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hhan.tistory.com/entry/어떤-포스트-구조주의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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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복잡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젝이 항상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생각을 진전시키지도 못하고 몇 년을 떠나 보내 있어서인지도.
아니, 생각하는 데 게을렀던 시간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레비나스라는 양반은 진중권의 디빠 비판은, 똘레랑스와 비평의 합리성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는 진짜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말인 거 맞겠지?
그리고 그 문제 중 하나는 디빠를 의식화된 다중으로 제대로 인정해야 하고, 그러한 다중이 되기 위해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대중이 다중이 되기 위해, 다시말해 주체가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밝혀야 한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고맙게도 링크로 찾은 캐즘님의 블로그 글은, 관용-똘레랑스라는 가치가 타자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동일자의 질서 유지 기능을 한다는 내용은 정말 생각해 보게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타자가 주체의 (환상으로 유지되는) 일관성을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그럼으로써 타자를 규율하고 지배적 질서를 유지한다.
그 규율의 한계를 넘어서는 타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똘레랑스는 보수적이라는 거다.
타자의 주체에 대한 파괴적 본성은 똘레랑스가 넘어설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어두운 타자’, 즉 주체를 붕괴시키는 진정한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7-80년대 학출 노동자처럼 타자 속으로 뛰어 들어서 자신의 주체를 ‘죽이고’ 난 후 만들어지는 주체의 가치를 얘기한다. 이게 이제는 기억도 흐릿하지만 아직끼지도 풀리지 않는 암호처럼 나를 괴롭히는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단절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인가?)
팔레스타인 저항단체의 비행기 납치 사건에 대한 푸코의 발언이나 프랑스에서 벌어진 폭동 사례를 똘레랑스가 실패하는 예로 들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주변부 국가들의) 테러에 대한 (중심부 국가들의) 세계적인 반대 연합도 세계 공존이라는 똘레랑스를 얘기하면서-동시에 타자들의 치명적인 반항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중심부 국가의 지배를 유지하는 전략의 한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도 똘레랑스를 어떤 도덕적 선으로 생각했지만 내가 소수 의견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을 때 상대방의 똘레랑스는 내가 의도한 문제의 근원을 끄집어 내지 못하도록 봉합해 버리는 것 같은 찝찝함을 남기고는 했었다.
그런데, 책은 읽어야 하지 않겠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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