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주의 [ 相關主義, relationalis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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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arx Engels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 대한 해설
테제1. 객체적, 직관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과 실천적 유물론 혹은 관계론적 행위-물질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선언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단지 객체 Objects의 혹은 직관 Anschauung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된다는 것, 감각적 인간 활동,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크 이래의 근대 유물론은 자연과학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사고와 결부되어 있으며, 감각 경험을 강조하는 경험주의다. 로크에 의하면, 물질적 실체는 감각을 통해 인간의 관념을 형성한다. 감각 관념을 초월한 인간의 관념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물질 세계의 운동은 원인-결과의 연쇄로 이루어진 기계론적 운동이다. 이런 인식론적 구도 아래서는 인간의 활동적 측면, 물질 세계를 변화시키는 측면은 배제되고, 죽은 경험의 관념을 축적하는 수동적 태도만이 부각된다. 이러한 태도는 대상을 객체의 형식 아래에서, 즉 주체와는 무관한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Anschauung, 직관 혹은 관조라고 번역되는 이 표현은 유물론만의 고유한 표현이 아니다. 칸트, 훗설 등 독일 관념론과 현상학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인식 주관이 실천과 무관하게 인식 자체를 목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 즉 근대 인식론의 비실천적 인식 태도를 대표하는 개념이다. 맑스는 여기서 ‘직관’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지금까지의 유물론과 한 덩어리로 묶기 위해, 객체의 형식 아래서 파악하는 것을 곧 직관의 형식으로 파악하는 것과 등치시키고 있다. Anschauung이란 단어는 접근을 표현하며 철학에서는 ‘즉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전치사 an과 바라보다는 뜻의 동사 schauen이 합성된 명사다.
따라서 활동적tätige<능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하여 관념론에 의해 추상적으로 – 관념론은 당연히 현실적, 감각적 활동을 그러한<현실적, 감각적인> 것으로 알지 못한다 – 전개된다.
활동적 측면이 전개된 관념론이란 관념론 일반이라기 보다는 셸링 이후의 독일 관념론, 즉 사유 Denken보다 의지 Will를 중시하는 관념론, 그 중에서도 특히 목적론적 관념론, 즉 헤겔 철학을 말한다. 칸트의 경우는, 인식 주관이 선험적 감성 형식과 지성 형식을 통해 인식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구성 능력이 강조되지만, 선험적 형식들이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라 보기는 힘들다. 독일 관념론에서 주체나 정신의 활동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Ich wille, also bin Ich. 나는 의지(의욕)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셸링으로부터 시작되며, 목적론적, 변증법적 철학을 완성한 헤겔에서 절정에 이른다.
변증법은 목적을 실현해나가는 전개의 논리, 운동의 논리다. 헤겔 철학은 즉자 존재이던 정신이 현실 속에서 외화, 대자화되어 자신을 전개하면서 기나긴 여정을 통해 즉자-대자적 존재, 즉 절대 정신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헤겔은 고대 철학 –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 의 영혼 Seele 개념이 갖고 있던 운동성을 부활시켜서 스스로 운동의 원인이며, 한정되지 않는 것으로 정신 Geist을 설정한다. 그리고 목적론을 부활시켜. 정신이 즉자 존재로 머물러만 있다면 정신일 수 없고, 자신을 전개시켜 절대 정신으로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고 설정한다. 이는 하나의 개체가 그 안에 자신의 긍정과 부정, 운동과 정지, 삶과 죽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사고로, 하나의 개체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운동한다고 생각하던 근대의 인과론적, 기계론적 사고와 대립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정신은 스스로 운동하지만, 물질은 스스로 운동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보통 기계론적 사고는 유물론으로 경도되고, 변증법적 사고는 관념론으로 경도되는데, 헤겔은 변증법과 관념론의 만남이 극치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기계론적 사고를 가진 유물론자들에게 인간은 원인-결과의 자연 법칙에 종속된 존재이지만, 헤겔에게 있어 자연은 정신의 외화일 뿐이다. 칸트의 경우에도, 다른 모든 것은 인과적 자연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인간의 정신은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는 모든 자연 세계도 정신의 산물이다. 더구나 그 정신은 활동하는 구체적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들을 초월해 있는 정신이다.
맑스는 구체적인 인간의 활동적 측면, 실천적 측면을 부각시킴을 통해 정태적인 유물론과 동태적이되 구체적 인간 행위를 소외시키고 추상적 정신의 운동만을 강조하는 변증법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감각적인 – 사유된 객체들 Gedankenobjekten로부터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 객체들을 추구한다 : 그러나 그는 인간 활동 자체를 대상적 gegenständliche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단지 이론적 태도 Verhalten만을 정당한 인간적 태도로 고찰하고, 반면 실천은 단지 그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형태 속에서 파악되고 고정된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begreift 않는다.
헤겔에게 있어 감각적인 것은 추상적이고 저차원적이다. 종교, 철학 등 고차원적인 이념은 구체적 혹은 구성적이며,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는 자신을 부분적으로, 추상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개념 Begriff을 통해, 철학적 사유 Denken를 통해 파악된 것이 더 구체적인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이를 뒤집는다. 그는 감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보고 이로부터 추상적 개념이 추론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유된 객체들이 아니라 감각적 객체들을 추구한다. 하지만, 감각적 대상을 객체로서만 다루며, 직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대상을 변화시키는 활동, 즉 노동하면서 감성을 형성하는 인간 활동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직관적인 파악을 통해 인간의 유적 본질을 이성, 의지, 사랑으로 규정하며, 그러한 직관으로부터 벗어난 속물적 실천은 인간에 대한 설명에서 배제한다. 즉, 인간적인 것은 직관적 파악에 의해 획득된 이론적 억제(Verhalten은 억압, 억제, 태도 등의 뜻이 있다) 속에서만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유태인은 사랑과 우정을 외면하고 금전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속물적 인간을 대표하는 표현인데, 포이에르바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독일어로는 한 단어 begreifen이다. 위에서 ‘파악한다’는 말은 fassen의 번역어인데, fassen은 담다, 붙잡다, 이해하다 정도의 의미이며, begreifen은 그 명사가 Begriff, 즉 ‘개념’인 단어로 헤겔 철학에서 감각적인 파악, 이해의 수준보다 높은 구체적, 구성적인 파악, 개념을 통한 파악을 뜻한다. ‘명료하게 파악한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테제 2. 주체-대상의 인식론 논쟁, 진리 논쟁에 대한 비판. 실천을 중심으로 한 주체-실천-대상의 구도로의 철학 전환, 사회적-실천적 인식론, 진리관의 제기
인간의 사유에 대상적 진리 Wahrheit<眞相>가 들어오는가의 문제는 –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 Wirklichkeit과 힘 Macht<장악력, 권력>, 그의 사유의 차안성 Diesseitigkeit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 –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 의 현실성과 비현실성에 관한 투쟁은 순수한 스콜라주의적 문제다.
고대 철학에서 제1철학이 존재론이었다면, 주체 중심의 근대 철학에서 제1철학은 인식론이다. 근대 철학의 논쟁은 로크-버클리로부터 시작하여 칸트의 종합에 이르기까지 인식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주제는 외부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서 표상되는가, 그 표상 작용에서 감각 경험만이 작용하는가, 선험적 관념도 작용하는가, 정신 바깥에 실체는 존재하는가, 실체는 우리의 관념과 일치하는가 등이다. 맑스는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이러한 논쟁들을 대상적 진리 혹은 대상에 대한 참된 상이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의 문제로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인식론 논쟁들은 중세 수도원의 스콜라들이 벌이던 논쟁과 같다고, 즉 공리공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두 번째 테제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정도로, 즉 인식은 주체가 대상을 변형하는 노동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진리란 실천 속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진리가 곧 현실성, 힘, 사유의 차안성이라면 맑스는 진리 상대주의자인가? 실천이 진리를 증명한다면, 실천이라는 검증 기준에서 탈락한 이론은 곧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면, 다시 인식론, 진리관 논쟁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맑스주의 역사에서도 여러 가지 진리관이 제기되었고, 논쟁도 벌어졌다.
위 테제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견해들을 아주 간단하게 구분하면, 첫째, 반영론적 인식론-실증주의 진리관, 둘째, 실천을 통한 주-객 통일성에 기반한 존재론적 진리관, 셋째, 상대주의-실용주의 진리관 등이다.
반영론이란 인간의 의식이 대상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인식론으로 철학의 근본문제를 존재와 의식의 관계 문제라고 말했던 엥겔스로부터 비롯되며, 레닌에 의해 반영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소비에트 공식 철학에서 발전해왔다. 반영론은 낙관적인 표상 이론을 가진 유물론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근대 초기 로크 등이 가졌던 표상 이론과 다를 바 없는 진리론이다. 로크와 다른 측면은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매개이자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으로 감각 경험이 아니라 총체적인 실천이 설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반영론, 유물론, 실증주의의 결합은 20세기 중반 영미 철학의 주류였던 논리-실증주의와 유사하다. 그런데, 논리-실증주의를 둘러싼 분석 철학, 과학 철학 논쟁에서 맑스주의는 검증을 통해 실패한 이론으로 취급받는다. 특히 역사유물론의 명제들은 반증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일 수 없다고 말하는 칼 포퍼의 비판은 반영론에 기반한 실증주의를 채택하는 맑스주의에서는 반박하기 어렵다.
존재론적 진리관은 노동자계급이 진리의 담지자이며, 그것은 노동대중에게는 가능성으로, 노동계급의 당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로 담지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허위이며, 노동대중도 상품 형식 속에서 의식이 사물화되어 실천을 통한 올바른 대상 인식에 실패할 수 있다. 이 진리관은 반영론-실증주의에 기반한 소비에트 공식 철학에서도 수용하고 있지만,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노동자계급 의식을 통해 주-객 통일성, 총체성을 이루어져 사물화된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루카치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맑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보편적 인간해방의 주체임을 주장했는데, 그 논지는 이제까지의 피지배계급들과 비교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 안에 이미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있다는 점, 세계적 교류를 실현할 수 있고 집단적 단결이 용이하다는 점 등 매우 현실적인 분석이었다. 루카치는 이를 진리관의 차원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신비화시킨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진리 담지자로서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실천만을 물신화시키고 맑스주의를 형이상학으로 이끈다.
반영론-실증주의 진리관과 존재론적 진리관은 모두 진리 담지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특권화하게 되는데, 이런 관점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 소개된 맑스주의 교과서들의 주된 입장이다. 한국의 운동에 만연한 노동자주의는 이런 진리관의 수용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진리관들은 90년대에 들어와 맑스주의자들이 다양한 철학적 흐름들을 개방적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이론적으로는 파산을 맞았다. 맑스주의적 실증주의 진리관은 노동자계급의 특권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적인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보다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고, 진리를 주-객 통일성, 총체성으로 보는 루카치의 주장은 20세기를 통해 계발된 다양한 상대주의 논변들, 과학과 이데올로기, 진리와 허위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논변들에 의해 밀려날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와 실용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 서양철학의 주류다. 상대주의자들은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적 진리를 합의의 문제로 바라본다. 실용주의자들은 진리를 진리 효과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며, 실용성이 높은 이론을 진리로 채택한다. 90년대 한국에서 주목받은 여러 철학자들, 데리다, 토마스 쿤, 니체, 로티 등은 모두 상대주의 내지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현실성, 힘, 사유의 차안성”과 등치시키는 맑스의 테제는 어찌 보면 위에서 본 입장들보다는 상대주의, 실용주의의 진리관과 가까운 듯하다. 현실성은 항상 가변적이고, 힘은 합의를 만들어내고 효과를 불러일으키니까. 그리고 20세기의 상대주의, 실용주의 논변들은 상당히 강력하다. 보편적 진리, 절대적 진리의 환상이 무너진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 다시 진리를 주장하든 이런 상대주의, 실용주의의 토대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진리는 자의적이다”는 식의 극단적인 상대주의, 실용주의는 실천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며, 집단적 운동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분명 어떤 것을 집단적으로 진리라 말하고 행동한다. 상대주의, 실용주의의 기반으로부터 어떻게 집단적인 진리를 설명해낼 것인가, 그리고 기초적인 자연과학 명제 등 매우 보편적으로 보이는 진리의 존재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맑스주의와 근대성}에서 이진경은 {테제들}에서의 진리관을 들뢰즈의 ‘계열’, ‘계열화’ 개념과 결부시켜 해명한다. 필자는 들뢰즈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이 글이 진리론에 대한 글은 아니기에, 여기선 결론만 인용하겠다.
“진리란 실천적 맥락에 따라 구성되는 어떤 특정한 계열 안에서, 반복적 진리효과에 의해 타당성을 획득하는 지식이다. 혹은 반복적 진리효과를 갖는 어떤 계열 S가 정의될 수 있을 때, S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명제는 계열 S 안에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진경은 상대주의, 실용주의에 기반하되, 실천적 맥락에 따라 구성되는 ‘계열’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집단적 진리, 다차원적 진리는 물론 진리의 역사적 변화, 불변인 것처럼 보이는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까지도 사고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진리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통해 사고하면 진리가 가지는 보편성, 역사적 가변성, 집단성, 당파성 등을 더욱 명확히 해명할 수 있다.
진리란 언어다. 그것의 의미나 대상이 비언어적인 것을 함축한다 해도 진리는 언어 이상의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특정한 언어-놀이 language game 속에서 작동하며, 언어-놀이는 삶의 형식 forms of life에 의해 규정된다.. ‘벽돌!’이라는 말은 건축현장에서 두 사람의 작업자가 벌이는 언어-놀이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벽돌을 여기로 가져오라!”는 실천과 결부되는 언어 행위지만, 태권도장에서의 언어-놀이라면 “벽돌을 격파하라”는 실천을 낳는 언어 행위일 수 있다. 북조선에서는 “위대한 인민해방투쟁”같은 문맥에서 쓰이는 “인민”은 한국의 지배계급은 “악질적인 인민군”이라는 문맥에서만 쓰인다. “인민군”같은 부정적 표현을 제외하고는 사라져버렸던 “민중”으로 대체되었던 한국 운동권 학생들의 언어-놀이에서도 87년 항쟁을 지나면서 “인민민주주의”같은 혁명 이론의 문맥에서, “인민의 기 붉은 기는”같은 노래 가사의 문맥에서 되살아났다. 이러한 언어-놀이 이론을 진리관의 문제로 확장하면, 진리도 결국 특정한 언어-놀이에서 반복적으로 진리 효과를 가지는 것, 즉 참이라고 여겨지는 것, 믿고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언어-놀이는 삶의 형식에 의해 규정된다. 비트겐슈타인식 진리관이 극단적인 상대주의, 실용주의와 달라지는 지점은 사적 언어가 불가능함을 증명하는 것을 통해 언어의 상호주관성과 공동체적 성격을 규명하고, 그 상호주관적 공간, 공동체는 총체적인 삶의 형식에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삶의 형식’은 매우 광범하게 추측될 수 있는데, 비슷한 신체 구조와 언어 능력을 가진 모든 인간적 삶에 작동하는 자연 환경의 기여, 외부 세계의 효과부터 나라별, 지역별 차이, 한 사회 안에서의 계급적, 계층적 차이까지도 삶의 형식에 포함될 수 있다. 즉, 인간 삶의 기본 조건부터 특정한 생활생산의 양식 – 맑스적 의미에서 -, 그리고 특정한 사회정치적 당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세계인이 아라비아 숫자를 쓰고 있고, 그를 이용한 기본 계산 규칙이 합의되어 있는 상황에서 “1+1=2″라는 명제는 절대적 진리, 보편적 진리로 보인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명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우리가 절대적 진리, 보편적 진리로 여기는 무수한 수학 명제, 기초 자연과학 명제, 기본 윤리학 명제들은 그 명제들이 진리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삶의 형식이 인간에게 거의 공통되기 때문이다. 맑스가 {자본}을 통해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 운동의 법칙이나 그 과정에서 사용한 개념들은 비맑스주의 사회이론가들도 많이 수용하고 있는데, 이는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당파들의 삶의 형식에서 규정되는 언어-놀이에서만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맑스주의는 과학”이라고 말할 때는 이러한 진리 효과를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황론, 코뮨주의 사회의 원리 등은 부르주아 사회이론가들은 결코 수용하지 않는데, 이를 단지 그들의 비과학성, 비진리성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파국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그러한 파국적 경향이 국가의 조절을 통해 완화될 수 있다는 관점, 이 둘 사이에는 이미 그들 고유의 이 사회에 대한 정서적 태도, 지향하는 미래의 차이가 내재해 있다. 이 두 관점은 합의나 일치에 이를 수 없는 당파적 진리다.
이진경이 수용한 들뢰즈의 계열화 이론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삶의 형식 이론을 {테제들}에서 나타난 맑스의 진리관과 결부시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진리나 절대적 진리란 불가능하며, 진리란 인간 생활을 규정하는 자연적-사회적 제 조건인 삶의 형식을 통해 작동되는 언어-놀이에서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 현실성, 힘, 차안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삶의 형식의 범위에 따라 진리의 보편성 수준이 달라지며, 그 삶의 형식 내부에서는 집단적 실천의 빈도와 강도에 따라, 즉 그 계열의 견고함 정도에 따라 진리 효과의 강도가 달라진다. 따라서 진리는 항상 공동체에 기반한 다차원성, 당파성을 가지되, 보편적 지향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덧붙여야 할 것은 삶의 형식의 구분, 공동체의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는 것, 한 사람이 다양한 공동체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다차원성, 당파성은 그가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한 사람 내부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가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삶의 형식)의 차이에 따라, 모순되는 견해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필자가 전개한 진리관도 또 하나의 진리관 논쟁을 불러일으킬 하나의 입장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맑스가 종결을 선언한 인식론 논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맑스나 비트겐슈타인이 하고자 했던 것은 진리 논쟁 자체의 종식이라기 보다는 언어에 대한 이해, 진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주체-대상간의 지시나 표상 관계를 통해 진리를 규정하고자 하던 인식론적 방식으로 벌이는 논쟁을 지양하고, 사람들의 집단적 실천과 언어 사용, 언어를 동반한 행위 속에서 진리, 의미 등을 따져보자는 것이 핵심이다. 즉 인식론에서 관계론, 실천론으로의 전환!
테제3. 계몽주의 비판, 결정론 비판. 결정론적 유물론과의 결별. 상황, 조건을 변화시키며 스스로 변화하는 인간에 대한 주목. 노동에 의한 주체와 물질적 조건의 동시 변형.
환경 Umstände<둘러싼 상황들>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 가르침은 상황들이 인간에 의해 변하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 따라서 그것<유물론적 가르침>은 사회를 두 개의 부분 – 그 하나는 사회를 뛰어넘어 있다 – 으로 측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어떤 선험적인 지성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유물론은 인간이 그를 둘러싼 상황들, 그가 받은 교육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맑스는 이러한 결정론적 유물론과 결별한다. 맑스에게서 우리가 물질적 조건, 구조 등으로 부르는 인간을 둘러싼 상황들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자칫 무엇이든 바꿔낼 수 있다는 주관주의적 환상으로 귀결될 수도 있는데, 그에 대한 맑스의 엄밀한 규정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 자연 환경을 변화시키는 문제와 사회 환경을 변화시키는 문제는 분명 그 변화 가능 수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언급만으로는 모든 자연을 인간화시킬 수 있다는 식의 오만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맑스가 일생동안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항상 인간화된 자연, 즉 사회적 환경이었다. 그는 유물론이란 표현을 주로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서 썼을 뿐이며, 세계 전체를 설명하는 어떤 통일된 철학 체계를 세우려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여기서의 환경은 주로 사회적 환경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아야 하며, 유물론적 역사 이해의 관점에서 모든 주어진 사회적 환경, 사회 구조는 인간의 집단적 행위의 관습화, 제도화에 불과한 바, 먹고 마시고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키는 인간 생활이 가능한 한 모두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제도인 교육과 함께 환경이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여기서 언급하는 환경은 사회 제도, 사회 구조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정론적 유물론은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식 지식을 확보하면 누구나 자신의 이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태도로 귀결된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파악한 진리, 자신들이 가진 합리적 사고가 확산되기만 하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세상이 가능하리라 본다. 계몽주의의 구도 하에서는 당연하게도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가 구분되고, 교육자는 진리를 피교육자에게 전하기만 하면 된다. 진리를 고정된 언어가 아니라 실천적인 것으로 보는 맑스는 인간의 실천과 결부되면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환경의 변화, 그에 따른 진리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진리/비진리, 교육자/피교육자의 고정된 이분법을 거부한다. 고정된 이분법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계몽주의자들은 당연하게도 진리와 교육자를 사회의 나머지 부분들에서 초월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맑스는 초월적 진리와 초월자에 대해 부정하며 내재적 진리, 실천적 진리를 추구하며, 모든 사람이 피교육자이면서 교육자인 미래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전위/대중의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전위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대중이면서 전위인 사람, 대중을 지도하면서 동시에 대중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이다.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실의 운동 속에서 진리를 고정된 것으로, 지도자를 초월적 존재로 사고하는 계몽주의적 편향이 얼마나 심각하게 존재해왔는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의 동시 발생 Zusammenfallen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맑스는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라는 단순한 결정론적, 유물론적 태도를 거부한다. 인간의 변화란 환경을 변화시키는 인간 활동의 변화다.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뒤의 테제 내용과 결부시키자면, 인간이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관계를 맺어나가는 활동 그 자체다. 인간의 변화는 오직 대상적 활동, 즉 자연이건 인간이건 간에 대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활동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물질적-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활동, 행위 그 자체가 바로 한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테제4. 포이에르바하를 비롯한 청년헤겔학파의 종교 비판에 대한 비판. 종교 비판을 넘어 종교의 세속적 토대에 대한 실천적 혁명으로 전환.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종교적인 세계 및 세속적인 weltliche 세계로의 세계의 이원화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토대 Grundlage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로부터 시작되는 청년헤겔학파의 종교 비판은 신에 대한 사랑 속에서 소외되어 왔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복원하려는 휴머니즘적 성격을 가지며, 이론적인 면에서는 당대의 독일에서 가장 급진적인 비판적 사고를 보여준다. 철학적 급진성에 머무는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1843년의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에서 이미 전개된 바 있다. 테제 4의 내용은 {서설}에서의 비판과 비슷한 기조라고 볼 수 있다.
청년헤겔학파의 종교 비판은 ‘철학의 개혁’, 즉 헤겔 철학을 인간학적 유물론으로 뒤집고자 하는 포이에르바하에게서 절정에 달하며, 맑스도 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에르바하는 모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와 의례의 기원은 세속적 인간의 삶에서 기원함을 증명하고, 종교가 신성한 것은 인간의 본질이 신성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종교적 광신은 오히려 참된 신성함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토대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라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킨다는 사실은 이러한 세속적 토대의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으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세속적 토대 자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모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세속적 가족이 신성 가족의 비밀로 폭로된 이후에 이제 전자 자체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파괴되어야 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성한 인간의 유적 본질은 종교에다가 자신을 대상화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정신이 자연에 자신을 외화시킨다고 말하는 헤겔의 명제에 대한 전복이다. 온 세계를 지배하는 헤겔의 정신이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인간의 머리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맑스는 종교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설명을 세속적 기초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천상에 자립적인 영역, 즉 종교를 형성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맑스는 청년헤겔학파의 종교 비판은 “사슬에 붙어 있는 가상의 꽃들을 잡아뜯어 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포이에르바하처럼 종교 비판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사랑과 우정의 눈으로만 세계를 보려 하며,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후진성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포이에르바하와 달리 맑스는 독일 현실에 주목했다. 인간의 유적 본질에 아무리 사랑과 우정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현실은 여전히 비참한 상태, 즉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속적 토대의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부자/빈자, 지배계급/피지배계급의 분열, 부르주아 사회의 수많은 갈등, 계급 모순 등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그런데, ‘분열’, ‘모순’ 등의 표현은 ‘통합’, ‘지양’ 등의 목적을 개념 자체에 함축하고 있는 부정적 개념, 즉 목적론적 용어들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서, 코뮨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문화 혁명이 계속된다고 해서, 과연 분열 없는 사회, 모순 없는 사회는 도래할까? 목적론적 용어의 사용은 코뮨주의에 대한 유토피아적 사고를 조장한다. 또한, 목적론적 용어는 현 사회가 필연적으로 파국에 도달하리라는 식의 안일한 사고 방식을 조장한다.
종교적 환상은 종교 비판만으로 퇴치될 수 없다. 그래서 맑스는 “이는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없는 사슬을 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고 살아 있는 꽃을 꺾어 가지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꽃을 꺾는 일이란 바로 현실 자체를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혁명하는 것이다.
테제 5. 인간학적 유물론과의 결별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직관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 Sinnlichkeit을 실천적, 인간-감각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못한다.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을 비롯한 이전의 주류 철학이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의식이나 지성에서 찾는 것, 즉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는 인간과 동물이 이성에 의해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그 기관인 신체에서부터 동물과 구별된다고 말한다. 헤겔에게서는 정신의 고차원적 단계, 주관 정신을 넘어서 있고 인간의 신체성을 초월해 있는 단계에서야 이성이 가능하고, 예술, 종교, 철학 등은 절대 정신의 단계에서야 가능하다. 반면에, 포이에르바하는 종교, 철학 등을 ‘도야된 gebildeten 감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무리 숭고한 이념이나 종교도 그 본질은 감성 속에 있다. “감정 Gef hl은 당신의 신이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사유를 통한 파악, 개념을 통한 파악에 만족하지 않으며, 감각을 통한 파악, 감성에 의한 직관을 최고의 인식으로 여긴다. 청년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이러한 감성적 인간관과 헤겔 철학 비판을 수용하면서 유물론자가 되었다. 그래서 헤겔 정신현상학의 서술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본}의 연구방식과 서술방식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체-추상-구체의 변증법에 대해서도, {독일 이데올로기}나 {그룬트리세} 등에서는 그 추상이 자의적일 수 있음을, 다양한 추상이 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다양한 추상이 가능하지만, 그 자의적인 추상들 때문에 구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추상 이후에 다시 구체를 직관해야 한다. 즉, 헤겔 변증법에 포이에르바하의 감성적, 직관적 구체성을 결합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은 헤겔-포이에르바하주의로부터 맑스 자신의 철학, 철학이라기보다는 철학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트다. 그 철학 비판은 곧 인간을 특정한 역사의 산물로, 생활수단을 생산하며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로 파악하는 것, 즉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다. 포이에르바하가 인간 일반을 감성적, 신체적 존재, 공동체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 이성,
의지, 심정을 그 유類의 본질로 파악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맑스는 고정된 유적 본질을 거부하고 개인과 그들이 결합된 공동체가 실천적, 인간적-감성적 ‘활동’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실천에 대한 주목을 통해 맑스는 인간학에 머무른 포이에르바하가 보지 못했던 세속적 삶의 비참함과 역동성을 볼 수 있었다.
테제 6.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 거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서의 인간 파악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 현실에 있어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 ensemble 이다. 이러한 현실적 본질에 대한 비판으로 파고들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강제된다 : 1. 역사적 진행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 고정시키고 하나의 추상적 – 고립된 – 인간 개체를 전제한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유類 Gattung”로서만, 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환상적 반영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종교적인 것, 신성한 것은 곧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간주의는 모든 개인이 신성하다고 말하며 에고이즘을 주장한 막스 슈티르너의 공격을 받게 된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신성함의 담지자가 종교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개인으로 확장되는 이 과정을 “저 존경스런 성 막스가 일괄적으로 세계를 성스러운 것으로 선포하고, 그리하여 세계를 단번에 정리할 수 있게 되기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확대 일로로 성도 명부 聖徒 名簿에 올려졌다”고 풍자하고 있다. 즉 그는 종교에 반영된 인간에 대한 특정한 추상적 규정들, 즉 사랑, 우정 따위로 인간이나 개인을 고정시켜 설명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보았다. 맑스는 그러한 추상물을 통한 인간 파악, 인간학적 철학을 거부하고 ‘유물론적 역사 파악’으로 나아가는데, 그 철학적 전환의 전제가 바로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전의 몇몇 번역본에서 ensemble은 ‘총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영어본들이 ‘totality’라고 번역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총체’라는 말이 정태적인 총합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하다면, 본래 불어인 ensemble은 역동적이고 다양한 변화 과정의 의미가 강하다. 각각의 인간 개체 속에서 선성한 인간의 본질이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사고 방식은 인간의 역사적인 변화, 사회적 관계에 따른 변화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 본질은 인간의 다양한 구체적, 사회적 성격을 파악할 수 없고 자연적 일반성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랑과 우정으로 인간의 본질을 고정시켜 파악하는 포이에르바하의 비역사적 인간관은 인간과 사회가 특정한 도덕 원리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관념론자와 비슷해진다. 그런데, 뒷날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인간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맑스가 인간의 본질을 노동에서 찾았다고 주장하곤 했다. 테제6에서 맑스가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 본질에 대해 새롭게 규정하기 위해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 본질을 찾는 인간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하는 앙상블이 ‘본질’이라는 개념에 적합할 수 있는가? 맑스가 {경제학-철학 초고}나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 등 여러 다른 저작에서도 노동이 인간의 형성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언급하는 구절은 많다. 그러나 이를 통해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맑스의 철학 비판 정신, 인간학 비판 정신에 걸맞지 않을 뿐 아니라, 쓸 데 없는 논쟁만 양산할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인간 역사의 다섯 가지 전제를 분석하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맑스는 실제로 인간 삶을 규정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분석하는데 주력했을 뿐이다. 따라서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맑스가 인간 실존의 조건을 ‘경제적인 것'(노동)에서만 찾는다고 보면 큰 오해이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간의 실존 및 모든 역사의 전제를 ‘먹고사는 것'(물질적 생산, 경제), ‘새로운 욕구의 창출’, ‘생식’, ‘산업 및 교환’, ‘의식과 언어’로 제시하고 있다.
테제7. 심성과 도덕 개념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접근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Gem th”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임을, 그리고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체가 하나의 특정한 사회 형태에 속함을 보지 않는다.
인간학 비판의 결과로 맑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의 본질로 보고 있는 종교적 심성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이라고 보며, 그 밖의 모든 심성이나 원리들도 그렇게 파악한다. 맑스에게 있어 일반적인 사랑, 우정, 도덕, 원칙 등은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모든 도덕적 개념은 특정한 사회 형태 속에서, 그들의 실천적 삶 속에서의 효과를 통해 규정된다.
테제8. 신비에 대한 합리적 태도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 Mystizism[us]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들은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 Begreifen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발견한다.
여기서 “합리적인 해결”을 인간이 모든 신비를 해명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테제2에서 볼 수 있듯이 맑스는 인간이 객관 세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 없는가 따위의 문제(인식론 논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뒷날 소비에트 교과서들이 엥겔스의 후기 저작 몇몇 구절을 인용해 철학의 근본 문제를 첫째, 사유와 존재의 관계로, 둘째, 세계의 인식 가능성 문제, 즉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문제로 설정하며 인식론적 낙관주의를 천명했는데, 이는 맑스의 철학 비판을 인식론 논쟁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맑스는 인식론의 논쟁선상에서 유물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합리적인 해결”이란 실천이 신비 자체의 일소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신비주의로 이끄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실험과 산업의 발전에 의해 이 세계 속에 있는 무수한 신비를 해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명할 수 없는 신비를 신비주의로 포장하지 않고 미완의 과제나 인간 인식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것, 따라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로 간주하면 되는 것이다.
테제9. 근대 유물론과 시민 사회의 관계
직관하는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개념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이르는 정점은 각각의 개체들과 시민 사회에 대한 직관이다.
근대 정치학은 각각의 시민들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계약을 맺는 것이 국가이며, 자신의 주권을 합리적으로 사용한다고 전제한다. 근대 정치경제학은 시장에서 모든 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한다고 전제한다. 즉, 근대적 개인에게는 이미 주권의식, 자기 이해 등이 명확히 내재해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개인 – 하인, 노동자, 재산이 없는 자 등 – 에 대해서는 계몽해야 하거나 주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 개인들에게 인간의 본질이 자연적 일반성으로 내재해있다고 보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관은 로크, 아담 스미스, 루소 등 초기 시민사회 이론, 근대 정치학, 정치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합리적 개인에 대한 사고와 유사하다. 다만, 그 내용이 냉혹한 이기적-합리적 개인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을 개체 속에 갖고 있는 유적 인간이라는 데서 차이가 난다. 이기적-합리적 개인이 근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듯이,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적 인간은 냉혹한 화폐 관계의 발전이 미약한 후진국 독일의 산물일 뿐이다. 즉, 미발전된 시민 사회의 개인들에 대한 직관이다.
테제10. 시민 사회에 기반한 유물론과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는 유물론
낡은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 사회 b rgerliche Gesellschaft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류 gesellschafrliche Menschheit이다.
홉스, 로크, 프랑스 계몽주의, 루소에서부터 포이에르바하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론자들이 서 있는 지점은 시민 사회다.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개인은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개인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 형성된 개인들일 뿐이다. 그들은 이 개인들이 어떤 물질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는가를 탐구하지 않고, 그 조건 자체가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유토피아에 빠졌다. 그들은 봉건적 잔재만 일소되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 계약으로 성립되는 국가와 합리적 개인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에 의해 이상적인 시민 사회가 성립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환상은 프랑스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부르주아 혁명 이후 도래한 시민사회의 대혼란과 국민투표에 의한 루이 보나빠르트의 집권, 공황이라는 시장의 재앙 등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근대적 개인들을 형성시키는 물질적 조건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유물론은 사적 소유의 철폐를 통해 진정한 사회 계약, 자유인의 연합체를 위한 전제 조건을 마련하려 한다. 따라서 그 입지점은 사적 소유가 자유로운 사회 계약을 가로막고 있으며, 화폐 축적 경쟁이 자유로운 인간 교류를 가로막고 있는 시민 사회가 아니라, 그러한 물질적 조건의 장애가 철폐된 사회다. 맑스는 여기서 이를 ‘인간적 사회’, ‘사회적 인류’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봉건 시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공동체 Gemeinschaft가 아니라 근대적 개인들이 그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면서 형성하는 새로운 연합체이기에 사회적 Gesellschaftlich이다.
테제11. 실천적 유물론으로의 전환 선언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고대 철학은 주로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했고, 이 문제를 주체의 관점에서 더 냉철하게 고민했던 근대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해왔다. 맑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객관 세계가 이러저러하다고 설명하는 무망한 과제를 위해 고뇌하는 철학, 객체로부터 분리된 주체의 사색이 아니다. 세계는 고정된 객체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행위 공간이다. 주체의 실천 속에서 변화되어 나가는 세계가 인간의 사유 대상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곧 실천 대상이기도 하다. 이 테제에 대한 과도한 해석은 주관주의로의 경도다. 객관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든 간에 주체의 실천만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맑스도 {자본}과 같은 저작들에서 객관 세계의 운동 법칙을 해명하고자 노력했다. 정태적인, 고정된 세계의 법칙이 아니라, 지금 그 구조나 체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위하도록 유도되는가를, 즉 운동 경향을 탐구한 것이다. 실천적 유물론자인 맑스에게서 법칙은 고정불변의 원리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 단계에서 인간 행위를 규제하는 물질적 힘, 경향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물질적 힘의 형성,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간 행위들에 의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될 수 있다. 주체에게 주어져 있는 객관 세계의 힘을 파악하되, 그 힘이 주체들의 행위를 초월해 있는 절대적 힘이 아니라 현재 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주체들의 행위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깨닫고 다른 행위들을 통해 그 고정불변인 듯 보이는 세계를 변화시켜나가는 것, 이것이 실천적 유물론의 세계에 대한 태도다.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던 유물론자들에게는 주체와 객관 세계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었고 둘은 분리되어 전자가 후자를 인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실천적 유물론은 그 거리 자체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주체와 객관을 매개하는 인간의 행위들, 실천을 주목한다. 실천적 유물론은 실험과 산업의 발전, 사회 변혁을 통해서 그 거리가 좁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거리가 완전히 해소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인간에게 모든 인식론적 난제들은 사라질 것이다. 맑스는 그런 인식론적 낙관주의자,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루카치는 계급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을 통해 주-객 동일성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면서, 맑스의 실천적 유물론을 신비화시켰다. 나는 맑스가 실천을 통해 객관 세계의 신비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해명되건 아니건 간에 인간은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세계에 대해 개입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맑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사회적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이 주어진 객관 세계의 힘과 구조가 수많은 인간들의 행위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는 개인의 마음대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객관 세계의 운동 경향, 타인의 행위들, 나의 행위의 마주침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주어진 객관 세계의 운동 경향은 ‘필연’이며, 개인들의 행위는 ‘우연’이다. 우연들의 마주침은 나의 목적의식적인 관계 맺음과 전략적 행위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유한한 능력을 가진 인간에게 그보다는 계획과는 무관한 마주침들이 더 많다. 이 우연들의 마주침이 필연의 변화, 새로운 필연을 형성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혁명적 상황을 항상 목적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우리의 의지에 의해 그런 상황이 마음대로 도래하지는 않는다. 혁명적 상황이 계획에 의해 도래하지 않고, 쉽게 예견할 수 없다고 흔히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쉽게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혁명적 상황에 이르는 마주침을 조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새로운 필연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참된 혁명가, 목적의식적 인간이다. 철학에 있어서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 사회학에 있어서의 행위 이론과 체계 이론의 대립, 맑스주의에 있어 주의주의와 경제주의의 대립은 이러한 실천적 유물론, 관계론적 행위-물질주의의 관점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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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필립 카우프먼
출연: 제프리 러쉬, 케이트 윈슬렛, 조아퀸 피닉스, 마이클 케인
이 영화는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낳게 한 마르키스 드 사드(Marquis de Sade) 후작의 광기 서린 성적 예술적 집착에 관한 묘사를 한다. 잡지를 통해 소개받은 사드 후작의 면면에는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나 가학적(심하면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은, 구질구질함이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면면은 생략하고 들어간다. 필립 카우프먼이 말하려는 것은 광기의 억압, 성의 억압, 표현의 자유의 억압이고 – 사드 후작의 성행위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광기, 특히 예술에 더 비중이 실린 듯한, 제목도 Quills(깃 촉)이 아닌가 – 사드 후작은 그 테마를 위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보는 내내 떠오르는 것은 작년에 읽었던, 고전주의 시대부터 정신 병리학에 걸치기까지 광기를 다스려 온 유럽의 이성과 권력…이 거대한 테마를 소상하게 고고학적 자료를 들이밀고 폭로했던 푸코의 ‘광기의 역사’였다. 물론 이 영화가 이 책과 요철과 같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예의 경험으로 인해 – 책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읽은 책은 꽤나 내 생각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듯 하다 – 그 책의 내용에 맞도록 이 영화를 재단하고 있었다. 아차 하여 정신차리고 보려 했지만 많이 늦은 듯 했다.
때는 아마도 비이성, 특히 광기를 일종의 ‘질병’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인 듯하다. 아니, 대화와 같은 정신적 방법을 통해 치료하려고 하는 젊은 병원 원장 쿨미에 신부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 후인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광인을 병자로 간주하고 일종의 ‘병원’ 시설에서 보호하고 치료하여 ‘정상인’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했나 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육체적,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것, 그것을 통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분별하고 자신은 지금 정상적이지 못하며 빨리 이 비정상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함을 경각시키고 정상으로 돌이킬 수 있다고 우직하게 믿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이라는 녀석의 합리적 판단이었나 보다. 아무튼 그 시기에 사드 후작은 온갖 기행(물론 성과 관련된 것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거기에 대한 묘사는 없다)을 저지르며 광인으로 취급받았는지 쿨미에 신부가 있는 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는 성적 욕망을 실제 섹스로 푸는 것보다는 펜끝으로 풀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펜끝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얼마나 변태적 표현으로 가득차 있고 얼마나 사람들이 그 언어로 인해 열광할지를 아는지라 나폴레옹(키 정말 작게 나온다. 의자에 앉아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니…)의 모종의 조치를 당한 것이다. 아무튼 그의 쓰고자 하는 욕망은 갇혀 있는 방 안에서는 가능하나 밖으로의 유출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병원의 하녀 매들린을 통해 사드 후작의 글이 밖으로 나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판이니 쿨미에 신부는 그의 성적 욕망의 배출구를 모두 차단하기에 이르지만, 사드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그는 억압당하는 성적 욕망을 부단히 표현하며 세상의 권력에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저항을 통해 억압당하는 진실을 밝히는, 즉 일종의 세상의 또다른 진리를 밝히는 예술에 대한 그의 강인한 의지가 그려진다. 그러나 자신의 글로 인해 충동받은 환자 한 명이 매들린을 그 글대로 잔인하게 죽이는 데에 이르러서는 방기된 자유에 대한 신중함을 권고하는 듯도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거의 일관되게 이성의 권력적, 폭력적 횡포를 폭로하고 예술적, 비이성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 웅변한다. 이는 가학적 변태성이라는 사디즘의 원조 사드 후작보다 더 가학적인 이성적 정신병리학 의사 꼴라의 행태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정신적 평온과 욕망의 억제를 부탁하던 그 침착하고 이성적인(또는 종교적인?) 쿨미에 신부가 종국에는 사드 후작의 뒤를 잇게 되는 결말부의 설정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 또한 이성적 지식만이 우리의 인식을 독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든 방기된 인식은 재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온 몸을 원고지 삼아 소설을 써 버리고 자신의 몸이 곧 소설책이 되어 버린 사드 후작은 거만하고도 광기에 찬 표정으로 웃음지으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