다.
두 사건은 국가의 안보를 담당하는 기관이 저지른 범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범죄를 국가안보를 빌미삼아 국가권력이 저지른 범죄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국가폭력이 국민들에게 `나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심리를 조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사회구성원들의 단결을 요구하는 국가안보의 강조가 실은 연대 의식을 기초에서부터 흔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곧, 국가 안보를 앞세운 색깔론은 지역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연대 의식의 성장도 가로막는 중요한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국가 폭력의 또다른 희생자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법 살인에 참여했던 사실에 대해 소신을 밝히라는 거듭된 요구를 아예 못들은 척하는 것도 색깔론과 지역주의에 올라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 관련 책임자들이 기억상실증과 모르쇠로 일관하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할 때 연대 의식 대신에 `나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란 의식이 팽배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는 김대중 정부도 사회정의와 연대 의식을 배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라의 안보와 질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관철될 때 사회정의와 연대 의식은 설자리가 없어진다. 반면에, 사회정의와 연대 의식이 서 있는 곳에 안보와 질서는 자동적으로 보장된다. 적어도 사회의 안보·질서 의식과 사회정의·연대 의식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60만이 넘는 노동자들의 조직인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단병호 위원장을 질서의 이름으로 감옥에 가두고 있다. 온건한 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가 어겼다는 질서가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질서인지 묻지 않을 만큼 한국 사회의 질서·안보 의식은 사회정의·연대 의식을 완전히 억누르고 있다. 그리하여, 올해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끝내지 못하고 또 한 해를 넘긴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홍세화/<아웃사이더>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