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영상자료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됐다.
사실 그간 속앓이를 좀 많이 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다 내쳐지고(나는 굳이 이 표현을 쓰고 싶다), 한 분은 나 때문에 밀려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미안함도 있고, 나 자신이 지금 잘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깊은 불안도 있고.
나는 첫 직장에서 일하는 약 2년 동안 나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직업이 내 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다소 아나키즘적이고 노동의 소외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나다운’ 일을 하는 것은 그래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로로 돌아가 영상자료원의 문을 두드렸다.(영화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고, 영화의 문화적 공공성에 기여하면서, 가꾸고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국가의 주요 사업목표에서도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바로 이 곳)
그런데 그 문은 생각보다 너무 높았다.
어떤 전문성의 벽이 아니라(나는 자본주의가 말하는 전문성의 신화를 매우 불신한다. 전문성은 단지 특정 분야를 둘러싸고 있는 배타적 자본의 울타리일 뿐이다. 또는 시민들이 익히고 배우는 수고로움을 화폐로 바꿔놓은 편의일 뿐이다.) 한국사회 공공 분야의 소극적이고 자기방어적인 관성의 벽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이 맡은 최소한의 기능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아 보이고 책임감에서 나오는 의욕보다는 안정감에서 나오는 권태에 의존해 문제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무엇이든’ 잘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지만 사실 이런 의욕적인 사람이 이 곳에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하고 있는 노동에 대해 진심을 보였는데 사실 이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또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일에 대한 내 유일한 진심이 외면 받고 경제적 곤란도 조금 느끼고, 더욱이 다시 (원하지 않았던) 민간기업의 일원이 되고자 해도 차고 넘치는 나이로 밀려나면서 88만원 세대의 세기말적인 위기감을 함꼐 느끼게 됐다.
나는 단지 소박한 희망을 이루고자 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모두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일할 만한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씨네21에서 읽은 글에서 (아마 기억이 맞다면) 허문영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프로페셔널을 추구하게 되고, 프로페셔널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세상에 쓸모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다른 때라면 머리로만 받아들였을 헤겔의 인정투쟁과도 같은 그 말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됐다.
내 자료원에 대한 인정투쟁이 소 귀에 경 읽기라면 나는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라도 세상에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절박하게 생각했다.
…
어쨌든 운 좋게 나는 다시 자료원에서 일하게 됐다.
형식상으로 이제는 계약직이지만 직원이다.
하지만 하던 일이 본래 장기 아르바이트(이따위 직책이 어디 있던가. 민간기업에서도 보기 힘든 신분이다)가 하던 일이라 바라보는 시선은 아르바이트와 다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달 여간 일하면서 드는 생각은 예전의 것과 동일하다.
이 곳의 기능에 필수적인 것들이 예전에 제한된 상황에서 미천한 신분을 얻었다면, 이것은 고스란히 지금도 미천한 지위로 치부된다는 것.
기능의 필요와 필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해졌던 신분에 의해 기능이 규정되는 개념 없는 시스템으로 근근히 지내오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
왜 나는 스스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중압감을, 미천하게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으로 자괴감마저 느끼며 짊어지려고 하는 것일까.
왜 이처럼 구제불능인 것처럼 보이는 조직에서 나는 소박한 희망 또는 내가 극복해 보겠다는 오기 따위에 간절하게 매달려 있는 것일까.
이미 이런 생각을 2년간 했는데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게 이제 조금 아슬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나는 가느다란 동앗줄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웹2.0은 확실히 수다쟁이 네티즌을 위한 환경이다.
나처럼 스스로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말만 하면 꼬이는 사람에게 웹2.0은 버거운 틀이다.
그래서, 역시 내게는 다크 톤이 어울린다.
어둡게 메워 놓고 수줍게, 말을 꼬아 가면서 아주 가끔 글을 올려도 별로 티가 나지 않을 만한 다크 톤.
스킨이 다소 지저분하지만…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