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빨갱이는 우리 사회에서, 일본에서 극우파적 역사 교과서, 미국에서 (국가) 미사일 방어체계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나치 시대 독일의 유태인의 역할도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빨갱이라는 호명은 가상적에 대한 안티로서 국가나 민족 또는 정치체계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는 친북세력일 수도 있고, 극우 기득권 세력에 약간의 타격이라도 될 수 있는 개혁적인 움직임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 사회의 정체성, 조갑제의 표현을 빌면, 보수 주류세력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빨갱이로 이름지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2.
빨갱이는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양민이 빨갱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켰듯, 빨갱이는 선량한 시민 밖의 어떤 존재를 가리킨다. 맑스레닌주의 신봉자나 주체사상 추종자만으로는 빨갱이의 외연을 채우기에 충분하지 않다. 변화되는 정세 속에서, 기득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이든 빨갱이라는 호칭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빨갱이는 건전과 불온, 안정과 불안, 전진과 혼란으로 경계지워진 우리시대를 특징짓는 총체적인 상징이다. 빨갱이는 빨갱이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는 ‘선량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해 만들어진, 체제 존속에 꼭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3.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근친상간으로 나누었다. 근친상간은 문화의 출발점이고, 문화 내에서 자연과 인간을 나누었던 이분법은 지속된다. 이를테면, 날것과 요리된 것,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하는 식으로.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많이 읽지 못했지만, 오늘 이곳 일기장에서 읽은 세진님의 글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대한) 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4.
빨갱이 사냥에 대한 대응책은 아마도, “그 사람은 빨갱이가 아니라 건전한 사고를 가진 개혁적인 지식인이야!”라고 외치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한완상은 자유주의자다!” 라고 조선일보에 대해 방어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대응책은 아니다. 그러한 대응책은 한완상은 자유주의자이지만, ‘빨갱이’에 틀림없는 그 누구는 사냥당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전제로 하므로. 중요한 점은 ‘빨갱이’는 왜 나쁜가 하는 질문을 자동적으로 배제하는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여전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5.
근친상간을 통문화적인 특징이라고 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은 무엇보다, 근친상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배제하고 있다. “근친”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문화에서 사촌은 근친이 아닌 것으로, 다른 문화에서는 모자, 부녀도 근친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다시 한번, 사촌이나 부, 모의 개념 역시 문화마다 다르다) 만약 근친상간이 어떤 문화에서건 볼 수 있는 특징이라면, 여기서 문화는 상간해서는 안될 근친이 무엇인가를 각각 다르게 구성하는 힘이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알제리 한 부족에 대한 연구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문화의 규칙은 꼭 지켜져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의 경향성이다. 여기서 근친은 근친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 이분법을 위해 만들어진 상징이다.
6.
전제를 의심하자. 맑스의 이야기처럼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은 사물의 뿌리를 본다는 뜻이다. 빨갱이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고, 왜 빨갱이인가 아닌가로 판단하려 하는가를 문제삼자.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고, 왜 성별을 능력의 차이를 재는 척도로 삼는가를 따져보자. 호남 사람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깔려 있는, 사람이 출신지역으로 평가되는 경향을 드러내자.
7.
나는 여전히 특정한 이분법이 내적으로 왜 일관성이 없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들의 유용성을 부정하지 않는다.자유주의자 한완상이 왜 부당하게 비난받는가, 여성의 사회기여도는 왜 저평가되는가, ‘좋은’ 호남 사람도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분법과 배제의 논리를 통해서만 지탱되는 낡은 체제의 허약성을 공격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전복을 위해서, “생각”의 근본성은 언제나 놓지 말아야 할 끈으로 생각한다.
forzapak : 레비스트로스는 이항대립적인 사고체계가 (인간의 두뇌작용에서 비롯되는) 인류의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이항대립의 구체적인 현상은 개개의 사회의 몫이다. < 빨갱이-양민>이라는 이분법의 조야함은 한국사회의 수준에 상응한다. 더욱이, 빨갱이 소리 듣기도 이제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