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출연 줄리 델피, 에단 호크
95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내가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보기를 아끼던 ‘비포 선라이즈’가 티비에서 했다. 지나가다 눈에 들어온 영화의 장면은 절대 혼자서는 안 보겠다는 유치한 다짐을 다시금 져버리도록 해 버렸다.

수많은 영화 장르 중에서 보통 영화 속 두 인물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영화는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화해 등에만 관심을 쏟게 한다. 이는 영화가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한 곳에만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인물은 어떻게 그려지는지, 주변 세상은 어떻게 그려지는지 눈여겨 볼 수 없게 할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제시와 셀린느 두 인물의 쉴새없는 대화와 그들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비엔나의 전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면죄부가 지닐 수 있는 특권을 미덕으로써 쓰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커플도 있겠다 싶다. 제시는 순진한 소년 같은 열정이 넘치면서도 사람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품는 남자이다. 셀린느는 프랑스인 답게 충분히 철학적이고 자기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또 동시에 충분히 낭만을 즐기는 여자이다. 이 남과 여가 유럽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비엔나에서 내리는 것만도 다분히 그들의 특별함을 말해 주지만 그들이 쉴새 없이 나누는 대화는 그 특별함을 넘어 나에게는 보편성까지 가져다준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전통과 현대, 남성과 여성, 자연과 인위, 만남과 헤어짐, 사랑 등 그들은 인간이 떠올리고 추구하며 고민하는 모든 것을 대화 거리로 풀어낸다. 영화 전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대사는 하나도 놓칠 만한 것이 없더라. 아직 젊어서 세상에 체념하거나 좌절하지도 않고 순수한 열정과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들이기에 수다처럼 내뱉는 그들의 대화는 진실되게 느껴진다.
’우리 부모님은 역동의 순간에 젊은 시절을 보냈죠. 전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남들보다 풍요롭게 자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전 갑갑함을 느껴요.  세상 젊은이는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역사를 통해 젊은이들은 다들 고뇌하고 괴로워 하잖아요’, ‘만일 신이 임한다면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에 임할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사랑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를 느끼고 그 사람에게 지친다고 했죠? 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에요’라는 식의 대사는 유치할지라도 진실한 열정이 넘치는 젊은 남녀의 내면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영화 내내 그들이 우연히 만나서 서로가 사랑의 느낌을 받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우선 제시의 소년같은 눈빛과 열정, 셀린느의 당당하고 솔직하면서도 사려깊음에 반하게 되고, 비엔나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풍경에 반하게 되며 그 안에서 거리를 거닐고 배를 타며 술을 마시면서 대화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반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셀린느의 말처럼 그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남녀의 애정이 가지는 미묘한 감정을 잡아내면서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리차드 링클레이터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반했을 법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그 미모와 연기에도.

그런데 문제다. 나는 언제쯤에나 이 영화를 나만의 셀린느와 함께 볼 수 있을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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