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론 레포트를 위해 쓴 글이지만…^^;(멀쓱)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에 가상의 정신적 활동인 유리알 유희와 유리알 유희의 명수였던 요제프 크네히트의 생애를 한 편의 전기와 같은 형식으로 고찰하고 있다. 굳이 시간적으로 먼 미래, 그리고 고도의 정신 활동을 수행하는 자치주로서의 카스탈리엔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유리알 유희라는 활동을 상정하고 그것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을 이 소설에 쏟아부은 것은 아마도 헤르만 헤세가 그의 생존시에 자행된 히틀러 정권의 폭압 속에서 어떤 비인간성의 만연함을 보았고,1) 그러한 인간의 추악함으로부터 인간의 고결함을 분리하여 보여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인간 본성의 구분과 분리에 대한 필요성은 이 소설에서 여러 가지 이원적 대립의 양상을 이끌어 내는데, 종국에는 그 다양한 이원성이 하나의 종합으로 귀결되고 있다. 카스탈리엔과 비카스탈리엔으로서의 외부 세계, 정신과 물질, 역사와 비역사, 전체와 개인, 늙음과 젊음, 안정과 변화, 추상과 구체, 이상과 현실, 영원과 순간 등이 이 소설의 중심축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삶의 과정에 번갈아 투영되면서 그러한 양자들이 진정으로 타협 불가능한 인간 본성인가에 대해 궁구해 보도록 권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작가가 소설 전체를 한 인물의 전기로써 구성할 만큼 애착을 보인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의 삶 전체를 고찰해 봐야 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질문이 카스탈리엔과 외부 세계의 화해 또는 종합이라는 점에 따라, 요제프 크네히트와 카스탈리엔은 이 소설의 중심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카스탈리엔은 정신의 영역이 추악한 탐욕의 영역으로부터 침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공화국이다. 이 특수한 자치주는 언제나 평온하며 오로지 정신적 능력의 함양을 추구할 뿐이다. 이러한 카스탈리엔적 기질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유리알 유희이다. 유리알 유희는 추상적 사유의 힘을 극한까지 밀고 가서 다다르는 표현을 음악과 상형문자의 구조를 빌어 집행하는 가장 순수한 정신활동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추상 활동은, 그러나 이제는 애초의 본질을 잃어 버렸다.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 사람들이 그 고도의 정신 활동의 만신전이 무엇을 토대로 성립되었는지를 망각하고 있음을 예감한다. 언제부터인가 카스탈리엔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고 외부 세계에서는 그들의 유산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이 너무 멀리 내질러 버린 수준의 것이라고 치부하게 된 것이다. 카스탈리엔 사람들도 탐욕과 쟁취와 경쟁만이 지배하는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단념한 지 오래다. 카스탈리엔은 계속 자기만의 영역에 빠져든다. 정신을 위한 정신,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는 것이다. 소위 학문 애호가들의 자치주로 변질된 카스탈리엔은 자신의 존립 토대가 되는 외부 세계의 지원을, 또는 현실을 외면해 버렸다.
  크네히트는 폴리니오 데시뇨리와의 논쟁을 통해 적극적으로 카스탈리엔을 옹호하지만 이미 그 때부터 카스탈리엔의 치부를 감지하였다. 또한 베네딕트 수도원의 야코부스 신부를 통해 그것은 더욱 구체화된다. 카스탈리엔도 역사라는 총체 안에서의 일부라는 신념은 더욱 공고해진다. 유리알 유희의 명수 직책에 취임하고도 그의 신념은 카스탈리엔에 대한 회의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현실 또는 역사에 기여하고 공생적 발전을 위한 일원이 되지 못한다면 카스탈리엔의 지속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자각 속에서 그는 결국 외부 세계로 나가 단절된 두 세계의 융합을 꾀한다.



  크네히트는 두 세계의 융합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여긴다. 크네히트의 전기 첫 장에서부터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종의 운명을 감지한다. 크네히트는 외부 세계의 학교에서 카스탈리엔의 영재 학교로 ‘불려’ 왔고 다시 카스탈리엔에서 외부 세계로 재차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는 것이다. 외부에서 카스탈리엔, 그리고 다시 외부라는 구도는 카스탈리엔은 현실 세계를 위한 건강한 자양분임을 암시한다. 또한 그 자양분을 안고 뛰어든 외부 세계는 한차원 고양된 세계라는 점에서 크네히트의 종착지인 외부 세계는 변증법적인 종합을 이루는 세계이다. 크네히트의 삶 전체는 그러한 양립적인 명제 사이의 대립과 그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을 향해 치닫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속적인 각성의 과정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면서 변모해 간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지속적인 진보와 생성을 은유한다. 카스탈리엔의 안정·질서와 외부 세계의 불안·변화는 서로 상생적인 관계이다. 생성의 관점에 있어서 파멸이나 죽음 또는 종말은 새로운 시작과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탄생은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2) 마찬가지로 카스탈리엔과 외부 세계도 완벽하게 분리된 양자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하나인 것이며 자유와 구속도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면 그 경계와 차이를 알 수 없는 하나임이 암시된다.



  이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크네히트의 삶은 이 작품 전체를 통해 헤세가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되는 대립적 양자의 종합이라는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 따라서 크네히트의 전기는 그 자체가 헤세의 사상이며 그의 사상의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네히트의 죽음은 일면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었지만 종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출해 나간다는 헤세의 주제의식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말이며, 나 역시 티토 데시뇨리를 가르치지 못했음을 안타까와 했지만 이미 티토에게 가르침이 전수된 것이다 – 티토의 존경과 우정과 영혼의 공명을 받기 위해서 싸우는 모습을 통해 조화와 종합이라는 그의 목표 전체로서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관점으로 볼 때 크네히트의 곁에서 각성을 위한 동반자가 되었던 음악의 대가, 플리니오 데시뇨리, 야코부스 신부, 노형, 프리츠 테굴라리우스 등의 인물들은 정과 반을 통한 종합의 과정에 수반되는 대립적 양자의 반영 또는 종합을 위해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조화의 노력이나 끊임없는 생성 속에서 카스탈리엔마저 무상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크네히트의 정신은 노형으로부터 중국의 역경이나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에서도 기인한다. 변증법적 종합이라는 유럽의 사상과 주역 및 도가라는 중국의 사상을 종합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면 이 작품에서 시도하는 헤세의 종합이 문화나 인식론적 근거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얼마나 구체적인 실체요, 인간형으로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는 독자의 판단에 달린 듯하다. 여전히 이 작품 속에서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의 정신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로 나가려고 한다. 이방인으로서 카스탈리엔을 접하고 그 정신을 외부 세계에서 실천하려 했던 데시뇨리는 부조화와 고통의 늪에 빠졌다. 속세는 그 고귀한 정신을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참담할지도 모른다. 크네히트가 종합의 사명을 간직하고 뛰어든 속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부분은 여전히 관념적 차원이었다. 만약 그가 계속 살아남아 그의 사명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계속했다 하여도 속세는 그에게 냉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음에도 크네히트의 노력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종합과 조화의 실마리는 그렇게 우리의 관념의 수준에서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속세는 냉담했을지라도 종래에는 변화의 잠재성, 화해와 진보의
가능성을 크네히트로 인해 담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 틀을 고안하고 수정할 수 있는 실마리는 개별 인간들의 의지에 달린 것과 같이 구체는 추상의 기반을 통해, 현실은 관념의 견인을 통해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작품은 그것 이상으로, 즉 구체와 추상은 같은 것이고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생각할 수는 없으니 추상의 발전은 구체의 발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로 대립되는 양자들은 종합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양자는 같은 것이고 하나인 인간 본성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토대가 되고 어느 것이 그 위에서 성립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언쟁하는 것은 어쩌면 소모적인 싸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
      헤세는 나치 정권 하의 현실을 먼 미래의 입장에서 ‘문예란’ 시대로 묘사한다.
      그것은 단절되고 도구로써만 사용되는 정신 활동만이 존재하던 시기이며
      추악한 탐욕 속에 매몰되어 버린 인간들에 의해 정신이 심히 훼손되었던
      시기로서, 그 처참함의 말단에서 카스탈리엔이라는 정신적 유토피아의 맹아가
      싹튼다.  



      2)
      음악의 대가의 죽음도 더더욱 명랑하고 활기에 찬 표정으로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의미의 생명을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윤회사상의 모습을 띄고
      나타난다.  



      3)
      ‘양자를 집으로 삼아 양자 사이를 오가며 양자에 다 관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홍신문화사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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