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씨 ‘B급 좌파’ 펴내…

 

보수란 사상이 아닌 욕망일뿐

김규항은 ‘글잡이’다. 그는 글을 ‘칼’처럼 쓴다. 그의 글에선 군더더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디 하나 흐리멍덩한 구석없이 숫돌에 갓
갈아낸 칼처럼 날이 서 있다. 그는 칼 대신 글로 세상과 싸운다. 그와 버성긴 ‘세상’이란 “아이에게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세상”이며, “인간이 만든 모든 부끄러운 것들로 가득 찬, 그래서 끝없이 내게 긴장을 선사하는 조국”이다.

그가 지난 3년 동안 영상 주간지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란 칼럼난에 격주 또는 3주에 한 꼭지씩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란 이름으로 묶어냈다. (야간비행 펴냄, 1만원) 재생지로 만든 이 책은 잘 마른 짚단처럼 가볍지만, 초심의 긴장은 책장을 다
넘기도록 팽팽한 현처럼 떨고 있다.

그 스스로 고백하듯, <씨네21>의 칼럼을 시작하기 전 그는 다른 글쓰기의 이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의의 습격”처럼
다가온 글쓰기는 그를 “B급 좌파”로 만들었다. 먼저 왜 아직껏 ‘좌파’인지 들어보자.

“보수는 오늘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 극우는 오늘의 이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 쓴다면 모를까,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있는가. 물론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렵다. 왜냐하면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B급’인가. “좌파로 살기로 결심은 했지만, 사회를 요령있고 짜임새있게 설명할 대단한 대안은 없다. 아마 그런 게 가능해야
‘A급’ 좌파일 것이다. 나는 원칙적으로 자본주의에 찬성하지 않는다. 대안이 뭐냐고? 그건 ‘A급’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전근대의 암흑기에 살던 노예와 농노들이 도대체 ‘근대’라는 개벽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혁명의 시대가 거꾸러진 뒤
캄캄한 반동의 세기가 백여 년씩 지속될 때, 사람들은 다시 혁명의 파도가 도래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칼끝은 단호하게 세상을 자른다. 가령 그는 보수와 진보를 이렇게 가른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도 사상인가. 보수 사상이 진보 사상과 대립한다 해서 보수 사상을 진보 사상과 같은 층위에 놓는 일은 터무니없다. 보수란
순수한, 매우 순수한 욕망이다.”

칼날의 단호한 나눔은 더러 경계선상에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 이 ‘B급 좌파’의 칼은 그러나 공정하게도 세상만을 겨누고
있지 않고 스스로의 목젖에도 날을 대고 있다. 그는 한국 지식인의 위선에 대해선 가혹하리만치 무섭게 칼을 들이대지만,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 또한
그 이상으로 매섭다. “배운 사람들은 아마도 실제 필요한 양보다 터무니없이 많은 지식을 갖고 있거나 꼭 필요하지 않은 종류의 지성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나 같은 건달도 아는 그런 소박한 이치를 도저한 지식과 장구한 글쓰기 이력을 가지고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된
사정일까.”

글은 이제 그의 삶의 무기가 됐고, 그의 삶은 자신의 글에 조회하기만 하더라도 싸움에서 한걸음도 물러설 수 없도록 묶였다. 이런 무덕을
갖춘 문사는 옆에 두고 보는 일만으로도 즐겁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짧은 주소

트랙백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