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장 : http://www.nonjang.co.kr/

Jacques Derrida 쟈끄 데리다

1926년 10월15일 알제리 출생
1949년 장 이폴리떼 교수 밑에서 논문준비 중 이폴리떼의 사망으로 중단
1951년  파리 소르본느 대학 철학과 강사
1952년 『글과 차연』, 『그라마톨로지』출판
1958년  『마쥐, 철학에 관하여』출판
1959년 철학강의를 위한 연구회 Greph 창단에 참여
1960년 박사학위 취득
1967년 국제 철학대학 설립을 위한 국가특별위원회 의장
1969년 국제 철학대학 학장 및 사회학 대학 철학 교수
1970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서 “장님의 기억, 자화상과 다른 폐허를”이라는 전시회 개최

데리다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는 ‘초담화’가 불가능해진 지금, 그리고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고 명백히 드러난 지금, 형이상학을 추구하고 있는 이론가이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현존이란 바로 모든 메타포에 대한 저항 속에 존재해 있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모든 표출화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또한 이점이 다른 사상가들과 데리다를 구별해주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데리다가 애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론적 근거규정, 실천적인 평가 및 이에 종속된 논의 형식들을 형이상학적 사유의 조건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겠다.” (H.키멜레, 『데리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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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서구 철학이 비이성에 대한 이성, 차이에 대한 동일성, 부재에 대한 현전을 전리 근거로 주장해 왔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은 차이와 관계 맺으면서 차이를 배제함으로써만 동일성일 수 있으므로 동일성 자체는 그 속에 차이에 대한 배제, 억압을 지니고 있는 폭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성, 동일성, 현전에 대비되는 비이성, 차이, 부재라는 그것의 타자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데리다는 이 작업을 현전의 형이상학을 해체시키는 전략을 통해 완수하려 한다. 데리다는 서구 철학의 근저가 되는 본질/현상의 이원적 대립 구조에서 진리-권력의 전략을 탐지한다. 그것은 본질을 현상에 대해서 우선적인 것, 근거로 보고 현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본질에 특권을 부여하고 그 특권이 그 대립항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각각의 대립항들에서 한 측면은 원천적인 것이고 다른 측면은 이차적인고 파생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대립항들은 그 대립구조와 그에 따른 권력 배분을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러한 은폐를 드러내어 해체시키는 것은 억압적이고 기만적인 이성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착취·성적 불평등·인종적 차별 등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기존의 대립관계를 폭로할 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해체의 전략인데, 이것은 그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 기존의 동일성, 진리를 보충하는 새로운 억압적 논리를 내세우고 또 다른 동일성을 제시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해체적 뒤집기는 “어떠한 종합도 허용하지 않고, 텍스트의 전략과 전제들을 파멸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푸코가 고고학과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지식의 형성과정에 내재하는 이성/광기의 구별, 또는 지식/권력의 사회사를 탐구함으로써 근대적 이성과 비이성의 차이를 전복하려 했다면 데리다는 테스트들 자체가 담고 있는 내적 불일치를 드러냄으로서 자기모순을 폭로1하고 그럼으로써  이성이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자신이 숨긴 차이를 털어놓게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함께 볼 사상가
가다머,  하이데거

이 글은 아도르노의 ‘최소한의 도덕 Minima Moralia’ 번역 시안의 일부이며 출처는 http://gshp.gsnu.ac.kr/~ydkim/adorno/main.htm 입니다.

아도르노; 최소한의 도덕(미니마 모랄리아)

헌사  슬픈 학문  – 이 책으로써 나의 친구 호르크하이머에게 그 몇몇 편린들을 바치고자 하는 – 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철학의 본원적인 용무로 인정되었으나 철학이 방법론으로 변질된 이후 지성의 냉대를 받거나 자의적인 경구에 머물다가 끝내는 잊혀지게 된 영역, 즉  올바른 삶 의 이론에 관한 것이다. 예전에 철학자들이  삶 이라 부른 것은 어떤 자율성이나 독자적인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私的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변했다. 직접적인 삶에 대한 진실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소외된 모습들이나 개별 실존의 가장 내밀한 국면까지를 규정짓는 객관적인 힘들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직접적인 것 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싸구려 장식과 같은 거짓 정열로써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치장하고 기계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무엇인가 실제적으로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인 양 행동시키는 소설가와 같다.  삶 을 향한 시선은  삶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로 넘어갔다. 그러나  삶 을  생산 에 부수된 하루살이 현상으로 격하시킨 삶과 생산과의 관계는 완전히 부조리한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이다. 그러나 수단을 위한 목적이라는 이 어리석은 상황에 대한 예감마저 삶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된 것은 아니다. 축소되고 퇴화된 본질은 스스로를 피상적인 것으로 변질시키는  마법화 에 집요하게 저항한다. 그렇지만  생산관계의 변화  자체도, 생산의 단순한 반영형식이고 진정한 삶의 왜곡된 상에 불과한 것인 소비영역, 즉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이모저모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직 생산의 질서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지는 않은,  생산 에 거역하는 힘에 의해서만 인간은 좀더 인간적인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삶의 가상 이 완전히 깨어진다면 – 소비영역 자체가 사악한 이유로써 이 가상을 방어하려 하지만 –  절대적 생산 이란 괴물이 승리를 구가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이 어떻게 가상이 되었는가와 마찬가지로 주체로부터 나온 관찰에는 수많은 허위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현 단계의 역사운동에서 그 운동이 갖는 압도적인 객관성이란 것은  주체 가 완전히 붕괴될 때 – 또한 이 붕괴 속에서  새로운 주체 가 생성되지 않을 때 – 가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경험 이란 어쩔 수 없이 저 옛 주체, 역사적으로 이미 유죄선고를 받았으며, 여전히  대자적이기는 하지만 즉자적이지는 못한 저 주체 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 는 자신의 자율성을 여전히 확신하고 있지만 아우슈비츠가 주체에게 보여준 저 절멸성은 이미 주체의 형식 자체에 치명타를 가한다.  주관적인 관찰 은 그것이 아무리 예리한 비판을 자신에게 가할지라도 무언지 감상(感傷)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세계행정(行程) 에 대해 한탄한다는 것은 그것의 선한 의도야 비난할 수 없지만 한탄하는 주체가 자신이  그렇게 있는 상태Sosein  속에서 경직되어버리고 이에 따라 세계행정의 법칙을 다시 한번 완수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의식과 경험 의 고유한 상태에 충실하려는 것은, 개인을 넘어서려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실체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는 통찰을 부인하려들게 됨에 따라 항상 불충실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헤겔은 – 『최소한의 도덕』은 헤겔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 주관성의  단순한 대자존재적 성격F rsichsein 을 매 단계마다 부인하려 들었던 것이다. 어떤 고립된 개별자도 용납하지 않는 변증법적 이론은 잠언적인 글 또한 인정할 수가 없다. 아무리 호의적인 경우에서일지라도 잠언들은 – 『정신현상학』 서문의 표현법을 따르면 – ‘대화 형식Konversation’으로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는 끝났다. 『정신현상학』은 사람들이 체계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체계의 총체성 요구를 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 요구에 저항하려들지는 않는다. 헤겔은 다른 곳에서는 열렬히 주장하고 있는 요구, 즉 사물에 충실하며  사물의 내재적인 내용에 파고드는 대신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 를 하지 않는다는 요구를 주체에 대해서는 지키지 않고 있다. 오늘날  주체 가 사라져 간다면 우리의 잠언들은  사라지는 것 자체가 본질적인 것으로 관찰되어야 한다 는 헤겔의 원칙을 이행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잠언들은 헤겔의 방법에는 반대되게, 그렇지만 부정성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걸맞게 다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정신의 삶은 정신 스스로가 절대적인 분열 속에 처할 때만 그의 진실을 획득한다. 이러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정신 이 부정성에서 빠져나온 긍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다. 즉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틀렸다고 말함으로써 그 문제를 마무리짓고 다른 무엇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 이 이러한 힘이 되는 것은 다만 정신이 그 부정성을 직시하고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헤겔이 자신의 통찰에 반하게  개별적인 것Individuelle 을 부당하게 다루는 이러한 처리방식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자유주의적인 사유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온갖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관철되는 조화로운 총체성을 헤겔이 구상하는 것은, 그가 아무리  개별화Individuation 를 역사나 사유과정을 추진하는 계기로 규정할지라도 전체 구조 속에서는 여기에 저급한 위치밖에는 부여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개별적인 것 을 무화시키면서  객관적인 경향 은 인간의 머리 너머에서 관철된다는 관념은, 개념 속에서 구상된  보편과 특수의 화해 가 오늘날까지도 완수될 수 없는 것이라 할 때, 헤겔에게서는 일그러진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지극히 냉정하게 그는  특수자Besondere 를 해소시키는 선택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어느 곳에서도  전체의 우위 는 헤겔에게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 역사에서나 헤겔의 논리에서 고립적인 반성은 총체성의 찬미로 넘어가는 것이 문제성을 드러내는 정도에 비례해서, 기존의 것을 정당화하는 것인 철학은  객관적 경향 이라는 승리의 마차에 열렬히 매달리게 된다. 사회적  개별화원칙 의 전개는 운명적인 것의 승리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그러한 철학에 그럴 듯한 동기를 제공한다. 헤겔은 시민사회와 그 근본범주인  개인 을 상정하지만 양자간의 변증법을 제대로 끝까지 밀고나가지는 않는다. 고전경제학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헤겔은  총체성Totalit t  자체가 구성인자들의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통해 생산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자체로서의 개인은 순진하게도  환원불가능한 소여  – 인식론에서는 그것을 더 해부했음에도 불구하고 – 로서 취급된다. 그렇지만 개인주의 사회에서  보편자 는  개별자 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될 뿐만 아니라  사회 는 근본적으로  개인 의 실체인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에 대한 분석은 헤겔이 용인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개인적  경험 에서 이끌어낼 수 있게 되지만, 거대한 역사적 범주들은 이러한 범주들과 결부된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기만의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헤겔의 구상이 나온지 150년만에 저항하는 힘에 힘입어 많은 것들이 다시  개인 에게 되돌려졌다. 헤겔이 개인을 다루는 데서 보여준 엄부(嚴父)의 인색함과 비교하면, 개인은  사회의 사회화 에 의해 약화되고 공동화(空洞化)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충일함과 힘을 획득하고 분화되었다. 개인이 몰락하는 시대에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개인의 경험 은 은폐되었던 많은 것들을 인식하도록 해주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개인이 여전히 지배적인 범주로서 긍정적인 무엇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이다.  차이 를 녹여버리는 것을 곧바로  의미 라고 외쳐대는 전체주의적인totalit r 통일성에 직면해서 사회의 해방적인 힘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잠정적으로  개별적인 것 의 영역으로 모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이론 은 –  개인 을 들먹이는데 찔리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이  개인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시도는 공격받을 여지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책은 대부분 전쟁 기간 동안 사유에 침잠할 수 있을 때 틈틈이 적은 것이다. 나를 추방한  폭력 은 그러나 완전한 인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집단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개인 에 관해 말을 하는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공범의식을 아직 고백하지 못했다. 이 책은 세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각각은 망명 지식인의 협소한 사적 영역의 체험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사회적 인류학적 부피를 지닌 언급들이 첨가된다. 이 언급들은 심리학, 미학, 그리고 주체와 연관된 한에서의 과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각 부분의 결말을 이루는 잠언들은 주제면에서 볼 때는 아무래도 주로 철학에 관계되지만 어떤 분명한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앞으로 씨름해야 할  개념 들의 이정표를 새기거나 모델들을 제공할 것이다. 집필의 직접적인 계기는 1945년 2월 14일의 막스 호르크하이머 생일이 제공했다. 집필은 우리가 외적 상황에 대한 고려 때문에 우리의 공동작업을 중단해야만 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중단된 시기에 이루어진 이 책에 대해서 그에게 사의를 표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내적 대화 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티브는 모두, 호르크하이머나 아니면 이 시기를 표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최소한의 도덕』의 특별한 단초 –  즉 두사람 공통의 철학적 계기들을  주관적인 경험 로부터 기술하려는 시도 – 의 전제조건은,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은 이 내용들이 합쳐서 이루게 될 우리 두사람 공동의 철학에 선행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은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형식을 지니게 될 것이며, 분명한 이론적 연관관계에 대해 표명하는 것은 포기할 것이다. 이러한 자제로서 동시에, 우리 두사람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으며 아직 손을 떼지도 않은 작업을 한사람만이 단독으로 진전시키게 되는 불의를 어느 정도 보상받고 싶다.

1. 마르셀 프루스트를 위하여 재능 때문이든 허약한 체질 때문이든 유복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들이 예술가나 학자 같은 지적인 직업을 갖게되면 그는 동료라는 역겨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남다른 어려움을 겪게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의 독립성을 질투한다거나 그의 진지한 의도를 불신한다거나 그를 기득권층이 보낸 밀사로 의심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불신은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적개심에서 나온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대체로는 그 자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적대감은 다른 데 있다. 정신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은 그 사이에 그 자체가 실용적인 일, 즉 엄격한 노동분업에 입각해 인원제한을 받는 전문직종이 되었던 것이다. 돈버는 일을 명예롭지 못한 것으로 혐오한 나머지 정신적인 직업을 택한, 물질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벌을 받는 것이다. 그는 프로가 못되며 경쟁자들이 만들고있는 위계질서에서 – 그의 학식이 얼마나 깊은가에 상관없이 – 딜레땅트의 서열을 차지하게 된다. 세상에 나가려들 경우 그는 옹고집을 부리는데 있어서 어떤 완고한 전문가도 능가해야만 한다. 그가 매달리고 있는 노동분업의 지양 – 그의 경제적인 여건이 어느 정도는 그러한 지양을 실현가능할 수 있도록도 해주지만 – 은 특별히 악평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한 노동분업의 지양은 사회가 명령한 일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혐오감을 누설하는 것으로서 각 분야를 이끄는 가장 경쟁력 있는 세력들은 그러한 이디오진크라지를 결코 용납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의 분화는 사회로부터 위탁받지 않은 일을 행하는 정신을 제거하는 수단이다. 분화된 정신은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훨씬 신뢰성 있게 행하는데, 그 이유는 노동분업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일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있는 탁월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공격당할 수 있는 지점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런 식으로 보살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살 방도가 없기 때문에 게임에 동참해야 하며 달리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동참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바깥에 있어야만 한다. 독립적인 지식인은 본래 자신이 속해있던 계급에서 도망나왔지만 이 계급은 탈영자들이 피난처를 구한 바로 그 영역에서조차 그들의 요구를 강제적으로 관철시키려듦으로써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7. 그들, 그 사람들 지식인은 대체로 지식인들과 상대한다는 정황은 지식인으로 하여금 지식인 집단을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비열한 인간으로 간주하도록 유혹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 유혹을 받는 이유는 아주 수치스럽고 타락한 경쟁관계 속에서 서로를 알게되기 때문에(불충분한 의역)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가장 역겨운 측면들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단순한 사람들과  – 지식인들은 이들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 지식인의 만남은 단순히 사고파는 역할관계 속에서의 만남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 고객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동차수리공이나 술가게의 여점원이 뻔뻔스럽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 위로부터 친절하라는 명령을 받고있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문맹자가 편지를 써달라고 지식인에게 달려올 경우도 그들은 그런 대로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람들이 사회적인 과실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챙겨야 될 경우가 되면 그들의 질투나 악의는 식자나 지휘자에게서 관찰될 수 있는 비열함을 훨씬 능가한다. 멋진 패배자들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을 그렇게 만든 멋진 체계를 찬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리적인 노동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죄책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죄책감이 ‘전원생활의 우둔함’에 대한 변명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인에 관해 글을 쓰는 유일한 사람들인 지식인이 순수성의 이름으로 지식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헉슬리에게까지 이르는, 반지성주의나 비합리주의의 지배적인 조류 대부분은, 글쟁이들이 지식인들의 경쟁메커니즘을 제대로 꿰뚫어보지도 못하면서 고발하고는 다시 그 메커니즘에 빠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신만의 가장 고유한 영역에서 그들은 ‘바로 네가 그렇다’는 의식을 스스로에게 차단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인도의 사원으로 달라간다. 9. 얘야, 이것만은 지켜다오 거짓이 부도덕한 이유는 신성한 진리를 침훼했기 때문이 아니다. 진리에 호소할 수 있는 권한은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쥐고있다. 사회는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말은 몽땅 쏟아내도록 부추기는데 그것은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구성원들을 좀더 확실하게 포획하기 위한 것이다. 부분적 진리에 대한 주장이 – 이로써 보편적 허위를 곧장 그 반대의 것으로 뒤집어놓기는 하지만 – 보편적 허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에는 역겨움이 붙어다닌다. 사람들은 해묵은 채찍에 의해 그러한 역겨움을 의식하도록 강요당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또한 채찍을 휘두르는 형리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게 해준다. 잘못은 과도한 정직성에 있다. 거짓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거짓말할 때마다 그는 매번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면서도 ‘성실하고 정직해라’고 노래해대는 한심한 세상의 메커니즘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교묘하게 짜여진 세상 메커니즘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무력화시킨다. 거짓말은 들통이 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비로소 거짓말은 타인에 대한 부도덕이 된다. 그러한 부도덕은 타인을 바보로 만들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타인을 멸시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노회한 실천가들에게서조차 거짓말은 사실을 은폐하여 아름다운 환영을 만들어내는 본래의 명예로운 기능을 잃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빠삭하게 알고있다. 거짓말은 오직, 타인에게 다음의 사실, 즉 그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행해진다. 거짓말, 언젠가는 의사소통을 위한 자유주의적인 수단이었던 거짓말은 뻔뻔스러움을 위한 테크닉이 되었다. 이러한 테크닉을 구사함으로써 모든 개인은 자신의 주변을 냉기로 두르고는 그 보호막 속에서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10. 분리와 결합 결혼, 결혼에 대한 인간의 권리가 그 토대를 상실한 시대에 치사한 패러디가 되어 아직 존속하고 있는 결혼은 오늘날 대체로 자기유지의 트릭으로 작용한다. 이 트릭이란 진실에 있어서는 우울한 늪 속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결혼식장에서 굳은 서약을 한 당사자들은 자신이 범한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을 밖으로, 상대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결혼생활이란 아마도 두사람이 각자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경제적으로 강요된 이해공동체에서 연유하는 뒤엉킴 없이 자발적으로 서로에 대한 상호 책임을 떠맡는 생활일 것이다. 이해공동체로서의 결혼은 어쩔 수 없이 이해에 관계된 상대방의 굴복을 의미한다. 설사 당사자가 그런 상황을 잘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굴복시키는 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세계체제의 사악함이다. 혹자는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을지 모른다. 이익추구에서 해방된 사람들, 즉 부자들에게는 치욕스럽지 않은 결혼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 가능성은 지극히 형식적인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특권을 가진 자들이란 바로 이익추구가 2차적인 천성이 되어버린 사람들로 그렇지 않고는 달리 자신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게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1. 책상과 침대 사람들이 이혼을 하게 되면, 착하고 친절하고 교양있는 사람일지라도,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켜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을 먼지로 뒤집어씌우고 똥칠을 하곤 한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던 공동생활의 신뢰 기반인 친밀감의 영역은 그 토대인 결혼관계가 파경에 이르자마자 사악한 독소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들 사이의 친근감이란 배려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독가시를 감싸주는 보호막이다. 친밀감이 일그러진 형태로 나타나면 그 안에 숨어있던 단점들이 노출되는데 이혼의 경우 그러한 단점들이 겉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이혼은 친밀감이라는 창고 속에 들어있던 모든 것들을 강탈해가버린다. 예전에는 애정어린 배려의 표시였고 화해의 형상들이었던 물건들은 갑자기 독자적인 가치를 획득하면서 차갑고 사악하며 유독한 마각을 드러낸다. 이혼한 어떤 교수들은 부인의 집에 침입하여 책상 속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빼내오기도 하고, 많은 위자료를 받은 부인들은 남편을 세금포탈 혐의로 고발한다. 결혼이 비인간적이 된 보편자 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아직 남아있는 고립된 섬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제공한다면 결혼이 깨지면서 보편자는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 보편자는 냉혹한 사회의 원칙에서 예외를 이루고 있던 것처럼 보이던 것을 다시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어 법과 소유라는 소외된 질서 밑에 굴복시키며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은 안전하다고 꿈꾸던 사람들을 비웃는다. 보호받고 있던 것은 (곰팡이가 볕에 쬐이듯) 잔인한 무방비상태에 노출된다. 부부가 본래는 서로에게 더욱더 관대했을수록, 또한 소유나 의무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것이 없을수록 이혼과 함께 품위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은 더욱 가증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이해당사자들의 끝모르는 싸움과 상호비방과 갈등이 펼쳐지는 영역은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를 이루는 어두운 영역, 즉 남편이 부인의 재산과 노동을 야만적으로 관장하는 것, 잠자리의 기쁨을 제공한 여자를 위해 평생동안 책임을 떠맡을 것을 남자에게 요구하는, 앞의 것 못지 않게 야만적인 성적 억압, 가정이 파괴되면 이 모든 것들이 지하에서 기어나와 햇볕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이다. 제한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울타리 안에서 선한 보편자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이제 사회에 의해 서로를 파렴치한으로 간주하도록 강요당하면서 그들 또한 무제한적인 비열성을 드러내는 바깥 세상의 보편자와 다를 바가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이혼 속에서 보편자는 특수자에 찍힌 치욕의 상흔임이 드러나는데 그 이유는 특수자인 결혼은 이 사회에서 진정한 보편성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 보호, 도움, 그리고 충고 망명 지식인은 모두 예외없이 상처받은 사람이다. 이 사실을 자존심이라는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씁쓸하게 깨닫기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자인하는 것이 속 편하다. 그가 노동조합이나 자동차산업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리 정통하다 하더라도 그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미로 속을 헤매게 된다. 대중문화의 독점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는 것과 엄정하고 책임있는 노동 사이에는 화해불가능한 단절이 지배한다. 그는 언어를 몰수당하며, 인식력의 샘인 역사적 차원은 매장되어버린다. 망명 지식인의 고립감은, 질서가 잘 잡힌 단단한 그룹들이 형성되어 있고, 소속원에 대한 불신이 깊고, 낙인찍힌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클수록 더욱 커진다. 사회적인 생산물 중 이방인에게 할당되는 몫은 충분할 수가 없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일반적인 경쟁과는 별도로 자기들끼리 치르는 제2의 경쟁을 아무런 희망도 없이 벌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개개의 망명지식인에게 상흔을 남겨놓는다. 나치의 획일화 통제(Gleichschaltung)의 치욕을 피해 망명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이러한 뿌리뽑힘을 특별한 표식으로 달고다니며, 사회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비현실적이고 헛개비 같은 생존을 영위하게 된다. 망명객들 간의 관계는 토착민들 사이의 관계보다 훨씬 독이 배어있다. 시각은 왜곡되며 비중두기는 허위적이 된다. 사적인 것이 부당하고 조급하게, 마치 흡혈귀처럼 표면으로 밀고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제는 차마 존재한다고조차 말할 수 없게 된 사생활이 발작적으로 건재를 과시하려 들기 때문이다. 공적인 삶은 헌정질서에 대한 암묵적인 서약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광기에 물든 차가운 시선은 포착해서 집어삼킬 무엇인가를 찾아헤맨다. 기댈 곳이란 오로지 자신과 타자에 대한 단호하고도 냉철한 진단, 그리고 숙명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깃든 눈먼 폭력, 끔찍한 폭력에 얻어맞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것 말고는 없다. 극도의 주의가 요구되는 것은 특히 사적인 관계를 잘 선별하는 것 – 그러한 선택 자체가 가능한지조차 모르지만 – 이다. 무엇보다도 삼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강자를 찾는 행위이다. 득을 좀 취해보려는 흑심은 인간적인 관계를 만드는데 치명적인 해가 된다. 상호신뢰나 연대감은 인간적인 관계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 눈앞의 목적을 이루려는 흑심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경계해야 할 대상은 권력자에게 비굴하게 아첨하고 구걸하는 주구(走狗)들인데, 까마득한 옛날부터 망명지 같은 경제적인 영점 지대에서는 의례 독버섯처럼 번성하는 이런 무리는 처지가 보다 나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보호자에게 작은 이득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그런 이득에 혹해서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당장 그를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보호자 자신도 낯선 땅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막막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런 유혹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을 부단히 느끼게 마련이다. 유럽에서 언어적인 표현을 거부하는 비의적인 제스처는 단지 인간 마음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똬리를 틀고있는 이기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aust rit 라는 개념은 – 아직 형태를 못 갖춘 취약한 개념이지만 – 망명생활에서는 가장 신뢰할 만한 구명정으로 보인다. 물론 이 구명정은 고도의 세심한 집중력으로 배를 몰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 그 배에 탑승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굶주림과 광기이다. 17. 잠정관리 예전에는 시장관계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통해 투명한 삶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오늘날은 그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더 이상 투명하게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장 강한 자까지도, 객체이다. 심지어는 장군이라는 직업조차 충분한 보호장치를 제공하지 못한다. 어떤 약정도 사령부를 폭격기의 공격으로부터 면제해줄 충분한 구속력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조심성으로 행동한 지휘관들도 히틀러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지고 장개석에 의해 단두대로 보내졌다. 이로부터 초래되는 직접적인 결과는,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 그런데 생존 자체는 세계 종말에 동참한 다음 종말 이후 땅구멍에서 기어나온다는 꿈만큼이나 황당무계해 보이는 상황에서 – 매순간 자신의 삶을 끝낼 수 있다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자유로운 죽음에 관한 짜라투스트라의 격앙된 가르침에서 나오는 슬픈 진리이다. 자유는 순수한 부정성으로 응축되어버린 것이다. 유겐트 양식 시대에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불리던 것은, 죽음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할 고약한 무엇이 있는 세상에서는 현존재의 무한한 굴복이나 죽음의 무한한 고통을 줄이려는 소망으로 쭈그러든다. 휴머니티의 객관적인 종말은 동일한 상황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개인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대표하는 개별자로서 인류 전체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18.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수용소 오늘날 사적인 삶이 어떠한가는 그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대로된 의미에서의 거주는 이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성장한 전통적인 주거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이유는 그러한 주거 안에 있는 안락함의 자취는 모두 인식에 대한 배반(安住)으로, 단란함의 흔적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가족공동체로 매도된다. 백지상태로부터 만들어진 기능적인 현대주거들은 무식쟁이를 위해 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주거상자이며, 어쩌다 소비영역에 흘러들어온, 거주자와는 무관한 공장이다. 이러한 주거들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독립적인 삶에 대한 동경마저 추방해버린다. 현대인은 침대와 함께 깨어있음과 꿈의 경계를 없애버렸다. 그렇게 밤을 보낸 자들은 항상, 무슨 일을 위해서든, 아무런 저항 없이 출동준비상태에 있으며 눈은 반짝반짝거리지만 아무런 의식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근사하지만 공동구매한 초현대식 주택으로 기어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을 산 채로 미라로 만든다. 호텔이나 가구 딸린 아파트로 이사감으로써 거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드는 것은 이민자의 강제조건을 처세를 위한 규범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어디서나 가장 혹독한 시련은 선택할 것이 없는 자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슬럼이 아니라면 방갈로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 방갈로는 내일은 나뭇잎으로 이은 오두막이나 트레일러, 자동차, 천막이 되거나 아니면 노숙일 수도 있다. 집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유럽 도시들의 폭격, 노동수용소나 아우슈비츠 같은 집단수용소는 기술의 내적 발전이 오래 전에 집들에 대해 내린 판결을 연장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집들은 이제 낡은 통조림 캔처럼 버려지기 위해 쓸모가 있는 것이다. 거주의 가능성은 사회주의 사회의 가능성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회의 가능성은 실종되어버린 후에는 부르주아적인 삶의 밑둥치만 갉아먹어치워 버리게 된다. 어느 개인도 여기에 대항할 수가 없다. 최상의 태도는 언제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태도일 것이다. “집소유주가 아니라는 점은 나의 행복”이라고 이미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썼었는데 오늘날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자기 집에 있으면서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다. 여기에, 개인이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갖게되는 – 그가 아직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면 – 곤혹스러운 관계가 약간이나마 드러난다. 사유재산은, 소비재는 잠재적으로 너무나 넘쳐흐르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소비재를 제한하는 원칙을 고수할 권리를 갖고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 개인에게 속할 수가 없으며, 그렇지만 고통스러운 종속관계 – 이러한 종속관계는 소유관계의 맹목적인 존속에 유리하게 작용하는데 – 에 빠지지 않으려면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분명히 자각하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소유를 버리자는 명제는 파괴로, 즉 아무런 애정 없이 사물들을 멸시하는 태도로 나아가며 이러한 멸시는 필연적으로 인간들에 대해서도 등을 돌리도록 만든다. 반면 소유를 인정하는 안티테제는 입으로 내뱉는 순간 이미 검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소유를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고만다. 거짓된 삶 속에 올바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19. 노크하지 마시오 기술화는 제스처를 정확하고 거칠게 만듦으로써 결국에는 인간까지 그렇게 만들었다. 기술화는 우리의 행동거지에서 망설임이나 신중함, 예절 같은 것은 몽땅 추방해버린다. 기술화는 그런 것을 어떠한 역사도 화해도 모르는 사물의 속성에 굴복시켜버린다. 이리하여 조용히,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문을 닫는 좋은 습관은 사라진다. 자동차나 냉장고 문은 꽝 닫아야만 하며, 어떤 문들은 저절로 닫혀버림으로써 들어갈 실내를 살피면서 등뒤를 돌아볼 틈을 주지 않는 실례를 범하도록 방문객을 강요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접하는 주변의 사물이 가장 내밀한 신경조직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자각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인간형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여닫이 창틀이 없이 미닫이 창틀만이 있고 부드러운 손잡이 대신 돌리는 단추자물통만이 존재하며, 거리를 향한 현관이나 문지방,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 등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주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운전사가 과연 엔진의 힘으로 거리의 하찮은 동물이나 보행자, 어린이, 자전거를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겠는가? 기계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운동에는 이미 파시스트의 난폭성과 비슷한 거친 폭력성과 과격성이 들어있다. 경험의 고사(枯死)에 대한 적지 않은 책임은, 수단-목적 관계에 완전히 종속되어버린 사물들은 그 취급을 오로지 작동에만 제한시키는 형식을 갖게되면서, 행동이 끝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잔영이나 잉여 – 행동의 자유에서든, 사물의 자율성에서든 – 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험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살아남은 잔영일 터인데… 20. 더벅머리 페터 영국신사들에게서 ‘순수철학이라는 악평을 얻은 인식론적 명상을 흄이 세인들에 맞서 옹호하고 들었을 때 그가 사용한 논거는 “정확성은 항상 미에 도움이 되며, 올바른 사고는 부드러운 감정에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거 자체도 실용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실천정신에 대한 진리 전체가 은연중 부정적으로 제시된다. 인간에게 유익한 체 하는 삶의 실천적인 질서는 이윤경제 하에서는 인간적인 것을 위축시키며 그런 경제체제가 확장될수록 점점 더 모든 부드러움을 제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들 간의 부드러움이란 목적에 사로잡혀있는 인간들을 위로의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탈목적적인 관계에 대한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특권 없는 관계를 약속해주는 옛 특권의 유산이다. 시민적 이성은 이러한 특권을 폐기함으로써 결국에는 그러한 약속 또한 폐기한다. 시간이 돈이라면 시간 –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간 – 의 절약은 도덕적으로 보이게 되며 사람들은 그러한 시간절약을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사람들은 직선적이 된다. 사람들간의 왕래에 끼여있는 외피들은 모두 기계적인 메커니즘 –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장치에 편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그 장치와 동일시한다 – 의 작동을 방해하는 요소로 느껴진다. 모자를 벗는 대신 별 생각없이 익숙한 인사말 한마디로 인사를 나누는 행태나, 편지 대신 인사말이나 서명을 생략한 공문을 주고받는 행태는 인간관계가 병들어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의 한 예일 것이다. 소외는 바로 사람들 간의 거리가 소멸되는 데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주고받고, 토론하고 그 결과를 실행하고, 통제를 하고 그 통제의 틀 안에서 역할을 행하고 하는, 즉 몸과 몸이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만 그들간을 함께 묶는 정교한 그물망을 위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며 한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바깥이 있을 때에만 안도 여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융의 추종자들 같은 반동적인 인물들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이어의 논문  에라노스 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어떤 주제에 직설적으로 접근하거나 곧장 언급조차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문명화된 틀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독특한 습관이다. 대화는 그 대신 본래의 대상 주위를 나선형 모양으로 맴돌 수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 두 사람 사이를 최단 거리로 결합시켜주는 것은 그들이 마치 점들이나 되는 양 그 점들을 연결하는 직선이 된다. 오늘날은 건물 바닥에 시멘트를 부어 한 덩어리로 만들 듯이 인간들 사이를 메워주는 접착제는 그들을 함께 묶는 압박으로 대체된다. 다름은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다. 점심을 먹으면서 사업상의 대화를 열기 위해 부인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몇마디 말들처럼 목적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 것들도 이 질서 속에 편입된다. 사업 얘기만 주책 없이 늘어놓아서는 안된다는 터부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무능력은 사실은 같은 것이다. 교수형 당한 사람의 집에서 그 밧줄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장사이기 때문에 장사라는 것을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위 민주라는 이름으로 허례허식이나 구식 예절, 쓸모없는 대화(쓸데없는 잡담이라고 의심받는 것이 아주 부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를 없애버리는 행위나 분명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 인간관계의 투명성 뒤에는 벌거벗은 야만성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런 반성이나 망설임 없이 타인의 면전에 바로 대놓고 하는 말에는 이미 파시즘 하에서 벙어리가 침묵하는 자들에게 행하는 명령의 형식과 울림이 들어있다. 인간들 사이에 있던 이데올로기적인 군더더기를 쓸어내고는 그들 사이에 사실만을 남겨놓으려는 요청은 그 자체가 이미 인간들을 물건 취급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되고만 것이다. 22. 목욕물과 함께 갓난아이를 버리는…  문화비판의 중심 모티브는 예로부터 허위의 모티브이다. 즉 문화라 있지도 않는 인간다운 사회의 환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또한 문화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토대인 물적 조건을 은폐하면서, 온갖 위로와 구슬르기를 통해 생존의 나쁜 경제적 결정성을 지탱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를 이데올로기로 보는 사유로서 시민적 폭력론과 그 반대편에 있던 니체와 마르크스가 공유하고 있던 생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거짓말에 대해 호통치는 행위가 대개 그렇듯이, 그 자체 이데올로기가 되지는 않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적인 영역에서 입증해볼 수 있다. 돈이나 돈으로부터 비롯된 온갖 갈등들에 대한 사유는 가장 부드러운 에로틱한 관계나 가장 고상한 정신적인 관계에까지 확장된다. 그 때문에 진리에 대한 열정과 논리의 수미일관성을 추구하는 문화비판은 제반관계를 물적 토대로 철저히 환원하고 당사자들의 이해상황에 따라 적나라하게 재구성해야할 것을 요구한다. 그 근거는 의미란 발생과 무관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것을 은폐하거나 매개해주는 것에서는 모두 부정직성이나 감상의 흔적,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 배의 독성을 지닌 감추어진 이해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을 끝까지 밀고나갈 경우 거짓된 것과 함께 참된 것도 모두 뿌리뽑아버릴지도 모른다. 즉 아무리 무력할지라도 보편적인 실천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든 것, 백일몽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좀더 고귀한 상태를 미리 구상해보는 것 등도 함께 뿌리뽑아버리고는 야만상태 – 이 야만상태는 문화에 의해 매개된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 로 곧장 넘어갈 것이다. 니체 이후의 문화비평에는 이러한 역전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중 슈펭글러는 가장 열광적으로 그러한 야만성으로의 역전에 가담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 또한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문화적인 진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믿음에서 깨어나 점점 커져가는 야만성에 직면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객관적인 경향’에 대한 관심 속에서 끊임없이 그러한 야만성의 증대를 옹호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있다. 그들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불구대천의 원수에 의한 치유를 기대하는데, 파시즘이라는 안티테제는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경로를 거쳐 종국에는 좋은 결말을 가져다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거짓말인 정신에 대항해서 물질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은, 경찰과 암흑가가 맺는 상호양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치적 경제와의 의심쩍은 친화관계 – 내재적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 를 만들어낸다. 유토피아를 몰아낸 후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요청되면서 사람들은 너무나 실천적이 되어버렸다. 이론의 무기력에 대한 두려움은 전능한 생산과정에 굴복하고는 이론의 무기력을 완전히 인정하는 구실을 제공한다. 음흉스러운 경향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언어에서도 종종 발견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은 사업정신과 냉철한 비판적 판단 사이의 유사성이나 속류 유물론과 다른 종류의 유물론 사이의 유사성이 점점 커져가게 되면서 주체와 객체를 제대로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종종 벌어진다. 문화를 허위와 곧장 동일화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가장 불행한 사태인데 그 이유는 실제로 전자가 후자에 의해 완전히 접수당하게 되면서 그러한 동일화는 어떤 저항적인 사유도 깨끗하지 못함을 입증하는데 안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현실을 교환가치의 세계라고 부르고 문화에 대해서는 그런 교환가치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기존의 상태가 존속하는 한 그러한 거부는 가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자유롭고 정직한 교환이란 그 자체가 허위라 할 때 그러한 교환을 부정하는 것은 진리의 편에 서게 된다. 상품세계의 허위와 마주서게 되면서 문화라는 허위는 앞의 허위를 탄핵하는 교정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문화는 실패해왔다는 사실이 그런 실패를 부추기는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함께 속해있는 인간들은 그들의 물질적인 이해를 숨겨서도, 아니면 그것만이 전부인 듯 행동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물적인 이해를 총체적인 인간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성찰하면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25. 그들을 기억해서는 안된다. 잘 알다시피 망명자들의 과거 삶은 없었던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는 그것이 지명수배서로 쓰였다면 오늘날은 전혀 이해불가능한 낯선 종류의 정신적 경험으로 선언된다. 물화되지 않은 것, 셀 수 없는 것, 측정될 수 없는 것은 누락시켜버린다. 그렇지만 이로써 물화가 그 반대의 것, 즉 직접적으로 현재화될 수 없는 삶에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삶은 언제나 사유와 회상으로서만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성, 나이, 직업 등을 묻는 설문지의 부록으로 ‘배경’이라는 별도 항목이 만들어진다. 모욕당한 삶은 미국 통계학자의 개선마차에 실려 끌려다니게 되면서, 과거조차 현재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 이 현재는 과거를 상기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과거에 망각의 은총을 내리는 것이다. 26. 영어로 말하기 어렸을 때 나는 부모님과 알고지내던 영국 부인들로부터 종종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 중에는 삽화가 많이 들어있는 청소년 잡지와 고급 모로코 가죽으로 된 푸른색의 작은 성경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선물을 준 사람들의 언어로 씌어있었다. 내가 과연 그것들을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책들은 현란한 그림들이나 제목들, 장식들로 내게 덮쳐왔지만 그 문구들은 해독 불가능했었는데, 이런 책들의 접근불능성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은 제대로 된 책들이 아니라 삼촌이 런던의 공장에서 만드는 기계들 같은 것을 선전하는 광고물이겠지라고… 내가 영어권 나라에 살면서 영어를 이해하게 된 이래로도 이러한 의식은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다. 하이제의 시를 가사로 한 브람스의 “소녀의 노래”라는 곡이 있는데 그 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오, 마음의 고통이여, 영원한 그대여, 함께 있음만이 축복일지라” 이 구절은 널리 보급된 영어판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오 고통이여, 영원함이여!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황홀할지니” 고풍스럽지만 열정적인 원전의 중심단어들이 히트송을 선전하기 위한 선전문구로 전락한 것이다. 네온사인 속에서 빛나는 이러한 문구들처럼 문화는 자신의 선전적 성격을 과시한다. 27. 프랑스어로 말하기 외국어로 포르노 책을 읽는 사람은 섹스와 언어가 얼마나 내밀하게 서로 교차하고 있는지 배우게 된다. 사드의 소설을 원서로 읽는 데는 사전이 필요없다. 집이나 학교, 또는 문학적 경험 중 어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요상한 외설스러운 표현들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어렸을 적에 섹스에 관계된 이상한 표현이나 장면목격이 생생한 그림으로 結晶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그런 단어들을 밖으로 들먹이기만 해도 갇혀있던 열정이 억압의 울타리를 찢고, 또한 눈먼 언어의 울타리마저 찢고 나와 오금을 못 쓰는 가장 깊숙한 감각세포 – 그 자체 그러한 열정을 닮은 –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같다.  28. 풍경 미국 경치에서 부족한 점은 낭만적 환상이 원하는 역사적 기억의 부재라기보다는 인간의 손이 만들어놓은 어떤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애써 경작해놓은 밭 대신 낮은 키의 무질서한 잡목 숲만 널려있다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지만 우선은 무엇보다 도로와 관계된 이야기다. 미국의 도로는 주변 풍경과의 아무런 매개 없이 다만 그것을 파괴하면서 뚫고나간다. 도로가 크고 시원하게 뚫려있을수록 번드르한 도로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주변 숲, 즉 제멋대로 자란 원시림에 폭력을 휘두르는 듯하다. 도로에는 표정이 없다. 어떤 보행 흔적이나 바퀴의 흔적도, 주변의 밭들로 통하는 부드러운 흙길도 없으며, 계곡으로 내려가는 샛길도 없는 도로에는, 인간의 손이나 손의 직접적인 도구들이 사물에 가했던 부드럽고 온화하고 모나지 않은 느낌 같은 것이 빠져있다. 마치 어떤 인간의 손도 풍경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본 적이 없는 듯 싶다. 아무런 위로도 받아보지 못한 도로는 살벌한 느낌을 준다. 풍경을 지각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왜냐하면 서두르는 눈은 자신이 차안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붙잡아놓을 수는 없으며, 그 눈앞에서 풍경의 흔적들이 허무하게 지나가버리듯 그 눈 또한 흔적 없이 가라앉고 말기 때문이다. 29. 쭉정이 과일 프루스트의 독자는 자신이 작가보다 더 영리하다고 여길 때 느끼는 당황감을 면제시켜 주는데 이 점이 프루스트적인 예절일 것이다.

19세기에 독일인들은 그들의 꿈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는 어김없이 채소만이 나왔다. 프랑스인들은 채소만을 그리기만 하면 됐는데 그래도 그것은 이미 하나의 꿈이 되었다.

영어권 나라에서는 창녀들이 죄와 함께 지옥의 형벌도 제공하는 듯이 보인다.

미국 풍경의 아름다움; 가장 작은 조각에도 나라 전체의 광대함이 표현되어 있다.

망명자의 기억 속에서 모든 독일인은 자신들에게서 사냥꾼의 총에 잡힌 노루고기구이 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신분석에는 과장 이외에는 아무런 진실성이 없다.

행복한 사람이건 불행한 사람이건 누구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불행한 사람은 바람소리를 집이 부서질 것 같은 경고로 들으며 잠을 설치고 악몽에 시달리면서 그 소리를 쫓는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바람소리가 편안한 보금자리를 확인시켜주는 노래소리로 들린다. 포효하는 윙윙 소리는 자신에게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들리는 것이다.

예로부터 꿈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 있던 소리없는 소음이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면 신문의 큰 제목들에서 울려나온다.

신화적인 흉보가 라디오와 함께 부활하고 있다.  위엄있는 목소리로 공표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항상 재앙에 관한 것이다. 영어 단어 solemn은 장엄하고 위협적이라는 뜻을 갖는다. 말하는 사람의 뒤에 있는 사회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듣는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

가장 최근의 과거사는 항상 카타스트로프에 의해 파괴된 것인 양 나타난다.

사물들 안에 새겨져있는 역사의 표현은 오직 지나간 고통일 따름이다.

헤겔에게서 자의식이란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는 진리, 정신현상학의 어투에 따르면 ‘진리의 고유 영역’이었다. 시민계급이 이런 것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되었을 때조차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부에 대한 긍지 속에서는 최소한 자의식적이었다. 오늘날 자의식이라는 개념에 대한 성찰은 어찌할 바 모르는 당황감이나 무기력에 대한 자각으로 자아를 파악하는 것,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서 이미 ‘나’라고 말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눈엣가시가 최상의 확대경이다.

가장 별볼일 없는 인간도 가장 중요한 인물의 단점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가장 어리석은 자도 가장 현명한 사람의 생각 속에 들어있는 결함을 인식할 수 있다.

성윤리학의 첫 번째이자 궁극적인 기본명제는 고소인은 항상 잘못이라는 것이다.

전체는 비진리다.(진리는 전체Das Wahre ist das Ganze라는 헤겔 명제를 뒤집어놓은 것) 30. 우리 집을 위하여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그 다음에 온 전쟁에 비하면 평화스럽게 보이는 지난번의 전쟁 동안에 대부분 나라의 오케스트라는 그 시끄러운 입을 닫고 있어야만 했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충격으로 불구상태에 빠진 간소한 실내악 연주곡 『군인의 역사』를 썼다. 그의 최고 악보가 된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중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초현실주의 선언문으로서, 꿈속의 가위눌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음악은 진리의 부정성을 암시해준다. 이 작품의 전제를 이루는 모티브는 빈곤이다. 이 작품은 공식문화를 격렬하게 해체시키고 있는데 그 근거는 이 곡이 공식문화의 물질적 자원뿐만 아니라 진정한 문화와는 거리가 먼 번드레한 허식을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곡에서 표현되는 공허함조차 꿈꾸지 못했던 파괴의 척도를 1차 대전은 그 후의 시대에 남겨놓았지만 세계대전 후에 나온 정신적인 산물에 대한 예시 같은 것이 이 작품 속에는 들어있다. 오늘날 진보와 야만은 대중문화 속에 촘촘히 뒤엉켜있다. 그 때문에 오직 대중문화나 매체의 진보에 야만적인 금욕만이 야만적이지 않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예술작품이나 어떤 사유도 거짓된 풍요나 일류의 생산물, 컬러영화나 텔레비전, 수백만부가 팔리는 잡지, 또는 토스카니니를 거부하지 않고는 생존의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는 낡은 매체만이 새로운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 것들만이 기업과 기술의 통일전선을 비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책이 책 같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책이 아닌 책들만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가 시작될 때 인쇄술의 발명이 있었다면 인쇄활자는 눈에 띄지 않는 전파매체인 등사 활자에 의해 폐지될지도 모른다. 31. 비밀 폭로 사회주의의 행동방식 중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인 연대감마저 병들었다. 연대감은 형제애라는 말을 진정으로 실현시키려 했었는데, 이 형제애라는 것은 보편자 속에서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사회주의는 이 관념을 보편자로부터 끄집어내어 당파성을 대변하는 당, 즉 적대적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편성을 대변한다는 당에 그 사용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함께 생명을 거는 일군의 사람들, 획득가능한 가능성 앞에서 개인의 삶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 그 때문에 어떤 추상적 이념에 얽매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무런 개인적 희망도 없이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기유지의 포기를 위한 전제조건은 인식과 결단의 자유였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에는 눈먼 당파적 이해가 금방 다시 재생산된다. 그러나 그 사이 연대감은 ‘당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명제에 대한 믿음으로, 더 강한 편이라고 믿는 노동자 대대 – 이 대대는 이미 한참 전부터 제복을 입고 있다 – 에 지원하는 것으로, 그리고는 세계사의 대세를 타고 함께 헤엄쳐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얼마 동안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은 항구화된 불안, 아첨, 앞뒤 눈치를 잘 살피는 처세, 복화술(腹話術)이다. 적을 이기는데 사용되던 힘은 자기네 대장의 심기를 살피는데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가장 깊숙한 내면 속에서는 예전의 적보다 자기네 지도자 앞에서 더 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양쪽 지도자들이 결국 자신들의 굴레 밑에 들어온 부하들의 등뒤에서 상호양해를 행하리라는 것을 희미하게 예감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들간의 조건반사가 감지될 수 있다. 어떤 이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닌 성골들은 암호처럼 통하는 모종의 은밀한 제스처나 언어(여기에는 거칠고도 순종적인 체념이 들어있다)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는데, 미리부터 사람들의 색깔을 나누는 상투적인 방식에 따라 진보주의자로 분류된 사람은 성골들을 결속시키는 매개체로 보이는 상상적인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성골들 또는 그들보다 약간 순도가 떨어지는 진골들은 그에게 다가와서는 연대감을 기대한다. 그들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진보라는 대의에 투신한 한 편임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나 그가 연대감을 입증하는데 미미한 관심을 보일 경우 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조직원들은 점잖은 지식인이 그들을 위해 알몸을 내보이기를 원하지만 지식인이 자신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그를 자본가로 몰아붙이며 점잖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는 감상주의나 우둔함이라고 깎아내린다. 연대감은 양극화하는데 그 하나는 퇴로가 막힌 자들의 절망적인 충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떼거리에 자신을 내맡기거나 형리들과는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협박이다.  34. 한눈팔이 한스 인식과 권력 사이에는 노예근성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진리의 연관성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인식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맞을지라도, 힘의 분배에 있어서의 균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이민 온 의사가 “내가 볼 때 히틀러는 병적인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면, 임상학적인 전거를 토대로 그의 진술이 결국에는 확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편집광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겨진 객관적인 불행을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서 그 때문에 그의 진단은 진단자의 우쭐대는 호기로만 들릴 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히틀러는 즉자적으로는 병적인 사례일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파시즘에 대항한 망명객들의 수많은 선언이 공허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유롭고, 거리를 취하며, 이해관계를 초월한 듯한 판단형식 속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은 그런 형식으로는 폭력의 경험을 담아낼 수가 없다. 폭력은 그런 사유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의 풀 수 없는 과제겠지만 중요한 것은 타인의 권력에 의해서든 자신의 무력감에 의해서든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36. 죽음을 위한 건강성 오늘날의 전형적인 문화에 대한 심리분석 같은 것이 가능하다면, -절대적인 경제제1주의가 그러한 제1주의에 의해 희생된 제물이 갖고있는 영혼의 상태로부터 현재상태를 설명하는 데 대해 조롱하지만 않고, 또한 심리분석가들이 오래 전부터 기존 상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지만 않았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 그러한 심리분석은 시대의 병은 바로 정상상태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영혼과 육체 모두가 건강한 개인이 요구하는 리비도적 활동이란 가장 깊은 심층부에서 일어나는 불구화, 즉 내면화된 거세를 통해서만 실현가능한 무엇 – 이에 비하면 아버지와의 동일화라는 해묵은 과제는 충분히 숙달된 아이들 장난일 것이다 – 이다.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소년과 소녀들은 그들의 욕망이나 인식을 억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시대에는 그러한 억압으로부터 초래된 온갖 징후들을 또한 억압해야 한다. 해묵은 불의는 빛, 공기, 위생 같은 것을 대중에게 풍족하게 베풂으로써 바뀌었다기보다, 합리화된 대기업의 현란한 투명성에 의해 은폐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지금의 시대가 갖고있는 내적 건강성이란 병의 원인에 대한 관심은 등한시한 채 병으로의 도주마저 차단하는 것이다. 곤혹스러운 공간낭비로 여겨진 어두운 변소는 제거된 다음 욕실 안으로 옮겨진다. 심리분석이 – 그 자신 이제는 위생학의 일부가 되었지만 – 품었던 변소에 대해 적의는 적절했음이 입증된 것이다. 가장 밝은 곳에서조차 은밀하게 배설물이 넘쳐흐른다. “비참함이 존재하는구나. 옛날 그대로/ 너는 결코 그것을 뿌리뽑을 수 없지/ 그렇지만 너는 그것이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시구는 넘쳐흐르는 상품이 부단히 증대하는 물질적 차이를 은폐하는 물질의 영역보다 영혼의 영역에 더 타당한 듯하다. 어떤 연구도 기형화가 일어나는 지옥까지 내려가지는 않는다. 노이로제의 원천인 이러한 기형화는 아동발달의 초기단계로 퇴행한다는 가정은 일리가 있다. 노이로제란 충동이 패배당하도록 만든 갈등의 결과라면 상처받은 사회는 이러한 노이로제와 흡사한데 이러한 사회가 정상적이 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상태란 갈등에 이르기도 전에 기세를 꺾어버리는 사전조정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후의 무갈등상태란 인식에 의한 치유가 아닌 사전 결정상태나 집합적 심급의 선험적인 승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고급 일자리에 응모한 후보가 갖추어야 할 필수요건인 차분하고 정중한 태도는 고용주가 입사 후 부과하게 될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의 예고편이다. 건강한 사람에게서 병을 진단해내는 유일한 객관적인 방법은 그들이 실제로 영위하는 합리적인 삶과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삶의 이상 사이의 불일치를 통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병의 흔적은 밖으로 튀어나오고 만다. 건강한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무늬진 발진으로 덮인 피부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든지 무기물을 닮아가려는 듯이 보인다. 별 이상이 없는데도 팔팔한 생동력을 지닌 사람들을 준비된 시체로 간주한 다음 다만 그들의 유감스러운 수명에 대한 보도는 인구정책적인 고려에서 자제한다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배적인 건강성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심장이 멎은 후의 반사운동과 흡사하다. 오래 전에 잊혀진 끔찍한 인고(忍苦)의 증거인 이마의 주름살, 유연한 논리를 방해하는 병적인 우둔함 또는 무기력한 몸짓만이 사라진 삶의 흔적을 어렵게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에 의해 부과된 희생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그러한 희생은 개인에게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는 모든 개인의 병을 떠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 안에 묻혀있는 주관적인 불행과 가시적인 객관적 불행이 사회 속에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위로마저 빼앗아가는 것은, 정상성 속에 있는 병은 그 반대편인 병 속에 있는 건강성 같은 것을 가능케하기보다는 후자 또한 대체로,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불행의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39. 자아는 무의식이다. 고대에서나 르네상스 이후에서나 사람들은 심리학의 발달을 시민적 개인의 부상과 결부시켜오곤 했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예전에는 심리학과 시민계급이 공유했지만 오늘날에는 서로를 배척하기에 이르게된 상반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향은 즉 개인의 억압이나 해체를 일컫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인식은 재차 인식 주체에 연결되게 되었던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의 심리학 이래 모든 심리학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생각을 통해 인간을 치켜세웠다면, 이로써 심리학은 처음부터 인간을 객체로, 분석의 재료로 만들었으며, 인간 자체를 사물들 중의 하나로 만듦으로써 사물들은 무(無)라는 속성을 인간에게도 덮어씌웠던 것이다. 사물을 주체에 종속시킴으로써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에 함축된 의미는 주체 자체의 부정이다. 어떤 척도도 만물의 척도가 되지 못하면서 척도 자체가 우연적인 것으로, 비진리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의 실제적인 진행과정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준다. 절대 명제로까지 발전했던 인간 지배의 원리는 절대적인 객체인 인간에게 그 칼끝을 돌리게 되었는데, 심리학은 그 칼끝을 날카롭게 가는데 일조해왔던 것이다. 심리학의 중심 이념이면서 선험적인 대상인 자아는 심리학의 시선을 만나면 (메두사의 눈에 쪼인 듯 – 역자 첨가) 비존재로 변해버린다. 심리학의 존재기반은, 교환사회에서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실상은 그 객체에 불과하다는 원칙 위에 서있기 때문에 심리학은 교환사회에 주체를 비존재로 만들어 자신의 발 밑에 굴복시킬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한다. 인간을 그가 지닌 능력들로 분해하는 것은 노동분업이 소위 주체라는 것들에 투사된 것으로서 주체를 좀더 착취하고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관심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심리기술이란 심리학의 단순한 타락형태가 아니라 심리학의 원칙 안에 이미 내재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매 문장마다 진정한 휴머니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 자아를 선입관들로 격하시킨 흄은 이런 모순 속에서 심리학의 그러한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흄은 나름대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아가 스스로 자아라고 설정한 것은 실제로는 단순한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며 추상적인 지배의 중심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실체화한 것으로서 이러한 정황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개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는 해체되고 남은 잔재를 더욱 손쉽게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이것은 심리분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심리분석은 개성을 삶을 위한 기만으로 간주하면서 개성이란 개인으로 하여금 충동을 포기하고 현실원칙에 순응하도록 하는 수많은 합리화 기제들을 함께 묶어주는 최상의 합리화 기제로 파악한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심리분석은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증명해낸다. 심리분석은 인간에게 스스로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도록 하고 자아의 통일성이나 자율성을 공격함으로써 인간을 합리화의 메커니즘에 완전히 굴복시켜 순응하도록 만든다. 자아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겁 없는 비판은 타자의 자아도 항복해야 한다는 요구로 넘어가게 된다. 심리분석가의 지혜는 궁극에 이르면, 스릴러 잡지의 파시스트적인 무의식이 자아를 취급하는 방식, 즉 고통받는 무기력한 인간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스스로의 목숨에 묶이게 만들어 그들을 명령하고 착취하는 전문가 도당의 테크닉이 되고만다. 암시와 체면은 – 심리분석가들은 이런 것을 장터의 가설무대에서 사기꾼 마술사들이 행하는 비술이라고 거부했지만 – 심리분석이라는 큰 틀 속에 다시 끼여든다. 더 잘 알고있다는 이유로 남을 도와준다는 사람은 유권해석의 특권을 가진 양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된다. 시민의식에 대한 비판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에 대해 모든 의사들이 보이는 태도는 어깨를 움찔하면서 모르겠다나 관심없다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인데, 이러한 제스처는 그들이 죽음과 은밀히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공표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내면성에 불과한 것이 벌이는 바닥모를 기만인 심리학이 인간의 ‘소유’와 관계한다는 것은 괜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 이러한 심리학에는 시민사회가 외적인 소유에 대해 지금까지 행해온 것이 투영된다. 사회적인 교환의 결과로서 시민사회는 소유를 발전시켜왔지만 모든 시민이 알고있듯이 여기에는 객관적인 유보조항이 붙어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은 단지 계급에 의해 소유를 단지 위탁받고 있는 셈인데, 통제권을 가진 자들은 소유의 보편화가 소유의 원리 – 소유란 바로 나누어주지 않고 움켜쥐는 것인데 – 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보이자마자 소유를 다시 환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심리학은 소유에서 일어난 일을 개인적 특성에서 되풀이한다. 심리학은 개인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면서 그 대신 개인적인 것을 몰수해간다.

43. 부당한 협박 무엇이 객관적으로 진리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이 어렵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관계에서 우리에게 테러를 가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첫눈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기준들이 이런 목적을 위해 이용되곤 한다. 그런 기준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어떤 주장이 ‘너무나 주관적’이라는 비난이다. 이러한 비난이 통용될 때, 그것도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공분하면서 그러한 비난을 내뱉을 때 사람들은 속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믿더라도 잠시 잠자코 있어야 한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개념은 완전히 전도되었다. 객관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현상 속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측면, 아무런 질문 없이 수락된 현상의 인상, 분류된 데이터로 이루어진 현상의 앞면, 즉 본래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 대신 그러한 것을 부수고 사물에 대한 특수한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인습적인 판단에서 벗어나는 것, 생각은커녕 보지도 않고 다수결에 의해 대상에 대해 결정을 내리려들기보다는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즉 객관적인 것은 주관적이라고 불린다. 주관적 상대성이라는 형식적 비난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주관성의 본래 영역인 심미적 판단의 영역에서 잘 드러난다. 예술작품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는 반응력을 가지고 예술이라는 진지한 영역에 몰입해 예술작품의 내재적 형식법칙이나 필연적 구조에 고분고분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심미적 경험을 단순한 주관적 경험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초라한 가상이라고 일축하고는 고도로 정련된 주관적 신경조직의 도움으로 사물의 내부로 파고드는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딜 것이다. 이러한 발걸음은 양식 개념 같은, 보다 포괄적이고 검증된 개념보다 훨씬 큰 객관적 힘을 지니는데, 사실 양식 개념이 학문적인 개념으로 정착하는 과정에는 그러한 내밀한 경험이 희생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증주의나 문화산업 – 이것의 객관성은 이것을 주도하는 주체들에 의해 계산된다 – 의 시대에는 두 배의 진실성을 지닌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이성은 이디오진크라지라는 창문도 없는 장벽 뒤로 완전히 은퇴하게 되는데, 권력을 쥔 자는 그러한 은퇴로 인한 자의성을 자의적으로 비난하게 된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은 그러한 주체들에게서 보존되는 객관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주체들이 무력화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64. 도덕과 문체 글쟁이는 보통 더 정확하고 더 양심적이며 사물의 진실에 맞게 표현하려 하면 할수록 그 결과물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며, 느긋한 마음으로 무책임하게 쓸 경우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는 칭찬을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한 온갖 전문어들,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교양층에 대한 암시를 금욕적으로 자제한다고 사정이 별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고도 순수한 언어의 피륙짜기는 아무리 단순해도 진공만을 울린다. 골머리를 썩이지 않고 느긋하게 친숙한 말의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은 친근감과 접촉을 위한 기호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표현에 있어 의사소통보다는 실상을 주시하는 것은 의심의 눈길을 받는다. 기존의 익숙한 도식에서 따오지 않은 특수한 것은 남을 배려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독선이나 혼란의 징후로 간주된다. 스스로 명료하다고 자부하는 일상의 논리는 사실은 일상어의 범주 속에서 그러한 도착상태를 순진하게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애매한 표현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 자신이 생각한 것만을 대충 상상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반면 엄격한 표현은 분명한 입장이나 개념의 긴장을 강요하며 – 사람들은 그러한 긴장이나 확고한 태도 정립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 , 다른 어떤 내용에 앞서 통상적인 판단의 정지, 그리고는 고립을 – 사람들이 온몸으로 거부하는 – 요구한다.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만이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진실로 소외된 말, 상업에 의해 인장이 찍힌 말만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며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정황만큼 지식인의 탈도덕화에 기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탈도덕화에 빠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전달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충고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배반임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65. 허기 문어체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자들의 은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반동적이다. 여가, 또는 심지어 자긍심이나 자만마저 상류층의 언어에 얼마만큼의 독립성과 자기단련을 제공한다. 그 때문에 그러한 언어는 상류층이라는 본래의 사회영역과 대립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언어는 명령을 위해 그러한 언어를 오용하는 주인들에게 – 그들의 이해에 봉사하기를 거부하고는 오히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듦으로써 – 등을 돌리게 된다. 반면 억압받는 계급의 언어에는 지배의 상흔만이 새겨져있다. 불구화되지 않은 자율적인 언어는 사사로운 원한감정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불편부당함을 약속해준다면 억압된 계급의 언어는 그러한 불편부당함이나 정의로움을 박탈당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배고픔에 의해 씌어진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언어를 씹어먹는다. 그는 사회가 거부하는 강력한 자양분을 언어의 객관적 힘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깨물어먹을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입을 언어로 가득 채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언어에 복수를 하는 것이다. 언어는 가난한 자에게 언어육체를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대가로 가난한 자는 언어육체를 모욕하게 되고 자신에게 가해진 치욕을 무력한 힘으로 되풀이한다. 베를린 북부의 방언이나 런던 사투리의 재치있는 답변술이나 타고난 위트는, 절망스런 상황을 절망하지 않고 견뎌내야 할 필요 때문에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웃어넘기고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병이 들었다. 문어가 계급들의 소외를 기호화한다면 그러한 소외는 구어로 돌아감으로써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객관성을 그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물고늘어질 때 극복이 가능하다. 문자를 자신의 내부에서 지양하는 언어야말로 인간의 말을, ‘말은 이미 인간적이다’라는 허위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100. 물위에 누워

해방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경우 사람들은 ‘인간적 가능성의 실현’이나 ‘풍요로운 삶’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된다. 그러한 질문은 불가피하지만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그러한 의기양양한 대답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이러한 대답은 삶을 만끽하려 들었던 1890년대의 수염이 텁수룩한 자연주의자들 같은 사회주의자의 이상형을 연상시킨다. [아무도 더 이상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가장 소박한 답변만이 부드럽게 들린다. 다른 답변들은 모두 인간들의 욕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태나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굴러가는 [생산] 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간 행태를 상정하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인간과 같은 소망상에마저,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 배어있는데,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물신주의에는 제약과 무기력, 항상 똑같은 것이 만드는 불모성 같은 것이 감초처럼 따라다닌다. 시민사회의 <무역사성>의 일부지만 그를 보완해주는 개념인 역동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위치로 부상되었지만, 이 개념은 생산법칙에 대한 인류학적 반사로서 해방된 사회에서는 그 자체가 욕구와는 비판적으로 대치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구속받지 않은 행동, 중단 없는 생산, 포만감을 모르는 빵빵한 배, 신명나는 일거리인 자유 같은 관념은 시민사회의 자연 개념을 먹고사는데, 이 자연 개념은 예로부터 항상 오직 사회적인 폭력을 변경불가능한 것, 한조각의 건강한 영원성으로 선전하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청사진 – 마르크스는 이에 저항했지만 – 이 야만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 소위 말하는 하향평준화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 이다. 두려워해야 할 사태는 인류가 유복한 생활 속에서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연이라는 가면을 쓴 사회성, 즉 만듦이라는 맹목적 분노로서의 집합성이 살벌하게 확장되는 것이다. 발전경향을 오직 생산의 증대라는 한 방향으로만 헷갈림 없이 물꼬를 트는 것은 그 자체가 저 시민적 전망, 즉 총체성으로 응축된 발전이 질적 차이에 대해 적대적인 양화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발전이라는 것을 한 방향으로만 허락하는 시민적 전망의 일환인 것이다. 해방된 사회라는 것을 그러한 총체성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구상할 경우 소실점들이 시야에 포착되게 되는데, 그러한 소실점들은 생산의 증대나 그러한 증대가 인간에게 투영된 모습은 어떠한가라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눌림도 없는 사람들이란 결코 가장 안락한 자도 가장 자유로운 자도 아니라면, 족쇄가 떨어져나간 사회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생산력이란 인간의 궁극적 토대가 아니라 상품생산에 맞게 역사적으로 재단된 인간의 모습을 내놓는다는 것일 것이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이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자유로부터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곤경을 모르는 인류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장치, 그렇지만 풍요로움과 함께 곤경을 확대재생산해왔던 그 모든 장치가 미친 짓이었으며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에 희미하게나마 생각이 미칠 것이다. 즐김 자체도 이러한 정황에 따라 바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즐김의 도식이 바쁘게 쫓아다니기, 계획 만들기, 의지를 세우는 것, 정복하기로부터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이런 상태가 과정이나 행위나 실현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고 본래의 원천으로 들어간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약속을 진실로 이행하게 될지 모른다. 추상 개념 가운데 ‘영원한 평화’라는 개념만큼 실현된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은 없다. 진보라는 경마장의 담쟁이 너머 구경꾼인 모파상이나 스테른하임은 이러한 의도에 표현을 빌려준다. 그러한 의도가 갖는 부서지기 쉬운 연약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수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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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공장 공장장의 결핍

얼마전 친구와 후배가 우리집에서 이틀 동안 묵고 갔다. 친구는 자신의 사진책 발간을 위해 온 것이었고, 후배는 된장 장사를 하기위해서였다. 20여 년 전에 야학에서 만난 그 후배는 제대 후 일본유학을 다녀와서 진로그룹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 당시 연락이와서 한 번인가 만났는데 그후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두절이라기보다는 안 만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술을 거의 못하던그로서는 연구소에서 맛보는 술만으로도 충분했을 테고 워낙 가정적인 친구라서 허랑방탕하게 지낼 위인이 아니었다. 퇴근 후에는아파트 단지에서 테니스를 치고 주말이면 주로 절을 찾는다고 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상한 열정과 집착과 절망적인 심리 상태에서지내던 내가 그 후배에게 연락을 안한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고 진로그룹이 망한 후그 후배는 지리산 견불동에 들어가서 된장공장을 차렸다. 공장만 차린 것이 아니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식솔을 이끌고 들어간것이었다. 나는 걸핏하면 매체에 소개되곤 하던 ‘첼리스트 여자와 스님 출신의 남자’가 만드는 된장 마을을 떠올리며, 그가 또다른허상을 좇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은근히 했다. 하지만 그는 캐나다 이민을 위한 모든 수속을 다 밟은 상태에서 돌연 걸려든지리산 그곳에 반해 ‘환상적인 꿈’을 꿀 겨를도 없이 정착을 했다고 한다. 이제 삼 년째로 접어든 그의 지리산 생활은 제법촌냄새나는 구색을 갖추고 있었고 이제는 영업망을 확보할 단계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그 후배가 유기농산물 영업망과 관계를 맺기위해 서울에 왔던 것이었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모처럼 온 그들과 함께 약간 들뜬 상태에서 지냈고, 그들을 떠나보내던 날 서울날씨는 유난히 흐렸고 마음 또한 흐렸다. 그 후배가 도착한 후 게시판에 올린 글은 “집에 도착해 내가 이뤄놓은 것들을 보면서드는 생각. 정말 잘 내려왔구나,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살아야지… 서울 사는 형들에게는 미안하네요,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로끝을 맺고 있었다. 그 후배야 진심으로 그런 글을 썼겠지만 나는 그것을 매개로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다. 과연 그는행복할까라는 생각이 첫째였다. 행복이란 그야말로 마음에 달린 것인데, 도시 경제와 관계를 맺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형편에과연 ‘단절된 행복’이나마 가능할까? 극도로 불리한 농촌의 교육조건은 어떻게 견딘다 하더라도 어차피 세상에 내보낼 아이를 둔부모의 입장에서 느끼는 경쟁심은 어쩔 것인가? 여러 매체를 통하여 접할 수밖에 없는 도시의 문화환경으로부터 느끼는 상대적박탈감은 또 어쩔 것인가? 스쳐 지나가는 시골이야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시골 역시 외양간부터 부엌까지 자본주의의 때가덕지덕지 묻어 있다는 것은 잠시라도 그곳에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안다. 도시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도시보다 훨씬 더, 누구네 자식이명절 때 무슨 차를 타고 오느냐, 무슨 직업을 갖고 있으며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가 가장 관심사인 것이 요즘 시골의 풍경이다.시골의 논밭을 버리고 도시로 떠날 수는 없어도, 도시의 복잡함과 숨이 칵칵 막히는 공기 때문에 살지 못할 곳이라고 말하면서도,시골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선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매일 흙을 손발에 묻히며 사느라 한번도 앉을 일이 없을 것 같은 가죽소파가놓여 있는 양옥풍의 실내, 텔레비전 드라마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내 미장센, 내가 이 년 정도 살았던 어느 시골에 있는삼십대 부부의 집이 바로 그랬다. 다행히 후배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는 자연의 귀중함을 알고 있으며 목회적 삶을 유지하기위해서는 덜 인공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선택이 타인을 향한 ‘간접적강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재래식 자연된장을 모르는 사람보다 그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오해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런 선택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괜찮은 과거와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거를 갖지못했거나 도와줄 가족이 없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선택은 호사스런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음식을선호하기는 하지만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품은 사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의 직장이 문을 닫지않았다면, 자신이 누렸던 안정이 박탈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의 선택은 ‘사람다운 삶’을능동적으로 지향한 것이 아니라 결핍을 채우려는 개인적 행위였을 뿐이다. 물론 워낙에 품성이 착하고 도량 또한 있는 그가 잇속차리는 장사를 위해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 같으면 된장조차 만들지 않고 소박하게 살고 싶었겠지만 세상에공짜는 없는 법, 울며 겨자 먹기로 그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좋은 뜻이 담긴 장사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궁극적인 대안은커녕 차선책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만약 그가 건강한 음식의 생산과 소비로 얽힌 자족적인 도농 공동체의 구성에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가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나도 가끔은 그런 생활을꿈꾼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며 못할 것이다. 법도 도둑도 들어올 수 없는 깊은 오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삶을선택하지 않는 한, 혁명적 열정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는 각오로 버무려진 계획이 없는 가운데서 실행한 공간 이동은 결코 결핍을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적 삶은 어차피 결핍투성이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는 절망적인 판단도자주 한다. 도대체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려고 들면 들수록 우리네 삶은 꼬이게 되고, 어느 것 하나가 채워지면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결핍이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결핍이란 그것을 애써 감추려들면 더 크고 또렷하게 드러나는법이다. 마음을 비워? 이건 웃기는 소리거나 수사에 불과한 소리다. 나는 내 후배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기 방식을고집하면서 그때까지도 ‘내려오길 잘했다’는 말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양질의 우리 농산품을 천연적이며 전통적인 방법으로맛있게 만든 그의 된장이 음식의 소중함을 아는 도시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 현재적 삶을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게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에게 ‘운동’이나 ‘사생적 결단’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는 그런 폭력적 권리도없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 어쩌구 저쩌구” 하는 혹세무민 발언에 서로가 속아주면서 도취될필요도 없다고 본다(세상을 살다보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위로나 위선이 필요하듯 구태여 위악을 떨 경우도 있다). 그 후배만큼착하고 예쁜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백돌이라는 개는 생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떠오르지만, 그들이 어렵사리 ‘자본’을 밀어내면서빚어내고 있는 삶의 결을 보는 내 눈에는 다른 것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빚어내는 그 삶의 결에도 자꾸만 ‘자본’이 끼어드는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천국의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아주 딱한 표정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착한마음 고운 눈물로 얼룩진 <선물>을 애써 냉대하는 것이고, 위악적인 손길로 빚어진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와 김수영의산문 그리고 세상을 둘러싼 껍질을 끝없이 벗겨내는 학자 촘스키의 정치적 실천을 동경하는 것이다.

2001.04.20 / 이효인(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