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예술철학(출처 : http://um-ak.co.kr/gong/nonmun/hong-adorno.htm)
홍정수
1.시작하면서
아도르노의 철학은 <종합요약>되고 <보고>(報告)되기를 완강하게 거부한다[부정 pp.43-45]. 이러한 성격은 그의 철학이 갖는 부차적 면이 아니라 거의 본질적 면에 속한다. 그는 말을 사용하지만 말로 밝힐 수 있는 것 이상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의 입장은 예술의 입장과 현저하게 닮아 있다. 물론 그의 글들이 결정적인 것을 말로 하지 않고 행간(行間)에 남겨두는 서정시나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고전적 기악곡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서정시나 기악곡에 관해 말하려고 할 때에 갖게되는 어려움과 아도르노의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에 봉착하는 어려움은 대단히 흡사하다. 그가 사용하는 개념의 뜻은 수시로 변하고, 긍정적인 빛을 받다가 곧 부정적인 것으로 변한다.<철학은 자체의 색깔들을 포착하는 프리즘>[부정 p.66]이라는 말은 개념을 수시로 변화시키는 아도르노 자신의 철학을 두고 한 말이나 다름없다.
이 글은 그러나 아도르노의 철학의 일부를 <종합요약>하고 <보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특히 음악과 관련된 그의 예술철학을 중심으로 제한하여 서술해 보려고 했으나, 다른 관련 부분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철학에서는 모든 분야들이 경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모든 글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의 어떠한 짤막한 글 하나라도 그의 철학적 관심사들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한다. 여기에서는 주로 비교적 초기의 세 책을 토대로 그의 예술철학에 관해 논하려고 한다:『계몽의 변증법』(1944) 『신음악의 철학』(1949) 『부정의 변증법』(1966). 여기에는 중요한 『미적이론』(1973)이 빠져있다. 『미적이론』은 부분적으로 앞의 책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과 견해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렇게 달라지는 것은 아도르노의 철학적 원칙에 이미 포함된다고 보았고 그의 철학적 기본틀이 바뀌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아도르노의 예술철학 중의 일부만을 드러낸다. 또한 아도르노 철학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영향 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비교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이는 가능한 한 이 글이 그의 예술철학을 보고하는 일에 더 치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도르노 스스로가 발언할 수 있도록 그의 언어 습관을 상당 부분 그대로 수용했다. 그래서 <…라고 아도르노는 말했다>,<…라는 것이다>와 같은 번거로운 말투를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 순서는 아도르노 책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이를 필자에게 편한 방식으로 재배치했다. 이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말하는 아도르노의 방식이 보고하기에 대단히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의 사상적 중심을 <부정의 변증법>, 계몽주의에 대한 견해, 예술(특히 음악)에 대한 견해를 통해 밝혀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고통, 실천, 예술에 의한 검토> 부분은 아도르노의 철학에 대한 필자의 해석과 견해를 많이 담았다. 아도르노의 철학은 상당한 정도로 반응을 도발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의 설정은 필요했다.
아도르노의 사상은 히틀러 경험과 스탈린주의라는 강압적 현실정치에 대한 철학의 반응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가 표면적으로 음악을 말하건, 헤겔이나 칸트의 철학을 논의하건 간에 이 현실체험의 배경이 늘 동반한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이루어진 그의 철학은 <부정의 변증법>이라는 특이한 철학적 사고를 형성한다. 이 글의 논의는 여기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2.부정의 변증법
아도르노에게서 가장 자주 만나는 말 중의 하나는 <부정(否定,Das Negative)>이다. 이 말은 그에게 가장 긍정적인 것을 뜻한다. 이러한 내용은 아도르노의 어법이 보편적인 어법과 대단히 다르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의 책 『부정의 변증법』에 나오는 <변증법>이란 말도 사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변증법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의 변증법에는 <통합>의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변증법을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부정법>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부정>은 그의 철학적 방법론이 되어있다. 그 자신은 학문적 방법이나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말한다[부정 p.43]. 그의 <부정>의 방법은 준거틀과 같은 말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의 철학을 만드는 방법이 되고 있으며, 모든 논의가 <부정의 정당화>를 지향하는 듯이 보인다.
아도르노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는 <긍정 Affirmation>이란 말이다. 이 말은 항상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사용된 <싫어하는>이라는 형용사는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도르노의 철학이 애증을 분명히 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에서는 형식적 논리보다는 애증의 역동성이 더욱 중요하다.
우선 몇 가지 부정을 들어보자. 아도르노는 이른바 다원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주의적 입장은 <관리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강요된 구성원들이 당하고 있는지를 무시한다. 이러한 입장은 정신적으로 세상이 아직 전적으로 개조시키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특권에 대한 비판은 특권이 된다>[부정 p.51]. 이 말 가운데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즉 관리하는 사람, 전적으로 관리 당하는 사람, 아직 덜 관리 당하는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직 덜 관리 당하는 사람은 비판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지만 관리되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한다. 그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 증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객관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질적인 면에 합당하도록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적 객관화는 데카르트 이후의 모든 학문의 양적 경향과 함께 질적인 면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모든 것을 잴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려고 한다[…].같은 것을 함께 묶는다는 것은 같지 않은 것을 솎아낸다는 것을 뜻하는데, 바로 ‘같지 않은 것’이 질적인 것이다>[부정 p.53]. 아도르노는 모든 것을 같게 만들어 버리는 것에서 정신(철학)의 위기를 느낀다. 모든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은 사고의 말살로 이어지고, 인간이 관리되는 물건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 정치체제에 대한 부정은 더욱 분명하다: <공산주의는 권력을 차지한 곳곳마다 자신들을 관리조직으로 정착시켰다.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당이라는 기관은 전에 국가 권력과의 관계에서 생각했던 무든 것에 대한 비웃음이다>[부정 p. 59]. (테러적이고 기계적인 이 국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관리 당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속보이는 구실을 내걸고 거의 오십년간 지속적 기관으로 자리잡고 있다)[부정 p.59].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이렇게 명확한 언급을 하는 것은 그가 악몽처럼 떨구고 싶어하는 전체주의의 한 전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이미 있는 사고의 틀로는 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선회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체>를 위한다는 전제가 서게 되면 부분들은 (특히 같지 않고 다른 부분들은) 도외시되거나 같게 만들어져 버린다. 이는 변증법에서 <통합>을 전제로 할 때에, 그 결과가 통합이 아니라 <부정>이 도태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나 <통합>은 개념상에만 존재하고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거기에는 개념과 현실에 괴리가 필연적이다. 따라서 앞에서 예를 든 <다원적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는 그 개념과 현실의 간격을 아도르노가 예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도르노는 <부정>을 철저하게 행하고, 이를 계속 유지시킴으로써 개념과 현실의 간격을 실제로 극복해 보려고 한다. 이렇게 부정에 철저하지 못하면 <전체>나 <통합>의 자리는 항상 권력을 긍정하는 곳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전체성>, <보편성>, <통합>, <긍정>과 같은 말을 가능한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부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이 너무나 그럴 듯하고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칸트의 보편성은 이렇게 처리된다: <칸트의 보편성은 ‘모두를 위한 하나’이고자 한다. 이 ‘모두’는 합리성에 능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 합리성에 능한 사람들은 모두 사회화되어 버렸다>[부정 p.201]. 사회화되어 버렸다는 것은 권력의 지배하에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그의 철학은 권력에의 저항이 큰 핵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희망>이나 <유토피아>는 <특수성>에만 있기 때문에 <보편성>에 저항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요구되는 것은 특수성이다. 그런데 <특수성>이 정말로 우선권을 가지려면 <보편성>이 변한 후에라야 가능하다[부정 p.307].그 정도로 <보편성>이나 <전체성>은 사회화, 즉 권력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철학이 철학 노릇을 할 수 있으려면 이러한 <보편성>의 궤도를 이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좋은 사상적 전통도 부정하는 철저함을 보인다. 그는 <계몽>의 전통과 생각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이 <부정>의 작업이 너무나 철저하고 신랄하기 때문에 계몽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이를 부정한다는 그의 의도가 거의 잊혀질 정도이다.
3.계몽과 오딧세이 이야기
<오딧세이는 바다요정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하나는 동행자들에게 지시를 내려 밀랍으로 귀를 막고 온 힘을 다해 노를 젓게 한다. 생존하려고 하는 자는 돌이킬 수 없는 유혹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일 시키는 땅주인인 오딧세이 자신이 선택한다. 그는 듣지만 돛대에 매달려 힘을 쓸 수 없다. 그는 유혹이 클수록 그만큼 더 자신을 강하게 매게 한다. 들은 것은 그에게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머리의 동작으로서만 자신이 매인 것을 풀라고 신호할 수 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노래를 스스로 들어보지 못한 동행자들은 그 노래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아름다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자신들과 오딧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를 돛대에 그대로 놓아둔다>[계몽 p.33].
오딧세이와 그의 동반자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한다. 그 결과 오딧세이는 들을 수는 있으나 결박당한 사람이 되며, 동반자들은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하고 들을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결박된 삶을 택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위기에 처한 인간의 대응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조처의 결과로 자유스러운 인간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인간에 의해 이룩된 신화시대 최초의 <계몽>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렇다면 계몽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스스로의 주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계몽 p.7]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신화시대의 오딧세이 일행은 자신들의 꾀 List로 자연의 지배를 벗어나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 가려고 한 것이다. 오딧세이의 조처는 신화적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합리성을 사용했다. 이 합리성은 인류 최초의 분업을 가져왔다고 그는 해석한다.
오딧세이 이야기가 <계몽>과 연결되면서 <위기에 대한 대처>보다는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꾀>가 강조된다. 이렇게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을 발전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특히 계몽주의의 전통적 생각이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그 이후의 오딧세이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러한 낙관적 입장을 철저하게 실망시킨다.
다음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오딧세이는 스스로 일로부터 제외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일에 대신한다. 오딧세이와 같은 상부층의 사람은 실제의 일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게 되고 명령적 작업에만 몰두한다. 노를 젓는 자와 같은 하부층의 사람들은 명령을 이행할 의무만 갖는다. <일하는 자들은 항상 앞만 바라보고, 옆에 놓인 것을 지나쳐야만 했다. 그들은 한눈 팔기를 부추기는 충동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어 승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실제적(실용적)이 된다>[계몽 p.34]. 상부층이 자신의 임무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하부층의 억압에 몰두하게 된다. 하부층은 상부층의 위험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부층의 안전은 하부층의 안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부층은 <압박자의 생명을 자신의 것과 하나로 만들어, 압박자가 자신의 사회적 역할로부터 헤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계몽 p.34]. 밧줄에 묶인 압박자는 실제의 일에 돌아올 수 없도록 장치되어 있다. 따라서 하부층이 발전에 기여하면 하는 만큼 그만큼 더 권력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앞의 해석은 오딧세이 이야기가 계급적 상황의 설명으로 옮겨져 온 것을 보여준다. 오딧세이와 동반자들은 압박자와 피압박자가 되어 있다. 그런데 피압박자들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압박자의 안전을 자신의 안전으로 생각하여 압박자의 입장을 돕는다. 이는 <자기보존>에 몰두하는 피압박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일만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신화시대의 압박자들은 자연에 제물을 바침으로 자연을 제거하고 복수한다. 자연종교적 신에 제물을 바침으로 이를 제거한다. <얻기 위해서 자신>을 버린다. 오딧세이는 자연에 자신을 버림으로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된다. 아도르노의 신화이해는 신인동일론(Anthromorphismus)을 따른다. 이 이론은 희랍시대의 여러 신들이 개인을 자연에 비춘 것이기 때문에 이 초자연적 신들은 사실 인간을 반사하고 있다고 본다. 아도르노는 신화 속에서 <개인>들을 반사하는 여러 신들이 권력을 상징하는 제우스에게 종속됨으로써 <개인>은 <권력>앞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존립이 가능해진다고 해석한다. 개인적 <주관을 살릴 수 있는 길은 권력을 모든 관계의 원칙으로 인정하는 희생을 치러야> 가능해진다[계몽 p.12]. <그러나 신화에서 보는 단순한 거짓은 바다와 땅에 악령이 살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전해오는 민속종교의 요술적 속임수이자 혼란이다. 자기보존, 귀향, 확고한 소유의 분명한 목적 앞에서 성숙한 인간의 시각은 길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계몽 p.45]. 신화에서는 말, 대상, 의도가 서로 혼재된 상대였으나 오딧세이의 <꾀>는 말과 의도 사이의 간격을 이용한다. 또한 보편성의 강조는 <집단>의 입장을 강조하는 윤리를 그 이면에 깔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지배>를 하거나 추구하는 사람들은 전체적 보편성을 강조해야 지배의 입장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압박자들은 보편적 이익을 내세워 피압박자들이 듣는 것(감각적인 것)을 억압하고, 이를 통해 그들은 생각도 위축시킨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생각은 행정이나 관리에만 사용되어 지배층의 도구가 되고 만다. 서로간에 들을 수 없는 개인들은 이러한 행정이나 관리기구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지배층만이 자신들의 생각을 행정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배층은 개인에게 <보편적인 것>이자 <현실적 이상>이다. 이 몇 사람의 지배층은 다수를 동원하여 개인을 억압할 수 있게 된다.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항상 집단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난다[계몽 p.23].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들에게 인간이 아니라 단위화, 대상화, 숫자화된 추상적 관리물이다. 모든 것이 수(數)로 만들어져 비교가능하게 되는 단일 체계를 만드는 데에는 인간이라고 예외적 대상이 아니다. 또한 계몽은 예측가능한 것만을 추구함으로써 조절이 가능한 집단, 대리(代理)가 가능한 인간, 현실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개체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조절되는 집단의 일원이 되고 만다. 따라서 주관은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변질된다. 이로써 인간은 주관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고 외적 욕구에 의해 규정된 물건으로 목숨을 부지한다고 아도르노는 주장하는데, 이러한 비판은 계몽의 결과가 만들어낸 현대사회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냐 물건이냐? 이러한 질문 뒤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전제가 깔려 있다. 아도르노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물건이 되어버린 인간상황에 대한 고발은 그러한 전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단히 아도르노적인 특징은 <감각적인 것>의 억압이 <생각>의 억압과 같다고 보는 점이다. 이는 감각적인 것을 되도록 억누르고 이성적인 것을 장려하는 계몽의 사상과는 다르다. 이성을 치켜올리고 감각적인 것을 억누르는 계몽적 억압은 <주관>이 실종되는 지경을 불러온다고 아도르노는 외친다. 이 외침 속에는 인간의 존엄성은 <주관>으로서 살아있어야 가능하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그에 의하면 자신의 의견은 없고 억압적이고 독점적인 보편적 의견만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상실한 사람이며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의 기능을 상실한 피지배자들은 기계와 같은 인간으로 격하된 것에 다름없다. 한편 이들을 조종하는 지배자들은 스스로를 <세계사의 엔지니어>로 생각한다[계몽 p.37]. 피지배지들은 이러한 발전에 힘없이 대응하고,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들은 지배자들의 관리대상물 이상이 아니라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지배자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경제적 시장성이다. 그들이 겉으로 <사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스스로는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사실적 역사는 사실적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도구의 성장에 비례하여 고통이 감해지지 않는데 이는 계몽의 개념이 맹목적으로 경제적인 것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계몽 p.37]. 계몽의 덕목들인 자유, 이성, 평등과 같은 것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제적 추구 때문에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이미 <자기보존>으로 이행되어 있고, 지배자들이 세운 목표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계몽 이전에는 자연이 인간을 지배했는데, 이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 즉 지배자가 지배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경제적 목표달성은 <자기보존>이나 마찬가지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인간의 고통은 문제 삼지도 않는다. 이는 <합리성>과 <이성>만을 강조하는 계몽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아무도 인간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이성>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경제도구 중의 하나로서 생산품처럼 목적에 맞추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고 만다. 세계전체를 총체로 하고 그 일부로 파악되는 개인은 한 개의 <구성요소>로 비인간화되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상실한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자연성에 관한 시민적 이상은 규정되지 않는 자연이 아니라 중용의 덕이다>[계몽 p.31]. 자기보존을 위한 인간의 처신은 원래의 자연적 본성을 상실하고 지배적 관리대상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 항상 작은 악을 택하고 다른 길을 의심하며, 이러한 환경에서 인간의 <자유>와 <소망>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계몽의 결과로 인간의 이성은 자유와 희망을 치켜올리지 않고 <계산하는 이성>이 되어버렸으며 지식인은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이 냉혹한 계산에는 새로운 야만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또다시 야만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이성은 수학적 이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계몽이 수학과 사고활동을 하나로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고활동은 자동화되고 이미 있는 것만을 반복하는 기계적 동작에 빠져 반복되는 역사, 운명적인 사건, 지배현상이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때문에 진실이라 하게된다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보편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배층은 이러한 <이성>을 편애하여 계산적인 차가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모든 시민적 계몽은 냉철함, 사실(현실)감각, 세력관계의 정확한 평가를 요구한다>[계몽 p.53]. 이러한 차가운 세상에서는 절대적 이상추구가 황당한 미신적 꿈과 동일시되어 버렸고, 예측가능하지 않고 유용성이 없는 것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기피된다는 것이다.
또한 평등이라는 개념조차 억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즉 평등의 이상이 모든 인간을 같은 것으로 만들 때에 같게 만들기 위한 억압이 발생한다. 같게 만드는 소수는 다수를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평등성은 억압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 청소년 돌격대의 집단성은 옛날의 야만성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억압적 평등성의 승리>라고 말한다[계몽 p.15].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연이 갖는 강제성을 깨려는, 계몽과 같은, 인간의 모든 시도들은 더 깊이 자연의 강제성을 끌어온다. 오딧세이도 그렇고, 18세기의 계몽주의도 그렇고, 20세기의 모든 이데올로기들도 그렇다. 자연의 강제성을 깨려는 힘이 강하면 강한 만큼 인간은 또다시 그 강제성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옛날 것을 반복하는 일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모든 문명적 합리성은 인간 속에 있는 자연적 본성을 거부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거부 속에 신화적 비합리성이 자란다. 이 거부는 전적으로 자연을 지배하자는 목적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목적도 혼란시키고 불투명하게 만든다>[계몽 p.51]. 여기의 <자연>은 지배하는 나쁜 자연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좋은 <자연>이 되어 있다. 또한 <합리성>이 부정된 부분과는 다르게 <신화적 비합리성>을 성토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한해서는 <자연>과 <신화적 비합리성>은 옛 계몽주의자들의 어법과 일치한다.
자연 본성 그대로의 인간을 거부하는 일은 <무의미>와 <고통>을 필연적으로 끌고 온다. 왜냐하면 그 결과로 억압이 발생하여 목적하는 바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현상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광란>의 상태에까지 도달한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세상을 포기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문명사는 세상포기의 역사이다. 세상을 포기한 사람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이상의 것을 주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계몽 p.51]. 아도르노는 세상포기와 지배가 없는 사회로 가는 화해의 세상을 말한다. 이러한 세상의 구체적 모습은 그려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아도르노는 <긍정>을 감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긍정적>이 되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노력한다. 그의 철학적 도구는 <부정>이다. 그가 흔히 비하적으로 말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람 Vorsokratiker>이 가진 특징은 <긍정>에 있다. 그런데 바로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에게서 그는 긍정적 면을 본다. 이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 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구체화되기 어려운 경우에만 아도르노의 긍정이 나타난다.
4.예술
<세상을 포기한 사람>과 비슷하게 <세상과 격리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예술이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계몽의 지배가 닿지 않는 요술적인 면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즉 구체화되기 어려운 곳에 예술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세속적 현존재와의 관련이 멀고 독자적이며 자체로 격리된 분야에 예술이 있다>[계몽 p.20].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그 점이 바로 예술에 요술적 힘을 더 깊게 한다. 이 점이 부분들로 분리되는 현실의 대상물들과는 달리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외면적 형태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신적 전체성을 갖고 있어서 절대적 위엄을 주장한다[계몽 p.21].
이제 맨 앞에 오딧세이 이야기를 아도르노의 언어로 계속시킬 필요가 있다. 묶여 있는 오딧세이는 예술을 즐기는 자로 나타난다. <묶인 자는 나중의 음악회 청중처럼 미동도 않고 귀를 기울인다. 해방을 향한 그의 열광적 외침은 갈채로 메아리쳐 사라진다>[계몽 p.34]. 오딧세이가 청중이라면 <바다요정>들은 예술가이다. 이 예술가 역시 상부층의 사람(오딧세이)처럼 실제의 일을 하지 않는다. 이 예술가들은 인간의 자연본성을 상징한다. 이 예술가들의 노래는 인간의 <희망>과 <바람>을 담고 있지만 이를 위험한 <유혹>으로 금기시하여 하부층에게 이를 듣지 못하게 한다. 하부층은 이 노래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그 위험성만을 알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오딧세이처럼 상부층의 사람이다. 상부층의 사람들은 밧줄을 풀고 싶다고 열광적으로 외치지만(갈채),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져간다.
이러한 예술에서는 미메시스Mimesis가 활동한다. 흔히 모방이라고 번역되고 <2차적인 질낮은 것>으로 이해되는 이 말은 아도르노에게서 크게 위치가 높아져 특이한 빛을 받는다. 예술은 사실적인 것을 모방하지만 <사실적인 것>자체가 아니고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한다. 그 모방에는 예술가의 유토피아적 생각이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모방은 예술가의 살아있는 주관이 <사실적인 것>에 대해 감각적으로 의사표시를 한다. 이러한 의사표시를 통해 주관은 물건이 되는 길을 벗어난다. 그런데 이 미메시스는 개념으로 붙잡을 수 없는 <원래적인 것>을 갖고 있는 특수한 입장으로 이해된다. 미메시스는 <감각>과 <사실적인 것>을 통합하여 이것들이 분열되지 않는 상태의 <진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미메시스는 한정적 진실을 드러내는 <개념>과는 다르고 <감각적>이어서 분명하게 제한시키는 개념으로 붙잡을 수 없다[계몽 p.20].
이러한 미메시스적 성격을 음악에 국한시켜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음악은 뜻을 가리키는 언어에 비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음악은 신학적 면을 포함한다. 음악이 말하는 것은 드러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숨겨져 있기도 하다. 음악이 생각하는 것은 신적(神的)이름의 형상이다. 음악은 비신화화된 기도이고 효과를 내는 마술로부터 벗어나 있다. 음악은 인간 자신들이 그 이름을 명명하고자 하는 헛된 노력에 그 뜻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콰지 p.11]. 여기에 따르면 음악은 신화나 마술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이를 벗어나 있고, 드러나 있으나 감추어져 있고, 모든 개념의 밖에 있다. 그가 <신적 이름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명령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에게 예술은 종교적 성격의 것이다. 이는 낭만주의자들의 종교성과 유사하다. 그가 옹호하는 예술은 낭만주의자의 그것처럼 세상을 거부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그 거부는 더욱 철저하다. 이렇게 세상을 거부하지 않고 바깥의 것을 그대로 따르는 모방은 스스로 예술이기를 거부한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결정적인 것을 말로 할 수 없다>라는 대단히 낭만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술에 대한 높은 견해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항상 결정적인 것을 유보해야 하는 어려움을 동반한다. 그는 이러한 것을 <어려움>으로 보지 않고 <희망>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러한 부분만이 사회의 전체적 지배를 떠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립적인 개인, 인간의 고통을 말하는 것도 낭만주의자들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낭만주의자들처럼 감정과다성에 자신을 맡겨 탄식적인 서정성을 드러내지 않고, 개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회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다. 그 분노 뒤에는 대단히 억센 절망감이 있어서 이것이 기존적 예술과의 대화를 막고 있다. 그는 울먹이기보다는 소리지르기를 택한다. 그는 이러한 절망이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본다. 왜 전통적 예술로는 참된 예술이 불가능한가? 여기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의 <문화산업론>을 거론해야 한다.
5.문화산업
아도르노가 본 지배적 문화는 산압화된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를 그는 <문화산업 Kulturindustrie>이라고 칭한다. 문화산업은 대기업에 종속적인 기관들이다. 즉 텔레비전 회사, 라디오 회사, 음반회사, 영화회사, 대중매체들은 대기업의 계열회사이거나 거기에 의존적이다. 아도르노가 이의 구체적 예로 든 것들은 주로 미국에 관한 것이지만, 이는 서유럽 문화풍토 전체에 관한 것으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속적인 문화에는 반대적인 현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이른바 자유주의적 경향이 그러한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절실한 자유를 말하지 않고 상대적, 중용적 태도를 견지하여, 스스로 문화산업체제의 일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 자유주의가 문화산업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려고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반대적인 것은 한 부분이 됨으로써만이 생존이 가능하다>[계몽 p.118]. 따라서 이러한 부분으로서의 반대는 하면 할수록 체제를 돕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문화산업에서는 예술적 가치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모든 것이 교환할 수 있는 것만큼만 가치를 가졌고, 자체가 무엇이기 때문에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다>[계몽 p.142]. 즉 시장성이 예술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래서 쉽게 문화와 광고가 융합된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좋은 상인이 좋은 예술가>이다. 그러나 문화산업에서의 예술가는 비누나 치약장사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시민적 예술은 물질적인 것에 반대되는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은 현실적인 것과 멀어지고 하부계층을 논의에서 제외시킨다. 이들은 양식적으로 번드르르한 작품을 만든다. <이들은 테크닉의 가능성을 극대화하여 이를 미적 대량소비에 사용하지만 배고픔을 제거하는 데에는 그 능력의 극대화가 거부된다>[계몽 p.125].즉 이들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상품적 예술을 만드는데 주력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교양음악>은 궁핍과 압박의 심각성을 비웃는다.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는 상업>[계몽 p.123].이지만, 그 내용은 세상과 상관없는 것을 다룬다. 이래서 예술은 무목적적 내용으로 상업적 목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문화의 힘은 더욱 막강해진다>[계몽 p.145].시장성이 가끔 거부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관습적 장르 전통을 크게 벗어나는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는 시장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이다>[계몽 p.141]. 베토벤은 시민적 예술에서의 <시장성>과 <독립성>이란 대립적 요소가 하나를 이루는 좋은 예를 보여준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매우 경험 많고 굳굳한 상인>인 베토벤은 <시장성>과 <독립성>의 모순을 자신의 작품에 드러나게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모순이 자신의 작품에 드러나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은 쉽게 시장성의 모순에 빠진다고 말한다[계몽 p.142].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문화산업에 종속적이어서 예술가의 본성을 상실했다고 아도르노는 진단하는데, 이는 예술가가 고용인과 같은 인간이 된 데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음악뿐만 아니고 모든 정신적 분야에서 공통적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렇게 <관리되는 세상>의 고용인 입장을 벗어나려고 하는 예술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술가는 <사회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사회로부터 고립됨으로써 사회적 진실을 지킬 수 있다고 아도르노는 생각한다. <달콤함>으로 세상을 잊게 하는 것도 물론 안될 일이지만, 좋은 의도를 가졌을지라도 이미 사용된 예술적 사고로는 이러한 <전체적>관리를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면적 거부냐 아니면 관리 당하느냐 하는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가 철두철미하게 전체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6.전통의 거부
아도르노의 사고에서는 전통거부가 필연이다. 인류애를 음악에 담으려했던 베토벤의 이상적 생각을 오늘날에 되살릴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 아도르노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계몽주의 시대의 생각으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베토벤처럼 <더 좋은 세상>과 <인간스러움>을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상업화된 세상에서는 원래의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 베토벤의 음악을 포함한 옛 음악이 전반적으로 지배계급의 고용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신음악 p.24ff]. 반면에 베토벤의 생각을 잘 계승하는 사람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고 그의 음악을 무시대적(無時代的)인 것으로 높이는 사람 가운데에 있지 않다.<위대한 음악의 철학적 유산은 이 유산을 업신여기는 사람에게만 상속된다>[신음악 p.16].
이러한 거부적 상속만이 아도르노에게는 진정한 계승이다. 그에 따르면 전통의 거부는<거부된 것>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전통을 거부하는 신음악은 전통의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고 더 이상 활성적이지 못한 예술적 주관을 되살린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바하를 이해하는 자만이 쇤베르크를 이해할 수 있고, 쇤베르크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바하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수 있게 된다[불협화음 p.133]. 역사적 순서로 보아서는, <쇤베르크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바하를 이해한다>는 말은 선뜻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이미 가치적인 판단으로 옮겨와 있다. 즉 <바하>는 이해되는데 <쇤베르크>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람은 더 이상 효력이 없어진 음악을 효력이 있는 음악으로 알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참 예술가는 옛 음악과 <철저하게radikal>결별해야 한다. 옛날의 <위대한> 음악에 합당한 오늘날의 음악은 <철저한> 음악이다. 즉 사회에 대해 철저하게 대립적이고 고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음악이다. 이제 예술가는 인간에게 말을 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진실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아도르노의 생각이다. 이는 <신음악>이나 모더니즘의 예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일반청중들이 신음악의 소리에 놀라는데 이는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불협화음은 청중을 놀라게 하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듣기 싫은 것이다>[신음악 p. 15].
신음악은 인간들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잊고 싶어하는 것을 의식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반발한다는 것이다. 진실 되지 못한 작곡가들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하여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지 못하고 <잘못된 화해>를 추구하여 옛 음악으로 되돌아가거나(시벨리우스등), 새로운 것인 체하면서 실제로는 옛것을 새롭게 포장한다는(스트라빈스키 등)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조직이라는 <거대한 기계>로부터 받은 충격을 예술에 의식화시키지 못하고[신음악 p. 138]. 사회조직에 순응하고 만다. 이 경우 주관은 상실되고 <자아>가 <남>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쇤베르크는 이러한 타협에서 이긴 철저한 작곡가였다고 아도르노는 평가한다. 쇤베르크는 사회조직이 주는 충격에 정면으로 대결하고 저항하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게는 <자아 유지냐 자아 상실이냐> 하는 문제가 <사회에의 적응이냐 저항이냐> 하는 문제와 같다. 즉 아도르노가 지향하는 세계는 기존 사회와의 통로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아도르노에게 <사회>라는 말은 <고통>, <억압>, <지배>와 같은 의미로 들린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현대라는 노예선 속의 노예들인 것이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틀을 깰 수 있는 힘도 강력해져야 한다. 철저하지 못하면 인간의 억압적 굴레를 풀 수가 없다. 그래서 유토피아에의 강력한 희망이 요청된다. 희망은 오직 지금까지의 것과는 <같지 않고 다른> 것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생각은 음악에서 옛 재료를 거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는 쇤베르크의 12음기법 음악을 크게 부각시켰다.
7.재료
음악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재료>라는 용어는 멜로디, 화성 등을 만들어내는 음들로 파악된다. <재료>라는 용어에는 어떤 정신적인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사용하는 <재료> 개념에는 적용가능한 그의 예술철학의 중요한 부분들이 모두 반영되어 있다: <불협화음들은 긴장, 이의제기, 고통의 표현으로서 발생했다. 이것들이 침전되어 재료가 되었다. 이것들은 더 이상 주관들의 표현이 아니다. 이 재료들은 그 발생 근원을 부인하지 않지만 객관적 저항의 성격들이 되었다. 이 음향들의 수수께끼적인 성공은 이것들이 고통을 재료로 변케하고 지배하는데, 이는 음향들이 고통을 계속 붙잡고 있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들의 부정성은 유토피아에 충실하다>[신음악 p. 80]. 아도르노는 12음기법 음악의 불협화음들이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 고통들이 침전되어 불협화음을 이루는 <재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음악을 만드는 재료가 단순히 음악의 물리적인 요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성격의 것이다. 정신의 침전은 일정한 주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주관에 의해 이루어진 재료는 주관적 성격을 넘어서서 <객관적> 저항의 성격을 갖는다. 이에 따르면 <재료>는 <정신>이며,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이다. 이러한 재료이해는 여러 과정들을 보여준다. 특히 재료의 발생을 <고통>과 연결시키는 것은 대단히 특이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제를 재료문제와 연결시키는 실마리가 된다. 고통으로 인해 발생되는 재료는 철저하지 못하면 사회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이런 불철저한 예의 하나로 아도르노는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를 거론한다. 이 작품은 기존 양식들을 (예: 팟사칼리아, 모음곡, 론도 등) 사용하여 충격을 드러내지 않고 흡수시키고 말아 <불의의 장치 속에 무력한 병정의 고통이 양식으로 평정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체념적, 합의적>으로 승화되어 옛 도식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신음악 p. 33]. 기존의 조성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힌데미트, 스트라빈스키, 시벨리우스에 대한 비판은 더욱 철저하다. 그는 관습화된 것을 사용하여 사회적 고통을 용인하는 잘못된 화해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재료>와 <역사>가 연결된다. 음악의 형식은 역사적 발달과정 속에 필연적으로 나온 것이며 자연처럼 저절로 생성되지 않았고 안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음악으로부터 <역사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 없으면 없는 만큼 그 음악은 더 완벽하지만 음악은 그 발생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신음악 p. 35]. 즉 음악의 역사는 당대의 부정적 체험이 음악으로 집합된 것들이다. 그의 음악사 이해는 이러한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작곡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는 이제 이미 3화성이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단지 낡고 시대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거짓이기 때문에 쓸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3화성은 소음이다. 소음으로 들리는 것은 이러한 3화성이고 불협음이 소음이 아니다[신음악 p. 37]. 아도로노는 이미 일반화된 고통의 표현은 (예:감 7도화음)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짓된 표현이라고 말한다. 진실된 역사의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답은 이렇다: <예술의 형태는 인간역사를 문서보다 더 합당하게 기록한다. 참혹한 형식은 참혹한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 일이 없다>[신음악 p. 44].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진실한 예술의 역사는 참혹한 형식에 들어 있고, 이 형식 속에 참혹한 삶을 거부하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특별한 음악청취방식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그가 듣는 방법은 <표면적인 불협화음의 ‘해결’을 바라는 요구를 느끼지 않고, 오히려 ‘해결’을 원시적 청취방법으로의 퇴보라 여기고 자연발생적으로 거부한다>[신음악 p. 36].
아도르노의 음악사 이해에서는 음악이 옛 재료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 보편성을 추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너무 많이 사용된 전통적 재료로는 <특수한 것>을 드러낼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보편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을 드러내야 하는 패러독스에 봉착한다. 베토벤의 모든 작품은 이러한 패러독스를 보여준다>[신음악 p. 51]. 아도르노는 베토벤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오늘날에 맞지 않다고 본다. 그는 예술이 <특수한 것>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사용되지 않은 재료로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예술가가 특수한 인간적 불행을 특수한 방식으로 표현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생각은 보편성이나 균형을 강하게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반고전주의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반고전주의적> 성향은 사회와의 불화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시 전적으로 새로워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재료이해에서 최대의 적은 음악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왜냐하면 음악을 듣는 마음은 당대의 사실적 고통만을 듣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뛰어넘는 음악이해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모든 음악심리학을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이유로 <모든 시대의 음악을 변치 않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견고한 음악적 주관>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음악심리학이 가능한데 그러치 못하다고 말한다[신음악 p. 35]. 이로써 음악을 듣고 심리적인 반응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일반적 음악청취자들의 태도를 거부한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재료> 이해에서 음악이 <아름답다>든지 <듣기 좋다>든지 하는 일반적 음악청취는 배격 당한다. 이 점에서 그는 동반자들에게 바다요정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지 못하게 명령한 오딧세이와 흡사한 입장을 보여준다. 오딧세이와 동반자들이 자기보존을 위해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면 아도르노는 사회적 거짓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 심미적 음악청취를 배제한 것이다. 즉 그는 <진실>을 추구하며 일반적 <미>를 버린 것이다.
여기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아도르노의 책 어디에고 진실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허구를 공박하면서 <진실>이 추구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세상의 고통을 폭로시켜 드러나게 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허구에 대해 부정적인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려내는 데 그치는 태도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고 매우 혐오할 만한, <자기>가 <타인>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드러낸다고 아도르노는 생각한다.
아도르노의 재료 이론은 어떤 예술이 <틀린> 예술이고 어떤 것이<맞는> 예술인지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맞는> 예술은 잘못된 사회와 연결된, 틀에 박힌 보편성을 거부하고 유토피아적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유토피아와 현실의 간격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며 이를 드러낸다.
8.쇤베르크
아도르노가 왜 쇤베르크를 높이 평가하는지는 이미 드러나 있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도르노는 몬테베르디에서 베르디까지의 음악이 <수난곡적 허구>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만 <쇤베르크는 열정을 가장하지 않고 무의식, 충격, 악몽을 수록한다>고 말한다[신음악 p. 41]. 이러한 <사실적인 고통>을 반영하기 때문에 쇤베르크가 <정신적 움직임의 검열장치가 되는 형식>을 파괴하는 데에 이른다고 말한다[신음악 p. 41]. 이 음악작품 속에서는 <사실적 고통>의 상처가 남아 있어서 이 상처가 작품 자체만의 독자적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것으로 이행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정적 진실을 그대로 작품에 담는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철저한>(형용사<위대한>의 현대적 계승) 음악가가 쇤베르크라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쇤베르크는 <음악적 허구의 가장 내면적인 원칙인 화해적 보편성>[신음악 p. 42]을 거부하여 관습의 지배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미 있는 양식에 잘 맞추어 번드르르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혐오할 만한 작곡가로 본다. 이러한 작곡방식은 <있는 것의 절대화>이며 <이데올로기>라고 그는 말한다[계몽 p. 117]. 그는 전통에 대해 따져볼 때에만 예술은 <고통을 위한 표현>을 획득한다고 말한다[계몽 p. 117]. 이렇게 <전통>이 고통의 반대되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철저한> 예술가 대신에 아직 <위대한> 예술가를 말하고 있는데 다음의 말이 쇤베르크 평가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양식을 흠없이 완벽하게 실행하는 사람들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고통을 억눌러 양식을 만들어내는 강함을 보이면서 그 고통의 표현을 부정적 진실로서 자신들의 작품에 수용하는 사람들이다>[계몽 p. 117]. 그에 따르면 쇤베르크는 이러한 작곡가이다. 그는 사람들이 익히 아는 일반성에 자신을 맡기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고립하여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음악에 수용했다고 아도르노는 생각한다. <고통>을 기준으로 한 아도르노의 생각은 고통과 작품간의 관계를 밝혀내는 증명적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고 상당히 신비적인 분위기를 갖는 언어로 이어간다. (예를 들어 <고독한 자의 공포가 미적 형식 언어의 성스러운 기준이 되는 것은 고독의 비밀에 관해 무엇을 알게 해준다>[신음악 p. 44]). 진실을 말하는 음악은 <맞는stimmig> 음악인데 이러한 음악은 <다르게 할 수 없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So-und-nicht-anders-sein-konnen> 절대적 주관에 의한 것이다[신음악 p. 49]. 이와 같은 음악과 쇤베르크의 음악이 부분적으로 맞지 않는 점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생각한다. 쇤베르크는 더 이상 사회에 대해 발언이 불가능한 관습적 음악을 떨쳐 버렸기 때문이다. 즉 쇤베르크의 음악은 <포기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이러한 긍정적 쇤베르크 이해로 아도르노는 끝을 내는가? 그렇지 않다. 그의 <부정의 변증법>은 계속된다. <포기함으로써 힘을 얻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동시에 이 기법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12음기법은 음악을 해방함으로써 음악을 다시 묶어 맨다. 12음기법은 작곡자의 자유를 빼앗아간다>[신음악 p. 64]. 쇤베르크의 규칙적 이론체계가 작곡가의 상상력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복종심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에서는 12기법을 경험적으로 겪지 못한 사람들이 조성의 대체물로 생각하고 새로운 복종심으로 맹종한다>[신음악 p. 65]. 이러한 사실을 아도르노는 오딧세이 이야기와 결부시켜 이렇게 설명한다. <12음기법이 오딧세이 이야기에서처럼 자연의 지배를 실행하고 다시 자연의 힘 아래 깔리게 된다>[신음악 p. 63]. 위의 말은 <12음기법이 보편성에 대해 승리하고 다시 보편성의 힘 아래에 깔리게 된다>라고 하는 말과 같다. 이로 보아 12음기법은 허구일수도 진실일 수도 있다. 이것이 억압적 운명에 흡사한 보편성에 저항할 때에는 맞는 것이지만 스스로 보편성이 되었을 때에는 다시 억압적 자연과 같은 것이 된다. 이에 따르면 예술은 사회적 보편성에 맞설 의무를 갖고 있다. 여기에 맞서지 못하면 <주관>이 아니라 <물건>이 되고 만다. 아도르노의 쇤베르크 이해는 계몽에 대한 이해와 흡사한 것을 본다. 즉 그는 역사에서 계몽을 인정하듯 쇤베르크의 필연성을 인정하지만 계몽이 가져다준 재앙을 비판하듯 쇤베르크의 음악이 가져오는 새로운 억압을 비판한다. 이렇게 그가 가장 좋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이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도르노의 철학적 사고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는 돛대에 묶인 오딧세이가 움직일 자유가 없는 것처럼 긍정할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떠한 긍정도 허구의 화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고통, 실천, 예술에 의한 검토
아도르노의 철학은 위기를 의식하는 철학이다. 즉 오딧세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적 인식이 항상 동반되는 철학이다. 그래서 어떠한 평범한 사항에 관해서 말해도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운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히틀러를 희화화시킨 영화) 끝부분에서 밀밭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 아도르노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 영화에서 많이 보는 독일 처녀의 금발머리를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영화 속의 <반 파시스트적 자유의 연설이 무효가 되었다>고 말한다[계몽 p. 134]. 이러한 부분은 아도르노의 철학이 <부정적 연상작용>에 크게 의존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사실상 거의 모든 사회 현상에서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는데 이는 그의 위기의식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를 멈추게 하는, 인간의 꾀로 만들어낸 장치들은 또다시 인간의 고통을 불러온다. 아도르노의 철학적 방법은 <부정>이지만, 이 부정을 추진하는 것은 고통이다, 또한 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예술 (또는 예술철학)은 고통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고 즐김이 있는 것은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사회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에게 <즐긴다는 것은> 사회에 대해 <동의한다>는 것을 뜻한다[계몽 p. 130]. 뿐만 아니라 고통을 적당히 중용화시켜 타협하는 것도 거짓에 속한다. 중도적 사고는 고통을 상대적으로 처리하여, 고통을 계산적으로 취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중도적인데 대해서도 준열한 비판을 퍼붓는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고통 앞에서 중도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고통이 발언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욕구는 모든 진실의 전제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주관성에 부담을 주는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서 체험되는 고통과 그 고통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중계된 것이다>[부정 p. 29]. 이에 따르면 고통을 가장 주관적으로 체험하지 않은 중도적 관찰은 객관 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주관-객관의 변증법적 틀과 내용적 <고통>이 결합된 것이다.
아도르노의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주관과 연결되어 있고, 이 주관은 집단적인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집단은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집단과의 화해는 진실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이 점이 그가 몸으로 겪은 파시즘이 얼마만큼 그의 철학적 사고를 사로잡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면이다. 따라서 어떤 한 집단을 위한다고 말하며 정당성을 주장하는 보편적 윤리관과는 아주 다른 면모를 보인다. 즉 그에게는 민족, 공동체, 민중이나 이에 흡사한 집단을 위한다는 말이 전혀 없다. 맑시즘의 영향이 현저한 그의 사상은 맑시즘에서 신성시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옹호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이 고통의 면을 포함하기도 하여(억압받는 사람),그의 옹호를 받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집단성은 이를 방해한다. 그는 집단을 위한다는 보편성의 명목이 억압의 도구가 되어왔다는 것을 대단히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가 동유럽을 보는 시각이 비판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유럽에서는 개인에 관한 견해에서 이론적으로 짧게 생각하여 집단적 억압에 구실을 주었다. 당은 구성원의 수가 많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개인보다 인식능력에서 우월하다는데, 이는 당이 분별력을 상실하고 테러화했을 때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립된 개인은 명령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가끔은 객관적인 것을 집단보다 더욱 선명하게 깨닫는다. 이 집단이란 것은 위원회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당은 천의 눈을, 개인은 단지 두 눈을 가졌다는 브레흐트B. Brecht의 말은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는 틀린 말이다. 부조화를 느끼는 한 개인의 정확한 상상력은 천의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천의 눈에는 빨간 안경이 통일되게 씌어져 있는데, 이를 통해 보는 것을 참된 보편성으로 혼동하며, 참된 것을 퇴보시킨다>[부정 p. 56]. 이러한 현실진단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동유럽의 정치체제가 개인의 억압과 개인의 고통을 구조화시킨 형태라는 점이다. 그는 집단에 관한 모든 환상을 버리고 있다. 그의 사상적 체계는 집단을 위한 공익성을 주장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는 면을 버리고 고통을 말함으로써 세상의 허구를 공박하는 입장을 취한다.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매우 절실하다. <아프다> <살려달라>하는 소리는 우선 생각하기보다는 동감(同感)을 구한다. 이는 합리적인 따짐을 요구하지 않고 고통을 제거시켜 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부정적 대응은 개념적으로 합리적으로 한계 지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한다. 아도르노의 철학이 갖는 힘은 바로 이 고통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고통의 충격을 받았고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고통은 그에게 윤리적인 바탕이 되었고 부정의 사고를 형성시킨 근원이었다. 그의 예술철학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또한 전체를 통해서만 부분을 파악하는 사고의 일방통행이 가져오는 피해에 대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고통 속에 깊이 잠수한 그의 예민함 때문이었다. 그의 고통의 시각은 현실과 사고의 비참함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은 예술에서도 침전된 고통을 보게 된다. 그의 귀는 한사코 순진한 즐거움을 거부한다. 고통은 그를 처절하고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분노의 언어가 곳곳에서 돌출한다. 그는 그가 바람직한 예술로 보는 신음악이나 모더니즘 예술에 분노의 특징을 부여한다. 그의 분노가 때때로 <거룩한 분노>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가 고통을 심각하게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견해가 말을 쉽게 걸 수 있는 분위기가 못 된다. 그의 철학이 절실한 그만큼 일방적인 면이 증가한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뿌리가 전체주의나 보편성의 사고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철저하게 <같지 않은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예술은 이미 있는 것과 같지 않은 모습을 갖게 된다. 기존의 생각의 틀로서는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도 <같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큰 의미가 된다. 그는 어떤 작품이 사회적으로 <어떤 긍정적 기능을 갖는가?> 또는 <어떤 계층을 위한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예술을 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 뒤에는 그가 혐오하는 보편성의 사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것>으로 무엇에 봉사하기보다는 <같지 않은 것>으로 있는 것에 저항함이 고통을 감하는 데에 더 좋은 방도라고 생각 한다.
그의 생각이 모더니즘 예술가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예술철학은 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해석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쇤베르크는 아도르노의 『신음악의 철학』을 읽고 그 위험성에 관해서 걱정했다[Metzger p. 9]. 그러나 모더니즘 예술을 받쳐 주는 철학으로서는 아도르노의 해석이 상당한 설득럭을 지니다. 그의 예술철학은 사실주의자들에 의해 <퇴폐주의>라고 비난되는 모더니즘의 보호막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모더니즘 예술이 도덕적 위엄성까지도 부여받는데, 이는 인간을 억압하는 보편성을 깨는 예술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 앞에서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생각을 제거하지 않는 한 아도르노의 특수한 생각이 이해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이 이해되려면 아도르노의 <고통>이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아도르노에게 열광할 수도 있다. 또한 바로 이 점이 그를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어떠한 논리도 고통 앞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못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고통 당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비판의 실행이 어렵다. 이렇게 아도르노는 자신의 철학에 고통의 모습을 부여함으로써 큰 방어벽을 쌓아놓고 있다. 그를 비판하는 자는 <차가운 세상>의 대표자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시각 역시 모더니즘이 <고통의 예술>이라고만은 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통의 예술>이란 일면 이외에도 <저항의 예술>이라는 일면도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예술에는 희희낙락한 경우도 있는데, 이 때에는 저항의 면만이 나타난다. 그러나 단순한 저항은 설득력(또는 공감시키는 힘)을 약하게 만든다. <즐기는 저항>은 고통의 면에서 보면 당혹감을 주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이 부분에서 명확한 언질을 주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보편적 예술표현 방식에 따라 드러내는 데 대해서 부정적이다. 그의 생각에서는 <고통> <같지 않은 것>이 함께 있어야 정당성을 획득하며, 최소한 <같지 않는 것>이라도 지켜지기를 바란다.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은 예술을 고통과 연결시킴으로써 감성적으로 분명하게 사회와 연결된다. 이는 예술이 사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이 사회는 단지 표면적으로 예술가와 접촉되는 것이 아니고, 예술가의 내면에 와 닿는 섬뜩한 것이다. 그의 유토피아적 사고는 바로 이 거짓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부정의 반응은 필연적이다. 다른 길이 없다. 그는 기계적 <부정> 아래 깔려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고통에 대한 견해에 동감을 갖는 사람도 그의 억압적 부정의 일방성에서 사고의 자유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벨머는 이 사항을 이렇게 말한다: <아도르노의 강박관념은 ‘같게 만들어 버리는 강요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 강박관념은 그에게 예리한 시력을 주었지만 동시에 눈을 멀게도 만들었다. 그의 깨달음을 화해적 철학의 포장으로부터 벗겨내려면 이성(합리성)의 개념에서 강박관념적 시각을 제거해야 한다>[Wellmer p. 164].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부정의 보편화>를 불러와 결과적으로 그가 가장 공박하고자 했던 것을 그대로 닮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리한 것은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도 그의 부정의 변증법에 원칙적으로 같이 들어 있는 한 요소이다. 예를 들어 음악심리학을 음악사회학적 관심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 미리 못박아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합리적 사고는 나쁜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살리려한 그가 음악심리학을 거부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이러한 제외는 그가 <즐거움의 예술>을 처음부터 봉쇄시켜 버리려 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그의 사고는 고통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두 가지 큰 윤리적 기준, 즉 집단의 유익한 것을 구하는 <공리성(公利性)>과 <고통의 제거>는 보편성의 사고에서는 같이 웅호된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고통제거> 때문에 <공리성>의 사고를 공박한다. 아도르노는 집단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부자유에 대해 대단히 예민하다. 보편성을 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독재가 없다. 그러나 <보편성>을 말한다고 하는 것 자체로 아우슈비치, 히틀러, 스탈린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예민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명분을 내세우는 것 앞에서 속지 않으려는 자세는 충분히 이해가 가다가도 모든 사회적 사실이나 현상 뒤에 <보편성의 간첩>(아도르노가 자주 쓰는 말)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그의 사고는 설득력이 약해진다. 그래서 그의 글에 많은 변증적 변화가 전개되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무는 장소는 <부정의 토치카>이다. 이는 공격과 방어에 썩 좋은 자리이지만 시야가 극단적으로 한정된 곳이다.
자신이 공박하는 것과 같아지는 경우가 아도르노에게 또 있다. 즉 자신의 사고가 피택(被擇)되어지는 것을 상정하지 않고, 모든 중간적인 입장을 매도해 버리는 일이다. 이는 억압적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에게 흔히 보는 현상이다.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은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편이기를 바라고 다른 생각에 대해 관용이 없다. 피택되려고 하지 않고 남을 개조시키려고만 할 때에 <억압>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모든 <현실화>에의 생각을 버리고, 예술의 자리로 옮겨 버림으로써 이러한 비난을 벗어난다. 예술은 그의 유토피아적 자리이다. 그러나 이세상의 억압자들은 하나같이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이를 명분으로 억압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억압자들과 다른 점이 있는데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말로 규정될 수 있는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러나 말로 규정되지 않은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그 추구가 현실화될 때에는 얼마든지 억압적 구실이 될 수 있다. 모든 민주주의는 완전한 세상을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산물이 아니라, 부족한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반유토피아적 사고의 산물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완전성의 면에서 볼 때에 가장 불완전한 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불완전한> 민주주의가 <완전한> 독재보다 더 억압과 지배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에 아도르노가 말하는 유토피아적 민주주의는 걱정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사람을 성숙되게 교육시키려 한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성숙성에의 요구가 당연한 것>[성숙성 p. 133] 이라고 말하고, 그 성숙성을 구체화시키는 교육을 <이의제기와 저항의 교육>[성숙성 p. 145]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유행가 가사가 전해 주는 것과 같은 결함 없는 세상이 아니기에 이의제기와 저항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러한 바르지 못한 세상에 대한 저항의 의도는 나무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어떤 위치에 두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저항>의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미성년자들로 보고 있으며, 자신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피택되려는 입장이 아니라, 인간 개조가로서 이미 내정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교육받고 교육되는 학교제도가 아니고, 의견들이 피택되고 거부되는 선택의 일을 그 업무로 하는 제도다. 그가 자신의 우월한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그의 철학의 중요한 본질에 그러한 요소가 들어 있다. 그의 희망은 귀를 막고 노를 젓는 다중에게 있지 않고 오딧세이라는 인식자에게 있다. 그의 <보편성> 거부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식자도 피택되어야 한다. <선택하는 사람>을 설정하지 않을 때에 아도르노의 부정적 작업은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것>으로 <보편성>을 깨려는 그의 방식은 <중도성>도 <보편성>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이 <보편성>이 되고 만다. 이는 학문이나 예술에서는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현실정치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조종하는 경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이를 감안하여 유토피아의 현실적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한다. 이론적으로 허구적 보편성에 대해 공박함으로써 실천적 변화를 이루어 보려는 그의 생각은 현실적 프로그램으로 작용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갖는다. 고통받는 것 자체로 진실의 소유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보편성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보편성을 앞세우고 지배하는 권력이 있을 수 있듯이, 고통을 이용하여 억압할 수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보편성이든 고통이든 이러한 명분을 지배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나쁘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을 저지하려고 변증법을 부정법으로 만드는 것은 <실천>에 대해 <이론>으로만 대응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예술>을 <사회>에 대립되는 것으로 치켜올려 사회적 변화를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개념>과 <현실>이 서로 맞지 않다면 <실천>의 면을 <개념>에 맞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서 <실천>의 면은 <긍정>의 거부로 인해 거의 봉쇄 당한다.
아도르노는 예술 수용자의 입장에서보다는 예술 창조자의 입장에서 발언한다. 그의 오딧세이적 입장은 감상자에 대한 생각을 무시하게 한다. 감상자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쁜 보편성에 의해 주관이 없어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상자를 거부해야 하는 예술의 형태가 추구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예술은 위로를 주거나 공리적이 되지 않고 <부정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의 예술철학은 어느 예술 분야에서보다 현대음악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현대음악에서는 <같지 않은 것>이 <같은 것>을 거의 몰아낸 상태를 보여준다. 보편성의 상실이 거의 완벽한 것처럼 여겨진다. 많은 음악이 청취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그러나 고통은 제거되었는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은 음악에서 (특히 현대음악 작곡가들에게서) 보편화되었기에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성공이 고통의 제거라는 면에서 보면 효과가 없다. 사회에 대한 저항이란 면에서 보면, 현대음악이 가진 저항의 효과가 극히 미미하다. 예술적 저항은 이제 많은 경우 예술가의 경력쌓기의 방편으로 고안되는 현상도 보인다. 예술 감상자들은 이러한 예술로의 접근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들에 대해 차가운 관용으로 묵인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도르노의 말처럼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고, 듣기 싫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은 아도르노로부터 큰 위엄을 부여받지만 그만큼 고립되어 있다. 아도르노는 계몽을 부정함으로써 계몽의 본뜻을 더욱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부정의 변증법이 예술에까지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부정의 변증법을 예술에까지 적용하면 신음악의 강조가 문화산업의 음악을 더욱 듣기 좋게 만든다는 역설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의 변증법은 모든 곳에 통용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춘향이의 열녀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변학도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소설가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실제의 인간인 춘향이를 위해서 실제의 인간인 변학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의견이다. 이론에서는 악이 있어야 선이 있다는 (또는 뚜렷해진다는) 말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악을 실현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삶>은 <이론>보다 더 엄숙하다. 이렇게 <이론>에서 허용되는 상대성이 <실천>의 장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아도르노가 지나치게 예술창작가의 입장에 치우쳐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그의 철학이 <실천> 부분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게 한다.
아도르노의 철학은 주관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방향의 철학은 실증주의에 의해 거부된다. 주관의 상실은 그에게 철학의 위기로 비쳐졌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철학이 없다>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 <주관이 없다>라는 말뜻으로 쓰인다. 아도르노에게 이러한 식의 철학이 없음은 곧바로 권력에의 복종으로 비쳐졌고, 인간의 전 분야가 사회화, 보편화되어 어떠한 <희망>의 생각도 용납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에 대해 개탄하였는데, 이의 회복을 <주관의 살림>, <부정의 실행>을 통해 이룩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 단계, 즉 여러 주관들을 상정하고 이들이 부딪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관한 것은 부러 회피하고 있다. 이는 긍정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어려움이 그를 예술로 더욱 가까이 몰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의 철학은 폭넓은 감성의 수용으로 인해 <철학예술>이라고 불리어도 무방할 듯하다.
- 끝내면서
아도르노의 이의제기는 오늘날도 유효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고통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존엄성이 훼손 당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커다란 폭력에 대한 작은 사람의 저항이 효과 면에서 기대되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는 꼭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을 모든 감성까지 동원하여 우리에게 소개하는 그의 철학은<부정>의 방법을 선택하고, 모더니즘 예술에 희망을 건다. 그래서 맞는 상황판단에 적절치 못한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물론 어떤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의 <부정의 변증법>은 처방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의 예술철학은 고통의 상태를 알려주는 감성적 온도계에 흡사하다. 이 온도계는 표준 온도계라기보다는 비표준적인, 보통의 것보다 더욱 예민한 종류의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도전을 예술로 풀어보려 한 그의 노력은 비일상적인 보통의 것과는 아주 다른 예술의 입장을 옹호한다. 이것이 그에게는 <유토피아의 옹호>나 마찬가지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작업을 통해 현실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을 강력히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오딧세이처럼 묶여 있다. 그의 철학은 이론적인 것에 묶여 있고 실천의 면에서 무능하다. 그는 해방감을 주지만 해방을 주지 못한다.
참고문헌:
Max Horkheimer, Theodor Adorno: 계몽의 변증법 Dialektik der Aufklarung(1944), Frankfurt am Main(1971).
Theodor Adorno: 신음악의 철학 Philosophie der neuen Musik, Frankfurt am Main(1972)
Theodor Adorno: 부정의 변증법 Negative Dialektik(1966), Frankfurt am Main(1977).
Theodor Adorno: 불협화음 관리되는 사회의 음악 Dissonanzen Musik in der verwalteten Welt(1956), Gottingen (1972)
Theodor Adorno: 음악사회학 입문 Einleitung zur Musiksoziologie(1962), Frankfurt am Main(1968).
Theodor Adorno: 성숙성의 교육 Erziehung zur Mundigkeit,(Frankfurt am Main(1971).
Theodor Adorno: 콰지 우나 판타지아 Quasi una fantasia, Frankfurt am Main(1963).
Albrecht Welmer: Zur Dialektik der Moderne und Postmoderne, Frankfurt am Main(1985).
Heinz-Klaus Metzger: Adorno und die Geschichte der musikalischen Avangarde → Adorno und Musik(hrg; Otto Kolleritsch), Studien zur Wertungsforsch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