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교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한국의 우익, 한국의 ‘자유주의자’
– 상처받은 자유주의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1. 도입
지난 10월 20일 상하이에서 개최된APEC 회의에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세계화 흐름에 대한 아시아 사람들의 단결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아시아 나라들은 자유를 위해 투쟁하기 이전에 아부하는 법부터 배웠다”고 반성을 촉구한 바 있다. 한국의 우익, 혹은 ‘자유주의’를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한국의 우파들은 출생당시부터 봉건, 제국주의 억압에 대항하여 자유를 쟁취해 온 경험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이념과 질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북의 공산주의적 개혁에 놀라 스스로의 입지를 ‘방어’하기 위한 논리로 자리잡았다. 그들에 내세운 ‘자유’는 투쟁을 통해 수립된 것도 아니며 철학적 성찰이 담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강대국에 대한 굴종의 논리이자 생존 본능이었다. 우리는 18, 19세기에 해방(liberation)의 이념으로 등장한 자유주의(liberalism)가 어떻게 정반대의 방향으로 개념의 굴절을 겪는지, 자유주의가 어떻게 반자유주의적인 실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는지 알아보려면 냉전시기 미국의 매카시즘 그리고 냉전이 아직까지 지속되는 한국사회를 보면 된다.
만약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반자유주의적 측면에 대항한 투쟁을 들어서 그 이력을 과시하려면, 공산주의와 유사한 억압체제인 일제의 파시즘에 대해서는 왜 저항은커녕 일방적으로 지지, 복종하였는지 설명해야 하며, 그것이 어떤 철학적 내용과 사상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왜 ‘국가’보다도 ‘민족’보다도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지를 주장해야하고 실천해야 하는데, 한국의 자유주의(자)는 그것을 할 수가 없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반자유주의적인 ‘국시’(國是)의 논리,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과 그 계승자인 ‘국가보안법’의 폭력성에 대해 한번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 ‘우익’ 출생의 정치적 맥락을 이해해야만 한국의 자유주의가 사실상 ‘반자유주의적’인 논리나 지배체제에 언제나 예속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한국에는 자유주의가 사실상 존립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익이 주장하는 자유가 해방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아부의 논리이자 방어의 논리, 즉 친미, 반공의 논리 혹은 파시즘적 정치적 실천으로 존재해왔고 또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2. 한국 ‘우익’의 논리와 행동
올해 들어서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과 언론사 세무조사, 시민단체의 제반 운동들을 둘러싸고 ‘색깔’ 논쟁이 재연되었다. 자유기업원은 재벌의 세습을 차단하고 합리적 경영을 요구한 시민단체의 요구, 사용자의 자의적인 해고조치를 막으려는 노동조합 활동을 모두 시장경제를 위반한 좌경운동이라고 몰아붙인 바 있다. 자유기업원은 “우익이 총궐기하여 좌익이 더 이상 국정을 농단치 못하게 해야 한다”고 ‘시장경제와 그 적들’에서 이렇게 또다시 우익 총궐기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89년 당시 양동안이 제기한 우익총궐기론의 재판이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당시 북한 조문 문제를 일부 국회의원들에 대해 정치적 공세를 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으며, 현 정권 들어서 진행된 최장집 교수 사상 시비도 그 한 예에 속한다. 한나라당과 김종필은 김대중 정부의 ‘북한 퍼주기’ 정책, 언론사 세무조사와 사기업으로서 언론에 대한 감시와 통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을 ‘무력에 의한 통일시도’라고 규정한 것도 친사회주의, 친북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색깔시비, 우익총궐기론의 중심에는 ‘자유’의 십자군 [한국논단]과 [조선일보]가 있다.
이러한 ‘색깔론’의 저류에는 한국의 국가권력의 후원 하에 재벌 기업들이 벌인 일들, 즉 기업들에게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모금하여 정치가를 매수하고, 기업의 의사결정을 오너와 그의 가족들이 독단적으로 장악하며, 중소기업 고유업종에 들어가 시장을 독점하고, 가격을 상승시키기 위해 다른 기업과 담합하고, 주식시장에 ‘작전’을 감행하여 주가를 조작하여 소액투자자를 몰락시키고,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노조결성을 막기 위해 폭력배를 동원하거나 종업원 감시체제를 구축하는 행동들을 사유재산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일들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지난 정권이 저항적인 사회운동이나 반정부 세력에 대해서 가한 테러와 고문, 학살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즉 ‘국가’와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한 행동들은 무조건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리는 곧 30년대 독일과 일본, 50년대 남한과 미국에서 나타난 바 ‘광신적 반공주의’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우익적 주장들의 특징은 이분법적 사고, 즉 우리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 최장집 교수 사상 시비에서 나타난 것처럼 6.25를 무력남침이라고 강조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조국해방전쟁론’에 동조하는 것으로 취급되고, 자유기업원의 주장처럼 노조가 기업의 경영권에 도전을 하면 사회주의 세력으로 낙인을 찍는다. 최근 부시정권이 테러사태에 대응하여 전쟁을 개시하면서 각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 “미국을 선택할 것인가, 테러집단을 선택할 것인가” 라고 물은 것도 전형적인 이분법적인 사고이며, 반대입장을 봉쇄하고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하는 도그마이다. 즉 이러한 이분법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은 물론 기대할 수 없고,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다.
둘째 이러한 사고방식은 리영희 교수가 강조한 것처럼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으며 상식적인 초등학생조차 이해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저급한 교양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정주영이 ‘반국가단체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잠입 탈출’한 것은 ‘민족화합’으로 칭송되어도 반정부세력이 방북한 것은 ‘국가보안’을 심각하게 헤친 사건이 되니 누가 그 규칙에 승복하겠는가? ‘혈맹’인 미국이 주한미군 분담비 증액을 요구하고 한국산 철강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려도 그들이 내세운 시장 개방과 세계화의 원칙에 대해 토를 달거나 비판하는 것은 ‘대역 죄’와 같이 취급되니 이 또한 개방사회와 맞지 않는 억지가 아닌가? 자본의 독재, 독점자본의 지배가 소비자와 노동자의 선택권을 제약해도 그것은 ‘시장’의 활성화이며, 자본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고 자본을 반대하는 측을 사회적으로 매장해도 그것은 ‘시장’ 의 법칙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궤변에는 더 이상 할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셋째 이 논리에는 ‘국가’를 지키자는 것 외에, 국가의 무엇을 어떻게 지키자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한국의 우익에게는 이념이나 사상이 없다. 그들에게 일관된 것이 있다면 김병국이 말한 것처럼 그냥 ‘공산주의 반대’거나 그렇지 않으면 친미, 친자본, 반노동, 반북한으로 집약해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서양의 ‘우익’이 표방하는 종교와 전통, 가족질서에 대한 강조와도 거리가 멀다. 통상 서양의 보수 우파의 논리는 프랑스 혁명기의 구질서가 내세웠던 바 ‘재산, 가족, 종교’에서 기원을 두고 있는데, 대체로 세습 귀족제, 인종적 우위, 특권의 옹호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그에 반하여 자유주의의 논리는 자율성, 개인의 인권, 차별의 철폐, 개방성 등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그러한 우파를 비판하고 있다. 한국의 우파 역시 서구의 우파처럼 ‘가치’를 내세우기보다는 ‘지킬 것’만 강조하는데, 단지 지켜야 할 것이 ‘국가’와 ‘자본’으로 대단히 단순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특히 한국의 우파는 계급이나 인종, 권위나 전통 등의 지켜야할 가치를 내세우면서 민중들을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주로 반대파를 공격하여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열중해왔다. 최근 한국에는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는 시민단체, 지식인단체도 등장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한국에서 해방직후를 제외하고는 우파가 강압적 힘과 돈의 힘에 의지 않고서 정말 그들의 이념과 노선에 끌려서 찾아온 지지자를 조직하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봉건세력과 파시즘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가진 서구에서는 ‘우익’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과거나 현재나 ‘우익’이 자유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양자가 혼돈된다. 즉 한국에서 극우반공주의는 보수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통괄하는 우익의 지배이념이었기 때문에 극우반공주의를 넘어서거나 비판하는 보수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우익 진영의 헤게모니는 극우반공주의에 있으며, 이 극우반공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한국의 우익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입장이나 이념이 아니다. 필자는 한국의 극우반공주의가 보수주의 일반의 이념, 혹은 자유민주주와도 거리가 먼 ‘상처받은 자유주의’라고 보고 있으며, 그들이 왜 이렇게 ‘색깔론’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정책적 이념적 토론보다는 공격적이고 험악한 언사를 사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방어하려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들이 입었던 ‘상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우익과 가장 유사한 입장의 우익을 들자면 45년 이후 즉 냉전체제 형성과정에서 미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우익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이 표방한 노선과 담론이 바로 냉전자유주의(cold-war liberalism)였다. 미국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냉전체제 하에서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재산의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옹호하고 소유권 행사를 제약하는 모든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소련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 운동으로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법학자 한태연은 50년대 말 ꡔ사상계ꡕ지면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원래 세계관에서는 상대주의이며 가치에 있어서는 중립주의였으나 공산주의 질서에 대항하기 위하여 점차 절대주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변질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주의와 전쟁을 벌인 한국에서 그러한 양상이 가장 두르러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지적하듯이 한국에서는 그것이 국가보안법의 법제화로 나타난 것이고, 한국전쟁 당시 무수한 민간인 학살로 나타난 것이다. 한태연 역시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반공이 ‘국시’가 되는 나라에서 ‘자유의 한계’가 설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계엄과 국가보안법과 긴급조치와 쿠데타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능하다면, 여기서 제주 4.3 당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했던 계엄령과 같은 국가의 비상조치들이 실제로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해명할 수 없는 자기모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를 지키자는 법이 실제로는 ‘자유’를 탄압하는 법률이 될 때 그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추구하는 사회의 모습, 그러한 사회에 필요한 인간형,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한 성찰이 완전히 결여된 가장 천박하고 타락한 자유주의, 즉 ‘붉은 세력’에게 몽둥이를 가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와 억압적 기구를 환영하는 ‘자유주의’인 것이고, 편법과 몽둥이를 자유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3. ‘우익’ 출생의 비밀
한국의 우익 즉 극우반공주의의 진면목에 도달하기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5년 이후부터 4.19 이전까지 만연했던 우익 정치폭력을 이해해야 한다. 그 시절 공격적인 반공주의는 무소불위의 강제력을 동반한 반공 청년운동을 통해 주로 드러났으며, 방식은 바뀌었지만 그 생리는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46년 이후의 백색 테러 혹은 정치폭력은 일차적으로는 구 친일세력의 자기방어 심리와 이차적으로는 북한 사회주의의 위협에 대한 위기의식과 공포에서 출발한 것이다. 독일의 파시즘이나 미국의 매카시즘이 그러하듯이 공격적인 우익 이념이나 우익적 실천은 언제나 진보적 지식인 혹은 좌익의 위협에 대한 반응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이들의 공세가 위협적일수록 그 공세에 대한 방어의 논리나 입지가 취약할수록 대항논리도 더욱 공격적인 성격을 지니는 경향이 있다.
해방 직후의 친일세력은 적극적 친일세력과 생존을 위해 소극적으로 친일한 세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일제 하에서 출세와 승진의 길을 도모하였던 관료, 군 장교, 경찰 간부, 친일적 담론을 유포한 지식인 등을 적극적인 친일세력으로 본다면 말단 관료, 말단 군인, 말단 경찰관 등은 소극적인 생존을 위한 친일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의 해방이 미. 소에 의한 분단을 수반하지 않았다면,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그러한 것처럼 수립될 정권이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니던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녔던 간에 국가건설(nation-building)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어느 정도 단죄를 받았을 것이고, 소극적 친일세력은 자기반성을 거쳐 재기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남북이 미소의 분할점령으로 귀결되고 냉전적인 기류나 한반도에서 조숙하게 형성됨으로써 민족국가 수립 문제는 좌우익 이념 대립 문제에 의해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냉전질서의 구축은 미국의 전후 자본주의 재건전략, 일본의 군국주의 우익 부활 전략과 한반도의 일본에 대한 방어진지 구축 전략의 산물이었다. 남한의 경우 냉전이란 곧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친일 세력, 즉 극우세력의 부활을 의미하였다. 이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유일한 세력은 반공과 반소, 친 자본, 친 현상유지 정책을 펴는 미국임을 확실히 파악하고 그 길로 매진한 것이다.
그러나 타력에 의해 주어진 해방이라고 하더라도 친일세력이 미국의 진주와 냉전분위기에 편승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 민중들의 정서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좌익 정치세력의 사주와 무관하게 민중적인 차원에서는 이들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공격이 만연하였는데,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대구 10.1 사건이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친일세력은 미군정의 지원에 편승하여 경찰력을 앞세우게 된다. 미군정 하에서 초기에 보다 공세적인 입지에 있었던 좌익, 민족세력은 점차 정치적 입지를 상실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이제 ‘우익’ 애국세력으로 변신한 구 친일세력은 보다 공세적으로 좌익 소탕에 나서게 되었다. 이제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혹은 자유 진영으로 자신을 포장하게 되었으며, 국가건설의 주역으로서 입지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좌익에 대항한 우익의 힘을 더욱 배가시키고, 우익의 대응을 더욱 폭력적으로 만든 주역은 38선 이북에서의 사회주의 개혁을 피해서 월남한 우익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남한에서 친일세력이 일반 민중들이나 좌익세력에게 공격을 당했듯이 북한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물적인 터전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종교적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지식인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북에서 친일 경력을 가졌거나 상당한 재산을 소유했던 사람 등이 남으로 내려와서는 가장 공격적인 우익이 되었으며, 기독교인사 온건한 자유주의자들도 이러한 반공의 대열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들은 남한의 우익과는 달리 공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직접 박탈당한 체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은 남한의 우익을 압도하게 되었으며, 공산주의가 싫어서 남으로 내려왔다는 그 명분 하나만으로도 반공노선의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었다. 50년대까지 이들은 체제수호의 선봉에 서게 되었으며 정계, 군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 기독교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남한 내 구 친일세력과 47년 이전에 월남한 우익 세력의 대다수는 사실상 ‘자유’의 가치를 존중해서 남한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일차적으로는 생존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공포 속에서 반공국가 건설에 앞장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입지를 지키는데 가장 믿을만한 방패는 미국의 지원과 이승만 정권의 수족이었던 경찰력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기반이 경찰과 군대, 그리고 미국의 지원에 있었던 만큼 한국 우익의 초기적 기반은 물리적인 국가기구 그리고 미국의 절대적 지원에 있었으며, 한국전쟁은 그러한 기반을 확고하게 만드는 게 기여하였다.
정부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잔존하던 민족세력, 중도좌파세력이 완전히 제거되면서 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변했다.
< 46년 당시의 지형 > 극우 중도우 중도(민족) 중도좌 극좌 < 53년 이후의 지형> |
우선 위의 [46년 당시의 지형]의 표에서 오른편 반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김구 등과 같은 우파 민족세력, 조소앙 등 중도파 민족세력, 여운형 계의 중도좌파의 완전한 제거다. 그리하려 아래의 [53년이후의 지형]에서와 같이 위의 남은 왼쪽 반이 전체 정치세력 그리고 이데올로기 지형을 채우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극우의 입지가 훨씬 넓어졌다. 그리하여 실제로 극우 파시즘에 해당하는 세력이 우파 일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되었고, 실제로는 중도파,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이 좌익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살아남은 중도좌익 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세력이 극좌로 분류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세력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분단 하에서 살아남은 중도파, 혹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들은 종종 좌익이라고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변화는 극우세력이 정치의 장에서 과잉대표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극우, 중도우파가 독점하는 정치질서 하에서 정당은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력의 창출 문제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 경우 여야의 구분은 이데올로기적 구분과는 사실상 무관하게 편재되었다. 언론에서의 극우 매체의 독점 역시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언론계에서의 중도파,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기조는 극히 미미한 세력만을 차지하였다. 민족주의적 언론은 4.19 직후와 같은 예외적인 시기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며, 일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언론인은 70년대 유신정권 하에서 언론계에서 추방당했으며 80년대 이후 언론의 기조는 극우와 우의 입장만이 허용되었다. 지식사회 혹은 시민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양상이 나타났다.
70년대까지 이 극우반공주의에 대한 안티 테제는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였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세력은 반공주의의 틀 내에 있지만 극우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자유주의적인 학자, 목회자, 학생, 중간층이었다. 장준하, 함석헌 등과 같이 이들은 주로 분단,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한 체제를 선택했던 양심적인 기독교 인사들이며, 남한체제의 극우반공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진정한 자유주의 혹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4.19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70년대 유신반대 운동과정에서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들 중 다수의 인사들이 고문과 탄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활동을 정지하였으며, 일부 인사들이 80년대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였다.
결국 80년 이전까지 한국은 극우반공주의의 독재체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우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정치세력과 사회세력이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세계관을 의심하는 지적인 흐름이 존속할 수 없었다.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중의 베트남 관련 논문은 그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는데도 심각한 탄압을 받고 의식화를 부추긴 서적으로 분류된 것은 그것이 극우반공주의의 물질적, 정신적 존립기반에 의문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극우반공주의가 가장 결정적 도전을 받는 계기는 80년대의 거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였으며, 그것의 주창자는 학생운동 진영이었다. 이 학생운동은 남한의 극우반공주의는 친미 반민족세력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며, 가장 노골적인 친자본/ 반사회주의 논리라고 공격하였다.
87년 6월 항쟁 등 군부의 퇴진과 민주화 운동의 진척은 극우반공주의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고, 극우반공주의는 보다 공격적인 대응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특히 89년 소련 동구사회주의의 붕괴는 이들의 목소리을 강화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은 민주/독재라는 구도가 잘못된 것이며, 좌익세력과 체제유지(자유민주) 세력간의 갈등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면서 모든 형태의 민주화 운동을 좌익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시작하였다. 극우세력을 지탱시켜주던 군부의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획득된 자본의 힘과 언론의 힘이 새로운 버팀목이 되기 시작하였다.
4. ‘우익’의 공격성 – 상처받은 자유주의
1947년 이후 미국의 일본 재부흥 정책과 한반도의 현상유지 정책은 단순하게 일본의 전범과 한국의 친일파를 정치적으로 부활시키는데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그래도 최소한의 ‘민주개혁’을 강요했기 때문에 덜 문제가 되었지만, 한국에는 ‘아부’와 출세의 달인들을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사회적 뒤틀림 효과가 발생하였다. 즉 냉전과 분단은 ‘우스꽝스러운 보통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 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일본의 헌병 밀정 출신 김창룡이 ‘친일 콤플렉스’를 갖고서 국가의 2인자로 부상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양심적 자유주의자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김창룡의 폭력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 자유주의자의 최대의 치욕이요,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과 같은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김창룡 개인이 아니라 당시의 법이요 ‘질서’였고, 체제였으며 ‘국가’였다. 김창룡은 바로 상처받은 신, 상처받은 국가의 상징이었다.
김창룡은 과거 파시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바 천박한 교양 수준과 콤플렉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자신에 대한 공격을 두 배로 갚아주려는 공격적인 우익의 화신이었다. 즉 자신의 치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동물적인 공격성을 지니고있다는 것이다. 열등감과 그 표현으로서 공격성은 이들이 ‘민족’ 국가의 정상적인 주역이 될 수 없다는 근원적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돌파하고 만회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즉 ‘반민족’의 전력 때문에 민족의 구성원,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위기, 가 무리수를 쓰거나 맹목적 충성을 보임으로써 신생 정치공동체서 중심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의 소외와 주변화에 대한 열등감이 중심 혹은 주류, 혹은 정상적인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무리한 수단 사용을 부추긴 것이다.
특히 어떤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주류로 편입하려는 열망을 가질 때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주류에 있는 사람보다도 더 주류적인 언사와 실천을 감행할 수 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극우반공주의와 우익의 폭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친일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민족국가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반공을 도그마로 만들고, 반공을 위해 반대세력에게 테러와 학살을 가해서라도 자신의 정당성과 주류에 대한 충성을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김창룡이 가장 공격적인 우익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그가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자격을 애초에 결여하고 있었던 가장 추악한 친일 경력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반공주의에 집착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데 반공주의가 하나의 신앙 혹은 도그마가 되고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폭력을 가하는 몽둥이로 활용된 것도 바로 그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좌익의 혐의를 받던 사람들 혹은 학살의 피해자들이 군에 입대하여, 공격적인 우익이 되거나 실제로 학살에 가담한 것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 자신의 좌익 경력을 의심하는 미국에게 자신이 우익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북의 밀사인 황태성을 서둘러 처형하고 혁신계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구속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문열과 같이 부친의 좌익 경력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한 분단의 희생자들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현실을 개혁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야만적 냉전논리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세력에 대해 더욱 적대적 태도를 보이면서 체제옹호론자로 변신하여 활동하는 것도 이러한 사회심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좌익이 천형이 되는 세상에서 세상에 대해 야심을 가진 좌익가족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우익보다 더 우익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극우 반공주의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생존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며, 이들이 거론하는 색깔론은 반공의 충정과 ‘자유’의 가치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류에 확고하게 편입하기 위한 수사, 혹은 자신의 상처를 건드린 데 대한 보복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자는 물론 아니지만 자유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이들에게 일관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동물적인 본능이다.
이것이 지난 50년 동안 반복된 색깔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 색깔론은 선진국의 우익세력이 표방하는 인종주의의 한국적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인종주의적 균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비이성적인 차별화의 논리는 지역주의와 색깔론으로 주로 나타나고 있다. 지역주의와 색깔론은 상대방과의 대화의 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이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어려워지면 언제나 이 무기를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색깔론은 위기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제기하는 세력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위기의 심도만큼 더욱 더 공격성을 띠게된다. ‘우익총궐기론’이나 색깔론이 90년대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도 그 동안 일방적 우위를 보여온 극우반공의 입지가 민주화, 혹은 야당의 집권으로 약간의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40년대 말이나 한국전쟁 당시 우익의 위기의식은 정치테러와 민간인 학살로 나타났는데, 90년대에 와서는 이와 같은 언어의 폭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는 공안기구를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민주화 국면에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거대 언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직접폭력이나 말의 폭력이나 그 기원과 성격은 동일하다. 상대방과의 대화를 차단하고, 할 수만 있다면 상대방을 적으로 몰아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다.
[한국논단]이나 [조선일보]가 그렇게 사상검증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그들이 주로 이승만 영웅 만들기,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에 자구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극우반공주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인 한국현대사, 특히 한국전쟁과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 주로 중점을 두었고, 오히려 마르크스주의 경향의 이론이나 논설들, 그러한 입장을 펴는 논객을 공격하기보다는 주로 한국전쟁, 이승만과 박정희 등에 대해 극우반공주의의 시각과 다른 시각을 견지한 논객이나 정치가들을 주로 공격대상으로 한 것, [한국논단]이 경제, 복지정책 문제를 중심으로 진보적 논객을 공격하기보다는 주로 현대사 해석, 북한을 보는 시각 등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기억의 정치‘ 즉 현대사 해석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논단]과 [조선일보]는 공공성을 지닌 언론이 아니라 입지가 좁아진 극우반공주의의 정치선전지와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오늘의 [조선일보]는 40년대 말의 서북청년단, 50년대의 김창룡, 6,70년대의 군부와 공안기구, 80년대의 5공정권과 안기부가 했던 ‘위대한’, ’역사적 역할‘을 마무리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수행해 온 작업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기 보다는 ’국가주의‘와 우익독재의 옹호였으며, 그 방식은 ’상처받는 자유주의‘의 공격성이었다.5.맺음말
‘국가의 안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언제라 유보할 수 있는 국가에서 자유주의가 온전하게 생존가능한가? 계엄령과 테러, 쿠데타와 학살, 고문과 의문사로 점철된 나라에서 자유는 주로 누가 향유해온 가치이며 누가 그것을 주창해 왔는가? 이제 분단과 군사정권의 일방적 지원과 보호 속에서 자라나 부를 축적하고 막강한 여론주도력을 가진 보수 신문들이 ‘말의 지배’를 구사할 수 있는 시점에서 이들이 정부의 세무조사를 정치탄압으로 맞받아 치는 논리로서 ‘언론의 자유’를 내세움으로써 한국에서 자유의 이념은 어디까지 희극적인 모습을 지닐 수 있는지 잘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는 계엄령, 고문, 정치사찰로 상징되던 냉전자유주의는 이제 시장만능주의를 옹호하는 자유기업원식의 자유주의로 변했는데, 과거나 현재나 일관된 것이 있다면 바로 ‘악덕자본가’까지도 용인할 수 있는 ‘돈벌 자유’를 자유의 으뜸에 두고 있으며, ‘돈벌 자유’를 비판하는 사람은 사회주의자(빨갱이)라로 낙인찍으며, 그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타협의 산물이며, 관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재산, 종교, 가족’을 내세우는 보수주의 혹은 우익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출생당시부터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우익을 자유민주주의자로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우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가 분리되지 않는 한 한국에서 타협과 관용이, 논쟁과 토론이, 자유의 제반 가치를 존중하는 정치세력이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즉 국가의 이념을 신성시하는 ‘색깔론’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국가보다 개인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될 수 있어야, 이 땅에서 진정한 정치적 논쟁이 시작될 수 있으며 정책이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고, 통치가 아닌 정치가 시작될 수 있으며 지식과 문화가 꽃피울 수 있다. 현재의 정치 사회적 구도 하에서 상식을 존중하는 인간, 교양을 중시하는 인간이 살아가기는 너무나 어렵다. 자유주의의 빈곤이야말로 오늘의 한국정치나 한국사회가 이렇게 뒤틀리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만, 과거나 현재나 지식인들과 언론들은 이러한 점을 외면하면서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고 개탄하는 일을 타성적으로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