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마무라 쇼헤이, 촬영·코마츠바라 시게루, 음악·시니치로 이케베
주연·야쿠쇼 코지, 시미즈 미사, 츠네타 후지오
97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이마무라 쇼헤이
별칭 今村昌平      출생일 1926
간장선생, 우나기(각본 겸), 일본곤충기, 인류학입문, 인간 증발
신들의 깊은 욕망, 복수는 나의 것, 나라야마 부시코, 도둑맞은 욕정
끝없는 욕망, 형, 돼지와 군함,붉은 살의,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전후사
마귀환병을 찾아서, 가라유키상, 좋지 않습니까, 뚜쟁이, 검은 비

세진이 녀석이 요즘 혼자 영화를 보고 있다. 내가 술 마시고 하숙집에 들어오면 꼭 이 녀석은 담배 하나 물고 비디오를 보고 있다. 배신감이 느껴진다. 혼자 삶의 질을 높인다며 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나기’를 세진이 없을 때 혼자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기 시작했다.(영화에 대한 글을 읽어는 봤었다. 안 본 영화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해서 문제이지…) 오프닝 크레딧에 감독과 주연 이름이 뜨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작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쇼헤이가 ‘나라야마 부시코’를 만든 감독이라는 사실을 곧 기억해 내었다.

영화는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죽이고 자수하여 제발로 교도소로 갔다가, 8년만에 가석방되어 바깥 세상에 나온 야마시타(쉘위댄스의 바로 그 남자!)라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전개된다. 누군가로부터 계속 아내의 불륜을 알리는 편지를 받던 야마시타. 평소에 즐기던 낚시를 일찍 끝내고 집에 와서 그 불륜현장을 목격하자 잔인하게 살인을 하게 된다. 우리 영화 ‘해피엔드’에 나오는 살인 장면보다 더욱 현장감(?) 있는 이 씬은 차분하던 흐름에 작은 자극이 된다. 작은 자극이라 함은, 몇 초의 긴장 후에는 다시 조용히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가는 야마시타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시타는 8년간의 복역 후 2년간의 가석방 판결을 받고 바깥 세상에 나온다. 그의 보호자를 따라 온 한적한 시골에서 그는 모아놨던 돈으로 이발소를 차리고 조금씩 세상에 적응한다.

그에게는 유일하면서 유별난 친구가 하나 있다. 바로 뱀장어이다. 그는 스님 이외의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는 뱀장어와 말한다. 인간과의 소통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후부터 사람을 믿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UFO를 찾는 소년과 옆집 목공수, 껄렁한 놈팽이, 낚시꾼 등은 울타리 바깥 세상을 향해서 내놓은 작은 쥐구멍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던 어느날  야마시타는 약을 먹고 풀밭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 케이코와 같이 이발소에서 일하게 된다.
케이코는 상냥하고 씩씩해서 이발소는 물론,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고, 야마시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녀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그녀를 걱정하며 급히 병원으로 가 응급 치료를 받게 해 준 야마시타에게, 케이코는 마음을 더욱 키우지만 야마시타는 과거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그녀를 멀리하기만 한다.

케이코에게도 자살을 하려 했을 정도로 괴로운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지니고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는 유부남 애인, 그리고 자신의 애인에게 욕정을 품는,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케이코에게 다가가는 야마시타의 마음은 케이코의 과거가 야마시타의 현재에 들어올 때에 비로소 야마시타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케이코의 옛 애인이 케이코가 가로챈 돈을 빼앗으러 야마시타의 이발소로 들이닥쳤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주먹다짐이 오가며 실랑이가 벌어지고, 케이코가 밴 아이에 대해 옛 애인이 당황해 할 때, 야마시타는 자신의 아이라며 거짓 선포를 하고는 그렇게 케이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케이코의 실수로 새게 머리를 얻어맞는 순간 야마시타는 비로소 과거의 악몽에서 자유로와지고, 현재의 자신과 화해하고 케이코를 받아들이는 경종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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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지고서야 화해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케이코는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는 야마시타가 돌아올 때까지 뱀장어의 운명과도 같은 아이와 함께 진실된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겠노라 한다.

뱀장어는 적도까지 가서 암컷이 산란을 하고 씨도 모르는 수컷에 의해 수정이 되어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뱀장어는 일본 열도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바다를 향해 갈 것이다. 이 뱀장어의 여행은 야마시타와 닮아 있다. 기나긴 여정을 거치고서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야마시타의 화해하지 못할 과거도, 소통하지 못할 인간도 그만큼의 ‘앓음’이 있고서야 비로소 화해와 소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처럼 이 영화에서도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을 병치시킨다.

사실 나는 나라야마…를 굉장히 지루하게 보았다. 그 영화는 고립된 산골에 사는 특이한 형태의 인간 집단을, 동물과 비유되는 인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나는 이런 영화 잘 못 본다. 나는 영화를 보면 감정이 먼저 몰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라야마 부시코’처럼 무감정으로 인간을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감독은 야마시타의 삶에 깊숙히 들어가서 그의 삶이 이루는 화해를 지켜본다.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말이다. ‘나라야마…’에서는 동물처럼 교미하는 듯한 남녀의 성교가 있었지만 ‘우나기’에는 교미 행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 인간만이 할 수 있는 – 남녀 사이의 사랑이 담겨 있고 한 삶의 번뇌가 있으며 사람 사이(人間)의 소통이 있다.

일본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절제라는 것이다. 일본 영화나 만화(특히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들)는 큰 기복이 없다. 감정이 과장되지도 않으며 사건도 돌발적이거나 크게 놀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이 영화에서 사건들은 튀지 않고 잔잔히 흘러간다. 기교도 특별히 없다. 철저히 자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밋밋한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다. 절제되어 잘 정돈되어 있는 정서적 카타르시스가 더욱 크다는 것을 느낄 정도이다. 이 감독도 참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품고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영화를 일본음식처럼 은근히 곱씹게 된다.

마지막 한마디. 케이코 너무 예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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