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드라마 에서 ‘어머니’(김혜자씨가 분한) 캐릭터의 변화를 보면 그래도 세상은 진보한다는 생각이 든다. 초기 의 어머니 캐릭터는 많이 배우고도 농부의 아내로 사는 ‘특별한’ 농민 여성이었고 오늘 의 어머니 캐릭터는 그다지 배우지 못한 ‘평범한’ 농민 여성이다. 20년이 넘은 장수 드라마고 작가도 여러 번 바뀐 걸로 알지만 어머니 캐릭터의 그런 변화는 세상의 진보에 조응한 것이다.
예술작품 속에서 ‘고귀하지 않은 계급’의 캐릭터를 그릴 때 ‘평범한’(전형적인) 캐릭터를 피하고 ‘특별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건 한 인간의 가치를 신분으로 결정하는 전근대적 정신의 반영이다. 그런 전근대적 정신은 예술작품 속에서 ‘평범한’ 농민을 주인공으로 사용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농민여성이되 ‘원래 신분은 고귀하나 부러 자신을 낮춘’ 농민 여성이라는 희한한 캐릭터가 사용된다. ‘고귀하지 않은 계급’의 캐릭터를 그릴 때 ‘평범한’(전형적인) 캐릭터를 피하고 ‘특별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건 예술작품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사’ 가수, ‘학사’ 권투선수, ‘학사’ 호스티스니 하는 기이한 호칭들을 기억하는가. 전근대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 같은 ‘고귀하지 않은 인간’을 공중의 의제로 삼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학사라는 사실이 노래부르거나 권투하거나 술시중 드는 일의 전문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만,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에서 학사 가수나 학사 권투선수나 학사 호스티스를 달리 보는 일은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를 계속 경멸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그런 점에서에서 ‘어머니’(김혜자씨가 분한) 캐릭터가 많이 배우고도 농부의 아내로 사는 ‘특별한’ 농민 여성에서 그다지 배우지 못한 ‘평범한’ 농민 여성으로 변한 사실은 작지만 의미심장한 일이다(‘전원일기’라는 타이틀마저 ‘농민일기’쯤으로 바뀐다면 더욱 좋겠지. ‘전원’이라니, 그런 돼먹지 못한). 가장 느리게 진보하는 정신인 공중파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일어난 그런 변화는 한 인간의 가치를 신분으로 결정하는 전근대적 정신이 청산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그런 청산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방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신분구조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특히 한국 같은 전례없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의 신분을 결정하는 전적인 기준은 돈이다. 돈이 신분을 사들이고 돈이 신분을 결정한다. 한국의 일류대학들은 날이 갈수록 부르주아의 자식들로 채워져 간다. 논술이니 수능이니, 대학입시의 방식이 개선될수록 대학입시는 부르주아의 자식들에게 유리해져만 간다. 대학을 우골탑이라 부르거나 노동자의 자식이 각고의 노력으로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드라마는 이미 지난 시절의 전설이다.
돈은 암세포처럼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엽말단까지 잠식해간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혁파한다는 열린 교육마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어간다. 저명한 열린 학교는 부르주아의 자식들로 채워져 간다(물론 부르주아들이 제 자식을 거기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제 자식이 두들겨맞지 않고도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 보고 때문이다). 진짜 무공해 먹을거리가 부르주아의 식탁으로 직송되듯 진짜 열린 교육은 부르주아의 자랑스런 가족사진을 장식하는 일에 봉사한다. 한국의 1세대 부르주아들은 대개 비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부르주아의 자식들은 부자에다 학벌까지 좋으니(혹여 입시에 실패하면 미국 대학으로) 그들은 이제 그 고귀한 신분을 당당히 주장한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아파트 평수별로 교우하고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애시당초 불가촉 천민이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부르주아의 인생은 먹을거리에서 자식 교육까지 자손만대 ‘열려’있고 노동자의 인생은 먹을거리에서 자식교육까지 자손만대 ‘닫혀’ 있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김규항/ 편집주간 drumcom@shinbiro.com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