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이탈리아 폼페이를 여행하면서 죽음을 명상했다. AD 79년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던 날 번성했던 고대 로마의 두 도시, 폼페이와 헤라큘레니움이 묻혔다. 18세기에 처음 발굴되었을 때 그 속에서 화산재를 뒤집어쓰고 죽어간 주검들이 생화석으로 발견되었다. 내가 본 폼페이 생화석들 중에는 한 남자가 화산재를 막아주려 사랑하는 여인을 부둥켜안고 죽어간 주검도 있었다. 그 처절한 비극적 절망의 현장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누군가의 고통스런 마지막 순간을 1,900여년이 지난 후에 다시 본다는 것, 그것은 내게도 큰 고통이었다. 뜨거운 화산재가 살갗을 파고드는 아픔, 앞을 볼 수 없는 아수라의 현장,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역사란 이런 것이다.
흐르는 시간은 마치 화산재처럼 우리의 삶을 덮치고,훗날 누군가 이 화산재를 벗겨냈을 때 당대의 삶은 고스란히 드러나리니.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전제하고 살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전근대적 모순과 부조리, 기득권 수구세력의 개혁을 방해하는 각종 기만술에 휩싸여있다. 예컨대 국회에 안건조차 상정되지 못하고 물 건너간 부패사학 척결과 대학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사립학교법 개정안’. 상상을 초월한 언론사 불법탈세 및 불공정거래 내역발표와 이를‘언론탄압’이라 우기는 일부 언론사와 정당 등등.
이 모두는 우리가 이 땅에 둥지 틀고 산다는 데 대해 심각한 절망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과거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 논의되고 있는 현실 그 자체가 어쩌면 희망일런지도. 이런 절망의 극한은 과거에도 있었다.
20세기 초,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였던 루쉰(魯迅)이 보았던 사회적 모순도 그랬다. 그는 소설‘아Q정전’에서 힘없는 민초로 표상된‘아큐’와 그를 위협하고 끝내 처형시킨 전근대적 중국사회의 상황을 블랙코미디처럼 그려냈다. 루쉰의 위대함은 그가 비록 절망의 극한에 있었지만 현실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외침으로 진실된 인간 상황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그는“망국병의 뿌리를 칭찬하는 자들을 경계”하고,“남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복수에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인간은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훗날 생화석으로 발굴될 현재의 우리가 부조리에 대항하는 시민정신으로 무장한 채 죽음을 전제한 치열한 삶을 살아야함 을 일깨운다. 나는 바로 이것이 희망이라고, 그동안 집필해온 칼럼의 유언을 남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