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학파 [ Annales School ]

분류


· 역사와 지리 > 역사 > 프랑스사 >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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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9년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L.페브르와 M.블로크에 의해 창간된 《사회경제사 연보》(1946년에는 ‘아날 ·경제 ·사회 ·문명’으로, 1994년에는 다시 ‘아날 ·역사와 사회과학’으로 제명 변경)를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랑케의 사실주의에 토대를 둔 근대 역사학은 역사철학이나 낭만주의적 역사서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사료의 정확성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역사학의 폭과 깊이를 축소시키는, 그 부정적 측면을 노출하여, 결국 인문사회과학의 세계에서 자료제공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학의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에서는 뒤르켐의 사회학, 비달 드 라 블라슈(Vidal de Blache)의 인문지리, 철학자인 H.베르의 역사적 종합 등이 인문사회과학을 주도하는 가운데, F.시미앙이 제기한 ‘역사가들의 3가지 우상(정치 ·개인 ·연대)’에 대한 논박, 그리고 이러한 도전에 대한 역사가로서의 수용은 새로운 역사학의 형태를 결정지었다. 정치보다는 사회, 개인보다는 집단, 연대보다는 구조를 역사인식의 기본 골격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이 학파의 정신이 된 것이다.

이렇게 출범한 이 학파가 역사학 안팎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은 제2세대인 F.브로델에 의해서이다. 그가 1949년에 발표한 《지중해》는, 지중해세계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시간이 잘 마모시키지 못하는’ ‘장기지속(la longue duree)’적인 지리적인 삶, 그리고 그 위에서 완만하게 주기적으로 변하는 사회 경제적인 삶, 그리고 표면의 거품과 같은 정치적인 삶을 구조적이며 총체적으로 그린 아날학파의 교과서였다. 이후 G.뒤비, E.르 루아 라뒤리, J.르 고프 등의 제3세대는, 이러한 브로델의 역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집단심성(集團心性)에 대한 연구를 아날학파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R.샤르티에는 문화현상에 대한 사회사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제4세대를 이끌고 있다.

이 학파는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 변동에 대한 설명 등에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을 역사의 무대에 소생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 학파는 1970년대에 특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 말에는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최근에는 국내의 관심도 더욱 높아져, 브로델의 대작인 《지중해》(한길사, 1995)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까치, 1995)를 위시한 이 학파의 주요 연구업적들이 활발히 번역 소개되었다.

[가리사니] `여호와의 증인’에게

 

그러니까 딱 30년 전이었다. 스물네 살 나이에 기약도 없는 옥살이를 예약해 놓고 서대문 구치소에 들어간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다.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에 와 있던 그는 매일 약상자를 들고 의무과 교도관과 함께 미결사동을 방문하는간병부’였다. 틀림없이 나에게 씌워진 어마어마한 죄명'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박해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그 자신의 슬픔 때문에 나를 보는 그의 눈이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따뜻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곱상하게 생긴 그의 이름을 나는김중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형.

그동안 잘 지냈는지요? 얼마 전 어떤 텔레비전 프로를 보다가 갑자기 기억의 아스라한 밑바닥에서 당신이 떠올라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문제를 다룬 그 르포의 주인공은 김세정씨라는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병역거부로 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는 아들 둘을 교도소에 두고 있었고, 셋째 아들의 감옥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된 김세정씨 얼굴을 보면서 문득 그만한 연배가 됐을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당신도 지금 아들 하나쯤 교도소에 보내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상념으로 저의 가슴은 아팠습니다.

30개 교도소에서 1600명이나 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복역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햇빛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온갖 미신에 사로잡힌 집단 히스테리가 사람들을 침묵시키고 어떠한 평화운동도 반전운동도 성장하기 어려웠던 우리 사회에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바로 당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고난으로 열린 시대입니다.

생각하면 당신이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고생하던 그 시절에 이미 동·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널리 법으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드는 법률이란 결코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 민주주의는 그 국민에게 제도와 법률, 그리고 습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믿음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고난의 성과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98년에 유엔 인권위원회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박해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구체적인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즉 양심적 병역거부자 보호원칙은 이제 우리나라도 당연히 준수해야 할 국제법입니다.

몇 년 전 저는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저의 오랜 감옥생활 기간을 통해 꾸준히 저를 도와준 국제사면위원회의 한 회원을 만났습니다. 젊어서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졌다는 그 노인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장 극악한 파괴행위는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져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도 젊어서 옥살이를 했었지”하면서 빙그레 웃는 그 노인을 알고보니 2차대전 때 병역거부로 두 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와의 모든 협력을 거부하면서 투옥된 3500명 가량의절대적 병역거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노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저는 지금 빛 바랜 흑백사진을 꺼내 보듯이 당신이 가졌던 맑은 표정을 생각합니다. 그 표정에 영국에서 만났던 노인의 선량한 표정이 겹쳐옵니다. 당신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오로지 신앙에서 나왔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류가 살아온 시대마다 각자의 처지에서 폭력에 굴복하지 않으려 고민하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비폭력은 서서히 자라는 식물이다.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성장한다.”

부끄럽게도 30년 동안 잊고 지낸 당신의 고난을 이제야 생각하며 저는 이런 말을 실감해봅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그 고난의 감옥에서 고립무원했던 젊은 공안사범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준 그 유물론자, 폭력의 구조를 떠받치는 그 어떤 법'도 어기면서 당신들과 함께 가고 싶어했던 그양심적 반전주의자’를 가끔은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