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님. 서해안을 따라가다보면 해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역시 서해안에 있는 비인과 함께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땅이름 가운데 하나지요. 나는 그 이정표를 볼 때마다 마음이 환해지곤 합니다. 특히, 그 이정표를 기다리는 것을 잊고 있다 우연처럼 그 이정표를 만나는 순간은 정말 근사합니다. 사람이든 땅이든 아름다운 이름은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그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편지 잘 읽었습니다. 해미님의 긴 편지는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오늘부터 그 질문들에 느릿느릿 답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편지 끝에 적힌 “진보주의자는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진-보-주-의-자-는-행-복-합-니-까…. 어린 시절, 깊은 우물 안으로 머리통을 잔뜩 구부려 넣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조금 멋을 부리자면, 이 편지는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서론이 길었군요. 강연에서 만난 청중에게 늘 묻습니다. 진보가 뭡니까?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답이 나오는 일은 드뭅니다. 몰라서라기보다는, 뭐든 어렵고 그럴싸하게 말해야 한다는 못된 버릇 때문이겠지요.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보수란 오늘 세상을 지키려는 생각이고) 진보란 오늘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입니다. 그 둘의 끊입없는 긴장 상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흔히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서구식 문명을 등진 소수 부족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아예 이기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기심은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진 사회적 습성일 뿐입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대개 사람이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주장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기에 함께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건 본디 불가능다는 것이지요.
해미님은 그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 겁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연대로 세상을 바꾼 예는 얼마든 있습니다. 이를테면, 1980년 5월의 해방 광주입니다. 계엄군을 몰아낸 그 며칠 동안 광주는 가장 조화로운 사회였습니다. 도시의 모든 기능이 자발적으로 작동했고, 그렇게 많은 무기들이 나돌았지만 단 한건의 절도조차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해방 광주의 주인공은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본능적일만치 진보적입니다. 해미님. 여기 대여섯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회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중 하나가 그 사회의 열매를 가로챕니다. 물론 그는 그 일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겠지요. 그러나 누군가가 그 일을 알아채게 되고 그 일은 곧 사회에 알려집니다. 그 사회의 구조는 무척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이제, 사회는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조선일보>의 김대중 같은 이조차도 그 상황에선 짐짓 진보적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많은 강제와 함께 속해 있는 국가나 세계 같은 사회는, 그런 대여섯으로 이루어진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크고 복잡한 구조를 가집니다. 물론 사회 성원들의 열매를 가로채는 사람들의 제 일을 숨기려는 노력 역시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크고 복잡한 구조를 가집니다. 이쯤되면, 사람의 사회적 본능은 맥을 못 춥니다. 우리 주변에서 더할 나위 없이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 국가나 세계 같은 거대사회의 문제에선 믿을 수 없을 만치 보수적인 경우를 보는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그런 슬픈 부조화를 물리치는 힘, 제가 속한 사회를 분별하는 능력이 바로 ‘교양’입니다. 제 아무리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양이 부족하다면 단지 ‘보수의 개’로 살게 됩니다. 진보는 ‘부러 선택한 상태’지만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지에선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아, 빠트릴 뻔했군요. 대학생이 된 것 축하합니다. 연애와 여행을 많이 하기 바랍니다. 김규항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