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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민의 냉혹한 묵시록, <우주전쟁>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 2005.07.20
<우주전쟁>이 전하는 어둠과 모호함의 정치학
<우주전쟁>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가장 어두운 영화다. 그의 초기 SF <미지와의 조우> <E.T.>에서의 우호적 외계인의 방문이 여기서 적대적 외계인의 침공으로 바뀌었다는 점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설정은 H. G. 웰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택했을 때, 그리고 오슨 웰스가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라디오극 대본을 스필버그가 입수했을 때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자 한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결국 외계인은 소멸되고 가족은 포옹한다. 이건 재난 장르와 미국식 가족드라마의 전형적인 결합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설명되고 광고되고 있다. 그러나 <우주전쟁>은 훨씬 더 풍부하고 복잡하며 모호하다.
<우주전쟁>의 주인공 페리어는 스필버그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비루하며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물이다. 또한 재난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완전히 부적합한 인물이다. 웰스의 같은 소설을 각색한 바이런 해스킨의 <우주전쟁>(1953)에서부터 최근의 <인디펜던스 데이> <아마겟돈> <딥 임펙트> <투모로우>까지 SF/재난영화의 영웅은 한결같이 전문가(기술자 혹은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제도와 관료들을 대신해 재난의 정체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혼남인 페리어는 뉴저지의 무식한 부두노동자이고 동료애도 없으며 게으르고 서투르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며 어딘가 야비해 보인다. 여피의 윤기와 귀티가 넘쳐흐르는 톰 크루즈에게 이런 배역을 맡김으로써, 스필버그는 처음부터 관객의 기대를 비켜간다. 이 한심한 주인공은 자신에게 하룻동안 맡겨진 아들과 딸을 도피시키는 것 외엔 어떤 의지도 능력도 없다.
전쟁이 아닌 도피의 로드무비
<우주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피난의 영화이며 도피의 로드무비다. 외계인의 정체와 씨름하는 전문가와 정치 지도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무력한 군인들만 피난민 대열을 스쳐간다. 영화의 대부분은 페리어 가족의 도피 여정이다. 우리가 만나는 건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이해되지도 않고 극복될 수도 없는 거대하고 잔혹한 힘, 절대 공포다.
<우주전쟁>의 뛰어난 이미지들은 도심 도로가 들끓다 폭발하고 거대한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초반 장면들이 아니라(이런 종류의 스펙터클은 <인디펜던스 데이>나 <아마겟돈>보다 특별히 나을 게 없다), 피난민 대열 앞을 미친 듯이 달려가는 불타는 기차, 허드슨 강을 가득 메우며 흘러가는 시체들, 피를 먹고 태어난 징그러운 식물들의 꿈틀거림,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죽은 이들의 찢긴 옷조각들, 시체들의 피로 염색된 들판과 저녁놀 같은 초현실적인 공포의 이미지들이다.
가장 흥미로운 시퀀스도 페리어와 딸이 숨어든 정신이상자 오길비(팀 로빈스)의 지하실 장면이다. 아나콘다 모양의 기계 촉수와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이 벌이는 수색과 내부의 정신이상자로부터의 위협 사이에서 페리어 가족은 기나긴 침묵의 공포에 휩싸인다. 여기서 페리어 가족이 직면한 것은 미지의 타자가 생산한 외적 재난을 넘어 내적 붕괴에 이른다. 오길비는 싸우겠다는 의지만 남고 판단력을 잃어버린 인간, 곧 전쟁광이다. 이런 광기는 생존을 위해 타인을 무한 살육하는 피난민들의 행태에서 예고된 것이며, 페리어의 아들에게도 전염된다.
<우주전쟁>이 전하는 건 재난의 스펙터클과 제어의 쾌감이 아니라, 재난을 확대재생산하는 인간들의 내면적 붕괴다. 그 재난의 서식지는 알 수 없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외계인들의 소멸은 지구의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는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 과정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이 갑작스레 제시되는 이 내레이션은 허탈감마저 안긴다.
그것은 웰스의 원작의 결말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재난이 페리어의 한바탕의 악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보스턴의 전처 집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고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외계인과 싸우겠다고 달려간 아들도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페리어의 동선 밖의 외계인은 전혀 영화에 나오지 않았다. 이 해피엔딩은 평온하지 않고 괴이하며, 페리어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그는 무엇을 겪은 걸까. <우주전쟁>을 하나의 장르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재난도 SF도 아닌 호러다. 이 영화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포스트 9·11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
<우주전쟁>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재난의 스펙터클에 대한 영화감독의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계인의 전투기계가 묻힌 도심의 도로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경찰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사람들은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구경거리의 매혹은 저항하기 힘든 것이다(재난영화의 계율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자기 장례식마저 보고 싶어한다’). 외계인이 처음 피격한 것은 자신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이며, 가까이서 구경한 사람일수록 빨리 징벌된다.
지하실 장면에서 오길비를 살해하기로 결심하며 페리어는 딸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다. 문을 닫고 살해할 것이므로 불필요한 행위다. 이건 봐서 안 되는 장면임을 서사 밖에서 일러주는 행위다. 당연히 관객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장면들은 살육의 스펙터클의 물신화가 얼마나 지독한 비윤리적 중독인지를 드러낸(동시에 5천여명의 육신이 찢긴 쌍둥이 빌딩 충돌 장면은 결코 물리지 않는 ‘장관’이었다) 포스트 9·11의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이다. 스필버그 자신은 면책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우주전쟁>에는 재난의 스펙터클로부터 거리두기의 안간힘이 있다.
<우주전쟁>의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또 다른 요소는 가족주의와 계급/지역 정치학의 긴장이다. 페리어는 뉴저지의 부두노동자이며 그가 사는 곳은 다리 밑의 하층민 거주지다. 전처 부부와 아이들이 사는 곳은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보스턴이다.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쓰고 있는 페리어는 아들이 보스턴 레드삭스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 그리고 그는 딸이 주문한 야채 음식을 먹지 못한다.
더 중요하게는 외계인은 뉴저지의 노동자들을 살육하며 등장했지만, 그렇게 멀지도 않은 보스턴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페리어는 거의 강박처럼 아이들을 보스턴에 데려가야 한다고 믿는다. 막상 그곳에 도착했을 때, 페리어는 웃지 못한다. 그곳은 자신이 통과한 지옥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쉬어갈 수 있겠지만 여기에 속할 수는 없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불길하게 엔딩신을 감싸고, 페리어의 불안한 얼굴은 프레임을 채운다. 이 장면을 해피엔딩이며 가족주의적 화해로 보기는 힘들다. 눈물 겨운 가족애도 메울 수 없는 계급/지역간의 심연이 거기에 있다.
<우주전쟁>의 재난은 페리어 개인의 악몽이 아니라 하층민의 악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악몽은 결국 해소되지 않는다. <우주전쟁>은 디스토피아의 낭만적 허무주의보다 훨씬 냉혹하며 다의적인 묵시록적 비전의 영화다. 스필버그는 전진한다.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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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생부를 무시하는가? <우주전쟁>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 2005.07.27
‘부권상실’의 거세 공포를 보여주는 <우주전쟁>
<우주전쟁>은 꽤 현실적인 재난영화다. 우선 <인디펜던스 데이>나 <딥 임팩트>에서 보이는 ‘재난상황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유지되는 공권력과 사회질서’가 없다.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라는 말처럼, 재난이 터지면 2차적인 약탈과 무질서로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따라서 차를 뺏기는 위치에 섰던 주인공이 곧 배를 타기 위해 억지로 매달리던 장면이 대변하는 영화의 현실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미덕은 이뿐이다. 허문영이 언급한(511호) “포스트 9·11의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이자, “재난의 스펙터클로부터 거리두기의 안간힘”으로 보기엔 공포의 스펙터클이 과하고, “가족주의와 계급/지역 정치학의 긴장”으로 갈음하기엔 ‘불안정한 아비의 위상’이 걸린다. 오히려 영화는 ‘포스트 9·11의 공포의 정치학’을 충실히 따른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며, 그보다 ‘생물학적 아비의 위상 제고론(提高論)’을 펼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포스트 9·11 피해의식을 강화하라
영화의 정치적 의미는 미국인들에게조차 전쟁의 명분이 희미해져가는 이때, 9·11 테러를 곱씹으며 ‘피해자-되기’를 성취하는 것이다. 즉 피해자로서의 알리바이를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외상을 재활용(recycling)하는 것이다. 재난을 접한 영화 속 미국 아이는 먼저 “폭탄 테러냐?” “유럽에서 왔냐?”고 묻는다. 재난은 곧 테러이고, 테러는 곧 이국(異國)으로 자동 연상된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 반공교육의 상당 부분이 전쟁의 잔혹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곧바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로 각인되었기에, 연상도 자동이었다. “상기하자! 6·25” 구호처럼, <우주전쟁>이 재현하는 “외부자에 의한 미동부 지역 파괴”는 9·11 테러의 피해 경험을 감각적으로 일깨운다. 부당한 전쟁을 정당한 복수극으로 계속 믿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선(先) 피해자 되기’, 즉 피해의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생부의 위상을 제고하라, 부계혈통은 유효하다
그는 ‘개털’이다. 이혼하고 자식들은 전처와 산다. 돈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고, 번번이 계부와 비교된다. 전처가 잠깐 아이들을 맡긴 사이 큰일이 터졌다. 그는 일단 전처에게 아이들을 ‘배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아이들도 이를 안다). 그는 궁극적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책임질지 더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전처의 집을 거쳐 처가로 향하는 행로에 “왜 꼭 엄마에게 데려가야 하는가? 거긴들 안전할까? 전처는 무사한가?” 따위의 고민은 없다. 아이들은 전처에게 속하고, 전처는 새 남편에게 속하니, 그러한 걱정은 주제넘은 것이다. 그의 행로 곳곳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외계인을 말함이 아니다. 가장 아찔한 장면은 딸을 다른 부부가 보호하겠다며 데려가려는 장면이다. 또 지하 홀아비가 “네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보호해줄게”라 말하자, “내 딸!”이라 소리치고, 결국 그를 죽인다. 그는 결국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낸 딸을 전처에게 잘 ‘반납’한다. 그 이상의 가족화해는 없으며, 그도 더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가 다루는 공포의 핵심은 외계인이 아니라, ‘무능한 생부가 유능한 계부, 양부들에게 자식을 빼앗기고, 아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풀 몬티> <아이 엠 샘> <갓센드> <주먹이 운다>에 면면히 흐르는 주제는 ‘아비의 전전긍긍’이었다. 생물학적 아비면서도, 사회적 아비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사회적 ‘거세공포’가 깊이 깔려 있다. <우주전쟁>은 그러한 ‘부권상실’의 (거세) 공포를 “흡입하는 기계”에 빨려들어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비를 통해 더 끔찍하게 재현한다.
애초 땅에 묻혀 있다 번개와 함께 솟는 괴물 역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생물학적으로 자명한 모권에 비해 생물학적 근거가 불확실한 부권은 ‘모체의 점거’를 보증하는 사회적 조처(가부장제)를 필요로 하며, 가부장제의 약화는 부권을 근본부터 위협한다. 영화는 ‘부권상실’이라는 대재앙이 이미 ‘물적 근거가 취약한 부권’으로 잠복해 있다가, 현재의 이혼율 상승과 친모 양육권 인정 등의 사태로 발현된 것으로 본다(가부장제가 강한 일본은 괴물을 물리쳤다는 말도 있다). 또한 선조들의 죽음을 거쳐 DNA를 통해 유전되는 면역력이 지구인을 지켰다는 결론도 ‘혈통’을 강조하는 영화의 주제와 조응한다. 흡사 “누가 생부를 무시하는가?”라 외치는 영화는, ‘바바리맨’과 닮았다. SF라는 외투를 덮고 있지만, 짜잔∼ 보여주는 건 ‘남근에서 남근으로 이어져오는 부계혈통의 순수성’이다. 감독이 ‘할례’로 민족정체성을 삼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