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아제(1857 ∼ 1927)
1920년 외젠 아제는 자신의 네가티브 필름을 구입해 달라고 제안하기 위해 교육예술부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는 20년이 넘도록 파리 구시가지의 모든 거리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이제 이 방대한 사진 모음집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로써 저는 옛 파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낸 필생의 역작에 대해 짤막하게 압축한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그는 1897년 이래로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의 사진을 수천 장 찍었지만, 이 사진들은 누구의 주문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이 원해서 촬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업발전의 그늘 속에서 영락해 가는 서민 주거지역들을 아제가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사진 속에 담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당시 화가로도, 떠돌이 극단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한 탓에 새로운 생계수단을 찾고 있었다. 사진술을 배운 것도 이 시기였는데, 사진기술은 익히는 것이 간단했고 단시일 내에 돈을 벌게 해 주었다. 1892년 《미술평론》에는 아제라는 파리의 사진가가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사진자료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자신을 ‘예술사진가’로 불렀는데, 이는 ‘예술작품을 위한 사진가’라는 의미였다. 또한 1920년대까지 캉파뉴 프르미에르 거리 31번지 건물 6층에 있던 그의 마지막 아틀리에의 문에는 “미술가들을 위한 자료 제공”이라는 문구가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한 남자가 이곳에서 사진의 영상미학에 혁명을 몰고 오고 있다는 것, 현대 사진술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몇 년 뒤 삶을 마감했을 때조차 그 의미에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제의 촬영 장비
아제가 수십 년간 사용했던 소박한 장비는 그가 그것을 구입했을 당시에도 기술상 이미 낡은 것이었다.그는 촬영을 위해 한 대의 목재 카메라와 표준판형(18×24)의 유리판들을 사용했다. 무거운 목재 카메라 상자와 브롬화은 젤라틴판의 낮은 감광성으로 인해 삼각대의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대물렌즈로는 매우 짧은 초점거리를 지닌 단순한 무수차 렌즈를 사용하였다. 그는 파리를 누비면서 약 20킬로그램 무게의 장비를 항시 들고 다녀야 했다. 그는 감광유리판을 아리스토 복사지 위에 복사하였으며 인화를 위해 염화금으로 명암을 주었다.
아제에게 주목했던 사람들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사진 몇 점을 《초현실주의 혁명》에 실어놓고 한동안 자신들을 아제의 발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제의 사진이 지닌 가치를 자신들의 시각으로만 평가했고, 그가 자신의 본래 뜻과는 달리 일상의 진부한 사물들 속에서 어쩌다가 마법적 시문학의 숨겨진 매력을 찾아낸 그저 그런 ‘사진가’의 수준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점은 알지 못했다. 그는 그들과는 다른 부류였다.
아제가 추구한 방향은 다른 쪽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구닥다리 고물 카메라로 부분적으로나마 보존되어 있는 중세 파리의 도시구조라는 형식 속에 과거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집스럽게 그 일에 매달렸다. 고령에도 날씨가 좋을 때면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집을 나섰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역사적인 옛 건물들 사이에 마치 협곡처럼 뻗어 있는 도심의 거리들, 광장, 분수대, 건물의 내부, 상점 진열창, 초라한 거리의 행상인, 고물장사, 궁벽한 변두리의 창녀들……이 모든 것들이 그가 찾아낸 사진의 모티프들이었다. 하지만 옛날 공원들과 교외의 전원 경관 또한 그의 관심을 붙잡았다. 그는 이러한 테마에 ‘초라한 직업들’, ‘파리의 옛 모습’ 또는 ‘그림 같은 파리’ 등의 제목을 붙여 하나의 테마에 백여 장에 달하는 연작물을 만들어냈다.
이 사진들에 보이는 도시는 아직 새로운 세입자를 들이지 못한 집처럼 텅 비어 있다. 초현실주의 사진은 이러한 성과들에서 주변세계와 인간 사이의 유익한 소외를 준비한다. 정치적으로 훈련을 받은 자들의 시선에 초현실주의 사진은 세부를 밝게 드러내기 위해 친밀한 모든 것들이 뒤로 물러나게 되는 영역을 열어 보인다.
– 발터 벤야민, 1931년
아제는 몰락의 위험에 처한 것들을 찾아내서 목록을 만드는 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새로운 것, 현대적인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의 사진들 어디에서도 산업시대로의 도약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에펠탑이나 ‘소비문화의 대성당’인 신축 백화점, 혹은 새로운 이동 개념의 상징인 파리 지하철 역사 입구를 찍은 사진 역시 없다. 하지만 그가 지닌 기술적 수단들로는 점점 더 역동적인 대도시의 움직임을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기술적 한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만 레이가 소형 휴대용 카메라를 빌려주겠다고 했을 때에도 단호히 거절했다. 현대적 기술은 의식적 성찰에 의한 그의 작업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는 현대기술을 철저히 외면했다.
때문에 그는 그림 같은 분위기나 극적인 대비와 같은 기법과는 거리가 먼, 놀랄 만큼 현대적인 작업방식을 발전시킨다. 20세기 초 20년간 절정의 감각으로 유감없이 표현된 아제 사진 미학의 현대성은 그가 자신의 모티프들을 대할 때의 단호함과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절대적 정확성과 투명성에 있다.
아제의 사진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처음엔 역사적인 성격을 지녔다. 건설부 장관인 조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에 의해 1853~1870년에 시행된 도시계획의 결과로 파리의 모습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에 따라 1898년 ‘옛 파리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 위원회의 주된 임무는 파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건축물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아제가 이 위원회에 팔려고 내 놓은 사진들은 바로 그 목적에 기여했다.
아제는 1930년대 초 다큐 스타일의 사진을 높게 평가하는 추세와 미국의 여류사진가인 베러니스 애벗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비로소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상반되었다. 즉물사진의 간판스타인 에드워드 웨스턴은 “내가 기대한 것은 밝은 불빛이었으나 발견한 것은 몇 개의 가물거리는 불꽃뿐이었다”라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반대로 발터 벤야민은 아제의 미학적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차렸고 1936년 자신의 논문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를 전환시대의 위대한 사진가라고 칭했다. 아제의 작품이 예술작품의 예배적 가치가 전시적 가치로 전환됨을 잘 드러냈기 때문이다.
『클라시커 50 사진가』, p86~90, 빌프리트 바츠 지음, 최은아 옮김, 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