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수업 과제를 위해 읽었던 소설 ‘죄와 벌’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물론 독서 토론을 위해서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마지막 페이지까지도 폐쇄된 듯한 답답함과 끈적끈적한 느낌을 유지하면서 한 개인의 내면을 파고든 소설이다. 폐쇄성이나 끈적끈적한 느낌, 그리고 개인 심리의 묘사는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 심상의 강도를 더해주는 것은 무더운 여름이라는 시간적 설정이다. 이는 대체로 일관된 목적을 띄고 나타나는 설정이며 표현 방식이다. 나에게 이것은 하나의 공간이나 영역에 갇힌 상태로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 – 대사로 드러나는 외면적 성격이 아니라 -를 치밀하게 쫓아가는 이 소설의 주된 주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 이론으로 대표되는, 자기 안으로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그럼으로써만 완벽할 수 있는 인간 사유의 오만함에 대한 회의 또는 비판으로서 나에게는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심증을 여기서는 이 소설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설정을 간략히 짚어봄으로써 찾아보기로 하겠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법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에 범죄에 대한 작은 논문을 월간지에 기고한다. 그 논문의 주된 내용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두 유형으로 나뉠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의 욕망 충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凡人)의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 집합체로서의 인간 전제의 행복 증진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되는 때에 일반적인 사회 규범의 한계 지점을 ‘용기 있게’ 극복함으로써 범죄가 성립되는 위대한 인간의 유형이며 후자의 경우에 범죄는 인간의 발전과 공리를 위해 역사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영웅의 행동으로 칭송받아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수많은 회의를 안겨주면서도 일말의 확신을 계속 던져준다. 그리고 무더운 날에 피폐해진 육체를 간신히 가누던 라스콜리니코프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서 구축된다. 급기야는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으로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위대한 인물이 아닐까에 대해 확인할 필요를 느꼈고, 타인의 불행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해 가는 한 노파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게까지 된다. 이 계획은 치밀하게 이루어져 실행에 옮기는 순간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 순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그 영웅적 인간이 아니지 않을까에 대해 스스로 회의하게 된다. 자신은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데에서 흠짓 당황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이론 체계 자체에 대한 회의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자기 질책만이 반복될 뿐이다. 자신이 세워 놓은 머릿속의 굳건한 성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결단에 의해 인간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바로 그 지점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그러나 스비드로가일로프라는 인물에서 나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대비되는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 또는 결단하고 운영해 나가는 데 대한 확고한 의식과 타인의 운명의 향방에 대해 쉽사리 침범하여 개입하지 않는 건강한 주체의 모습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나와 마찬가지로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자살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확연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을 스비드로가일로프의 행위를 빌어 질책하고 있지 않았던가.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의연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행위에 대해 심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대비되는 인물로 일반적으로 부각되는 소냐와 두냐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인물 유형을 강한 자존심, 확고한 주관,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유발하는 타협할 수 없는 이론의 소지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면, 소냐와 두냐는 유약함, 자신의 현실적 편리를 져버리고라도 기꺼이 타인을 위하는 희생정신, 진리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 절대자로의 유보, 타인의 슬픔마저 자기 것이 되어 버리는 소통의 열림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헌신하는 것은 자신의 양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도움을 준 사실 이외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행위에 대해 측은지심을 가지고 그 고뇌와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 하며 8년간의 복역 생활도 함께 한다. 두냐 역시 타인에 대한 헌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오빠를 위해 아무런 애정도 없고 인간성도 신뢰가 가지않는 이에게 시집을 가려 하는 점이 이러한 두냐의 성격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이들의 자신에 대한 희생이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두 여인의 헌신과 고뇌의 공유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낀다. 정작 자신은 소설의 마지막 몇 장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살인행위에 대해 뉘우치지 않건만, 이 두 여인의 숭고한 정신 앞에서는 쉽사리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인물 유형의 대비는 여러 가지 양상의 대비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성과 감성, 인간과 신, 소통에 대한 닫혀 있음과 열려 있음, 오만과 겸손 등…그러나 이성과 감성으로 이 대비를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마지막 장의 구절, ‘새로운 인간으로의 갱생’이라는 표현에 대해 적용되기가 어색하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예들도 찾을 수 있다) 이성적 존재에서 감성적 존재로의 전환으로 일반화한다면 라스콜리니코프의 오만함을 설명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감성적 인간은 반드시 오만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이 두 인물 유형의 대비를 이성과 감성이라는 도식을 제외한 여타의 대비로서 파악한다. 인간이 자신의 이론적 체계에 기대어 그것을 얼마나 절대화하는가,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는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사유의 틀 속에서 다져진 울타리 바깥으로 다른 영역을 형성하는 타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얼마나 꺼리고 배척하며, 심지어 정복하려 드는가. 과연 우리는 타자를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대화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그 울타리 너머로 나아간 적이 있는가. 그것에 대한 회의가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두냐라는 두 인물 유형의 대비와 라스콜리니코프의 감화와 승복 속에 짙게 베어 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보여주는 내면의 모습은 일면 현대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타자 – 개인 또는 사회 구조 – 에게 내맡기고 이끌려다니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 갇혀 버려 타자와 소통할 창을 닫아 버렸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영역 안의 규칙으로 타자를 재단하려 든다.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인간형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이 소설 속에서 말하는 갱생의 과정이며 진정한 생성의 과정일 것이다. 결국 이는 현실의 부정이라는 이성의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판이론의 언표를 떠올리게 하고 인간의 사유체계의 고착화가 안겨준 현대의 비극,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참사를 상기하던 그들의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하나의 사유 체계는 확고한 기반 없이 허공에 떠 있는 성에 불과하고, 그것은 완벽하게 그 땅의 모습을 조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으리라 여기는 모습, 그 성 안에서 다른 성의 주민들 일에 가타부타 소리치는 모습, 그것을 떠올리다 보면 그 성 안에 서 있는 나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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