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ritte 홈페이지에서 퍼옴

학생운동

청춘을 불사른 반란의 불꽃

68년 유럽을 뒤흔든 젊은이들의 혁명 열기… 씁쓸한 패배로 끝난 반권위주의 몸부림

(사진/‘반권위주의’에 대한 공감이 68년 유럽의 학생들을 반란의 광장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사회적 행동주의에 냉소를 퍼붓는 분위기이지만, 68년 유럽에서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힘을 합쳐 사회를 한번 바꿔보겠다는 꿈을 꾸던 사람들이 있었다. 엉뚱하게도 그 꿈의 주체는 자본주의하에서 착취를 당한다는 노동자계급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후의 경제붐 시대에 태어나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란 대량소비시대의 젊은 학생들이었다. 대체 왜 이들이 혁명의 주체로 나섰던 것일까? 갑자기 다가온 혁명의 파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급진적 혁명의 요구는 오직 제국주의적 침략과 착취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일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유럽의 길거리에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체, 체”라고 외치는 게바라의 티셔츠가 걸어다녔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답답한 세상, 버릇없이 살고 싶었다

원래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64년부터 미국의 학생들은 마틴 루터 킹의 흑인운동과 연대를 표명하고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격렬한 정치적 운동, 잘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탈주하려는 히피문화와 같은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이 운동이 70년까지 비교적 조용하게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미국에서 불어온 이 새로운 바람이 유럽에서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유럽의 전후사를 나눌 정도로 요란한 운동을 낳았다. 이 운동은 짧고 격렬했다. 독일에서는 길어야 1년이었고 프랑스에서 이 운동의 생명은 고작 한달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에 학생들은 학교를 점령하고, 공동체를 결성하고,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수십만의 인파를 모을 수가 있었다.

(사진/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바스티유’를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앙시앵 레짐’까지 걷어내지는 못했다)

대체 왜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 독일의 경우 이 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된 것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이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에서도 그 운동을 이론적으로 대변할 법한 푸코 같은 사람조차 시위현장의 밖에 머물렀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졌던 68의 아이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현란한 이론이나 그들이 표방한 요란한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반권위주의라는 문화적 특징일 게다. 언젠가 아르테라는 방송에서 내보낸 68특집에서 이제는 중년이 된 당시의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버릇없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구세대에 대한 신세대의 문화혁명, 그러니까 급속한 경제성장기를 거쳐 바야흐로 ‘보수적으로 철저하게 관리되는’ 안정기로 이행하던 시기의 답답한 사회에 숨통을 트려는 마지막 생명의 몸부림이었을 게다.

학생들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원했다. 그들은 당시에 지구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던 또 하나의 대중 반란, 즉 마오의 문화혁명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이 원하던 민주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민의를 왜곡하는 구세대의 부르주아적 대의체제를 대체할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이었다. 물론 이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독일 학생들은 기성세대에게 이러저러한 요구를 내세웠다. 민주적 대학개혁, 비상조처법 도입 반대, 극우파의 의회진출 저지, 미디어 무굴제국의 여론조작에 대한 반대, 그리고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 및 종전. 극우파의 의회진출을 저지한 것 하나를 빼면 이 요구들 중 어느 하나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68은 패배한 운동이었다.

꺼져가는 불꽃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짧게 퍼득이던 반란은 곧 사그라진다. 시위는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해산되고, 운동의 지도자 두치케는 우익에 암살당하고, 한 때 반란의 열기에 도취했던 배우들은 운동의 참담한 실패를 목격하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어 다시 보수의 역공이 시작되고, 살아남은 자들 중의 일부는 민족공동체주의를 설파하는 우익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 실패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집요한 극성파들은 좌익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고, 이들이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그 잔인한 납치극과 처형극은 물러가는 68의 이미지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이로써 68년 봄은 더이상 기억하기 싫은 추억이 된다. 그리고 떠들썩한 주연 뒤에는 언제나 취중에 했던 언행에 대한 부끄러움이 따라다니는 법.

68은 패배한 운동이었다. 그것도 완벽히 패배한 운동이다. 하지만 원래 운동은 패배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 잔인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68의 반란은 거기에 참여했던 대중의 머리 속에는 황홀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체제에 반란을 하는 것처럼 완벽한 해방의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세대가 앞으로 또 그런 경험을 하겠는가? 68은 실패했으나 사람들은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거리에서 외치던 이상은 현실 속에 ‘무의식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효과다. 가장 일상적인 예로 하숙집 방에서 만나는 연인이 주인 아줌마에게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방문을 열어놓을 필요가 없게 된 것도 68 이후다. 학교에서 사제관계를 규정하던 권위주의가 무너진 것도 68 이후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오늘의 정치에는 분명히 그 반란의 경험이 각인되어 있다. 사민·녹색 정권의 수장인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요슈카 피셔도 68년 봄에는 청바지를 입고 길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광란을 바라고 있는가

68세대의 반란을 우리는 386이라는 이름으로 체험했다. 우리의 저항은 체포와 강집, 투옥과 고문, 학살과 변사로 얼룩졌다. 그러하기에 확립된 복지제도와 비교적 확립된 대의민주주의를 가졌던 선진국에서 일어난 아이들의 반란이 우리 눈에는 그저 배부른 애들의 투정으로만 보인다. 우리세대는 그들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 우리는 바스티유를 무너뜨렸다. 87년 거리에 나갔던 어느 후배는 그때의 경험이 “황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네티즌의 말대로 “바스티유는 무너졌으나 앙시앵 레짐은 남아 있다.” 정확하게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앙시앵 레짐과 싸웠던 68의 반란은 아직 우리에게 다가와야할 미래의 축제로 남는다.

우리의 운동이 패배로 끝났듯이 그 축제 역시 패배로 끝날 것이며 또 패배로 끝나야 한다. 이 답답한 시대에 그 반란은 언제 시작될 것인가? 낡은 우리 세대가 신세대와 연대하여 이 새로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독일에서도 68세대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체험을 한 ‘89세대’를 연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신세대의 그것에 비해 우리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집단주의적이다. 68세대가 가졌던 그 철저한 반권위주의, 래디컬한 평등의식이 우리에게는 없다. 바스티유를 무너뜨리려면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적을 닮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저 실패한 그 혁명의 효과를 조용히 자기 삶의 주위에 퍼뜨리면 된다. 우리 역시 잠시 후면 사회의 의사를 결정하는 위치에 오를 것이다.

흉물스럽게 남은 앙시앵 레짐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신세대의 일이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과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서울대에 처음으로 비운동권 학생들이 학생회장에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학생회라는 또 하나의 앙시앵 레짐에 대한 반란인지도 모른다. “×같은 세상, ×같이 살자.” 그런 의미에서 거기에는 진보적인 면까지 있다. 하지만 나를 씁쓸하게 하는 것은 이 ‘광란’이 실제로는 가짜 광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말 광란이 되기에 그것은 너무나 안 위험하다. 유세장에서 춤추고 어쩌고 하는 유치한 짓은 제발 중·고등학교와 함께 졸업하고, 이제 정말로 위험한, 정말 막가는 진짜 반란을 일으켜 보라. 그렇게는 못 하겠지?

진중권/ 자유기고가

MarxEngels 홈페이지에서 퍼옴

알기 쉬운 마르크스주의

Chris Harman                                    

1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왜 필요한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론이 필요한가? 우리는 사회 불안정과 경제 공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고용주들한테 착취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밖의 것은 먹물들한테나 맡겨 두라.” 우리는 사회주의자 투사들이나 심지어 노조 운동가들 중에서도 이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흔히 본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또,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하지만 실제 생활 상식에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고도 말한다.   이런 말은 사실 사회 변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강력히 선전하는 견해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의도는 마르크스주의란 모호하고 복잡하며 지루한 교조(敎條: ‘ism’)일 뿐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이런 주장의 대변자들이, 자기들은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보통은 자기들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한테 사회적 문제에 관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면 이런저런 식의 일반화를 해가며 대답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야.”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기업인이 없으면 우리에게 일자리 줄 사람도 없어.” “도덕적 타락으로 그 나라가 그 꼴이 되었지.” 도대체 이런 주장이 얼마나 많은지 어디서건 들을 수 있을 지경이다. 공장에서건 사무실에서건, 술집, 다방, 식당, 그 어디서건 말이다. 어느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사회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다. 위의 견해들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사회 “이론”들이다. 누군가가 자기는 이론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정리해 둔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태도(이론 경시 풍조–옮긴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소위 대중 매체들이 한결같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한 의도적인 해석을 우리 머리에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들은 우리가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떠드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 다양한 주장에서 거짓된 바를 인식해 내지 못한다면 사회 번혁을 위해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없다.  

이것은 150년 전 처음으로 입증되었다. 1830년대와 40년대 영국 북서부 지방은 공업이 발달하여 수십만의 남녀 성인 노동자와 미성년 노동자들이 비참한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열악한 생활 조건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은 최초의 노동자 대중 조직을 결성하여 싸웠다. 그것은 최초의 노동조합이었고, 영국 최초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므로 인민헌장 운동(차티즘: Chartism)이라 불렀다. 물론, 인민헌장 운동은 소집단으로 이루어진 다른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도 병행되었다.   노동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문제가 즉각 부과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회 지도자들을 평화적으로 설득하여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들 말했다. 즉, 대중의 ‘도덕적 힘’, 다시 말해서 평화적 운동으로도 노동자들한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 견해에 근거하여 조직하고 시위하고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과는 패배와 사기저하였다. 어떤 이들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필요는 인정했는데도, 이 힘이 사회로부터 유리된 매우 작은 음모 집단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동의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의 투쟁도 패배와 사기저하로 끝나고 말았다. 또,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이 군대 및 경찰과 대적하지 않고 경제투쟁을 통해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중의 행동이 뒤따랐다. 1842년 세계 최초의 총파업이 영국 북부의 공업 지대에서 일어나 4주일이나 계속되었지만,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작업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패배를 거듭하던 노동운동의 제1단계의 끝무렵인 1848년에 독일인 사회주의자인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란 소책자에서 자기 사상을 남김없이 명확하게 밝혔다. 그의 사상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에서 제기된 현실 문제들을 취급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사상은 오늘날과도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가 140년 전에 ㅆㅓㅅ다고 썼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맞서서 논쟁을 벌였던 온갖 사회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인민헌장 운동가들이 ‘도덕적 힘’이냐 ‘물리적 힘’이냐 하는 것을 논했듯이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도 ‘의회 사회주의’냐 ‘혁명적 사회주의’냐 하는 것을 논하고 있다. 혁명가들 중에서 테러리즘에 찬성하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이 1848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관념론  마르크스가 사회 문제들을 해석하려고 저술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공장에서는 기술 혁신으로 그 이전 세대가 꿈도 꿔보지 못한 규모의 부(富)가 축적되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가 전(前)시대 고통의 원인이었던 자연적 재앙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술 혁신과 그에 따른 엄청난 부의 축적이 대다수 대중의 생활 향상을 가져오진 못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남녀 성인 노동자들과 미성년 노동자들의 생활은 토지를 경작하던 그들의 조상들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들의 임금은 그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대량 실업의 주기적 발생으로 아예 최저 생계비를 훨씬 밑돌 정도였다결국, 그들은 비참하고 열악한 빈민가로 내몰려 적절한 의료도 받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시달리곤 했다. 자본주의 공업화는 전반적인 행복과 복지를 가져오는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더욱 혹심한 빈곤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   이를 주목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영국 시인 블레이크(Blake)와 셸리(Shelly), 프랑스 사회주의자 푸리에(Fourier)와 쁘루동(Proudhon), 독일 철학자 헤겔(Hegel)과 포이에르바흐(Feuerbach) 같은 이들도 자본주의 착취 현상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 처한 이 불행한 상태를 ‘소외'(alienation:Ent fremdung)라고 불렀다. 요즘도 흔히 듣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가 과거에 했던 행동에 지배되고 억압받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神)이란 관념을 만들고 신 앞에 엎드려 절하고 나서는, 자기가 만든 것(즉 신)에 따라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낀다고 포이에르바흐는 지적했다. 그리고, 사회가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오히려 인간은 더욱 비참해지고 ‘소외’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에서 이 ‘소외’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를 창조한 사람들, 즉 직접 생산자들의 삶에 적용하였다. “노동자는 부를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의 생산 능력과 생산 범위가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더 가난해진다…… 물건의 가치가 증가함에 비례해서 인간의 가치는 하락한다…… 노동의 산물은, 소외된 그 무엇으로서, 즉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어떤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하게 된다.”  

마르크스 시대에 사회 문제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설명은 여전히 종교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사회의 불행은 신이 자기들에게 명령하는 바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를 버릴 수가 있다면야 모든 게 잘 될 텐데……” 이와 비슷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다. 보통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이 마르크스 시대의 설명과의 차이라면 차이랄까. 현대의 통속적인 견해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개인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기의 ‘이기심’이나 ‘물질주의'(혹은 ‘집착’)를 버릴 수만 있다면야 사회는 자동적으로 나아질 텐데……”   이와 관련있는 어떤 견해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권력을 쥔 ‘소수’의 핵심적 인물들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이 “이치를 깨달아 반성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이라는 한 영국인 사회주의자는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좀더 친절하게 대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어용 노조 지도자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용자들의 범죄를 “실수”라고 부르는지 주시해 보라. 마치 약간의 분규만으로도 대기업을 설득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견해들을 ‘관념론'(idealism)이라고 못박았다. 사람들이 ‘관념'(ideas)을 갖는 것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견해들이 관념을 인간의 생활 조건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관념론’이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관념은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종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기심”(혹은 “탐욕”)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이기심을 조장하고 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조차 이기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억누르기 어렵다. 아이들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젊은 아버지 노동자나 쥐꼬리 만한 월급을 부모에게 송금하고자 하는 효녀 노동자는, 처자 부양과 부모 봉양을 위한 유일한 길이 끊임없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서 더 나은 직장을 얻고 좋은 조건의 잔업을 얻으며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사회의 노동자들은, 개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기심’이나 ‘탐욕’을 버릴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권력과 부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훨씬 더 웃기는 얘기다. 만약 어떤 대기업 회장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당해 사회주의 관념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한테조차 관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관념을 형성시킨 모태인 사회 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요점을 달리 설명해 보자. 관념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관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사회에 살고 있다. 제도 언론과 제도 교육이 오도(誤導)하고 호도(糊導)하고 있는 관념이 옹호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이념기구가 강요하는 관념과 완전히 다른 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들의 일상 경험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요즈음 왜 “의식화”한 노동자들이 70년대보다 늘어났는가 하는 것을 단순히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급진적 관념에 전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로서, “위인”들의 영향을 설명하려면 왜 대중이 그들을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에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해 봤자 헛일이다. 결국, 위인들을 대중 최면술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사회 생활의 무언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가 옳은 듯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관념이 어디서 나온 것이며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관념이 역사를 바꾼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관념의 이면에 숨어 관념을 형성시킨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을 검토할 때만 관념의 혁명적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2 역사에 대한 이해

  관념 그 자체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의 사상가들처럼, 역사를 이해하려면 인간을 물질 세계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자연물(自然物)의 행동처럼 물질적 힘들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그러므로, 인간학은 자연계(自然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일부였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상가들을 유물론자(materialist)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이 여러 가지 종교적·관념론적 역사관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 조건을 바꾸는 것에 관해 과학적으로 논하려면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한다거나 사람들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념론을 버리고 유물론을 택하는 것은 ‘신비한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과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물리학에도 그릇된 “이론”이 있듯이, 사회과학에도 잘못된 이론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첫째 예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기계적인 유물론의 시각으로서, 인간이 몇 가지 측면에서 “본성적”(natural)으로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견해이다. 늑대가 ‘본성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고 양이 ‘본성적’으로 온순하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적이고 지배욕이 강하며 경쟁적이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여성이 ‘본성적’으로 부드럽고 남자에게 순종적이며, 부모와 남편을 공경하고 매사에 수동적이라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견해를 근래에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인간·동물 동일 본성론'(the naked ape view)이다. 이 지극히 반동적인(reactionary) 주장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공격적이라면 사회를 개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으례 똑같을 테니 혁명을 통하여 새 사회를 건설하여도 그 사회는 항상 실패작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 본성”(human nature)은 사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전의 많은 사회에선 존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수'(Sioux)족 인디안들한테 지능검사를 실시하려 했던 과학자들은 ‘수’족 인디안들이 왜 서로서로 협력해서 답을 구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인디안들이 사는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강조했던 것이다. “공격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럽인과 처음 대면한 에스키모인들은 도대체 “전쟁”이란 말(그들에게는 ‘말’이 아니라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이 뭘 뜻하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쓸어버린다’는 생각은 그들한테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에서는 젖먹이를 산속에다 버려 놓고 추위를 이기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겼다.  

또한, ‘불변의 인간 본성’론은 역사 속의 대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 또는 잉카제국의 찬란한 영광, 근대 공업 도시 등에 살았던 인간들이, 중세의 진흙 오두막집에 살았던 무지한 농민과 같은 수준—동렬—에 놓이게 된다. 거기서 중요한 건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지, 그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세운 장대한 문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가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먹이는 데 성공한 반면, 어떤 형태의 사회는 수백만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굶겨 죽인다는 사실은, ‘불변의 인간 본성’론자들한테는 의미 없는 얘기일 뿐이다.

  

두 번째 예도 역시 많은 이들이 신봉하고 있는 통속적인 것으로서, 이 또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나온 것인데, 인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물이 써커스에서는 정글에서와 다른 행동을 하도록 길들여질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도 이와 유사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인즉, 제대로 된 사람들이 사회를 통제하기만 한다면 ‘인간 본성’도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확실히 ‘불변의 인간 본성’론보다 진일보한 견해이지만, 사회 전반이 바뀔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역시 실패작이다.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현재의 사회 조건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면, 사회 조건을 딛고 넘어서서 제어장치(制御裝置)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아는 이가 도대체 누가 있을까?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여러 압력을 마술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가 써커스에 나오는 동물이라면 누가 사자 조련사란 말인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결국에는 ‘인간 본성 불변’론자들처럼, 사회란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거나, 혹은 변화는 신이나 위인 또는 개개 관념의 힘과 같은 사회 밖에 있는 어떤 것이 만들어 낸다고 믿게 된다. 이쯤되면, 이들의 “유물론”은 신판(新版) 관념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런 “이론”은 결국에는 반드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분이 사회를 초월하고 있는 걸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류의 견해는 그러므로 흔히 반동적이다.   오늘날 이 견해의 지지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스키너(Skinner)라는 미국의 보수 심리학자이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그들을 ‘제약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므로 그가 주장하는 “제약한다”는 말은 사람들을 그 사회에 순응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세 번째 사이비 유물론적 견해는 세계의 모든 불행을 인구 증가 탓으로 돌린다. 이 견해는 주창자인 18세기 말의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Malthus)의 이름을 따라서 맬서스 학파(Malthusian)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인구 증가’론은, 예컨대 미국에서 150년 전에는 1천만 명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밖에 생산되지 못했는 데 반해, 지금은 2억 명을 먹이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견해는 식구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노동할 수 있고 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난다는 것을 잊고 있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서술한 그릇된 설명들을 ‘기계적’ 혹은 ‘천박한’ 유물론의 여러 형태라고 불렀다. 이들 기계적 유물론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망각하고 있다.     역사 유물론   “우리는 인간을 의식, 종교 또는 그 밖의 무엇을 통해서든 동물과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은 생활 수단, 즉 의식주의 수단을 생산(강조는 옮긴이의 것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다.”—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사회 발전 과정을 독특하게 설명하였다.   인간은 유인원의 후손인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관심거리는 배를 채우고 외부의 기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이 이러한 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타고난 생물학적 육체 조건에 달려 있다. 늑대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능에 따라 결정된 방법대로 먹이를 사냥해 잡아 먹음으로써 살아 간다. 또, 추운 밤에도 털 덕분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새끼들은 타고난 행동 양식대로 기른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실, 10만 년 내지 3만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하던 인류는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생활했다. 그들은 동굴이나 땅에 구멍을 파고 살았다. 음식이나 물을 담을 그릇도 없었고, 식량은 낱알을 줍거나 돌로 맹수를 때려 잡아 해결했다. 글씨를 쓸 줄도 몰랐고 손가락 셈 이상의 계산을 할 줄도 몰랐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이웃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자기네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실제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10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 인류의 신체 조건과 유사하고, 3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인과 똑같았다. 만일 혈거인을 목욕시키고 면도까지 시켜 양복을 입혀 번화가를 걷게 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그를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C. Gordon Child)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의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이 지질학적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약 2만 5천 년 전에 인간의 문화적 진보가 막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 이래로 인간 육체의 진화는 사실상 멈추어 버렸다.”  

또 다른 고고학자 리키(Leaky)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2만 5천년 전의 오리그네시아(Aurignacian) 문명과 막달레니아(Magdalenian) 문명에 살던 인류와 현대 인류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엄청나지만, 신체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다.” 여기서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문화’란, 동물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서로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것(예컨대, 모피나 양털로 옷을 만드는 법, 점토로 토기를 만드는 법, 불을 만들고 집을 짓는 법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미 처음부터—육체상의 진화가 멈추기 시작하고 문화적 진보가 이제 막 시작되던 처음부터 이미—인류의 생활은 다른 동물의 생활과 크게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한테만 있는 육체적 특징, 즉 큰 뇌수와 사물을 다룰 수 있는 사지 등을 사용해 자기의 필요에 맞게 주의 환경을 변형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 조건의 변화 없이도 광범위하게 다양한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자기를 둘러싼 조건에 반응만을 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환경을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맹수를 공격하기 위해 돌과 막대기를 사용했고, 열과 빛을 얻기 위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을 가지고 횃불을 켰으며, 동물 가죽과 식물로 몸을 가렸다. 수만 년에 걸쳐서 인간은,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른 돌멩이를 이용해 석기를 만드는 것과 결국은 자신이 심은 씨앗에서 식량이 자라게 하여 토기에 그것을 저장하는 것과 동물을 길들이는 것을 배웠다. 비교적 최근에—100만 년의 인류 역사에 비하면 불과 5천 년 전에—인간은 광석을 유용한 도구와 효율적인 무기의 재료인 금속으로 변형시키는 비법을 알아냈다. 이 모든 진보로 인간은 더욱 쉽게 먹고 입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 생활 그 자체의 조직에도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인간의 생활은 사회적이었다. 여러 사람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만 맹수를 죽일 수 있었고, 식량을 모을 수 있었으며, 불을 계속 지필 수 있었다. 즉, 인간은 협동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밀접한 협동을 통해서 인간은 또한 소리를 내서 언어를 발달시킴으로써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 집단은 단순했다. 건장한 수십 명의 인간 집단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자연적으로 자라는 농산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종류의 생활을 해야 했다. 또, 식량을 저장하는 수단이 없었으므로 사유 재산이나 계급 분화가 있을 수 없었고 전쟁 동기를 유발시킬 어떤 노획물 같은 것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러한 양상을 띤 사회가 지구상 곳곳에 수백 군데나 남아 있었다. 남·북미 대륙의 어떤 인디언 부족들이나, 아프리카의 적도 부근과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등이 그런 사회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영리하지 못하거나 더 “원시적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호주의 원주민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수천종의 식물과 수십 가지의 상이한 동물들의 습성을 곧 알아낼 줄 알아야 했다. 인류학자 퍼스(Firth)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호주의 종족들은…… 사냥터에 있는 잡아 먹을 수 있는 동물, 물고기, 새 등의 습성과 특징, 서식처, 그리고 계절에 따른 이동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바위, 돌맹이, 밀랍, 고무, 식물, 풀뿌리, 나무 껍질 등의 외적 속성뿐 아니라 그보다 덜 분명한 속성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불을 일으키는 법과, 고통을 덜고 출혈을 막는 법 및 신선한 음식의 부패를 지연시키기 위해 열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열을 이용해 어떤 나무는 딱딱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부드럽게 만들 줄도 안다…… 그들은 적어도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조수(潮水)의 운동과 혹성의 주기 및 계절의 순서와 지속 기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들은 풍향·풍속 체계와 연간 습도 및 기온 유형과 같은 기후의 변동이 자연계 생물체의 성장과 생활상의 끊임없는 변화와 서로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잡아 먹기 위해 죽인 동물에서 나온 부산물을 현명하고도 경제적으로 이용할 줄 안다. 예컨대, 캥거루 고기는 먹고 다리뼈는 석기를 만드는 데 도구로 사용하거나 쐐기로 이용하고, 근육은 창을 묶는 데에, 발톱은 밀랍과 섬유를 갖고 목걸이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기름은 붉은 황토와 섞어 화장품을 만들고 피는 목탄과 혼합해 페인트로 쓴다….

.. 그들은 간단한 역학적(力學的)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부머랭(일종의 무기로서 던지면 곡선을 그리며 다시 돌아옴–옮긴이)이 정확히 곡선을 그리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사막에서 생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영리’했던 것이다. 그들이 터득하지 못했던 것은 씨를 뿌려 자기들의 식량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우리 인류의 조상도, 지구상에 존재해 온 기간의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불과 5천 년 전에야 비로소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부(富), 즉 인간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신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분업 형태, 즉 새로운 사회 관계를 생가나게 했다. 예컨대, 인간이 처음으로 씨를 뿌리고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식량을 기르고 토기에 그 식량을 저장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고고학자들이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회 생활의 전면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인간은 동물을 사냥하는 데뿐 아니라 이제는 땅을 개간하고 추수를 하는 데도 협력해야 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할 수 있었고,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과 재화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 최초의 도시들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저 식량을 마련하는 데에만 종사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이 최초로 생겨날 수 있었다. 항아리를 만드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도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한 부싯돌 채광과 금속 채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전체 공동체 성원응ㄹ 위해 초보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더욱 불길한 것은 저장된 잉여 식량이 전쟁 동기를 유발·제공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위의 세계를 다루거나 자연을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들의 생활을 변형시킨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과정을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 노동력과 생산수단 및 양자간의 기술적 관계–옮긴이)의 발전이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관계–옮긴이)를 변화시키고,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사회까지 변화시킨 과정이라고 요약했다.   더 최근의 예들이 많이 있다. 3백 년 전에 서구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땅을 일구고 살면서,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의 사고(생각)의 범위는 그 지역 촌락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관념은 그 지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다수는 읽거나 쓸 필요가 없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백 년 전쯤에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한 탈바꿈을 했다. 이제 그들은 조그만 촌락이 아니라 대도시에 살게 되었고, 결국 읽거나 글씨 쓸 줄 아는 것을 포함해 그들의 선조들은 꿈꾸지도 못했던 기술들을 배울 필요가 있게 되었다. 또,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지구의 반을 횡단해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머리에 주입한 고리타분한 관념들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생산에서 물질적 혁명은 또한 생활 양식과 관념에서도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변화가 지금도 막대한 수의 사람들한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방글라데시나 터키 촌락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이나 독일의 공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지녀 온 오랜 관습과 종교적 태도들의 더 이상 적합하지 못하다고 깨닫는 것을 보라. 아니면, 지난 50년간 다수의 여성들이 가정 밖의 직장일에 익숙해지면서, 여성이 실질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이전의 태도에 어떻게 도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이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과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마르크스 이전의(그리고 그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 즉 관념론자들과 기계적 유물론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회 변동, 즉 역사의 비밀이다.   관념론자들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변화는 관념이 바뀌면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규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객관적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주위 세계의 제약을 받지만, 역으로 그들은 세계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여 세계를 더욱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자기들 자신까지 변화시킨다.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식주를 만들어 내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술과학(technology)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낳는다거나 새로운 발명이 자동적으로 사회변동을 일으킨다고 믿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견해(때로 기술과학 결정론 technology determinism이라 부른다)를 배격했다.   역사를 보면, 의식주의 생산을 촉진하는 관념들이 기존의 사회 형태나 사람들의 태도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듭해서 이러한 관념들을 배척한 적이 있다. 예컨대, 로마제국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땅에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방법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방안들을 채택하게 되면 채찍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노예로부터 수확을 얻어낼 때보다 귀족이 일에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방안들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18세기에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했을 때,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의 공업 발전이 런던 기업가들의 이익과 상충되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려 했다. 만약 누군가가 성우(聖牛)를 죽여 인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쥐고기를 가공처리해 영국인들에게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공급하는 방법을 내놓는다면, 그러한 방안들은 기존의 편견 때문에 묵살당할 것이다.  

생산 발전은 낡은 편견(선입관념)과 낡은 사회 조직 방식(구체제)에 도전은 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러한 구식 편견과 구식 사회 구성 형태를 뒤집어 엎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막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만약 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면, 그때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실시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조차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풀어 보자.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 발전하면, 발전된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 및 그것이 형성한 낡은 사회관계의 기초 위에서 성장한 관념들과 상충하게 된다. 이 충돌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진보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틀에 박힌 채 그 상태 그대로 머물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까지 한다.

3 계급투쟁

  우리들은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사유 재산을 소유한 반면, 우리들 대부분은 거의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항상 그러했던 것으로 당연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계급과 사유 재산, 군대 혹은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5천 년 내지 1만 년 전까지에 이르는 50만 년 동안 인류가 발전해 온 길이었다.   계속해서 노동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계급의 분화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노예가 생산하는 것 모두가 그 노예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하다면 노예를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생산의 진보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계급이 분화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화해야 했다.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면 직접 생산자들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소비를 하고도 잉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 잉여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 존재했다.  

이 모든 식량(총생산물)을 노동해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초과분의 잉여 식량을 그저 먹어 치워 버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부실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충동이 강했다. 그러나 잉여 식량을 다 먹어 버린 결과, 다음 해의 홍수나 기근 같은 자연의 파괴력과 외부의 굶주린 종족의 공격에 대해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책임지고 장래 재앙에 대비해 이러한 여분의 부를 저장하거나, 수공업자들(식량 이외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을 부양하거나, 방어 수단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거나, 그 일부를 먼 곳의 부족들이 생산한 유용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든가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행정관과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살던 최초의 도시들에서 실행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생산물을 기록하기 위해 평판(平版) 위에 표시하는 것으로부터 문자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들이 바로 우리가 소위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최초의 싹이 트는 단계였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但書)로서, 증가된 부를 인구 중 소수가 관리하는 데 이 모든 것은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전체 사회의 이익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 부를 사용했다. 그런데, 생산이 더욱 발달될수록 부는 더욱 이 소수의 사람들 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그 집중된 부는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는 더욱 괴리되는 것이다.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되었던 여러 규칙들은, 부와 그것(부)을 생산하는 토지가 소수인의 사유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법률”이 되었다. 지배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법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옹호해 주었던 것이다.  

‘토지에서 노동한 사람들이 자기네 생산물을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사회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럴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여전히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인구의 대다수는 땅을 파먹으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데 너무 바빠서, 읽기나 쓰기 체계를 발달시키고,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교역을 위해 배를 건조하고, 별들의 행로를 연구해 보고, 수학의 기초 원리를 발견하고, 언제 강이 범람할지 혹은 어떻게 관개 수로를 건설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등의 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생활 필수품이 다수 대중한테서 탈취되어 이것이 하루 온종일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소수의 특권 집단을 부양하는 데 사용될 때만, 이러한 일들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계급 분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꾸지도 못했던 생산의 발전을 이룩해 왔다. 자연적인 빈곤은 극복되었고, 지금 존재하는 빈곤은 자본가들이 저임금을 줌으로써 새로이 빚어진 인위적 빈곤이다. 오늘날의 계급 사회는 인류를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필연적인 계급 분화를 일으킨 것은 최초의 순수한 농경 사회에서 읍과 도시 사회로 변화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부의 생산 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예컨대, 천 년 전 영구의 지배계급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뼈빠지게 일하는 농노에 기생해 생활하는 봉건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교역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봉건 귀족과 함께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이라는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했다. 그리고, 공업이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상인들의 힘이 산업체 소유자(산업 자본가 계급)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사회 발전의 각 단계마다, 육체 노동을 해 부를 생산하는 피억압 계급과 그 부를 소유·통제하는 지배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모두가 변화를 겪었다.   고대 로마의 노예 사회에서 노예는 지배계급의 사유 재산이었다. 노예 소유주는, 마치 그가 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닭이 생산해 내는 달걀을 소유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생산해 내는 재화를 소유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 농노는 자기 토지를 보유(소유한 것은 아님–옮긴이)하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소유했다. 그러나, 이 토지를 보유하게 된 대가로 봉건 영주가 소유한 토지(領地: demesne–옮긴이)에서 보통 매주 사흘을 일해 주어야 했다. 즉, 그들의 시간은 구분이 되어, 반 정도는 영주를 위해 일하고 나머지 반 정도는 자신들을 위해 일하곤 했던 것이다. 만약 농노가 영주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주는 농노를 채찍질, 투옥, 혹은 더 가혹한 방법으로 벌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소유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위해 지불되지 않는 노동(不拂勞動)을 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처벌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고용주는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서 얻어야만 하는 일자리인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는 아주 쉽게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가 소유한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상품의 가치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모든 경우에서 억압자 계급은, 일단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 필수품이 충족되면, 남은 모든 부를 소유·통제한다. 노예 소유주는 자기 재산(노예)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하므로, 자가 운전자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기 노예한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가 육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 잉여로 남는 모든 것은 주인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 봉건 농노는 자신의 땅뙈기에서 일함으로써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농노가 영지(領地: demesne)에서 하는 모든 가외 노동은 영주에게 돌어간다. 현대 노동자는 임금을 지불받는다. 그가 창출하는 그 밖의 모든 부는 이윤이나 이자나 지대의 형태로 고용주 계급한테로 간다.     계급투쟁과 국가  

근로 대중이 저항하지 않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 적은 거의 없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 노예 반란, 중국 전제 왕조 시대의 농민 반란, 고대 그리스 도시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내전 등이 있었다. 칼 마르크스가 자기의 소책자 『공산당 선언』(1848) 서두에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문명의 성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함으로써 일어난 계급투쟁에 좌우되어 왔다.   이집트의 왕(파라오)이나 로마의 황제나 중세의 군주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또한 아무리 호화롭게 살았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장대한 궁전을 가졌다 해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농민이나 노예가 생산한 생산물이 자기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힘으로 보장하지 못했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 분화와 병행해서 또 다른 것, 즉 폭력 수단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지배할 수 있어야만 위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사회에서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정부 기관이나 군대나 경찰 같은 것—즉 국가(기구)—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불과 60~70년 전에조차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국가(기구)가 없는 사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국가가 수행하는 많은 업무들이 단순히 비공식적으로 전체 주민이나 대표자 회의를 통해서 수행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회의는 중요한 사회 규범을 위반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행위를 재판하곤 했다. 예컨대, 악한을 추방시킨다든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처벌에 동의했으므로 처벌을 수행하기 위해 경찰이 별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도 별도의 군대 조직 없이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선발된 지도자 아래 모든 젊은 남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단 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부를 지배하는 사회가 성립되면,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조직하는 이러한 간단한 방법들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대표자 회의나 어떤 무장 청장년 회의도 계급에 따라 분열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 집단은 형법과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과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생산하는 것을 오직 자기들의 손에 독점할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급 분화에는 재판관(판검사)과 경찰(및 비밀 경찰)과 장군 및 관료—이들 모두에게는 특권 계급의 지배를 보호해 준 보답으로 특권 계급이 쥐고 있는 부의 일부가 주어진다—와 같은 집단의 성장이 뒤따랐다.   이러한 국가(기구)의 여러 지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상관의 명령에 주저없이 복종하도록 훈련받았고 피착취 인민 대중과 모든 정상적인 사회적 유대는 맺지 않았다. 국가는 특권 계급의 손아귀에 있는 살상 장치로서 발전했다. 그것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로서. 물론, 이러한 장치를 움직이는 장군들이 흔히 어떤 황제나 왕과 불화가 생겨, 자기들 자신이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괴물같이 거대하게 무장한 지배계급조차도 종종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살상 장치를 계속 돌아가게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부(富)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착취에서 나오므로, 이같은 반란은 한결같이 사회를 구시대적 방식으로 지속시켰던 것이다.  

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특권 계급뿐 아니라 이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무장한 기구, 즉 국가도 자기들의 타도해야 할 대상임을 역사 전반에 걸쳐서 자각해 왔다.   지배계급(과 그들을 지원하는 장군, 경찰, 판검사, 교도관 및 관료들)이 없으면 우선 무엇보다도 문명이 발전할 수 없었기에, 지배계급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일단 자신들의 권력이 확립되면, 문명이 더 이상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게 된다. 그들의 권력 유지는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부를 자신들에게 넘겨주도록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구식의 부 생산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새로이 도입할 수 있을지라도 부의 관리권(력)이 자기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까봐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억압 기구는 피착취 대중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두려워한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해서 자기들 자신의 무기와 군대의 비용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재력을 갖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어느 한도를 넘으면 생산의 발달을 돕지 않고 오히려 저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제 왕조 시대 중국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그리고 관개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운하와 제방(提防)을 통제하는 데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토지의 소유 및 운하·제방의 지배는 약 2천 년 동안 지속된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전제 왕조 시대 말기의 생산은 초기보다 그리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물론 그 대신, 유럽이 내내 중세의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때 중국은 예술을 꽃피웠고 인쇄술과 화약을 발명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의 주도로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기들의 지배를 완전히 받지는 않는 사회 집단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전제 왕조 당국은 주기로 가혹한 조치를 취해, 성장하는 도시 경제를 분쇄했고 생산을 저하시켰으며 신흥 사회계급의 세력을 파괴했다.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 즉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의 발달은 보수적인 기존 지배계급의 이익과 상충했다. 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가 사회의 모든 장래를 결정했다.  

때로, 그 결과는 중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산 형태가 등장하는 것이 저해받아 사회가 매우 오랫동안 거의 정체되다시피 하기도 했다. 때로, 로마제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상 형태가 발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충분한 부가 생산되지 못하며, 결국 사회는 낡은 기반 위에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문명은 붕괴되었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조야한 농업 사회 형태로 되돌아갔다. 때로, 새로운 생산 형태에 토대를 둔 신흥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을—그들을 지탱시키는 사법 체계(司法體系), 군대, 이념, 종교와 더불어—조직적으로 약화시켜 마침내는 타도할 수 있었다. 이 때에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경우에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후퇴하느냐 하는 것은 계급간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느 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는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계급들의 조직과 단결력, 지도력에 달려 있다.

4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노동자들이 듣는 가장 바보스러운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상황이 달라져도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그것이 오래전이 아닌, 그리고 지구상의 어떤 먼 고장에서가 아닌, 바로 이 나라(영국을 가리킴–옮긴이)에서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과 250여 년 전의 사람들한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거대한 도시, 큰 공장, 비행기, 우주 탐험—촐도 체계조차 그들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과 같은 것들로써 묘사했다면, 그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압도적으로 농업적인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방 촌락 밖으로 40리 이상을 여행해 보지 못했고, 생활 양식은 수천 년 동안 그러했듯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칠팔백 년 전에 이러한 사회체제 전반에 마침내 도전하게 되는 발전이 시작되었다. 수공업자 및 상인 집단이 도읍(都邑)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정 영주에게 무료로 봉사하지 않고, 그 대신 생산물을 여러 영주들 및 농노들과 식료품으로 교환했다. 점차로 그들은 귀금속을 그러한 교환의 척도로 사용했다. 이것이 모든 교환 행위에서 얼마간 여분의 귀금속을 얻는, 즉 이윤을 얻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보 대전진은 아니었다.   도시는 처음에 한 군주를 다른 군주와 서로 반목시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수공업자들은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더욱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영향력도 커졌다. 당시의 “중간 계급”—부르주아들을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은 중세 봉건 사회 내부의 한 계급으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 영주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부를 획득했다.   봉건 영주는 농노들을 시켜 자기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농산물에 직접 의존해서 생활했다.

그는 농노들한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 자기가 가진 권력을 사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더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지)은 비농산품을 판매한 수익에 의존해 생활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그러한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일당 혹은 주당으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들 노동자들(흔히 도망친 농노들이었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일단 자기가 수당을 받는 만큼의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유일한’ 강제력은, 만약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못하면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굶어 죽기보다는 일한 대가로 자기가 생산한 상품의 값어치(가치)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으려 했기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에는) 중간계급인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는 전혀 다른 원천으로부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인해 그들은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기를 원하게 된다.   봉건 영주의 이상(理想)은, 성문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외부 집단이 침입하여 자기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는 일이 없고 농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자신의 토지에서 자신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였다. 영주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사회적 신분을 받아들여 선조들의 시대처럼 현상(現狀)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부유한 신흥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사물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업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이 쌓은 부(富)를 강탈해 가는 군주나 귀족들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뽑은 대표자들이 작성하고 시행하는 확고한 성문법 체계를 통해 봉건 귀족과 군주를 견제하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더 가난한 계급들을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켜 이들이 도시에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그래서 자기들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 자신의 신분 문제에 대해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흔히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자기 대(代)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흥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대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구질서와 그들의 충돌은 경제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일반 관념의 주된 원천이 교회 설교(성당 강론)이었던 문맹 사회에서 관념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신분을 타고난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연히 도시 부르주아지의 많은 행위들을 “죄악”이라고 공격하는 친(親)봉건제적 견해를 폈다.   그래서 16. 17세기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는 ‘중간 계급’이 자기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가 바로 그것인데, 개신교는 검약, 절제, 근면(특히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주도권으로부터 중간 계급 신도의 독립을 설교했던 종교 관념이었다.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중세의 신 관념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단순히 성찬식(성체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뜻하는 바에 대한 이견으로 싸우고 죽었던 것인 양, 즉 마치 당시의 큰 종교 전쟁과 내전들이 그저 종교적 차이로부터 비롯한 것인 양 학교나 텔레비젼에서 듣게 된다. 그러나,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문제로 되어 있었다. 즉, 부의 생산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에 기초한, 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사회 사이의 충돌이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승리했다. 현재의 지배계급(부르주아지)한테는 비록 무섭게 여겨지겠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왕의 목을 참수해 자기들의 신에게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시켰고, 그러한 행위를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을 들먹이며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1회전의 승리는 봉건 귀족한테 돌아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개신교도인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처절한 내전 끝에—비록 북부 독일에서는 봉건제의 성격을 띤 개신교가 종교로서 생존하긴 했지만—일망타진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그 후 2세기 이상이나 기다려서야 비로소 1789년 파리에서 종교적 외피를 입지 않고 시작되었던 제2회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착취와 잉여가치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상층 계급(유산 계급)은 근로 인민 대중에 대해 법적 제재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봉건 영주나 노예 소유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즉, 농노나 노예)이 달아나버려, 특권 계급 자신을 위해 노동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인격에 대해 그러한 법적 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가 굶어 죽게 될 것이 보장될 수만 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소유하는 대신에 노동자의 생계 원천, 즉 기계와 공장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활 필수품은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땅을 경작할 도구와 자연에서 얻는 원료를 가공할 도구가 없으면, 그 노동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 도구는 호미와 쟁기 같은 간단한 농기구로부터 현대의 자동화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기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구 없이는 가장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조차도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생산할 수 없다.   현대 인류가 아득한 석기 시대의 조상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구들—보통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라 부르는—의 발전이다. 자본주의는 소수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영국 인구의 1퍼센트가 산업(여기서는 농업도 포함됨–옮긴이) 주식과 유가증권의 84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생산수단—기계·공장·유전·비옥한 농토 등—의 대부분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포함한 개념–옮긴이)가 그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인민 대중(민중)에게 그러한 일터(작업장)와 생산수단을 가동시켜 노동하도록 허락하면 대중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 점(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한다는 점)이 자본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는데도—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독점적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는 수세기가 걸렸다. 예컨대, 17, 18세기의 영국 의회는 농민을 그들의 생산수단—그들이 수세기 동안 경작해 왔던 토지—에서 몰아내는 종획법(Enclosure Acts: 지주가 자기 토지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쫓아낸 후 목양장(牧羊場)을 만들 수 있게 한 법령–옮긴이)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토지는 특정 자본가 계급의 재산이 되어 버렸고,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대중은 살아 가기 위해 자본가들한테 자기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이렇게 독점하게 되자, 자본가는 인민 대중이 함께 자유와 균등한 정치적 권리들을 누릴 수 있게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친(親)자본가 경제학자들은 당시 일어난 상황에 대해 단순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임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정당한 하루의 임금”을 주고, 그 보답으로 노동자는 “정당한 하루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은 자본가가 자기의 생산수단, 즉 자신의 자본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 “희생”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노동자한테는 전혀 곧이들리지 않는 논리이다.  

“순 이윤율”이 10%라고 발표하는 한 회사를 예로 들어 보자. 그 회사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계, 공장 등의 비용이 1억 파운드라면, 해마다 마모되는 기계를 대치하는 비용(감가상각비)과 원료 비용 및 임금을 지불하고도 그 회사는 천만 파운드의 이윤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그 회사가 1억 파운드—원래의 투자액 전비용에 해당하는—의 총이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만약 이윤이 “희생”에 대한 “대가”라면, 분명히 10년 후에 모든 이윤은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자본가는 자기가 처음에 투자한 돈을 전액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는 이전보다 두 배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원(原)투자액과 그 동안 축적된 이윤을 몽땅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이렇게 되는 동안 노동자는 자기 삶의 에너지를 하루에 8시간씩, 일년에 300일을 공장에서 일하는 데 희생시켜 왔다. 노동자도 자본가와 같이 10년 후에 두 배로 잘 살게 되었는가? 분명코 그렇지 않다. 비록 노동자가 열심히 저축을 했다 해도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이상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결코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당한 하루의 보수에 대한 정당한 하루 일”이라는 방식은, 노동자를 자본도 없고 그저 대략 똑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팽개쳐 두었지만, 자본가의 자본은 배가 시켜 놓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등”권은 불평등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이 명백한 변칙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노동자들이 행한 노동의 가치 전부를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법적·정치적·경제적) 장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기계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한 주일에 190~200파운드에 해당하는 생산물을 새로이 산출해 낸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곧 그 노동자가 이 액수를 전부 지불 받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노동자는 훨씬 적은 액수를 받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 외에 달리 택할 길은 굶주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 전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참을 만한’ 생활 수준을 가능케 할 만큼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를 지불받는다. 즉, 자본가가 날마다 부려먹을 수 있도록 자기의 일할 능력(마르크스가 노동력 labour power이라고 부른 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받는 것이다.   노동자들 자신이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보수를 노동자들이 받는다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액수를 지불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富)의 양은 그들이 일단 노동해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양보다 훨씬 더 적다.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는 그들의 노동으로 창조되는 가치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 차액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불렀다.     자본의 자기증식(自己增殖)  

현(現)체제를 변호하는 자들의 글을 읽게 되면, 그들이 이상한(그러나 그들한테는 당연한) 관념을 공유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돈(화폐)은 마술적 속성을 갖고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는 은행에 돈을 예금할 때 그 돈의 액수가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자본가는 돈을 주식에 투자할 때 그 돈이 배당금의 형태로—해마다 새로운 돈을 ‘새끼 쳐서’—보상되기를 기대한다. 칼 마르크스는 ‘돈이 돈을 낳는’ 현상을 주목해 ‘자본의 자기증식’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설명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ㅎ녀재의 사회에서 충분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돈으로 살 수 있고, 생산수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들한테 팔게 할 수 있다.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 즉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돈이 기적처럼 불어날 수 있는 비밀은 이러한 노동력을 사고 파는 데 있다.   반복해 강조하면, 자본가는 애당초부터—발전도상국은 국가 권력과 유착하여 받은 특혜 융자와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원조·차관 등)을 통해—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살 만큼 충분한 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각 노동자로부터 날마다 뽑아 내는 잉여가치로 더욱더 부유해지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싸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돈은 계속 불어나는 것, 즉 그의 자본은 계속 증식되는 것이다.   배당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가 투자한 기업의 노동자를 단 한 명도, 단 한번도 대면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한테 수입을 주는 것은 돈의 신비스러운 힘이 아니라 그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이다.(은행이나 증권 회사와 같은 금융 기관 등을 매개로 하여 이자 소득을 얻는 자산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배당금, 이자, 그리고 이윤은 모두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가 일해서 얼마나 받는가 하는 것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고용주는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임금을 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가 더이상 깎아내릴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육체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들한테 하도 형편없는 임금을 주어 그들이 영양실조로 허덕여 일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수 없다면 이는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기계 위에서 잠들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밤에는 일에서 벗어나 휴식할 보금자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들이 약간 “사치스럽다”고 여기기도 하는 것, 즉 가끔 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다든가 텔레비젼을 본다든가 가끔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적절한 보수를 생각해 주는 것은 자본가한테도 유익한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가 더 상쾌한 기분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모두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새로 보충하는 데 이바지한다. 임금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본가는 또한, 또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한다. 현재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의 회사는 오랫 동안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현재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력까지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한테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정부가 이들 노동자 자녀들한테 교육 제도를 통해(읽기·쓰기·셈하기와 같은) 일정한 기술들을 가르치도록 책임을 분담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저발전국”의 경우, 교육비를 조달할 수 없는 임금 수준은 미성년자나 부녀자들까지도 공장에 나가 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또 다른 것이 역시 문제가 된다. 즉, 노동자가 어느 정도를 “괜찮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보다 상당히 적게 보수를 받는 노동자는 자기 일을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을 소홀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이 모든 요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그 모든 요인들은 자본가가 일당으로 사들이는 노동자의 노동력, 즉 그의 생활 에너지를 보장하는 수준을 지향한다. 노동자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계속 “먹고 살” 수 있고, 자기가 계속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비용을 지불받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해 한 가지 점이 더 지적되어야 한다. 막대한 양의 부가 경찰력과 군사력 같은 것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과 군대 등은 국가가 운영하지만,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즉, 군대와 경찰 등의 국가 군사·관료 기구)을 위해 소요되는 가치는—노동자들한테 귀속되지 않은—노동자들한테서 착취되어 자본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가치이다. 다시 말해 이것 또한 잉여가치의 일부이다.   결론적으로, 잉여가치=이윤+임대료+이자+국가(정부, 행정기관, 군대, 경찰, 감옥, 사법부 등)에 쓰이는 비용이다.

5 노동 가치 이론

  “그러나, 기계, 즉 자본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재화를 생산한다. 만약 그렇다면, 노동은 물론 자본도 또한 부(富) 생산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생산 요소는 그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친(親)자본가적 경제학을 배운 자들이 착취와 잉여가치(surplus value)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은 얼핏 듣기에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확실히 우리는 자본 없이는 재화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 없이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생산수단은 맨처음 어떻게 생겼는가?”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부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상 사용해 온 모든 것은—신석기 시대의 돌도끼이건 또는 현대의 컴퓨터이건 간에—일단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비록 도끼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그 도구들도 역시 그 이전에 행해진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일컬어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기업주들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자랑할 때, 그들은 사실 그 이전 세대들이 행한 광대한 양의 집적된 노동을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총괄하는 개념이다–옮긴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전 세대의 집적된 노동)은 그들 자본가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만큼의 일만 했던 선조(혹은 선배)자본가들의 “노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개념은—보통 노동 가치론이라고 하는데—마르크스의 독창적 발견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시대까지 모든 훌륭한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조차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 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나 리카도(David Ricardo) 같은 사람들은 산업(여기서는 광공업을 가리킨다–옮긴이)자본주의 체제가 아직 초기 단계였을 때—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1789~99)을 전후한 시기에—이론적 저술 활동을 했다. 자본가들은 아직 (정치적으로)지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기들이 지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부의 진정한 원천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들 자본가들에게 “노동이 부를 창조하며, 따라서 부를 축적하려면 자본가들이 노동을 자본주의 이전에 속하는(전근대적인) 구 지배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말해 줌으로써 자본가들의 이익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동계급과 친밀한 사상가들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친구들(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바로 그 주장을 되써먹기 시작했다. 즉, 그 친(親)노동자 사상가들은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동시에 노동은 또한 자본을 창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의 “권리”는 강탈당한 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자본을 정당화·합리화해 줌으로써 자본가를 지원하는 경제학자들은 노동 가치 이론이 말도 안 되는 애물덩어리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앞문으로 차내면 뒷문으로 기어들어 오는 법이다.   영국방송협회(BBC) 텔레비젼 뉴스를 들어 보라. 자본가의 대변인들은, “노사 분규”(labor disputes)로 인해 “대폭적인” 임금 인상이 있으면 “기업인”의 투자가 위축되어 “성장”(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이길래?)이 둔화될 것이므로 실업자가 급증할 것이고, 또한 고율의 인플레가 유발되어 결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감소시키고야 말 것이라고 약올리고 위축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의 다짐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잠시 접어 두자.(사실, 접어 두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기업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동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것이 이윤율—우리는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을 저하시키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그 대신에, 그 주장이 제기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자.

그들은 “기계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 즉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인 즉,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더 많은 부가 창조될 것이고, 이는 다시 새 기계를 더 많이 투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자기들 자신은 모를지라도—더 많은 노동(량)이 더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일, 즉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다!   내가 주머니에 1파운드의 지폐를 갖고 있다고 하자. 왜 그것이 나한테 유용한가? 결국 그것은 인쇄된 종이 조각일 뿐이다. 그것이 나한테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용한 물건을 그것과 교환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1파운드의 지폐는 그만한 양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2파운드의 지폐는 그 두 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고, 3파운드의 지폐는 3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며 …… 등이다.   우리가 부를 측량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들인 노동(량)을 측량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주어진 일정한 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가 책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숙련된 목수보다 시간이 5~6배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아무도 내가 만든 책상이 숙련된 목수가 만든 책상보다 5~6배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책상을 만드는 데 목수의 노동—나의 나동이 아니라—이 얼마만큼이나 필요했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길 것이다.  

목수가 책상을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책상의 가치가 한 시간의 노동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책상의 가치는 현사회에서 보통 수준의 기술과 숙련도로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어떤 물건의 가치 척도는 단순히 한 개인이 그것을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평균 수준의 기술과 평균 수준의 숙련도를 가지고 일하는 개인이 들이는 시간—그는 이 필요한 평균 수준의 노동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임을 지적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술 진보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이 점은 중요하다.   예컨대, 진공관을 가지고 라디오를 만들던 때에 라디오는 매우 비쌌다. 왜냐하면, 진공관을 만들고 그것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일 등에 많은 노동(량 혹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훨씬 적은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연결될 수 있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여전히 지공관 라디오를 만들고 있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생사하고 있는 라디오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라디오의 가치는 더이상 진공관을 가지고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트랜지스터를 갖고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MarxEngels 홈페이지에서 퍼옴

알기 쉬운 마르크스주의

Chris Harman                                   

1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왜 필요한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론이 필요한가? 우리는 사회 불안정과 경제 공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고용주들한테 착취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밖의 것은 먹물들한테나 맡겨 두라.” 우리는 사회주의자 투사들이나 심지어 노조 운동가들 중에서도 이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흔히 본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또,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하지만 실제 생활 상식에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고도 말한다.   이런 말은 사실 사회 변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강력히 선전하는 견해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의도는 마르크스주의란 모호하고 복잡하며 지루한 교조(敎條: ‘ism’)일 뿐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이런 주장의 대변자들이, 자기들은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보통은 자기들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한테 사회적 문제에 관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면 이런저런 식의 일반화를 해가며 대답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야.”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기업인이 없으면 우리에게 일자리 줄 사람도 없어.” “도덕적 타락으로 그 나라가 그 꼴이 되었지.” 도대체 이런 주장이 얼마나 많은지 어디서건 들을 수 있을 지경이다. 공장에서건 사무실에서건, 술집, 다방, 식당, 그 어디서건 말이다. 어느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사회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다. 위의 견해들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사회 “이론”들이다. 누군가가 자기는 이론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정리해 둔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태도(이론 경시 풍조–옮긴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소위 대중 매체들이 한결같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한 의도적인 해석을 우리 머리에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들은 우리가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떠드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 다양한 주장에서 거짓된 바를 인식해 내지 못한다면 사회 번혁을 위해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없다.  

이것은 150년 전 처음으로 입증되었다. 1830년대와 40년대 영국 북서부 지방은 공업이 발달하여 수십만의 남녀 성인 노동자와 미성년 노동자들이 비참한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열악한 생활 조건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은 최초의 노동자 대중 조직을 결성하여 싸웠다. 그것은 최초의 노동조합이었고, 영국 최초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므로 인민헌장 운동(차티즘: Chartism)이라 불렀다. 물론, 인민헌장 운동은 소집단으로 이루어진 다른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도 병행되었다.   노동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문제가 즉각 부과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회 지도자들을 평화적으로 설득하여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들 말했다. 즉, 대중의 ‘도덕적 힘’, 다시 말해서 평화적 운동으로도 노동자들한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 견해에 근거하여 조직하고 시위하고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과는 패배와 사기저하였다. 어떤 이들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필요는 인정했는데도, 이 힘이 사회로부터 유리된 매우 작은 음모 집단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동의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의 투쟁도 패배와 사기저하로 끝나고 말았다. 또,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이 군대 및 경찰과 대적하지 않고 경제투쟁을 통해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중의 행동이 뒤따랐다. 1842년 세계 최초의 총파업이 영국 북부의 공업 지대에서 일어나 4주일이나 계속되었지만,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작업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패배를 거듭하던 노동운동의 제1단계의 끝무렵인 1848년에 독일인 사회주의자인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란 소책자에서 자기 사상을 남김없이 명확하게 밝혔다. 그의 사상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에서 제기된 현실 문제들을 취급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사상은 오늘날과도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가 140년 전에 썻다고 썼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맞서서 논쟁을 벌였던 온갖 사회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인민헌장 운동가들이 ‘도덕적 힘’이냐 ‘물리적 힘’이냐 하는 것을 논했듯이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도 ‘의회 사회주의’냐 ‘혁명적 사회주의’냐 하는 것을 논하고 있다. 혁명가들 중에서 테러리즘에 찬성하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이 1848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관념론  마르크스가 사회 문제들을 해석하려고 저술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공장에서는 기술 혁신으로 그 이전 세대가 꿈도 꿔보지 못한 규모의 부(富)가 축적되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가 전(前)시대 고통의 원인이었던 자연적 재앙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술 혁신과 그에 따른 엄청난 부의 축적이 대다수 대중의 생활 향상을 가져오진 못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남녀 성인 노동자들과 미성년 노동자들의 생활은 토지를 경작하던 그들의 조상들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들의 임금은 그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대량 실업의 주기적 발생으로 아예 최저 생계비를 훨씬 밑돌 정도였다결국, 그들은 비참하고 열악한 빈민가로 내몰려 적절한 의료도 받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시달리곤 했다. 자본주의 공업화는 전반적인 행복과 복지를 가져오는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더욱 혹심한 빈곤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   이를 주목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영국 시인 블레이크(Blake)와 셸리(Shelly), 프랑스 사회주의자 푸리에(Fourier)와 쁘루동(Proudhon), 독일 철학자 헤겔(Hegel)과 포이에르바흐(Feuerbach) 같은 이들도 자본주의 착취 현상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 처한 이 불행한 상태를 ‘소외'(alienation:Ent fremdung)라고 불렀다. 요즘도 흔히 듣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가 과거에 했던 행동에 지배되고 억압받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神)이란 관념을 만들고 신 앞에 엎드려 절하고 나서는, 자기가 만든 것(즉 신)에 따라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낀다고 포이에르바흐는 지적했다. 그리고, 사회가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오히려 인간은 더욱 비참해지고 ‘소외’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에서 이 ‘소외’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를 창조한 사람들, 즉 직접 생산자들의 삶에 적용하였다. “노동자는 부를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의 생산 능력과 생산 범위가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더 가난해진다…… 물건의 가치가 증가함에 비례해서 인간의 가치는 하락한다…… 노동의 산물은, 소외된 그 무엇으로서, 즉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어떤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하게 된다.”  

마르크스 시대에 사회 문제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설명은 여전히 종교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사회의 불행은 신이 자기들에게 명령하는 바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를 버릴 수가 있다면야 모든 게 잘 될 텐데……” 이와 비슷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다. 보통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이 마르크스 시대의 설명과의 차이라면 차이랄까. 현대의 통속적인 견해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개인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기의 ‘이기심’이나 ‘물질주의'(혹은 ‘집착’)를 버릴 수만 있다면야 사회는 자동적으로 나아질 텐데……”   이와 관련있는 어떤 견해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권력을 쥔 ‘소수’의 핵심적 인물들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이 “이치를 깨달아 반성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이라는 한 영국인 사회주의자는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좀더 친절하게 대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어용 노조 지도자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용자들의 범죄를 “실수”라고 부르는지 주시해 보라. 마치 약간의 분규만으로도 대기업을 설득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견해들을 ‘관념론'(idealism)이라고 못박았다. 사람들이 ‘관념'(ideas)을 갖는 것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견해들이 관념을 인간의 생활 조건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관념론’이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관념은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종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기심”(혹은 “탐욕”)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이기심을 조장하고 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조차 이기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억누르기 어렵다. 아이들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젊은 아버지 노동자나 쥐꼬리 만한 월급을 부모에게 송금하고자 하는 효녀 노동자는, 처자 부양과 부모 봉양을 위한 유일한 길이 끊임없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서 더 나은 직장을 얻고 좋은 조건의 잔업을 얻으며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사회의 노동자들은, 개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기심’이나 ‘탐욕’을 버릴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권력과 부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훨씬 더 웃기는 얘기다. 만약 어떤 대기업 회장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당해 사회주의 관념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한테조차 관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관념을 형성시킨 모태인 사회 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요점을 달리 설명해 보자. 관념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관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사회에 살고 있다. 제도 언론과 제도 교육이 오도(誤導)하고 호도(糊導)하고 있는 관념이 옹호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이념기구가 강요하는 관념과 완전히 다른 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들의 일상 경험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요즈음 왜 “의식화”한 노동자들이 70년대보다 늘어났는가 하는 것을 단순히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급진적 관념에 전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로서, “위인”들의 영향을 설명하려면 왜 대중이 그들을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에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해 봤자 헛일이다. 결국, 위인들을 대중 최면술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사회 생활의 무언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가 옳은 듯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관념이 어디서 나온 것이며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관념이 역사를 바꾼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관념의 이면에 숨어 관념을 형성시킨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을 검토할 때만 관념의 혁명적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2 역사에 대한 이해

  관념 그 자체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의 사상가들처럼, 역사를 이해하려면 인간을 물질 세계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자연물(自然物)의 행동처럼 물질적 힘들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그러므로, 인간학은 자연계(自然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일부였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상가들을 유물론자(materialist)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이 여러 가지 종교적·관념론적 역사관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 조건을 바꾸는 것에 관해 과학적으로 논하려면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한다거나 사람들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념론을 버리고 유물론을 택하는 것은 ‘신비한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과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물리학에도 그릇된 “이론”이 있듯이, 사회과학에도 잘못된 이론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첫째 예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기계적인 유물론의 시각으로서, 인간이 몇 가지 측면에서 “본성적”(natural)으로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견해이다. 늑대가 ‘본성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고 양이 ‘본성적’으로 온순하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적이고 지배욕이 강하며 경쟁적이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여성이 ‘본성적’으로 부드럽고 남자에게 순종적이며, 부모와 남편을 공경하고 매사에 수동적이라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견해를 근래에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인간·동물 동일 본성론'(the naked ape view)이다. 이 지극히 반동적인(reactionary) 주장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공격적이라면 사회를 개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으례 똑같을 테니 혁명을 통하여 새 사회를 건설하여도 그 사회는 항상 실패작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 본성”(human nature)은 사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전의 많은 사회에선 존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수'(Sioux)족 인디안들한테 지능검사를 실시하려 했던 과학자들은 ‘수’족 인디안들이 왜 서로서로 협력해서 답을 구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인디안들이 사는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강조했던 것이다. “공격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럽인과 처음 대면한 에스키모인들은 도대체 “전쟁”이란 말(그들에게는 ‘말’이 아니라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이 뭘 뜻하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쓸어버린다’는 생각은 그들한테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에서는 젖먹이를 산속에다 버려 놓고 추위를 이기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겼다.  

또한, ‘불변의 인간 본성’론은 역사 속의 대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 또는 잉카제국의 찬란한 영광, 근대 공업 도시 등에 살았던 인간들이, 중세의 진흙 오두막집에 살았던 무지한 농민과 같은 수준—동렬—에 놓이게 된다. 거기서 중요한 건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지, 그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세운 장대한 문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가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먹이는 데 성공한 반면, 어떤 형태의 사회는 수백만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굶겨 죽인다는 사실은, ‘불변의 인간 본성’론자들한테는 의미 없는 얘기일 뿐이다.

 

두 번째 예도 역시 많은 이들이 신봉하고 있는 통속적인 것으로서, 이 또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나온 것인데, 인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물이 써커스에서는 정글에서와 다른 행동을 하도록 길들여질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도 이와 유사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인즉, 제대로 된 사람들이 사회를 통제하기만 한다면 ‘인간 본성’도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확실히 ‘불변의 인간 본성’론보다 진일보한 견해이지만, 사회 전반이 바뀔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역시 실패작이다.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현재의 사회 조건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면, 사회 조건을 딛고 넘어서서 제어장치(制御裝置)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아는 이가 도대체 누가 있을까?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여러 압력을 마술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가 써커스에 나오는 동물이라면 누가 사자 조련사란 말인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결국에는 ‘인간 본성 불변’론자들처럼, 사회란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거나, 혹은 변화는 신이나 위인 또는 개개 관념의 힘과 같은 사회 밖에 있는 어떤 것이 만들어 낸다고 믿게 된다. 이쯤되면, 이들의 “유물론”은 신판(新版) 관념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런 “이론”은 결국에는 반드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분이 사회를 초월하고 있는 걸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류의 견해는 그러므로 흔히 반동적이다.   오늘날 이 견해의 지지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스키너(Skinner)라는 미국의 보수 심리학자이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그들을 ‘제약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므로 그가 주장하는 “제약한다”는 말은 사람들을 그 사회에 순응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세 번째 사이비 유물론적 견해는 세계의 모든 불행을 인구 증가 탓으로 돌린다. 이 견해는 주창자인 18세기 말의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Malthus)의 이름을 따라서 맬서스 학파(Malthusian)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인구 증가’론은, 예컨대 미국에서 150년 전에는 1천만 명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밖에 생산되지 못했는 데 반해, 지금은 2억 명을 먹이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견해는 식구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노동할 수 있고 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난다는 것을 잊고 있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서술한 그릇된 설명들을 ‘기계적’ 혹은 ‘천박한’ 유물론의 여러 형태라고 불렀다. 이들 기계적 유물론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망각하고 있다.     역사 유물론   “우리는 인간을 의식, 종교 또는 그 밖의 무엇을 통해서든 동물과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은 생활 수단, 즉 의식주의 수단을 생산(강조는 옮긴이의 것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다.”—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사회 발전 과정을 독특하게 설명하였다.   인간은 유인원의 후손인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관심거리는 배를 채우고 외부의 기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이 이러한 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타고난 생물학적 육체 조건에 달려 있다. 늑대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능에 따라 결정된 방법대로 먹이를 사냥해 잡아 먹음으로써 살아 간다. 또, 추운 밤에도 털 덕분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새끼들은 타고난 행동 양식대로 기른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실, 10만 년 내지 3만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하던 인류는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생활했다. 그들은 동굴이나 땅에 구멍을 파고 살았다. 음식이나 물을 담을 그릇도 없었고, 식량은 낱알을 줍거나 돌로 맹수를 때려 잡아 해결했다. 글씨를 쓸 줄도 몰랐고 손가락 셈 이상의 계산을 할 줄도 몰랐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이웃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자기네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실제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10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 인류의 신체 조건과 유사하고, 3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인과 똑같았다. 만일 혈거인을 목욕시키고 면도까지 시켜 양복을 입혀 번화가를 걷게 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그를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C. Gordon Child)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의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이 지질학적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약 2만 5천 년 전에 인간의 문화적 진보가 막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 이래로 인간 육체의 진화는 사실상 멈추어 버렸다.”  

또 다른 고고학자 리키(Leaky)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2만 5천년 전의 오리그네시아(Aurignacian) 문명과 막달레니아(Magdalenian) 문명에 살던 인류와 현대 인류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엄청나지만, 신체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다.” 여기서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문화’란, 동물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서로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것(예컨대, 모피나 양털로 옷을 만드는 법, 점토로 토기를 만드는 법, 불을 만들고 집을 짓는 법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미 처음부터—육체상의 진화가 멈추기 시작하고 문화적 진보가 이제 막 시작되던 처음부터 이미—인류의 생활은 다른 동물의 생활과 크게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한테만 있는 육체적 특징, 즉 큰 뇌수와 사물을 다룰 수 있는 사지 등을 사용해 자기의 필요에 맞게 주의 환경을 변형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 조건의 변화 없이도 광범위하게 다양한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자기를 둘러싼 조건에 반응만을 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환경을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맹수를 공격하기 위해 돌과 막대기를 사용했고, 열과 빛을 얻기 위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을 가지고 횃불을 켰으며, 동물 가죽과 식물로 몸을 가렸다. 수만 년에 걸쳐서 인간은,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른 돌멩이를 이용해 석기를 만드는 것과 결국은 자신이 심은 씨앗에서 식량이 자라게 하여 토기에 그것을 저장하는 것과 동물을 길들이는 것을 배웠다. 비교적 최근에—100만 년의 인류 역사에 비하면 불과 5천 년 전에—인간은 광석을 유용한 도구와 효율적인 무기의 재료인 금속으로 변형시키는 비법을 알아냈다. 이 모든 진보로 인간은 더욱 쉽게 먹고 입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 생활 그 자체의 조직에도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인간의 생활은 사회적이었다. 여러 사람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만 맹수를 죽일 수 있었고, 식량을 모을 수 있었으며, 불을 계속 지필 수 있었다. 즉, 인간은 협동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밀접한 협동을 통해서 인간은 또한 소리를 내서 언어를 발달시킴으로써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 집단은 단순했다. 건장한 수십 명의 인간 집단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자연적으로 자라는 농산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종류의 생활을 해야 했다. 또, 식량을 저장하는 수단이 없었으므로 사유 재산이나 계급 분화가 있을 수 없었고 전쟁 동기를 유발시킬 어떤 노획물 같은 것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러한 양상을 띤 사회가 지구상 곳곳에 수백 군데나 남아 있었다. 남·북미 대륙의 어떤 인디언 부족들이나, 아프리카의 적도 부근과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등이 그런 사회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영리하지 못하거나 더 “원시적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호주의 원주민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수천종의 식물과 수십 가지의 상이한 동물들의 습성을 곧 알아낼 줄 알아야 했다. 인류학자 퍼스(Firth)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호주의 종족들은…… 사냥터에 있는 잡아 먹을 수 있는 동물, 물고기, 새 등의 습성과 특징, 서식처, 그리고 계절에 따른 이동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바위, 돌맹이, 밀랍, 고무, 식물, 풀뿌리, 나무 껍질 등의 외적 속성뿐 아니라 그보다 덜 분명한 속성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불을 일으키는 법과, 고통을 덜고 출혈을 막는 법 및 신선한 음식의 부패를 지연시키기 위해 열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열을 이용해 어떤 나무는 딱딱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부드럽게 만들 줄도 안다…… 그들은 적어도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조수(潮水)의 운동과 혹성의 주기 및 계절의 순서와 지속 기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들은 풍향·풍속 체계와 연간 습도 및 기온 유형과 같은 기후의 변동이 자연계 생물체의 성장과 생활상의 끊임없는 변화와 서로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잡아 먹기 위해 죽인 동물에서 나온 부산물을 현명하고도 경제적으로 이용할 줄 안다. 예컨대, 캥거루 고기는 먹고 다리뼈는 석기를 만드는 데 도구로 사용하거나 쐐기로 이용하고, 근육은 창을 묶는 데에, 발톱은 밀랍과 섬유를 갖고 목걸이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기름은 붉은 황토와 섞어 화장품을 만들고 피는 목탄과 혼합해 페인트로 쓴다….

.. 그들은 간단한 역학적(力學的)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부머랭(일종의 무기로서 던지면 곡선을 그리며 다시 돌아옴–옮긴이)이 정확히 곡선을 그리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사막에서 생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영리’했던 것이다. 그들이 터득하지 못했던 것은 씨를 뿌려 자기들의 식량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우리 인류의 조상도, 지구상에 존재해 온 기간의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불과 5천 년 전에야 비로소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부(富), 즉 인간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신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분업 형태, 즉 새로운 사회 관계를 생가나게 했다. 예컨대, 인간이 처음으로 씨를 뿌리고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식량을 기르고 토기에 그 식량을 저장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고고학자들이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회 생활의 전면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인간은 동물을 사냥하는 데뿐 아니라 이제는 땅을 개간하고 추수를 하는 데도 협력해야 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할 수 있었고,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과 재화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 최초의 도시들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저 식량을 마련하는 데에만 종사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이 최초로 생겨날 수 있었다. 항아리를 만드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도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한 부싯돌 채광과 금속 채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전체 공동체 성원응ㄹ 위해 초보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더욱 불길한 것은 저장된 잉여 식량이 전쟁 동기를 유발·제공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위의 세계를 다루거나 자연을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들의 생활을 변형시킨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과정을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 노동력과 생산수단 및 양자간의 기술적 관계–옮긴이)의 발전이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관계–옮긴이)를 변화시키고,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사회까지 변화시킨 과정이라고 요약했다.   더 최근의 예들이 많이 있다. 3백 년 전에 서구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땅을 일구고 살면서,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의 사고(생각)의 범위는 그 지역 촌락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관념은 그 지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다수는 읽거나 쓸 필요가 없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백 년 전쯤에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한 탈바꿈을 했다. 이제 그들은 조그만 촌락이 아니라 대도시에 살게 되었고, 결국 읽거나 글씨 쓸 줄 아는 것을 포함해 그들의 선조들은 꿈꾸지도 못했던 기술들을 배울 필요가 있게 되었다. 또,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지구의 반을 횡단해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머리에 주입한 고리타분한 관념들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생산에서 물질적 혁명은 또한 생활 양식과 관념에서도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변화가 지금도 막대한 수의 사람들한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방글라데시나 터키 촌락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이나 독일의 공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지녀 온 오랜 관습과 종교적 태도들의 더 이상 적합하지 못하다고 깨닫는 것을 보라. 아니면, 지난 50년간 다수의 여성들이 가정 밖의 직장일에 익숙해지면서, 여성이 실질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이전의 태도에 어떻게 도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이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과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마르크스 이전의(그리고 그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 즉 관념론자들과 기계적 유물론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회 변동, 즉 역사의 비밀이다.   관념론자들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변화는 관념이 바뀌면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규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객관적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주위 세계의 제약을 받지만, 역으로 그들은 세계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여 세계를 더욱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자기들 자신까지 변화시킨다.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식주를 만들어 내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술과학(technology)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낳는다거나 새로운 발명이 자동적으로 사회변동을 일으킨다고 믿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견해(때로 기술과학 결정론 technology determinism이라 부른다)를 배격했다.   역사를 보면, 의식주의 생산을 촉진하는 관념들이 기존의 사회 형태나 사람들의 태도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듭해서 이러한 관념들을 배척한 적이 있다. 예컨대, 로마제국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땅에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방법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방안들을 채택하게 되면 채찍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노예로부터 수확을 얻어낼 때보다 귀족이 일에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방안들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18세기에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했을 때,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의 공업 발전이 런던 기업가들의 이익과 상충되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려 했다. 만약 누군가가 성우(聖牛)를 죽여 인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쥐고기를 가공처리해 영국인들에게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공급하는 방법을 내놓는다면, 그러한 방안들은 기존의 편견 때문에 묵살당할 것이다.  

생산 발전은 낡은 편견(선입관념)과 낡은 사회 조직 방식(구체제)에 도전은 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러한 구식 편견과 구식 사회 구성 형태를 뒤집어 엎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막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만약 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면, 그때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실시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조차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풀어 보자.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 발전하면, 발전된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 및 그것이 형성한 낡은 사회관계의 기초 위에서 성장한 관념들과 상충하게 된다. 이 충돌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진보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틀에 박힌 채 그 상태 그대로 머물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까지 한다.

3 계급투쟁

  우리들은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사유 재산을 소유한 반면, 우리들 대부분은 거의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항상 그러했던 것으로 당연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계급과 사유 재산, 군대 혹은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5천 년 내지 1만 년 전까지에 이르는 50만 년 동안 인류가 발전해 온 길이었다.   계속해서 노동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계급의 분화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노예가 생산하는 것 모두가 그 노예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하다면 노예를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생산의 진보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계급이 분화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화해야 했다.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면 직접 생산자들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소비를 하고도 잉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 잉여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 존재했다.  

 이 모든 식량(총생산물)을 노동해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초과분의 잉여 식량을 그저 먹어 치워 버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부실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충동이 강했다. 그러나 잉여 식량을 다 먹어 버린 결과, 다음 해의 홍수나 기근 같은 자연의 파괴력과 외부의 굶주린 종족의 공격에 대해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책임지고 장래 재앙에 대비해 이러한 여분의 부를 저장하거나, 수공업자들(식량 이외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을 부양하거나, 방어 수단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거나, 그 일부를 먼 곳의 부족들이 생산한 유용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든가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행정관과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살던 최초의 도시들에서 실행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생산물을 기록하기 위해 평판(平版) 위에 표시하는 것으로부터 문자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들이 바로 우리가 소위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최초의 싹이 트는 단계였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但書)로서, 증가된 부를 인구 중 소수가 관리하는 데 이 모든 것은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전체 사회의 이익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 부를 사용했다. 그런데, 생산이 더욱 발달될수록 부는 더욱 이 소수의 사람들 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그 집중된 부는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는 더욱 괴리되는 것이다.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되었던 여러 규칙들은, 부와 그것(부)을 생산하는 토지가 소수인의 사유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법률”이 되었다. 지배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법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옹호해 주었던 것이다.  

‘토지에서 노동한 사람들이 자기네 생산물을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사회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럴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여전히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인구의 대다수는 땅을 파먹으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데 너무 바빠서, 읽기나 쓰기 체계를 발달시키고,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교역을 위해 배를 건조하고, 별들의 행로를 연구해 보고, 수학의 기초 원리를 발견하고, 언제 강이 범람할지 혹은 어떻게 관개 수로를 건설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등의 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생활 필수품이 다수 대중한테서 탈취되어 이것이 하루 온종일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소수의 특권 집단을 부양하는 데 사용될 때만, 이러한 일들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계급 분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꾸지도 못했던 생산의 발전을 이룩해 왔다. 자연적인 빈곤은 극복되었고, 지금 존재하는 빈곤은 자본가들이 저임금을 줌으로써 새로이 빚어진 인위적 빈곤이다. 오늘날의 계급 사회는 인류를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필연적인 계급 분화를 일으킨 것은 최초의 순수한 농경 사회에서 읍과 도시 사회로 변화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부의 생산 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예컨대, 천 년 전 영구의 지배계급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뼈빠지게 일하는 농노에 기생해 생활하는 봉건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교역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봉건 귀족과 함께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이라는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했다. 그리고, 공업이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상인들의 힘이 산업체 소유자(산업 자본가 계급)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사회 발전의 각 단계마다, 육체 노동을 해 부를 생산하는 피억압 계급과 그 부를 소유·통제하는 지배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모두가 변화를 겪었다.   고대 로마의 노예 사회에서 노예는 지배계급의 사유 재산이었다. 노예 소유주는, 마치 그가 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닭이 생산해 내는 달걀을 소유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생산해 내는 재화를 소유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 농노는 자기 토지를 보유(소유한 것은 아님–옮긴이)하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소유했다. 그러나, 이 토지를 보유하게 된 대가로 봉건 영주가 소유한 토지(領地: demesne–옮긴이)에서 보통 매주 사흘을 일해 주어야 했다. 즉, 그들의 시간은 구분이 되어, 반 정도는 영주를 위해 일하고 나머지 반 정도는 자신들을 위해 일하곤 했던 것이다. 만약 농노가 영주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주는 농노를 채찍질, 투옥, 혹은 더 가혹한 방법으로 벌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소유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위해 지불되지 않는 노동(不拂勞動)을 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처벌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고용주는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서 얻어야만 하는 일자리인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는 아주 쉽게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가 소유한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상품의 가치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모든 경우에서 억압자 계급은, 일단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 필수품이 충족되면, 남은 모든 부를 소유·통제한다. 노예 소유주는 자기 재산(노예)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하므로, 자가 운전자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기 노예한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가 육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 잉여로 남는 모든 것은 주인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 봉건 농노는 자신의 땅뙈기에서 일함으로써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농노가 영지(領地: demesne)에서 하는 모든 가외 노동은 영주에게 돌어간다. 현대 노동자는 임금을 지불받는다. 그가 창출하는 그 밖의 모든 부는 이윤이나 이자나 지대의 형태로 고용주 계급한테로 간다.     계급투쟁과 국가  

근로 대중이 저항하지 않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 적은 거의 없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 노예 반란, 중국 전제 왕조 시대의 농민 반란, 고대 그리스 도시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내전 등이 있었다. 칼 마르크스가 자기의 소책자 『공산당 선언』(1848) 서두에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문명의 성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함으로써 일어난 계급투쟁에 좌우되어 왔다.   이집트의 왕(파라오)이나 로마의 황제나 중세의 군주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또한 아무리 호화롭게 살았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장대한 궁전을 가졌다 해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농민이나 노예가 생산한 생산물이 자기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힘으로 보장하지 못했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 분화와 병행해서 또 다른 것, 즉 폭력 수단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지배할 수 있어야만 위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사회에서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정부 기관이나 군대나 경찰 같은 것—즉 국가(기구)—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불과 60~70년 전에조차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국가(기구)가 없는 사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국가가 수행하는 많은 업무들이 단순히 비공식적으로 전체 주민이나 대표자 회의를 통해서 수행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회의는 중요한 사회 규범을 위반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행위를 재판하곤 했다. 예컨대, 악한을 추방시킨다든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처벌에 동의했으므로 처벌을 수행하기 위해 경찰이 별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도 별도의 군대 조직 없이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선발된 지도자 아래 모든 젊은 남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단 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부를 지배하는 사회가 성립되면,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조직하는 이러한 간단한 방법들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대표자 회의나 어떤 무장 청장년 회의도 계급에 따라 분열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 집단은 형법과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과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생산하는 것을 오직 자기들의 손에 독점할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급 분화에는 재판관(판검사)과 경찰(및 비밀 경찰)과 장군 및 관료—이들 모두에게는 특권 계급의 지배를 보호해 준 보답으로 특권 계급이 쥐고 있는 부의 일부가 주어진다—와 같은 집단의 성장이 뒤따랐다.   이러한 국가(기구)의 여러 지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상관의 명령에 주저없이 복종하도록 훈련받았고 피착취 인민 대중과 모든 정상적인 사회적 유대는 맺지 않았다. 국가는 특권 계급의 손아귀에 있는 살상 장치로서 발전했다. 그것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로서. 물론, 이러한 장치를 움직이는 장군들이 흔히 어떤 황제나 왕과 불화가 생겨, 자기들 자신이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괴물같이 거대하게 무장한 지배계급조차도 종종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살상 장치를 계속 돌아가게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부(富)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착취에서 나오므로, 이같은 반란은 한결같이 사회를 구시대적 방식으로 지속시켰던 것이다.  

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특권 계급뿐 아니라 이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무장한 기구, 즉 국가도 자기들의 타도해야 할 대상임을 역사 전반에 걸쳐서 자각해 왔다.   지배계급(과 그들을 지원하는 장군, 경찰, 판검사, 교도관 및 관료들)이 없으면 우선 무엇보다도 문명이 발전할 수 없었기에, 지배계급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일단 자신들의 권력이 확립되면, 문명이 더 이상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게 된다. 그들의 권력 유지는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부를 자신들에게 넘겨주도록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구식의 부 생산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새로이 도입할 수 있을지라도 부의 관리권(력)이 자기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까봐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억압 기구는 피착취 대중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두려워한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해서 자기들 자신의 무기와 군대의 비용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재력을 갖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어느 한도를 넘으면 생산의 발달을 돕지 않고 오히려 저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제 왕조 시대 중국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그리고 관개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운하와 제방(提防)을 통제하는 데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토지의 소유 및 운하·제방의 지배는 약 2천 년 동안 지속된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전제 왕조 시대 말기의 생산은 초기보다 그리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물론 그 대신, 유럽이 내내 중세의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때 중국은 예술을 꽃피웠고 인쇄술과 화약을 발명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의 주도로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기들의 지배를 완전히 받지는 않는 사회 집단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전제 왕조 당국은 주기로 가혹한 조치를 취해, 성장하는 도시 경제를 분쇄했고 생산을 저하시켰으며 신흥 사회계급의 세력을 파괴했다.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 즉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의 발달은 보수적인 기존 지배계급의 이익과 상충했다. 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가 사회의 모든 장래를 결정했다.  

 때로, 그 결과는 중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산 형태가 등장하는 것이 저해받아 사회가 매우 오랫동안 거의 정체되다시피 하기도 했다. 때로, 로마제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상 형태가 발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충분한 부가 생산되지 못하며, 결국 사회는 낡은 기반 위에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문명은 붕괴되었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조야한 농업 사회 형태로 되돌아갔다. 때로, 새로운 생산 형태에 토대를 둔 신흥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을—그들을 지탱시키는 사법 체계(司法體系), 군대, 이념, 종교와 더불어—조직적으로 약화시켜 마침내는 타도할 수 있었다. 이 때에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경우에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후퇴하느냐 하는 것은 계급간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느 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는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계급들의 조직과 단결력, 지도력에 달려 있다.

4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노동자들이 듣는 가장 바보스러운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상황이 달라져도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그것이 오래전이 아닌, 그리고 지구상의 어떤 먼 고장에서가 아닌, 바로 이 나라(영국을 가리킴–옮긴이)에서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과 250여 년 전의 사람들한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거대한 도시, 큰 공장, 비행기, 우주 탐험—촐도 체계조차 그들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과 같은 것들로써 묘사했다면, 그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압도적으로 농업적인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방 촌락 밖으로 40리 이상을 여행해 보지 못했고, 생활 양식은 수천 년 동안 그러했듯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칠팔백 년 전에 이러한 사회체제 전반에 마침내 도전하게 되는 발전이 시작되었다. 수공업자 및 상인 집단이 도읍(都邑)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정 영주에게 무료로 봉사하지 않고, 그 대신 생산물을 여러 영주들 및 농노들과 식료품으로 교환했다. 점차로 그들은 귀금속을 그러한 교환의 척도로 사용했다. 이것이 모든 교환 행위에서 얼마간 여분의 귀금속을 얻는, 즉 이윤을 얻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보 대전진은 아니었다.   도시는 처음에 한 군주를 다른 군주와 서로 반목시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수공업자들은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더욱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영향력도 커졌다. 당시의 “중간 계급”—부르주아들을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은 중세 봉건 사회 내부의 한 계급으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 영주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부를 획득했다.   봉건 영주는 농노들을 시켜 자기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농산물에 직접 의존해서 생활했다.

그는 농노들한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 자기가 가진 권력을 사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더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지)은 비농산품을 판매한 수익에 의존해 생활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그러한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일당 혹은 주당으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들 노동자들(흔히 도망친 농노들이었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일단 자기가 수당을 받는 만큼의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유일한’ 강제력은, 만약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못하면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굶어 죽기보다는 일한 대가로 자기가 생산한 상품의 값어치(가치)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으려 했기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에는) 중간계급인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는 전혀 다른 원천으로부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인해 그들은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기를 원하게 된다.   봉건 영주의 이상(理想)은, 성문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외부 집단이 침입하여 자기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는 일이 없고 농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자신의 토지에서 자신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였다. 영주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사회적 신분을 받아들여 선조들의 시대처럼 현상(現狀)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부유한 신흥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사물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업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이 쌓은 부(富)를 강탈해 가는 군주나 귀족들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뽑은 대표자들이 작성하고 시행하는 확고한 성문법 체계를 통해 봉건 귀족과 군주를 견제하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더 가난한 계급들을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켜 이들이 도시에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그래서 자기들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 자신의 신분 문제에 대해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흔히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자기 대(代)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흥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대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구질서와 그들의 충돌은 경제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일반 관념의 주된 원천이 교회 설교(성당 강론)이었던 문맹 사회에서 관념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신분을 타고난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연히 도시 부르주아지의 많은 행위들을 “죄악”이라고 공격하는 친(親)봉건제적 견해를 폈다.   그래서 16. 17세기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는 ‘중간 계급’이 자기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가 바로 그것인데, 개신교는 검약, 절제, 근면(특히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주도권으로부터 중간 계급 신도의 독립을 설교했던 종교 관념이었다.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중세의 신 관념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단순히 성찬식(성체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뜻하는 바에 대한 이견으로 싸우고 죽었던 것인 양, 즉 마치 당시의 큰 종교 전쟁과 내전들이 그저 종교적 차이로부터 비롯한 것인 양 학교나 텔레비젼에서 듣게 된다. 그러나,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문제로 되어 있었다. 즉, 부의 생산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에 기초한, 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사회 사이의 충돌이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승리했다. 현재의 지배계급(부르주아지)한테는 비록 무섭게 여겨지겠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왕의 목을 참수해 자기들의 신에게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시켰고, 그러한 행위를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을 들먹이며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1회전의 승리는 봉건 귀족한테 돌아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개신교도인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처절한 내전 끝에—비록 북부 독일에서는 봉건제의 성격을 띤 개신교가 종교로서 생존하긴 했지만—일망타진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그 후 2세기 이상이나 기다려서야 비로소 1789년 파리에서 종교적 외피를 입지 않고 시작되었던 제2회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착취와 잉여가치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상층 계급(유산 계급)은 근로 인민 대중에 대해 법적 제재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봉건 영주나 노예 소유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즉, 농노나 노예)이 달아나버려, 특권 계급 자신을 위해 노동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인격에 대해 그러한 법적 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가 굶어 죽게 될 것이 보장될 수만 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소유하는 대신에 노동자의 생계 원천, 즉 기계와 공장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활 필수품은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땅을 경작할 도구와 자연에서 얻는 원료를 가공할 도구가 없으면, 그 노동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 도구는 호미와 쟁기 같은 간단한 농기구로부터 현대의 자동화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기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구 없이는 가장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조차도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생산할 수 없다.   현대 인류가 아득한 석기 시대의 조상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구들—보통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라 부르는—의 발전이다. 자본주의는 소수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영국 인구의 1퍼센트가 산업(여기서는 농업도 포함됨–옮긴이) 주식과 유가증권의 84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생산수단—기계·공장·유전·비옥한 농토 등—의 대부분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포함한 개념–옮긴이)가 그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인민 대중(민중)에게 그러한 일터(작업장)와 생산수단을 가동시켜 노동하도록 허락하면 대중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 점(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한다는 점)이 자본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는데도—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독점적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는 수세기가 걸렸다. 예컨대, 17, 18세기의 영국 의회는 농민을 그들의 생산수단—그들이 수세기 동안 경작해 왔던 토지—에서 몰아내는 종획법(Enclosure Acts: 지주가 자기 토지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쫓아낸 후 목양장(牧羊場)을 만들 수 있게 한 법령–옮긴이)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토지는 특정 자본가 계급의 재산이 되어 버렸고,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대중은 살아 가기 위해 자본가들한테 자기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이렇게 독점하게 되자, 자본가는 인민 대중이 함께 자유와 균등한 정치적 권리들을 누릴 수 있게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친(親)자본가 경제학자들은 당시 일어난 상황에 대해 단순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임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정당한 하루의 임금”을 주고, 그 보답으로 노동자는 “정당한 하루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은 자본가가 자기의 생산수단, 즉 자신의 자본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 “희생”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노동자한테는 전혀 곧이들리지 않는 논리이다.  

“순 이윤율”이 10%라고 발표하는 한 회사를 예로 들어 보자. 그 회사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계, 공장 등의 비용이 1억 파운드라면, 해마다 마모되는 기계를 대치하는 비용(감가상각비)과 원료 비용 및 임금을 지불하고도 그 회사는 천만 파운드의 이윤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그 회사가 1억 파운드—원래의 투자액 전비용에 해당하는—의 총이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만약 이윤이 “희생”에 대한 “대가”라면, 분명히 10년 후에 모든 이윤은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자본가는 자기가 처음에 투자한 돈을 전액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는 이전보다 두 배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원(原)투자액과 그 동안 축적된 이윤을 몽땅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이렇게 되는 동안 노동자는 자기 삶의 에너지를 하루에 8시간씩, 일년에 300일을 공장에서 일하는 데 희생시켜 왔다. 노동자도 자본가와 같이 10년 후에 두 배로 잘 살게 되었는가? 분명코 그렇지 않다. 비록 노동자가 열심히 저축을 했다 해도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이상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결코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당한 하루의 보수에 대한 정당한 하루 일”이라는 방식은, 노동자를 자본도 없고 그저 대략 똑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팽개쳐 두었지만, 자본가의 자본은 배가 시켜 놓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등”권은 불평등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이 명백한 변칙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노동자들이 행한 노동의 가치 전부를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법적·정치적·경제적) 장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기계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한 주일에 190~200파운드에 해당하는 생산물을 새로이 산출해 낸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곧 그 노동자가 이 액수를 전부 지불 받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노동자는 훨씬 적은 액수를 받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 외에 달리 택할 길은 굶주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 전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참을 만한’ 생활 수준을 가능케 할 만큼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를 지불받는다. 즉, 자본가가 날마다 부려먹을 수 있도록 자기의 일할 능력(마르크스가 노동력 labour power이라고 부른 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받는 것이다.   노동자들 자신이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보수를 노동자들이 받는다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액수를 지불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富)의 양은 그들이 일단 노동해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양보다 훨씬 더 적다.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는 그들의 노동으로 창조되는 가치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 차액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불렀다.     자본의 자기증식(自己增殖)  

현(現)체제를 변호하는 자들의 글을 읽게 되면, 그들이 이상한(그러나 그들한테는 당연한) 관념을 공유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돈(화폐)은 마술적 속성을 갖고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는 은행에 돈을 예금할 때 그 돈의 액수가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자본가는 돈을 주식에 투자할 때 그 돈이 배당금의 형태로—해마다 새로운 돈을 ‘새끼 쳐서’—보상되기를 기대한다. 칼 마르크스는 ‘돈이 돈을 낳는’ 현상을 주목해 ‘자본의 자기증식’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설명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ㅎ녀재의 사회에서 충분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돈으로 살 수 있고, 생산수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들한테 팔게 할 수 있다.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 즉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돈이 기적처럼 불어날 수 있는 비밀은 이러한 노동력을 사고 파는 데 있다.   반복해 강조하면, 자본가는 애당초부터—발전도상국은 국가 권력과 유착하여 받은 특혜 융자와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원조·차관 등)을 통해—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살 만큼 충분한 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각 노동자로부터 날마다 뽑아 내는 잉여가치로 더욱더 부유해지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싸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돈은 계속 불어나는 것, 즉 그의 자본은 계속 증식되는 것이다.   배당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가 투자한 기업의 노동자를 단 한 명도, 단 한번도 대면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한테 수입을 주는 것은 돈의 신비스러운 힘이 아니라 그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이다.(은행이나 증권 회사와 같은 금융 기관 등을 매개로 하여 이자 소득을 얻는 자산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배당금, 이자, 그리고 이윤은 모두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가 일해서 얼마나 받는가 하는 것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고용주는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임금을 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가 더이상 깎아내릴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육체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들한테 하도 형편없는 임금을 주어 그들이 영양실조로 허덕여 일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수 없다면 이는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기계 위에서 잠들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밤에는 일에서 벗어나 휴식할 보금자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들이 약간 “사치스럽다”고 여기기도 하는 것, 즉 가끔 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다든가 텔레비젼을 본다든가 가끔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적절한 보수를 생각해 주는 것은 자본가한테도 유익한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가 더 상쾌한 기분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모두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새로 보충하는 데 이바지한다. 임금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본가는 또한, 또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한다. 현재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의 회사는 오랫 동안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현재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력까지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한테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정부가 이들 노동자 자녀들한테 교육 제도를 통해(읽기·쓰기·셈하기와 같은) 일정한 기술들을 가르치도록 책임을 분담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저발전국”의 경우, 교육비를 조달할 수 없는 임금 수준은 미성년자나 부녀자들까지도 공장에 나가 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또 다른 것이 역시 문제가 된다. 즉, 노동자가 어느 정도를 “괜찮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보다 상당히 적게 보수를 받는 노동자는 자기 일을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을 소홀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이 모든 요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그 모든 요인들은 자본가가 일당으로 사들이는 노동자의 노동력, 즉 그의 생활 에너지를 보장하는 수준을 지향한다. 노동자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계속 “먹고 살” 수 있고, 자기가 계속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비용을 지불받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해 한 가지 점이 더 지적되어야 한다. 막대한 양의 부가 경찰력과 군사력 같은 것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과 군대 등은 국가가 운영하지만,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즉, 군대와 경찰 등의 국가 군사·관료 기구)을 위해 소요되는 가치는—노동자들한테 귀속되지 않은—노동자들한테서 착취되어 자본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가치이다. 다시 말해 이것 또한 잉여가치의 일부이다.   결론적으로, 잉여가치=이윤+임대료+이자+국가(정부, 행정기관, 군대, 경찰, 감옥, 사법부 등)에 쓰이는 비용이다.

5 노동 가치 이론

  “그러나, 기계, 즉 자본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재화를 생산한다. 만약 그렇다면, 노동은 물론 자본도 또한 부(富) 생산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생산 요소는 그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친(親)자본가적 경제학을 배운 자들이 착취와 잉여가치(surplus value)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은 얼핏 듣기에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확실히 우리는 자본 없이는 재화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 없이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생산수단은 맨처음 어떻게 생겼는가?”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부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상 사용해 온 모든 것은—신석기 시대의 돌도끼이건 또는 현대의 컴퓨터이건 간에—일단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비록 도끼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그 도구들도 역시 그 이전에 행해진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일컬어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기업주들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자랑할 때, 그들은 사실 그 이전 세대들이 행한 광대한 양의 집적된 노동을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총괄하는 개념이다–옮긴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전 세대의 집적된 노동)은 그들 자본가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만큼의 일만 했던 선조(혹은 선배)자본가들의 “노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개념은—보통 노동 가치론이라고 하는데—마르크스의 독창적 발견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시대까지 모든 훌륭한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조차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 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나 리카도(David Ricardo) 같은 사람들은 산업(여기서는 광공업을 가리킨다–옮긴이)자본주의 체제가 아직 초기 단계였을 때—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1789~99)을 전후한 시기에—이론적 저술 활동을 했다. 자본가들은 아직 (정치적으로)지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기들이 지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부의 진정한 원천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들 자본가들에게 “노동이 부를 창조하며, 따라서 부를 축적하려면 자본가들이 노동을 자본주의 이전에 속하는(전근대적인) 구 지배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말해 줌으로써 자본가들의 이익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동계급과 친밀한 사상가들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친구들(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바로 그 주장을 되써먹기 시작했다. 즉, 그 친(親)노동자 사상가들은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동시에 노동은 또한 자본을 창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의 “권리”는 강탈당한 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자본을 정당화·합리화해 줌으로써 자본가를 지원하는 경제학자들은 노동 가치 이론이 말도 안 되는 애물덩어리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앞문으로 차내면 뒷문으로 기어들어 오는 법이다.   영국방송협회(BBC) 텔레비젼 뉴스를 들어 보라. 자본가의 대변인들은, “노사 분규”(labor disputes)로 인해 “대폭적인” 임금 인상이 있으면 “기업인”의 투자가 위축되어 “성장”(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이길래?)이 둔화될 것이므로 실업자가 급증할 것이고, 또한 고율의 인플레가 유발되어 결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감소시키고야 말 것이라고 약올리고 위축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의 다짐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잠시 접어 두자.(사실, 접어 두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기업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동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것이 이윤율—우리는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을 저하시키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그 대신에, 그 주장이 제기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자.

그들은 “기계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 즉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인 즉,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더 많은 부가 창조될 것이고, 이는 다시 새 기계를 더 많이 투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자기들 자신은 모를지라도—더 많은 노동(량)이 더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일, 즉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다!   내가 주머니에 1파운드의 지폐를 갖고 있다고 하자. 왜 그것이 나한테 유용한가? 결국 그것은 인쇄된 종이 조각일 뿐이다. 그것이 나한테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용한 물건을 그것과 교환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1파운드의 지폐는 그만한 양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2파운드의 지폐는 그 두 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고, 3파운드의 지폐는 3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며 …… 등이다.   우리가 부를 측량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들인 노동(량)을 측량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주어진 일정한 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가 책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숙련된 목수보다 시간이 5~6배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아무도 내가 만든 책상이 숙련된 목수가 만든 책상보다 5~6배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책상을 만드는 데 목수의 노동—나의 나동이 아니라—이 얼마만큼이나 필요했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길 것이다.  

목수가 책상을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책상의 가치가 한 시간의 노동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책상의 가치는 현사회에서 보통 수준의 기술과 숙련도로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어떤 물건의 가치 척도는 단순히 한 개인이 그것을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평균 수준의 기술과 평균 수준의 숙련도를 가지고 일하는 개인이 들이는 시간—그는 이 필요한 평균 수준의 노동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임을 지적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술 진보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이 점은 중요하다.   예컨대, 진공관을 가지고 라디오를 만들던 때에 라디오는 매우 비쌌다. 왜냐하면, 진공관을 만들고 그것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일 등에 많은 노동(량 혹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훨씬 적은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연결될 수 있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여전히 지공관 라디오를 만들고 있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생사하고 있는 라디오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라디오의 가치는 더이상 진공관을 가지고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트랜지스터를 갖고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