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측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의 개최를 축하하는 간략한 영상 메시지를 남겨 달라는 것이다. 그때 카메라 앞에서 농을 섞어 이런 얘기를 했다. “사실 제가요, 명색이 미학 전공자거든요. 그런데 미의 여왕을 뽑는다는 ‘미스 코리아’ 대회에서 정작 미학 전공자들을 제쳐놓고 디자이너, 영화 감독 등 이상한 사람들만 부르더군요. 이래서 되겠습니까? 올해는 혹시 불러줄까 내심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네요. 그래서 이 참에 ‘안티 미스코리아’ 측에 붙기로 했습니다.”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세상에, 이 농담이 실현된 모양이다. 풍문에 따르면 미학과 모 교수가 미스 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나갔다는 게 아닌가. 농담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그 농담을 사는(生) 사람도 있다.
자기 과 교수가 연출한 이 해프닝에 발끈한 그 학교 학생들이 크게 항의의 대자보를 써 붙였다. 심사위원 나가느라고 수업을 빼먹었다면 모를까, 남이야 어떻게 살든 거기에 반대할 건 또 뭐 있을까. 그 반대의 변을 들어보았다. 직관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그 죄목(?)을 적시하려니 영 논리가 딸렸던 모양이다. “일반인들에게 미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오해를 심어줄 수 있다.” 여기에는 아마 미스 코리아와 같은 저급한(?) 문화 행사와 대비되는, 아니 대비되어야 할 고급한(?) 인문학적 자부심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대중문화의 현상이 저급해야 할 이유도 없고, 인문학이 고급해야 할 근거도 없고, 그리하여 미학과 교수가 대중문화적 성격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학생들의 직관은 옳은데, 논증은 틀렸다. 나 같으면 다른 식으로 논증했을 게다.
세 가지 종류의 비판적 논증이 가능하다. 먼저 미의 상대성에 바탕을 둔 비판.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아직 여신들의 미를 판정할 객관적 기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절대적 미적 기준이 있다는 믿음은 고전주의 이후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사회마다 지배적인 미감이 있어, 특정한 외모가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미스 코리아 대회에 나온 여자들의 그 늘씬한 몸매를 바라보며 (적어도 그 예쁜 입에서 무식한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나 역시 쾌감을 느낀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좋은 것이고 탓할 것이 못 된다. 문제는 그 아름다움이 절대적으로 특권화되어 다른 아름다움들을 배제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지배적인 대중적 미감에서 벗어난 외모는 종종 욕설과 비방과 같은 무례한 비평적 언급의 대상이 되곤 한다. 못 생긴 게 졸지에 죄가 되는 것이다. 이건 명백한 미의 파시즘이다.
둘째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신체 자본’의 관점에 선 비판. 여성의 경우를 보자. 외모가 혼인을 통한 신분상승은 물론이고, 독립적인 사회활동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조건하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수술대에 누워 제 몸을 뜯어고치고 있다. 최근에는 남자들마저 면접 시험을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외모가 경제적 자본으로 전화하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몸을 뜯어고쳐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가령 어느 개그우먼은 살을 뺀 것만으로 8억의 수익을 올렸고, 그후 지방흡입술인가 뭔가를 사용했다고 구설수에 올랐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이제 사회는 우리의 몸뚱이까지 관리한다. 오늘날 ‘미’라는 것은 사회가 우리의 몸을 가두어놓는 거대한 원형감옥의 감시자가 되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푸코의 존재미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자. 한편으로는 특정한 미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다른 아름다움들을 배제하고 모욕하는 차별의 미학이 있다. 이 차별의 미학은 우리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몸뚱이에 열등의식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그것을 뜯어고치도록 강요하는 생체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배적인 대중적 미감에 따라 제 몸을 뜯어고치는 사람은 어쩌면 거기서 쾌감을 느낄지도 모르나, 그 쾌감은 자기의 자연적 신체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이 차별의 미학은 이제 다양한 아름다움의 공존을 인정하는 차이의 미학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제 몸을 지배적 미감에 맞춰 뜯어고치는 자기포기의 미학은 이제 자기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연출하는 배려의 미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미스 코리아 대회는 차별의 미학, 자기 포기의 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원시적인 미의 파시즘이다. 거기에 미학과 교수가 참여하는 것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권리일 게다. 하지만 그의 권리행사를 보고 “촌스럽다”고 논평하는 것은 양도할 수 없는 나의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