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토론 사이트들을 돌아다녀보면, 바야흐로 말의 난장이 펼쳐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말들은 어지러운 욕망을 실어나른다. 진실에 기대어 혜안으로 번쩍이는 말들이 있는가 하면, 증오와 저주로 날선 말들도 있다. 그런 말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무엇인가로 짓눌린 것처럼 갑갑해진다. 이 어지러운 말들의 갈래를 어떻게 잡아서 역사의 올바른 물줄기 안에 실어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시대에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어지러운 사회 안에서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위치를 가장 위험하고 가파른, 누리는 것 없이 의무만을 짊어져야 하는, 존재의 옹색한 벼랑 끝에 올려놓는 일이므로. 그러므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이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 질문의 대상이 아니다. 날카롭게 벼리어진 결단으로서만 지식인의 자리는 질문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나는 “이것은 무엇이어야 할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정보화 시대에 지식인의 위상은 전시대 같지 않다.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접근이 가능했던 고급 정보들이 사방으로 뚫린 인터넷 공간 안에 무한대로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인은 무지의 공포에 기대어 일반인들을 상대로 행사해 왔던 권위를 더 이상 행사할 수 없다. 지식인이라는 소수의 정보 독점자들을 둘러싸고 있던 아우라는 더 이상 없다. 대중은 지식인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대의 지식인의 위상에 대한 성찰은 이러한 탈신비화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식인의 위상이 전시대같지 않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대사회 안에서 지식인의 존재가 덜 필요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온갖 종류의 정보들이 카오스 상태에서 부유하고 있는 현대사회 안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더욱더 중요해진다. 지식인에게는 무수한 정보들의 가치를 분별하고, 합리성을 결한 채 정서적 반응 안으로 침몰한 위험을 가지고 있는 대중의 무질서한 견해 표명을 합리적인 방향으로 견인해 내어야 할 긴박한 의무가 주어져 있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겸손한 지식인이 요구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계몽은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대중의 위상은 높아져서, 계몽을 거부한다. 여전히 이성이 작동해야 하는 맥락에 욕망이 들어앉아 이성을 비웃고, 팔려나가는 힘으로 권력이 된 표피적 문화들은 선동적 문구로 경박함을 부추긴다. 진지함은 이제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자리에서 전시대의 지식인의 위상에 연연하는 지식인은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보편의 성 안으로 퇴각해 버리거나, 아니면 시끄러운 말의 범람을 바라보면서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찢어진 아우라의 베일을 들고 역사 저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렇게 한다고 무너진 권위가 돌아올까? 미지의 공포로 대중을 협박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최근에 우리사회에서 불거지고 있는 문제들은 지식사회학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들을 제시한다. 내가 그렇게 보고 있는 까닭은, 많은 문제들이 결국 < 말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식의 문제는-인문학에 관계될 때 더욱더- 결국은 말의 문제이다. 근대의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는, 언어와 존재의 문제였다. 존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어적 분절에 의하여 구축된다. 따라서 말을 장악하는 자는 세계를 장악한다. 거칠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근대는 말의 경쟁의 시대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정치와 결합되면서 어떤 야만적 귀결로 이어졌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대결로 무참하게 막을 내린 그 근대적 야만의 경험을 우리는 육체적으로 지겹도록 경험했지만, 그러나 말의 형태로는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했다. 물론,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분단 상황 안에서 한쪽 입에 재갈이 물려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무턱대고 절대악으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실은 아주 조용한 사회였다. 지배자의 말과 < 다른> 말들은 얼음장 아래에 밀어넣어졌었다. < 빨갱이> 한 마디면 모든 말들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고, < 다른> 말들이 시끄럽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음나라에서 포시랍게 살아왔던 기득권을 가진 지식인 집단이 < 지식인의 위기>가 닥쳐왔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 지식인 위기론>이 그 동안 반공이라는 단 하나의 혀를 빼고 다른 혀들을 압살해 왔던 조선일보라는 거대한 말의 大兄 집단에 의해 제기된 것은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귀청이 떨어져나갈 일인 것이다. 지식사회학적으로 < 다른> 말들의 반란이 우리 사회에서 < 언론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사이 우리 사회의 거대언론은 언론이라기보다는 정치세력이었다. 그들은 말의 분배자가 아니라, 말의 지배자였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형성된 당연한 국면이다. 다양성을 견디지 못하는 기득권 수호자들의 불안이 그것을 혼란으로 여기고 있을 뿐, 실제로 혼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언어를 독점하고 기득권 누려왔던 거대언론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는 현재의 상황을 < 위기>리고 주장하면서, 우리 사회 특유의 불안 공포증을 부추기도 있다.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말장난을 통하여 철저하게 조작된 가짜 위기이다. 기득권자들은 빌미를 잡아서 위기론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래야 기득권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위기는 없다. 전반적인 문화적 상황 안에서 지식인의 위상이 재조정되고 있을 뿐, 지식인의 역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 지식인의 위기>는 조선일보식으로 사유하면서 타자의 말을 억압하고 포시랍게 살아왔던 낡고 오만한 지식인들의 위기이지, 스스로의 특권적 지위를 반납하고 난장에서 새로운 이성을 찾아가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지식인들의 위기가 아니다.
이 글을 빌어서 나는 양식있는 지식인들에게 입을 열어 말해 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지금은 지식인들이 말을 아낄 때가 아니다.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녀 보면, 조선일보 식의 잘못된 말의 운용이 어떤 폐해를 국민에게 가져다 주었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 조선일보에 반대하면 무턱대고 < 전라도 깽깽이>, < 빨갱이>, <5.18때 깔아뭉갰어야 하는 놈들>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런 극언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은 당당하다. 심지어 < 매카시는 한국의 은인이다>리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다. 공산당을 때려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일보는 < 적색혐오증>을 꾸준히 국민에게 주입해 왔고, 그것은 지금 상당히 우려할만한 현상으로 고착되어 가고 있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극우가 현실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 국민전선>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도 드디어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 위기론>을 들먹이면서 이런 극단적인 대립을 계속 조장하고 있다. 월간조선 9월호를 읽어보면, 다시 이념대립의 광풍을 불러일으키려고 조선일보가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북한은 종교재판의 대상이다. 북한은 사탄이다. 따라서 죽여 없애는 것 외에는 아무 다른 방법이 없다. 조갑제는 이런 광란을 부추기기 위해서 일본의 극우신문 산케이에 버젓이 기고를 해서 한국사회가 지금 이념대립에 휩싸여 있는 듯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침묵하면서, 냉소적 양비론의 우산 아래에 숨거나, 조선일보를 두둔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극우적 행동의 조직화를 용인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상황은 미묘하고 힘들다. 과거처럼, 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저절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전선을 설정하기도 어렵고, 보편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언론정국 자체가 불투명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따라서 가능한 한 조용히 몸을 사리고 상황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핑계는 늘 그렇듯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렇게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다. 자칫하면, 어떤 변수가 나타나 나라 전체를 휘감아버릴지도 모른다. 가짜 위기가 진짜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조선일보는 그런 선동에 도가 튼 집단이다. 지식인들이 입을 열어 말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나라 전체가 증오의 해일에 휘말려들어가게 내버려둘 것인가, 그래서 내 몫만 챙기고 대충 엮어놓은 엉터리 집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힘들더라도, 나라의 말을 왜곡시키고 있는 집단과 절연하고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갈 것인가. 지식인들이여, 입을 열어 말하라. 길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이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식의 길은 늘 그렇게 먼저 말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오지 않았던가.
말들이 자유롭게 흘러넘치도록 언로를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나 물길을 잡아주어야 한다. 얼음장 밑에서 나무나 오랫동안 추위에 떨었던 말들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무한대의 자유에 너무나 흥분해서,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에 디오니소스적으로 탐닉하고 있다. 그 말의 자유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용되도록, 말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물길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어떤 매카시가 부활하여, 이 땅을 동토의 왕국으로 돌려보낼지 모른다. 역사는 실험을 용인하지 않는다. 역사는 일회의 절박성으로 우리 앞에 있다.
*문화연대 소식지 기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