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산영화제 갔다 온 것을 알아 챈 회사에서 사보 좀 쓰라 해서 아주 귀찮아 하며 끄적였다. 써 놓고 보니 영화 관련 간단 소개 글 정도는 될 것 같아서 블로그에도 옮겨 놓는다. 별 내용은 없다.
10월 6일부터 14일까지 9일 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매번 각국의 영화 스타와 거장들이 찾아 화제가 되는 부산영화제에 대해 내 관심은 오로지 어떤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예매 경쟁이 치열해 원치 않은 영화를 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가열찬 예매 경쟁을 뚫고 힘겹게 본 몇 편의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감을 적는 것으로 나의 부산영화제 참관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1.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질서와 도덕>: 1980년대 프랑스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식민지 뉴칼레도니아의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진압을 그린 영화다. 특공대 소속 주인공은 독립 운동 단체와 평화적인 협상을 시도하지만 선거 기간에 돌입한 프랑스 정부는 정치적 성과를 목적으로 이 단체를 유혈 진압한다. 프랑스에는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성숙한 시민들이 있지만 제국주의적 국가 시스템은 시민의 의식과는 별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한다.
2.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타는 소년>: 아빠가 양육을 포기하자 상처 입고 방황하는 시릴이라는 소년이 주말 보모 사만다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시릴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대신 사만다의 사랑을 받으며, 자전거를 잃었다 되찾으며, 방황 속에서 사람을 때리고 앙갚음을 당한다. 이렇게 영화는 한 소년의 어떤 시기를 다루면서 소년의 상처와 잘못에 대해 공평하게 되돌려 받는 시점에서 무심하게 끝난다. 정의로운 결말에도불구하고 나는 슬프고 소년 시릴은 여전히 아플 테다. 상처에 대한 공평한 보상은 그것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직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바이트 헬머 감독의 <바이코누르>: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 이 근처 초원에는 우주선 발사 후 하늘에서 떨어지는 추진체 같은 잔해를 주워 고철 판매상에게 팔면서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가가린이라는 청년은 우주비행사 줄리를 흠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줄리가 지구 귀환 중 불시착으로 기억을 잃고, 가가린은 줄리가 자신의 아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이후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전반적인 내용 구조는 선녀와 나무꾼의 다른 판본에 가까운데 결국은 우주와 첨단 기술을 흠모하던 가가린이 별빛과 초원의 마을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초원과 별빛이 간직한 상상력의 세계를 현대 문명이 훼손하는 것에 대한 귀여운 풍자가 담겨 있다.
4.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나는 사실 이 영화를 고대하며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우울과 비관과 절망으로 가득 찬 지구의 마지막 순간을 선체험하는 것이니 결코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위기 앞에서 지구를 구해 내는 그 흔한 헐리웃 영웅들이 은폐하고 있는 파국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오고 있다. 하늘에는 파란 색 행성이 달처럼 떠 있고, 이 달은 점점 가까이 커다랗게 하늘을 채운다. 결혼식을 망친 한 여자와 그의 언니 가족은 불안 속에서 멜랑콜리아 행성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우를 준비한다. 우울한 정서를 물질화한 거대하고 파란 별 멜랑콜리아는 공포보다 무력감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지 않는 마지막을 예정해 놓고 곧장 달려 한 치의 희망도 없이 끝내 버린 이 영화는 한 동안 나를 앓게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