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창]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의 ‘정통’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프간 침공이 한참 진행 중이다. 한때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프간의 약 95%를 통일시키고 나름대로의 질서를 잡는 데 성공했던 탈레반은, 이제 ‘주인’ 미국에 대한 ‘배신자’의 신세가 되어 철저하게 ‘팽’을 당하고 있다.
그 다음에 ‘황제’ 부시에 의해서 ‘관직 삭탈’을 당할 제3세계의 ‘제후'(諸侯)는 누구일까?
1980년대에 미국과 프랑스의 후원으로 이란과 싸워 이슬람 혁명의 확산 방지에 ‘일등 공로’를 세웠다가 나중에 ‘배신죄’로 몰려 1990년대 내내 미국 ‘천자'(天子)의 ‘응징’을 계속 받아 왔던 이라크일까? 미국보다 프랑스와 러시아에 더 충실한 관계로 ‘괘씸죄’에 걸린 시리아일까?
어쨌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이번의 ‘절호의 기회’를 십분 이용해서 그 세계 제국에서의 ‘군기를 바로잡는 데’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천하 평정’의 대가로 제3세계 주민의 다수가 비명에 죽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뻔한 것은, 주변부 ‘조공국’ 백성의 생명이 이 ‘신세계’의 ‘황도 사대부'(皇都 士大夫)-즉, 미국과 유럽의 지배층-들에게 하등의 관심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러·친미 세력의 복합체인 북부동맹의 군벌들이 탈레반을 수도에서 밀어낸 지금, 초원의 불처럼 번져 가는 빨치산 전쟁과 북부동맹 깡패들의 약탈 때문에 탈레반 치하에 비해서 구호 물자의 공급이 상당히 줄었다는 사실을, CNN뉴스에서 과연 들을 수 있는가?
지금 이 순간에 심해져만 가는 기아 사태와 강도·약탈로 탈레반 시절보다 훨씬 많은 아프간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제1세계 귀족들에게 관심사도, 걱정거리도 아니다.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측면에서는, 현재의 제국주의는 19세기의 ‘고전적’ 제국주의나 한국·월남 전쟁 시기의 신식민주의적 제국주의와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사항은, 부시 시대의 제국주의의 전략과 실행 패턴이 또 다른 측면에서 종래의 관례와 상당히 상이하다는 사실이다. 상이점을 낳은 기본적 원인은, 깊어져만 가는 미국 자체의 경제·사회적 위기다.
인터넷 기업의 거품이 빠진 뒤에 기만적인 ‘지속적 성장’의 신화가 깨진 미국, 실업률과 함께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커져 가는 미국, 이미 산업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죄수 비율을 ‘자랑’하는 미국은, 문제 지역에 대한 영토지배를 실시하거나 한국·월남 전쟁과 같은 장기적 지상 침략을 감행할 만한 대내적 명분도, 재정적 자원도 없다. 점차 쇠퇴해 가는 제국인 만큼, 그 ‘천하 통치술’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제국주의적 열강(列强)사이의 경쟁을 최소화시키고 서구뿐만 아니라 러시아까지도 포함하는 ‘백인 열강들의 대동단결’을 꾀한다. CIA 전문적 살인자들이 러시아 첩보 기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프간 동굴의 지도를 활용하면서 빈 라덴과 그 측근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신세계’의 상징이다.
둘째, 생명이 귀중히 여겨지는 자국의 병사보다, 현지 괴뢰들을 예전에 비해서 훨씬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북부동맹과 같은 깡패적 괴뢰들의 편리한 점은, 그들을 마음대로 ‘대충’ 다뤄도 된다는 것이다.
11월 27∼29일, ‘폭동’을 일으킨 탈레반 외국계 포로들을 폭격으로 대량 학살하는 과정에서, 미국 폭격기가 북부동맹의 세력까지도 오폭해 50여명을 죽였다고 해서 미국이 보상금을 주어야 하겠는가? 미국의 병사와 달리, 현지 괴뢰들이 말 그대로 편리한 일회용 제품이다.
셋째, 미국이 지상군의 대량 투입과 장기적 지상전을 기피하는 만큼, 그리고 러시아 등의 주요 핵 보유 국가와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 낸 만큼, 대량 살상 무기의 이용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번 아프간 침공 개시 때 핵무기 사용 포기에 대한 약속을 의례적으로 요구한 국제적십자사가 미국으로부터 이례적인 거절을 당했다는 것은, 미국 지배층 전략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어차피 빨리 끝날 침공이면 그럴 일이 없겠지만, 오래 걸릴 침공의 경우에는 미국에 의한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마저도 배제할 수 없다.
한 진영으로 합쳐진 제국주의적 열강에 의한 제3세계 백성의 대량 살상의 위험이 커지는 현재야말로, 전세계적인 반제(反帝), 반전(反戰) 연대 투쟁이 가장 시급할 때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