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두 점을 치는 소리./방법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되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이다. 우리 잠시 두 손을 모으고 이 시가 그려보이는 슬픔에 동참해 보자.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 많은 시들을 보았으나 나는 가난의 슬픔을 이토록 가슴아프게 그린 시를 쉽게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아름다운 시가 이번 수능시험 언어영역의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그러므로 감동을 잠시 유보하고 긴장해 보시라. 혹시라도 정답과 다르게 감동하면 안 될 것이므로.
시험문제는 박재삼 시인의 `추억에서’와 이용악 시인의 `그리움’을 같이 제시한 후 세 시의 “공통점으로 알맞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아무런 상관 없이 씌어진 다른 시인들의 시를 두고 공통점을 찾으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몰상식한 폭력이다. 칸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시는 보편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라고. 그러니 어떤 시도 다른 시와 공통적이지 않다. 물론 같은 것이 있다. 지문에서 주어진 시들이 모두 우리말로 씌어진 시라는 것. 그러나 이런 공통점이 하나의 시를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더 당황스런 것은 문제에 딸린 보기들이다. ① 자연친화적인 삶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② 화자 자신의 과거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있다. ③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④ 화자는 자신의 현재상황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드러나 있다. 잠시 머물러 생각해 보시라, 과연 이 시가 말하려는 것이 이 다섯가지 가운데 어떤 것인지. 여기에 답이 있는가? 하지만 이 가운데 답이 있든 없든, 학생들은 이 다섯가지의 한계 내에서 답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섣부른 상상력은 금물이다. 우리는 이 부자유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불만을 감추고 정답을 골라 보시라.
정답은 5번이다. 이리하여 신경림 시인의 시는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표현한 시라고 규정되고 말았다. 이 시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웃 젊은이의 서러운 가난을 노래한 시가 졸지에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박재삼의 시의 제목은 `추억에서’이고 이용악 시의 제목은 `그리움’이다. 그리하여 신경림 시인의 시도 추억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로 함께 이해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12년 동안 끊임 없이 이런 식의 시험을 위해 시를 읽어야 한다면 과연 시가 주는 감동에 편안히 빠져들 수 있겠는가? 시를 혐오하게 만드는 국어교육, 역사를 혐오하게 만드는 역사교육, 수학을 싫어하게 만드는 수학교육, 도덕을 냉소하게 만드는 도덕교육. 도대체 언제까지인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이 비극은 끝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