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대 서양사학과 강성호 교수님 홈페이지 에서 퍼옴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 연구경향을 중심으로

 

목 차

1.머리말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1)독일사회민주주의 역사적 발전과정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

4.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한국의 연구경향

5. 맺음말

* 영문초록(Abstract)

* 참고문헌.

1. 머리말

최근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통해 급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19세기 중엽 이후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인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온 흐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는 최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자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관심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91년 이후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개가 활발하게 소개되어왔다. 이에 비해 회민주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 발전해 왔는가를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개념,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과 한국에서의 연구 경향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보다 깊이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개념

1)독일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기에 앞서 독일사회민주주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고,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크게 3 단계의 시기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번째 단계는 1890년대 중반에 베른쉬타인이 제기하여 일어난 수정주의 논쟁 시기이다. 베른쉬타인은 1896년의 독일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에 제출했던 의견서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전면적 수정을 제기탖다. 베른슈타인은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에 따른 궁핍화 법칙, 자본주의 멸망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들 둘러싸고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경제민주주의의 구상을 둘러싼 시기이다. F. Naphtali가 경제민주주의 구상을 창안하였는 데, 이것은 공적 개입에 의한 경제의 민주화와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전제하는 자주관리형태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25년 독일노동자 총연맹 브레슬라우대회에서 제창되어, 1928년의 함부르크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세번째 단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전환을 둘러싼 논쟁 시기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공정한 사회질서의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보호하고 장려하려 한다. 사회화론을 부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1951년에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표와 임무’라는 제목의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강령] 등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2) 사회민주주의 개념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상황이 변화되어옴에 따라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을 담아왔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사회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다르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주의는 곧 맑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전통 위에서 현대적 상황의 변화를 담은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사회민주주의의 개념을 토마스 마이어(T. Meyer)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이어는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요한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사회주의는 윤리적 필연성이며, 사회주의는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정도에서만, 그리고 그 실천 형태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는 건설적 사회개혁과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노동자의 경험 및 지식의 증가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건설된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로의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이다. 세째,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사회화란 반드시 국유화나 전면적인 몰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생산수단에 대한 개별적 소유권을 다양한 사회적 이해의 담지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회화란 반드시 시장의 철폐를 의미하지 도 않는다. 네째,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기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주의의 일부이다. 다섯째, 사회주의적 원리의 의미에서, 사회구조는 폭력적, 혁명적 반란에 의해서 건설적으로 개조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사회 관계의 창조적 건설은, 민주주의 속에서만 점진적으로, 또한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된다.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 동향

그럼 독일사회민주의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사회민주주의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베른쉬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의 검토는 베른슈타인 당대의 수정주의논쟁에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의 기본적인 틀이 바로 이 시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19세기 후반 수정주의논쟁의 제공자인 베른슈타인의 기본 입장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베른쉬타인은 자신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1896-1898년 사이에 걸쳐 {신시대(Die Neue Zeit)}지에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문제]라는 연재기사에서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보다 보충되어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로 출판되었다. 베른쉬타인은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맑스주의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하려 했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의 이론적 전제와 독일사회민주당의 실천 사이에 하나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 진부하고 공상적으로 된 이론을 검토하여 당의 실천 정책들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단점으로 지나친 추상성과 이 추상성으로 인한 이론편향적 경향들을 지적하였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현실분석 중 맞지 않는 것으로 붕괴론을, 즉,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체제가 그 속성상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견해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붕괴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내재한 본질적인 오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 본질적 오류로 헤겔주의류의 변증법적인 선험적 연역론과 유물론적인 역사관, 운명론 및 결정론 등을 들었다. 베른쉬타인은 또한 사회의 양극화이론, 즉 점증하는 빈곤화와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이론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점진적인 심화와 그에 따르는 혁명적 긴장의 고조에 대한 개념들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러한 테제들이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현실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의 진행이 맑스가 희망하고 예견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는 생산의 집중도 없었고, 대규모기업에 의한 소규모기업의 소멸도 없었다. 상업과 산업에서도 집중은 매우 느리게 발생했고, 농업에서 소규모 생산단위의 소멸 역시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간층이 프롤레타리아화 하지도 않았으며,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양극화 현상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이 수정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자, 일련의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바이레른 사회주의자이며 가장 열렬한 베른쉬타인 옹호자가 된 폴마르(Georg von Vollmar), 제국의회 의원과 바이마르 때 국회의장을 역임한 농업이론가 다비드(David),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적극적인 활동을 자원한 이상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인 프랑크(Ludwig Frank), 윤리적 사회주의자인 아이스너(Kurt Eisner), 가치이론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경제학자인 콘라드 슈미트, 그리고 독자적으로 베른쉬타인과 유사한 논점에 도달한 캄프마이어(Paul Kampmeyer) 등이 그들이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간 사회주의(Sozialistische Manlatshefte)}를 통해 자신들의 집장을 피력하였다. 비록 다양한 논제에 걸친 논문, 평론, 단상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폭력에 대한 반대, 윤리의 강조, 개량적 활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 여성해방, 노조활동의 고무, 교육환경의 증진 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연합전선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비슷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던 개혁주의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을 지지하게 되면서, 수정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지적 비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윤리적인 사회민주적 세계관을 구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개량주의와 구별된다. 개량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수정주의 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레기엔(Legien), 라이파르트(Leipart), 팀(Tim), 움브라이트(Umbreit), 엘름( von Elm) 등과 같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정책 수준에 머물렀다. 두 번째 부류는 에버트(Friedrich Ebert)같은 당직자들이다. 그들은노동조직의 성장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정책간의 타협을 중요시하였다. 세 번째 부류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 입장을 보였던 쉬펠(Schppell), 칼베르(Calwer), 힐데브란트(Hildebrand) 등과 같은 보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선택적 관세에 대한 지지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대전 중의 가장 극단적인 사회제국주의로 완결된다. 이러한 입장들은 베른쉬타인의 기본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른쉬타인은 사회제국주의와 명백히 다른 입장에 서있다.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는 지지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도 받았다. 카우츠키와 로자 룩젬부르크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섰다. 이중에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뽑히고 있고, 이후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로자 룩젬부르크의 견해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제문제]시리즈에 주목하다가 {전제}가 출판되자 수정주의의 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사회개혁과 혁명을 사회민주주의 사상 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그리고 개혁을 수단으로 혁명을 목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녀는 이에 비해 수정주의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회혁명 – 사회민주당의 목적인 – 을 폐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면서 비판하였다. 궁극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심장이므로, 그러한 목표를 폐기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술적 수정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 모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했으며 관념론으로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체제 분석이 그의 관념론의 지주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평가절하하면서 그것을 “적응성”, “지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주의의 적응성에 대한 베른쉬타인의 주장은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전례없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했던 신용의 증가와 국제화는 실제로는 전유방법과 생산방법을 더욱 단절시키고,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더욱 괴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자본주의의 몰락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카르텔과 트러스트와 관련해서도 베른쉬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의 안정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현상 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의 최종국면의 징후로 보았다. 그녀는 더욱이 공황이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베른쉬타인의 주장을 유치한 오류로 비판하였다. 1890년대의 상대적 번영이 장차 도래할 자본주의 대격동의 그림자를 가릴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번영은 생산과 교환간의 최후의 모순을 위한 전제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출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부분적이고 국지적인 공황이 무제적한적인 세계공황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수정주의의 기초를 검토한 룩젬부르크가 제출한 결론은 수정주의는 사회주의적 이론이 아니라 절충주의 철학을 지닌 부르주아 개량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전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적 활동, 사회개혁, 그리고 현대국가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세 가지 동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한다. 룩젬부르크는 이러한 세가지 전술 모두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첫째, 노동조합은 맑스의 임금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를 폐지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 세력이 무한히 확대될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낙관론은 근거가 없다. 노조는 그들이 骕하는 대로 생산계획에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는 생산의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 방법에도 관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은 수정주의자들이 산정했던 바의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두번째, 사회개량은 장기적인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한게가 있다.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양립될 수 있는 한에서는 개량을 허용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더 이상 개량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룩젬부르크는 사회개량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러한 착취에 질서와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라고 보았다. 세번째, 수정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성숙에 의존하고 있는 데, 그러한 민주화과정은 식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허용되며, 지배계급들이 위협당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된다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 다음처럼 결론을 내렸다. 수정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에 다름아니며, 그 전술은 사회주의적 승리를 잉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승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권력장악으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베른쉬타인의 전술은 결코 현존 체제 내에서의 사소한 개량이상을 끌어낼 수 없기때문에 수정주의자들의 목표는 급진파의 궁극목표와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수정주의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가 없으면 그 지위가 한층 더 상승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과 베른슈타인의 지지자들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이러한 비판은 형성중에 있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약점을 통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나찌즘의 대두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룩젬부르그의 비판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룩젬부르크의 입장은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사회주의 이론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한 분파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릭케(Dieter Fricke), 라쉬짜(Annelies Laschiza), 라드뽅(Günter Radczun), 그리고 테뵉(Manfred Tetzel)등이 이어 받어 발전시겼다.

1950년대초 이전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으로 선호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심지어 베른슈타인이이라는 커다란 명성에도 불구하고, 베른슈타인의 원저작들이 전집형태로 정리되지도 못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초 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과정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하나의 독창적인 새로운 포괄적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 대표적 학자로 피터 게이를 들 수 있다. 게이는 19세기 후반에 수정주의는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베른슈타인의 공적이라고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만약 베른쉬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독일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개량주의적 이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진기한 이론이라고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상황의 이론적 인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수정주의가 즉각적인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론이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주고 아울러 맑스주의가 그랬던 것 처럼 논리적인 체계로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쟁적인 개념구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터 게이는 베른슈타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던베른슈타인에 대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을 재비판하였다. 피터 게이는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비판을 가하였다.

첫째,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폐기’를 너무 멀리까지 끌고가 버렸다. 사실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주의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는 투쟁 자체를 문제시하는 쉬펠(Schipell)과 베른쉬타인의 이론 비판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이론적 주장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베른쉬타인의 이론구조가 그 취약성으로 곤란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현실감각은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파급된 번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세번째, 로자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은 독일은 물론이고 여타 국가에 대해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경직된 혁명적 사고 패턴은 영국노동계급의 평화적인 권력획득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득권 계급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담보를 과소평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리하여 베른슈타인이 독일적 상황에 대해 오판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영국적 상황을 오판했던 것이다. 네째, 혁명적 전술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옹호는 대책없는 모순들을 잉태한다. 그녀는 특정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염두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블랑키주의적 쿠데타는 노동계급에게 심각한 불행을 안겨주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장악 시기, 혁명의 형태 등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베른슈타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사상 속에서도 혁명이라는 난제와 개혁이라는 난제 간의 딜레마는 결코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한 피터 게이의 이러한 반비판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이외에 그노이스(Gneuss)도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체계화의 산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유로코뮤니즘과 유럽사회주의가 대두된 1970년대에 바우어(O. BGauer) 르네상스와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사회민주주의 연구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바우어 르네상스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에 따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재평가와 관련이 있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는 1969년 이후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베른쉬타인 연구는 1970년대 초 이전까지는 매우 적었으나, 197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활성화되었다. 1977년에 베른쉬타인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이것을 입증해준다. 이 대회 의장을 맡았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의 하나인 토마스 마이어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20세기의 전환기에 가장 올바른 입장으로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회중의의 원리와 실천 간의 괴리가 점점 커지는 상황속에서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의 내부로부터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의 모순을, 이론적 기반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실제적 발전과의 현실적 관련에 기반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수정주의는 결코 반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건설적인 개량작업을 방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는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단순히 수동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역사적 시대상황에 적응하기위해 고안된 진일보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새로운 평가들을 미 출판된 초고와 편지들을 통해서 뒷받침하는 작업들과 정통적 입장에서 계속 비판하는 시각들이 서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다.

4.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 연구 동향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여러가지 요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공간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압도되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1950 년대에는 조봉암의 진보당을 통해 사민주의적 입장이 잠시 현실화되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좌초되었다. 5.16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마저도 부인되는 열악한 현실 상황에서 사민주의는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연구되기 어려웠다. 다만 이 시기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참여하기 위한 일환으로 관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한국사회가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사회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 이에 따라 한국에서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같은 ‘개량’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 논의는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국에서 수입되는 과정 속에서 , 그리고 90년대 초 현존사회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현실 영역에서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과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사회민주주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김윤환, 안병직 등이 열악한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이후 사민주의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전문적으로 이루저어지기 시작했다. 나라 별로는 스웨덴, 영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중에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엽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연구자들로 박호성, 강신준, 강철구, 최영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사민당일반에 대한 개설적 연구이거나 한 특정부분에 관한 부분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사민당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민주의 초기의 핵심적 문제의 하나인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형성과정과 쟁점 들을 둘러싼 논의들은 거의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맺음말

이상으로 독일과 한국에서의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았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통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1990년 대 초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기회주의, 개량주의, 그리고 독창적인 내용이 없는 절충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견해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 동시에 독일사회민주주의의 원조가 되는 베른쉬타인을 하나의 독창성있는 포괄적인 체계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이후의 급변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지니는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는 이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확인되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부분이 채워진다면 20세기 사회사상사를 한국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영문초록 >

Reserch Trends on German Social Democracy and Bernstein’s Revisionism

Sungho Kang

AbSTRACT

In this article, I studied the following subject ” Reserch Trends on German Social Democracy and Bernstein’s Revisionism.

Since revisionism debate 1896-1898, Bernstein’s Revisionism has been criticized as opportunist and nonsocialist theory by many socialist. Especially Rosa Luxemburg became famous throgh her systematic critics about Bernstein’s Revisionism. Hers critics make a great influensce in underestimating the meaning of Revisionism. Also, First and Second World War, the great economic crisis, and Nazism made Revisionism’ influence insignificant.

Since 1950′, Bernstein’s Revisionism has been estimated as positive and systematic theory by several scholars. Gneusis and Peter Gay played important role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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