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아니, 일제 부역자!
역사와 관련한 말은 그 역사에 대한 해석과 입장을 담기에(1980년 5월 광주에서의 사건을 광주항쟁이라 하는 경우와 광주사태라 하는 경우가 전혀 다른 해석과 입장을 담듯) 주의 깊고 명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친일파’라는 말은 역사에 대한 부주의와 모호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다. `일본과 친한 무리’라는 이 말을 일본제국주의 부역자라는 정당한 적대 대상을 넘어 일본인(민족)에 대한 뭉뚱그린 민족주의적 적대감을 담고 있다.
알다시피, 한국인들이 그런 민족주의적 적대감을 갖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경험이다. 그 경험은 참혹했으며 그로 인한 적대감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그 참혹한 경험과 그로 인한 적대감은 한국인(민족)과 일본인(민족) 사이에서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국 민중 사이에서 일이라는 점이다. 대다수 일본 민중들 역시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였으며 한국의 지배세력은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이해를 같이 했다.
그런 분명한 역사적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최초의 필요는 해방 후 일제 부역자들이 한국 지배세력의 중심을 차지하면서다. 요컨대 그들은 한국민중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정당한 적대감을 일본인(민족) 전체에 대한 뭉뚱거린 민족주의적 적대감으로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 후 50여년동안 한국을 장악해 온 그들은 일본 극우세력과 철저히 야합하면서도, 민족주의적 적대감을 대중조작함으로써 손쉽게 자신들의 안전을 유지해 왔다. 이를테면 종군위안부 문제 같은 정작 자존과 위엄을 보여야 할 문제엔 비슷한 경험을 한 어떤 나라보다 비굴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던 그들은, 독도 문제 같은 소재엔 온나라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민족주의적 선동을 하곤 했다.
자칭 민족언론의 일제부역 행적(세계사 초유의 코미디라 할)을 폭로 선전하는 등, 일제부역자 청산을 위한 여러 진지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노력들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 역시 민족주의의 함정이다. 흔히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민족주의란 인간의 모든 선의를 민족 단위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본디 위험하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모든 파시즘이 민족주의를 기초로 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만 우리처럼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에서 민족주의는 한정된 차원의 진보성을 갖는 바, 그 역시 민족을 단위로 한 전면적인 착취와 억압 상태에서 방어적인 의미의 민족주의에만 해당한다. 태극기를 휘날리는, 뭉뚱거린 민족주의는 결국 악용되기 마련이다.
지난 55년의 역사가 그래왔듯 말이다. 그런 역사적 기만의 중심에 친일파라는 말이 있다. 식민지나 피점령의 경험을 가진 나라 가운데 그런 부주의하고 모호한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프랑스인들이 나치부역자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은 `콜라보’다. 콜라보는 `콜라보라퇴르'(협력자)에서 나온 말이지만 보통의 협력자를 표현할 땐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게르마노필리'(친독파)는 단지 독일이나 독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근래 진행되는 일제 부역자 청산을 위한 여러 진지한 노력들은 매우 고무적이지만, 일제에서 해방된 지 55년이나 지난 우리가 어떤 역사적 혼란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친일파라는 말은 그 말의 정당한 적대 대상인 일제 부역자들의 안전을 유지하고, 그들을 청산하려는 우리를 도리어 그들의 함정에 빠트리는 데 사용되어 왔다. 친일파라는 말을 좀더 주의 깊고 명료한 말(일제 부역자? 역사전문가가 아닌 나는 자격이 없기에, 남겨둔다.)로 바꿈으로써 역사가 우리에게 좀더 주의 깊고 명료해질 것이다.
김규항/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