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사이트에서 펌
시스템은 전지전능하시다.
소비의 신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것이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참으로 전지전능하시다. 그는 우리에게 헌금이든 회개든 뭐든 원하지 않았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인내나 참됨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항상 하고 싶은 데로 하라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편한 데로 하라고 했다.
오랜 세월동안 참고 견디는 것을 몸에 베어온 우리로서는 처음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우래 마음속에 있는 안락과 달콤함에 대한 욕망은 슬금슬금 기어 나왔고, 금새 그것들을 열광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복종이나 맹목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유혹했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그것에 매료되었고,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 믿음은 언제 인간이 가졌던 어떤 것과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비로소 인간을 동물과 진짜 다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의 신들은 항상 우리에게 너희들은 선택받은 존재라고 설교했다. 너희는 축생과 달리 고귀한 영혼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확인할 방도는 그들의 사제들이 해주는 축도 이외에는 없었다. 우리가 때론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확실하게 우리를 짐승들과 다르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시스템의 덕분으로 비로소 동물들과 명백히 다른 모양의 옷과 집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이전에 단지 나무나 흙으로 만들었던 집이나, 풀잎이나 털로 만들었던 옷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교통과 통신수단을 제공받았다. 시스템은 모든 것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절대적이기만 했던 공간과 시간의 제약도 끝없이 축소시켜 주었다.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끝없이 그 한계를 단축시켰고, 그것이 계속 단축될 거라는 약속 또한 확실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것을 위해 앞을 다투었다.
한시라도 머뭇거리는 자는 믿음이 부족한 자의 대가를 치뤄야 했다. 의심이 많은 자는 항상 그렇게 은혜로부터 멀었다. 더 이상 의심은 필요없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탓해야 할뿐이었다. 파라다이스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이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불충분하기는 했지만, 끝없이 버전업되고 있었다. 파라다이스는 오직 선택의 문제였다. 단지 선택을 하면 되었다. 그의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로 마음먹으면 되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은 멀리 있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자녀로 귀의하는 선택을 하는 순간 거기에 있었다. 아직 불충분하기는 해도 일단 선택된 순간 그것이 앞으로 더 많은 환락을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런 선택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선입견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에 대해 철저히 복종하지 않고는 그의 은혜를 온전히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다. 그가 직접 복종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도록 시스템이 되어 있었다. 그를 어버이로 모신다는 것은 항상 어버이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하는 간난아기가 된다는 것을 뜻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그것이 삶에 영향을 미칠 뿐이었다. 그것은 아주 미소한 것이었고,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은 점차 삶을 송두리째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시스템이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냥 그럴 운명으로 여기고 살았다.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고, 스스로 옷을 기워 입고, 신발도 스스로 만들어 신었다. 우리에게 전지전능한 신은 항상 있었지만, 그런 것을 해결 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은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런 힘든 과정을 통해서만이 신의 은총을 얻게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스템이 나타나자 그는 그 모든 것을 해결 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을 주었다. 심지어는 놀기나 쉬는 일까지도 해결해 주기 시작했다. 잠자든, 먹든, 일을 하든, 놀든, 멀리 여행을 떠나든지 시스템은 그 모든 것을 해결 해줄 수 있음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차 그것에 의존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단 그것에 익숙해지자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선택했지만 선택한 순간 그것에 지배당했다. 일단 시스템으로부터 옷을 공급받자 더 이상 옷을 기워 입는 일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한번 바늘과 실을 놓자 그에 대한 흥미는 급속히 감퇴되었다. 아니 더 이상 그 어려운 근로를 하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게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지만, 금새 적응되기 시작했다. 습관의 힘은 무서웠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시스템이 일단 정착되는 순간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힘을 필요로 하거나 기술을 요구하는 그런 것은 완전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없던 시절 우리는 많은 일을 서로 협력해야만 했다. 항상 가족과 이웃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우리에게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산재해 있었다. 아니 한시도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협력을 생활화했다. 그러나 시스템이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시작하자 이젠 아무도 서로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필요할 때면 시스템을 이용하라고 했다. 협력은 아주 귀찮은 일로 여겨졌고, 이제 아무도 예전처럼 서로 협력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젠 정말로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참 야박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탓만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무도 원치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있었다. 그것은 돈과 시간이었다. 때문에 일단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순간 돈과 시간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더 이상 협력할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부모와 자식간에도 서로 돕지 못했다. 그 전화로 서로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게 딱히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시스템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 시작했고,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친구가 없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시스템이 모든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는 시스템이 놀아 주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도 척척 해주었다. 한 마을이 다 움직여야 겨우 해결되던 일조차 순식간에 쓱싹 해치웠다. 그래서 부족해진 운동 때문에 나빠지는 건강까지도 관리해 주었다. 모든 것은 아무일 없이 잘 돌아갔다. 가끔 장애가 발생하는 일이 있기는 해도 금새 스스로 복원하면서 돌아갔다. 일단 복종만 하면 주어지는 쾌적한 삶이 있었다. 물론 우리가 복종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문명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원시적인 감정인지 몰랐다. 그런 감정의 찌거기를 살짝 거두면 만사 오케이었다.
흔히 선지자라는 자들이 그로 인해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잃어버릴 거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또한 시스템이 우리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받칠 만큼 그렇게 믿음직한 신이 아니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이미 지나 버린 시대의 케케묵은 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하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흐트러뜨리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으례 그런 것이기도 하다. 항상 말 만고 의심만은 자는 있기 마련이다. 진보의 노정에 방해를 부리는 비겁한 자들은 항상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도 결국 시스템에 의존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비겁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