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피터 위어
출연 : 로빈 윌리암스, 에단 호크, 로버트 숀 레오나드
‘나는 신중하게 살기 위해 숲속에 들어갔다. 나는 삶의 골수를 깊이 음미하며 살고 싶었다.’
이 바닥, 남조선의 초,중,고,대…소위 ‘꿈나무’라 하고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고 일컫는 우리네 ‘애들’ – 범생님들과 양아치님들 모두를 포함하여 – , 그리고 소위 교사라 칭하는 이들에게 권할 만한 ‘교육영화’.
영화 속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악덕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미덕을 덮을 수는 없다. ‘교육’이란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키팅의 신념을 뼈속깊이 새기고 교육에 임하는 교사들이 과연 몇이나 있으며 노예가 아닌 지배자로서 살아가려는 ‘애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를 반추해 보시기 바란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우엽이라는 녀석이 있다. 같이 소위 엘리트 써클에서 정열을 불태웠고 공부도 그런대로 했던 그 녀석은 만화와 미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상상력, 광기와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100년 가까운 역사의 전통을 지닌 명문 고등학교라 자칭하면서 고교 평준화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특설반이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명문대, 특히 서울대 진학률의 수직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그 녀석도 특설반이라는 데에 있었다. 충분히 똑똑하고 충분히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는 그 녀석은 고3이 되어서도 미술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치 않았던 그 녀석은 부담없는 국립대면 좋겠지만 어떻게든 미대를 가고자 하는 꿈을 키웠었다. 어느 날 의례적으로 진행되던 진학 상담 때였던가, 아무튼 담임 선생과의 면담을 하러 갔던 우엽이가 한 쪽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교실을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웃어 댔다. (우리는 너와 ‘함께’ 웃는 것이지 너를 ‘대상으로’ 웃는 것이 아니다라던 영화 속 대사가 이 글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떠오르는군) 그 녀석이 미대에 가겠다고 우기다가 담임 선생에게 교무실 입구에서 반대편 벽쪽까지 몰려가며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설프게 반항한 그 녀석에 대해 더한 웃음이 쏟아졌다. 그 녀석은 결국 영어교육과를 들어가 낭창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우리네 애들 대부분이 낭창한 삶의 행로를 향해 나가고 있지 않은감) 여전히 그리는 일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못하고 있다.
나도 만화가에 대한 몽상을 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 녀석만큼 반항하지 못했다. 공주전문대 만화예술과를 반드시 가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대던 내가 조금씩 내 재능에 대해 의심하던 때에 고모부까지 찾아와 몰아붙히는 설득의 공세는 나를 여지없이 무릎꿇게 했었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서일까. 나에게 닐의 자살은 이 영화에 더욱더 몰입하게 만든다. 남일 같지가 않고 10대, 특히 고교 시절을 지나고 있는 이 바닥의 ‘애들’ 모두의 앞에 놓여져 있는 절망적인 벽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그리고 피해자를 그 늪에서 꺼내려던 이가 가해자가 되게 만드는 현실 논리가 이제 ‘나’를 찾아가는 애들마저 스스로를 기만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은 도무지 감정적으로 억제가 되지 않는다. ‘Captain! Oh, My Captain!’이라 외치며 책상 위에 올라서는 토드를 보고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인생의 골수를 음미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완강하다. 내 목소리는 하찮고 가볍디 가벼운 깃털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빈자리에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논리가 빛과 어둠을 교묘히 동반하여 자리잡는다. 우수한 성적을 위해 우리는 내가 ‘내’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 우수한 성적 확보에 성공한 범생이 애들은 명문대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으리으리한 간판으로 대부분 낭창하게 살아간다. 성적 개떡 같이 받은 양아치 애들은 아둔하고 어리석으며 능력없는 패배자로 간주되며 또 나름의 낭창한 삶을 이어간다. 어중간한 애들도 낭창한 생이 계속되기는 마찬가지다.
키팅은 그 낭창함의 늪에서 애들을 끄집어내려 안간힘인 것 같다.(그 사람의 교육방식이나 그 사람의 사상에 대해 딴죽 걸 생각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학생들이 그들 ‘자신’이 되어 살아갈 것을 종용하는 그 노력 자체이다.) 시로써 대화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획일성의 위험성을 가르치며 다른 것을 인정하도록 가르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것을 가르친다.(조PD 1집의 어느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좆같은 게 좆같은 거지…’) 그러나 그것은 명문 학교의 운영자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키팅이 가치 없다고 찢어 버린 교과서 시의 이해 서문에 기술된, 시를 이해하기 위한 양축과 그것으로 그려낸 그래프가 그들에게는 더 중요하다. 외워야 한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은 학생들에게 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인가 아닌가에 대한 회의는 학생들에게 죄악이다. 스스로 시를 짓고 큰소리로 읊으며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학생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다. 키팅이 찢어버린 교과서의 종이 쪼가리들이 우리 머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 빈자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 학교가 강요하고 부모가 강요하며 사회가 강요하니까. 그렇게 나는 또 그 종이 쪼가리들을 머리 속 깊이 간직한 채 또 하나의 부모가 되고 사회의 일원이 된다. 제기랄. 씨발 좆같네.
아, 이 영화의 악덕? 낭만성이라는 한 단어로 말하면 될까? 키팅이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고 ‘죽은 시인의 사회’ 클럽의 멤버들이 낭만주의자로 묘사되며 내러티브가 낭만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나름의 악덕이라고 하면 될까? 가슴이 뜨겁고 행동이 먼저 하며 일단 부딪쳐 보는 것이 가능한 10대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이 악덕의 방어막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피터 위어 감독의 휴머니즘적 낭만성이 고도로 응축된 영화라는 단서를 어렴풋이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로 응축되어 있어 볼 때마다 가슴을 울컥거리게 하며 눈물샘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