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속에 있어 더 음란한 그 것. 18세기 화가였던 안젤리카 카우프만은 ‘여성은 누드를 그릴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그것도 남성 누드를 그렸다. 작품 ‘남자의 인체 데생’에는 “나, 마리안네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그리다”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당시로서는 인습과 관행에의 도전이었고 파격이었다. 그녀의 자랑스런 시도는 아쉽지만 이것으로 끝난다.
이후 화단의 남성주의 둑은 조금씩 무너져 간다. 한 세기를 더 지나 파울라 모더존 베커가 그린 여성누드는 성기의 노출을 교묘히 감추면서 여성을 남성의 대상으로서 바라보았던 그런 누드화가 아니다. 자신을 임산부로 놓고 그린 ‘여섯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은 창조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을 달고 다닌다. 그 당당하게 응시하는 눈빛은 ‘내 몸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힘차게 외치는 듯하다. 이렇듯 그녀의 작품에서 여성은 성욕의 대상에서 해방된다.
21세기의 중학교 교사이자 화가인 김인규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자기 부부의 나체 사진을 올렸다하여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의 홈페이지를 잠시 서핑해 본면, 그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집요하게 그의 관심사인 ‘예술과 삶의 거리’에 대해 깊은 성찰로서 천착해 왔는가를 보여준다. 작가로서의 예술혼이 담긴 온라인 미술관인 셈이며, 네티즌들에게는 참신한 문화공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딴죽이 걸렸다.
교사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이분법적 논리는 더 부질없고 허황하다. 일부에서 문제 삼고 있는 그의 알몸 사진은 사진 한 장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편적인’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주장을 통해 성을 신비화하고 상품화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그가 팬티 한 장 걸치고 사진을 찍었더라면 지금처럼 불필요한 곤혹을 치루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만 ‘전달’과 ‘소통’은 불가능하거나 반감됐을 것이다. 그가 일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제의 사진’을 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일 터이다.
과연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는 팬티 한 장 차이인 것인가?
은밀하지 않으면 ‘좆’도 아니다 . 그래서 앞으로도 교묘하게 성기를 가린 채 꿈꾸듯 흐물거리는 눈빛과 교성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의 작품들은 갤러리에 일군의 발길을 모으게 될 것이고, 팬티를 벗어난 성기는 포르노 사이트에서만 대상화 된 상품으로 창궐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김씨의 작품은 성기 노출이 없으면서도 더 ‘좆’같은 작품들이 넘쳐나는 데 대한 야유이며 시위일지도 모른다. 그와 부인은 작품 속에서 다 벗었지만 마치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누워있는 엄마와 아기’처럼 성적 자극을 주거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남자아기의 백일 사진은 대개가 全裸였다. 그 어린 것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성우월주의가 투사되어 어쩔 수 없이 고추를 드러내야 했지만 어쨌든 아무도 그것을 음란하게 생각치 않았다.
같은 이치다.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가공된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관음증을 더욱 자극한다. 고로 정작 음란한 쪽은 딴쭉을 건 쪽일지도 모른다. 김씨는 예술을 기본 욕망으로 삼고 있었지만 인습은 외설로 보는 욕망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 ‘성’은 또다시 현실이 아니라 우상이며 상품이고 대상이 된다.
우리의 성기는 장마철 쥐 볕 보듯 잠시 나왔다가 다시 은밀하고 음습한 곳에 갇힐 신세인 것이다.
‘감각의 제국’의 이시다 키치조우처럼… 김씨의 물건이 사법당국에 의해 온라인에서 잘려나가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속 옷 한 장의 탄성 보다도 유연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예술적 천박성을 공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絃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