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는 참 예쁜 영화다. 너무 예뻐서 욕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다. 그런 영화가 있다. 정치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기는 영화는 사실 전혀 바람직하지 않거나(그런데도 바람직한 것처럼 허세 부리거나) 바람직함을 넘어서 그것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영화다.(사실 후자의 경우는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데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당한 비판보다 정당한 칭찬이 더 어려운 법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아주 흐뭇하게 봤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는 영화였다고 생각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뮤직비디오의 가장 솔직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면서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지를 치더라.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내러티브는 분석적이다. 숏과 숏 사이의 틈을 메워야 하기 떄문이다. 이 틈을 메우는 것은 우리를 추동하는 서사의 욕망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카메라가 주관적 시선의 자리에 있을 때조차 우리는 이 시선을 서사의 욕망 안에서 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카메라가 어두운 구석에서 저쪽에 있는 한 사람을 지켜보는 숏이 있다고 치자. 이 다음에 또는 이 전에 그 구석에 있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를 말해 주는 숏이 통상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거나 무언가 뒤바껴 있다면, 그 시선은 지젝식으로 말하면 ‘히치콕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은 완전히 관객 자신의 시선이 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선은 서사의 인증 하에서 승인되는 타자의 시선이다.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선은 어떤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관객과 카메라는 느슨하게 붙어있다. 그런데 음악은 카메라의 객관성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랑 노래가 깔린다면 이 노래를 부르는 연인을 객관적으로 잡은 숏이 있다 해도 이 숏은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가득차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음악은 이미지를 주도한다. 음악이 이미지를 자신의 서사 안으로 잡아당긴다. 예를 들어 요즘 유행하는 UCC 뮤직비디오의 조잡한 그림들은 노래 가사를 문자적으로 재현한다.(‘Tell Me’라는 가사를 ‘태음인’ 또는 ‘태릉인’이라는 글자로 표시하는 것은 UCC 뮤직비디오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와는 상관없는 스토리를 가진 영상의 뮤직비디오라 해도 음악의 정서와 서사를 (가사와는 상관 없더라도) 시각적으로 설명해 준다.(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은 매우 싫어한다. 내게는 조성모의 To Heaven 뮤직비디오가 그 첫 기억인데, 이런 뮤직비디오에서 음악의 서사와 이미지의 서사는 서로 매우 신경질적으로 달라붙는 것 같다. 마치 더이상 새로운 서사를 제시하지 못하는 음악이 이미지를 먹어치워 스스로 폭발지경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이다. 음악이 갑자기 멈추고 영상만이 흐르는 따분한 순간은 이미지가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음악에 복종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음악과 이미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도 이미지는 음악의 실현에 불과하다는 것. 말씀이 먼저 있고 나서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신화와 같다. 그렇다면 소리는 시각의 객관성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힘과 같은 것이 아닐까?
가지를 너무 오래 쳤는데, 영화 원스는 음악이 서사를 구축한다. 원스 OST에 수록된 곡은 총 약 43분여다. 한 곡이 여러 번 반복돼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전체 러닝 타임 86분 중에 음악은 반 이상을 흘렀다. 남자의 옛사랑에 대한 추억과 상처, 여자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원망스러움은 노래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호감을 느끼는 것도 노래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려는 꿈 역시 마찬가지다.(물론 음악은 아주 멋지고 적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와 대사는 음악 사이의 인서트이거나 음악의 실현이다.(악기 가게에서 남과 여가 노래하고 연주하면 가게 주인은 웃음을 짓는다, 녹음실에서 프로듀서는 처음에는 무시하며 건들거리다가 음악을 듣고는 그들을 존중하고 녹음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등등.) 그러나 그들이 현실원칙으로 돌아오는 것은 음악을 빌릴 수가 없다.(함께 하자는 남자의 제안에 여자가 거절할 때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환상과 현실의 교환관계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뮤지컬 영화와 오히려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은 ‘어둠 속의 댄서’와 비교해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의 댄서’는 정반대의 경우, 즉 비참한 현실의 고통과 충격을 어떻게든 환상으로 치환해야만 버틸 수 있을 때 음악이 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