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말이지만, 세상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서점에는 처세술 책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는 살지 마라, 저렇게도 살지 마라, 등등의 충고들로 행간은 빽빽하다. <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처럼 노골적으로 돈 많이 벌자고 부추기는 책들도 있지만 역으로 돈 많이 벌어봐야 헛거고 열심히 살아봐야 자본가들 배만 불리니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아니하고 느리게, 그리고 다르게 살자고 속삭이는 책들도 있다. 후자도 넓게 보자면 처세술 책이다. 결국 ‘사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세술이라는 장르는 자본주의 세상과는 찰떡궁합이다. 봉건시대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처세가 필요치 않다.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농사를, 장인의 자식으로 나면 장인으로, 뭐 그런 식이다. 마을의 대장장이는 처세술보다는 철과 불의 성질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귀족이나 정치계급은 처세나 사교, 혹은 넓은 의미의 정치에 관심이 있었겠으나 그런 사람들이 어디 그걸 책 사보고 배우겠는가.
그렇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선 다르다. 정말이지 자본주의 세상에선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다. 돌잔치 상에서부터 우리는 선택을 강요당하며 그 의무는 대체로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선택 하나하나가 일생에 작게 혹은 크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는 피곤하다. 도대체 어떤 놈을 사귀고 어떤 놈은 잘라야 되는지, 주식은 사야 되는 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 돈을 모아야 되는 건지, 땅을 끼고 있어야 되는 건지, 저 자식이 나한테 개기는데 저걸 밟아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꾹 참고 살면서 성불을 노려봐야 되는 건지, 여하튼 우리 삶은 선택의 지뢰밭이며 그 하나하나가 결코 간단치 않다. 이래서 처세술 책은 잘 팔린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처세술이란 선택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처세술 책을 다 읽어도 선택은 난망이다. 책 밖 세상,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책 속에선 그토록 분명했던 것들이 책을 덮자마자 흐물거리며 불투명한 점액질로 변해 버린다. 책을 읽고 있을 때만 해도 새로운 세계에서 멋지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처세술 책이 기본적으로 단순화, 그리고 유형화라는 논리적 기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세술의 저자들이 제일 먼저 착수하는 일은 세상을 몇 개의 블록으로 구획하는 작업이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 친구와 적, 자산과 부채 등등의 대립항들이 동원된다. 물론 인간 유형도 대략 서너개의 부류로 친절하게 구분해 준다.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될 상황도 아무개형, 아무개형, 아무개형 따위로 나누어 준다. 일단 그렇게 분류해 놓은 뒤에 저자들은 각각의 유형마다 ‘적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대체로 처세술 책에는 ‘그래 이게 바로 나야’라는 인물 유형이 하나쯤은 반드시 있으며 ‘그래 김 부장이 바로 이런 놈이야’라고 무릎을 치게 되는 인물 유형도 빠지지 않는다. 이러니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이 바둑판처럼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쯤에서 독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정도라면 나로서도 해볼 마하지 않을까?” 이 순간 처세술 책은 피로회복제처럼 일시적이고 휘발성 강한 각성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건 진정한 의미의 ‘처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잘 알고 있듯)세상도 처세술 책들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조감도가 아니다.
어쨌든, 피로회복제처럼 소비되는 것. 그게 처세술 책이 계속해서 팔려나가게 되는 원리다. 피로회복제가 피로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듯 처세술 책 역시 궁극적으로 처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팔린다. 성공의 꿈, 생존의 희망, 탈락의 불안을 먹고사는 불가사리. 그게 작음의, 아니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처세술 교본들이다. 그럼 어디에서 인생의 참된 지혜와 올바른 선택의 기술과 깊이있는 인간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어디라고, 자신있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 자가 사기꾼일 것이다. 대신 여전히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릎걸음으로 더듬거리며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정답일 것이며 그게 바로 우리가 멋진 영화와 좋은 책을 찾아 어두운 극장과 서점에서 금쪽 같은 시간을 탕진(?)하는 이유일 터이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8)
제목은 선택의 기술
감사…
저의 실수 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