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른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알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그럴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이해에서 오는 것이고
이해는 지식에서 오는 것이며 지식은 관심에서 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관심으로부터 그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가려 해야 하고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마음으로, 몸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나는 이 신비주의의 색을 띈 한 학자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소유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랑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분리감을 극복하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인데 그 일체감이란 소유를 통해서는 획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 관념이 개입되는 사랑이란 사실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 대상을 나와 일치시키는
데에 있다는 결론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나 기실 우리들의 사랑은, 적어도 이성간의
애정으로 국한시키자면 그 소유 관념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랑에서
오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상처는 이 소유 관념에서 나온다.
어떠한 양태의 소유이든
그것은 일정 정도 그 대상을 사물로서 파악하는 것이 수반된다.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나 그 대상이 인간일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우리가 고민하는
현실의 병폐들은 대개가 인간을 사물로 파악해 버리는 데에서 연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쉽게 말해 인간을 돈이나 유용한 자원으로 파악할 때, 나와 대상으로서의 인간 사이에
지옥의 불구덩이가 치솟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라는 관념으로부터 완벽히
초월해서 살 수 없다고 할 때, 우리는 매순간마다 긴장과 고민의 끈을 느슨히 해서는
안된다.
생각이 여기쯤까지 미치니 흔히 발견하는 연애감정에서의
이성에 대한 소유욕이 본질적인 것이면서도 경계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이 나를 위한 도구로서 파악하는 형태 – 나르시즘도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 , 또는 내가 그 대상에 속한다고 파악하는 형태 – 그것은 상대를
소유한다고 파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 나은 것이 아닐까 – 로서 그려진다면 그것은
사랑은 소유라는 관념에 함몰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소유하려 하는 만큼 나는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라는 말도 떠오른다.) 내가 사랑하려 애쓰는 – 분명 사랑은
애쓰고 노력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 대상에게 소유라는 관념은 활력소가
될 수도, 해악이 될 수도 있다. 활력소와 해악은 소유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 양면 사이에서 어느 쪽이 나올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랑하려는 대상에게 쏟는 진실만큼이나
필요한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 나는 그 또는 그녀와 사랑할 것인가 고통의 구덩이로
뛰어들 것인가. 존재와 존재 사이의 벽을 허물 것인가 침범하거나 반대로 영원히
담을 높이 쌓아버릴 것인가. 이 또한 진실한 노력과 긴장의 고삐에 달렸다.
애석하게도 내가 떠올리는 사랑에 대한 원론은 현실적으로
거의 적용불가능 상태이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합일된다는 것은 관념적 환상일 뿐이고,
이해와 지식, 관심이라는 말도 범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원론일 뿐이며, 소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긴장이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다. 자본주적 구조가
우리의 인식 틀에 깊숙이 박혀 있는 지금에는 더더욱 그렇다. 나의 개똥 원론에 적용한다면
우리네 사랑은 거짓이고 허위일 뿐이다. 그러면 우선은 이같은 지껄임들을 이룰 수
없는 이상이라 하자. 그러나 이상은 현실을 견인하는 동력이다. 언제나 그 이상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추구할 때만이 나는 쉼없는 변화라는 진리 아닌 진리의
과정 속에 동참할 수 있다.
나는 사랑을 다른 존재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그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알고 싶어하며 그렇게 구해낸 존재의 소묘를 빌어 그 존재를 이해함으로써
그 존재와 나 사이의 울타리를 유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구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사랑에 빠져보자..
민망하다, 이넘아…언젠가는 빠지겠지…-,-
제발 좀 빠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