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은 주장이 그 하나의 예다. 국경이 머지않아 모두 사라질 것이고 세계가 하나의 나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인류 모두가 미국인이나 영국인처럼 잘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되기보다는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 각국의 상품이 우리나라의 구멍가게에도 들어오며,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대기업을 매입할 뿐 아니라 주식시세를 올렸다 내렸다 마음대로 하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모든 소식이나 자료를 안 방에서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계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 하나의 정부, 즉 세계정부가 세워지고 우리 모두가 세계인이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도 이 생각이 환상이라는 것은 곧 알 수 있다. 미국이나 남한이나 북한이라는 나라가 곧 사라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또한 외국의 자동차, 초컬릿, 은행, 컨설팅회사는 우리나라에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들어오지만, 우리나라 노동자가 미국에 이민가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여러 나라가 하나의 나라로 되는 실험을 가장 빨리 실시하고 있는 유럽연합에서도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기까지 하지만 모든 정책은 `각국’ 대표들에 의한 다수결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각국 정부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상품이나 돈은 국경을 넘어 매우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다. 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어떤 자연적인 필연성 때문에 나타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진국의 자본가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또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외국시장을 개척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자유화의 동인이고, 이에 따라 선진국의 정부가 자국의 자본가를 위해 자국의 외환관리규정을 폐기하고 외국정부에게는 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강요한 사실이 자유화가 지금처럼 전개된 이유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선진국은 아이엠에프나 국제무역기구 등 국제기구를 동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1997년 12월의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에 수입의 다변화정책이 없어졌고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에서 외국투자자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화는 선진국의 자본가를 위한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상품이나 돈이 마음대로 다른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대다수의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이윤추구와 주민의 생존권은 서로 모순을 이루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웨덴 정부가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올리면 기업과 부유층은 다른 나라로 기반을 옮겨가기 때문에, 스웨덴의 주민은 실업과 생활수준의 하락을 감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자본가도 싼 임금노동자를 찾아 국내의 생산설비를 중국이나 동남아로 이전한 경우가 많다. 이리하여 국내에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실업자가 늘었지만 자본가는 더 큰 이윤을 얻었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자유화가 세계적인 규모에서 더욱 진행되고 있는 지금, 자본가의 이윤추구와 주민의 생존권은 점점 더 충돌하고 있다. 물론 돈이나 생산설비가 들어가는 나라에서는 고용이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에게 더욱 큰 이윤을 보장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고 노동자의 단결권이나 파업권 등 기본인권은 무시될 것이다.
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화는 세계를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세계정부가 곧 탄생해 세계 전체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환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남북한 사이의 긴장 완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부시 정권의 대테러전쟁을 지지하는 것은 얼빠진 짓이다.
김수행/서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