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거창하게 말할 만한 사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도서관 책상에 앉아서 지식사회학 교재를 보고 있자니 문득 제목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발단은 맑스의 소외 개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결과물에 대해 외화(소외와 비슷한 개념?)되고 더 나아가 유적존재(인간 종으로서의 특수성? 여기서는 육체적 욕구를 극복한 의식적 활동을 통해 생산한다는 점)로서의 자기 인식은 생존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강제되는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 순간마저도 자기의식은 제한받는다. 철저한 분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은 내 식으로 말하면 개인의 전개성, 총체성의 형성 및 발현을 억압한다. 쉽게 말해 인간으로서의 자기발현이란 가능치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화하기 힘든 언어들을 훑어내려가다 지금 내 상황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학습활동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은 아닌지…중학교 때부터 객관식 문제를 증오하면서도 편한 데 안주했고 점수를 내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상황을 경멸하면서도 그 구조 안에서 놀던 나이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더라. 나는 지적 관심에 따라 이론을 접하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시험을 위해 지금 벼락치기를 한다. 대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슷한 상황이리라 생각한다. 내가 학습하는 지식은 분명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며 머리를 굴리면서 내 안에서 놀지만 그것은 시험이 끝나면, 또는 외부에서 필요로 하지 않으면 깨끗하게 머리속에서 사라진다. 나와 그렇게 씨름하던 지식들은 분명 내 안에 있지만 또한 내 밖에 있다. 지식은 내가 관심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외부적 필요에 의해서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나는 그것을 주체적으로 찾아다니고 획득해 가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그것은 철저히 나와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맑스의 소외 개념은 자본주의의 분업화된(심지어 생산물조차 그 주체와 분리되어 만드는 사람 따로 있고 소유하는 사람 따로 있는) 생산 양식 및 관계와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있지만 그것을 양화된 인간 생활 양태로 바꾸어 적용한다 해도 충분히 그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라고 통칭하겠다)네 대학생들 역시 인문계 쪽으로 한정시킨다면 서술형 시험이 주를 이루지만 결국은 그것 역시 0점에서 100점으로 수치로 측정되고,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아예 5지선다형이나 단답형 주관식으로 수학 능력을 측정하지 않는가…한 개인의 지적 능력을 측정한다는 목적 자체의 가부에 대한 시비는 차치하고라도 그 수단으로 이렇게 양화된 방식을 자연스럽게 쓰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 수치가 과연 그 사람의 총체성을 밝혀주고 그 사람이 무슨 관심을 지니고 있으며 성격이 어떻고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밝혀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그것은 객관적 신빙성이 있는 평가 기준이 되고 있다.



수업 중에 듣는 흥미롭고 진지한 문제의식들은 충분히 모두들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양화된 지식에 기대어 진실을 말하려 하는가…우리는 얼마나 실적 지상주의적인 생활 원칙의 노예가 되어 있는가. 그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연과 관념과 행동과 자아로부터 소외되고 있는가…



분명 할 말 없어 짤막하게 긁적이려 했건만 아귀도 맞지 않는 문장을 또 토해내고 말았네…



아, 시험이라는 데드라인을 앞두고 해대는 이 경박하고 강박적인 공부란 것이 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중간중간 멋진 언어들이 즐비한데 그것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인간이 물건에 생명을 불어 넣자 그것은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서 인간에게 맞선다.’ …소외를 일으키는 것은 자본주의의 경제관계만이 아니며(인간이 맺는 관계 중 가장 심오한 관계,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더욱 발전되면 될수록 자연의 전유(專有)는 더욱 증대된다. 자연이 점점더 생산의 한 요소로 될수록,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것은 노동자의 생활수단이 될 수 없게 된다. ‘감각적인 외부세계’는 상품으로 전유되기 때문에 더 이상 노동에 속하는 대상이 될 수 없고, 그것은 또한 더이상 노동자를 위한 물질적인 생계수단도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양식이 초래한 인간-자연간의 상호작용에 있어서의 변화는 노동자를 자신의 생산물의 노에로 격하시킨다. 이러한 노예상태는 결국 노동자는 그가 노동자인 한에서만, 육체적 주체로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육체적 주체로서만 노동자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소외는 노동자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현상은 아니다. 소외는 또한 생산과정을 특징지우기도 한다. 다시 말해 생산과정에서 노동의 ‘적극적 외화'(active externalization), 즉 생계 수단을 박탈당한 노동자로부터 그의 생존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노동을 강제로 추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동자로서의 인간은 개성을 잃게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해 주는 ‘동물적 기능'(animal functions)을 할 때만, 자신을 개인적인 인간으로서 느낀다. 이것이 인간의 소외이며, 자신을 인간으로 의식하게 해주는 질적인 개성(qualitative individuality)의 객체화(objectification) 및 외화(externalization)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작용에서 비롯된 더 근본적인 소외 형태가 있다. 즉 ‘유적 존재'(類的存在 : species being : 본질적으로 포이에르바하류의 개념임)로부터의 소외가 그것이다. ‘유적존재’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편적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의식할 때 발생한다. … 인간을 자연 및 자기 의식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가운데, 소외돈 노동은 종(species)을 인간으로부터 소원하게 하며 그것을 추상물(abstraction)로 만든다. ‘유적 생활’은 단지 생존 과정으로만 생각되게 된다. 인간본성은 현실에서 후퇴하여 전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 된다. 인간의 사회 관계가 비현실적이며 사회원자론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및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지식도 모두 비현실적으로 되고 원자화된다. …’



사회구조와 사회의식(P.해밀턴) p42~43

조선일보의 ‘마술’

최근 <조선일보>에서 위탁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63.4%가 현재의 언론개혁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대답했고, 70.7%는 개혁은언론사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면 마치 국민의 대다수가 개혁에 반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다른 기관에서 위탁한 조사에선 그 반대로 국민과 기자의 대다수가 거기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어찌 된 일일까? 마법이다. 이 놀라운 둔갑술의 예술가는 조선일보 홍아무개 기자다.

제대로 된 설문조사라면 이런 항목들을 포함해야 할 게다. (1)언론개혁에 찬성하는가? (2)찬성한다면 그 방법은 자율인가 타율인가? (3)자율개혁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만약 “언론개혁에 찬성하는가”라고 물었다면 아마 국민의 대다수가 “그렇다”고 대답했을 게다. 그런데 조선일보에서는 이 질문을 가볍게 생략한다. (2)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율개혁이 좋다”고 할 게다. 근데 문제는 우리의 언론사에서 그 동안 자율개혁을 하겠노라 26번이나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3)`자율개혁이 가능하다고 보느냐’고 물을 일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 물음도 생략한다. 그 결과 (2)의 문항에 대한 답변, 즉 “자율개혁이 좋다”는 답변이 졸지에 (1)과 (3)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암시되면서, 마치 대다수가 지금 진행되는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 정권에서 추진하는 언론개혁에 정치적 동기가 있느냐”는 문항을 보자. 이것처럼 멍청한 질문도 없다. 세상에, 정치권에서 하는 짓 중에서 정치적 동기가 없는 일도 있는가? 되물어 보자. 그럼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의 태도는 당리당략을 초월한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숭고하고 거룩하기만 한 행위냐? 맹구 빼고는 다 “아니다”라고 대답할 게다. 따라서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 “정권에서 추진하는 언론개혁이 과연 공익에 부합하는가?”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런 질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하나마나한 질문을 던져놓고, 그 질문만큼 뻔한 답변을 마치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의견인 양 제시하는 거다. 이 놀라운 둔갑술은 예술이다.

조선일보 기자 여러분.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입니까. 언론자유의 대명사 아닙니까?

설날 `천황’의 사진을 실어도 일부러 못생기게 나온 걸로 골라 실었던 그 민족애. 맛도 없는 포항 석유(?)를 입에 집어넣고, 대통령 앞에 무릎 꿇고 술을 올려야 했던 그 모진 굴욕과 수모. 그 속에서도 오직 한 가지 언론자유를 위해 와신상담해 오신 것, 알만 한 사람은 다 알죠. 그 전통 어디 갑니까? 아니죠. 어디 안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간악한 정권의 음모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사수하고 계신 거죠. 그런 여러분의 투쟁을 설마 국민이 몰라주겠습니까? 왜 몰라주겠습니까. 홍아무개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보세요. 온 국민이 바로 여러분 뒤에 서 있지 않습니까.

조선일보 기자 여러분,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습니다. 머리띠를 두르세요. 피켓을 드세요. 거리로 나와 구속된 조선일보 기자의 석방을 요구하세요. 해고된 조선일보 기자의 복직을 요구하세요. 국정원에서 고문을 받는 동료 기자를 구출하세요.

조선일보를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지금 조선일보 광고란은 백지일 겁니다. 시민들에게 격려광고를 내달라고 호소하세요. 홍아무개 기자의 기사를 보세요. 온 국민이 여러분 뒤에 서 있지 않습니까? 국민의 힘을 믿고 당장 거리로 나오세요. 이 참에 시민들에게 돌 좀 맞아 보세요.

진중권/ <아웃사이터> 편집주간

시장 우상숭배자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시장은 “여러가지 상품을 사고 파는 일정한 장소”라고 돼 있다. 아스라한 향수로 가슴에 젖어오는 시골의 5일장터가 이런 풀이에 적합한 듯하다. 그러나 미국 시카고의 선물시장처럼 판매자와구매자가 직접 만나지도 않고, 매매물건도 현장에 없는 시장도 있다. 인터넷 시장은 아예 물리적인 공간조차 없다.

어떤 형태의 시장이건 그 시장에서는 아담 스미스가 얘기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룬다. 이 때의 균형가격과 공급·수요량은 자원이 ‘최적의 상태’에서 배분되는 것으로 경제학자들은본다. 자본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가격체제, 시장경제가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설명하는, 경제원론 앞머리에 나오는 얘기다.

시장논리와 ‘시장실패’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에서 멎어버린 미숙한 지식인들이 많다. 걸핏하면 시장논리에 맡겨야 한다며 정부의 정당한 역할과 기능마져도 규제와 간섭이라고 호되게 비판한다. 재벌개혁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동원하는 것도 시장논리다. 이들에게 시장경제는 만병통치약인 것같다. 그것은 분명 우상숭배다.

그러나 경제원론을 조금만 더 읽어보면 그 우상은 곧 파괴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한계와 장애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것은 시장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최적의 자원배분’을 할 수 없는 상황, ‘시장이 실패’해버린 상황이다. ‘시장실패’의 고전적인 예는 공공재 공급이다. 국방, 고속도로, 공립교육, 공원등이 대표적인 공공재인데, 가격체제, 시장기능에 맡겨 놓았다가는 이런공공재의 공급은 불가능하다. 정부의 역할과 기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소득분배, 거시경제의 불안정, 독과점 문제도 가격체제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장실패’의 경우다. 시장에만 맡겨 놓았다가는 소득의불균형도, 거시경제의 불안정도 해결될 수 없다. 독과점 문제도 마찬가지다. 독과점 업자가 시장을 지배하는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할 수가 없다. 아담 스미스가 얘기한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공정한 시장’을 대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기에 ‘공정한 시장’을 제약하는 독과점을 시정하기 위해 정부의 규제가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90년에 셔만 반독점법이 탄생했고, 1914년에는 한국의 공정거래위에 해당되는 연방교역위원회가 생겨 본격적인 독과점 규제에 들어갔다. 미국 연방정부가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거대왕국의 독점체제에 칼을 들이댄 법적 근거도 그 뿌리는 지금부터 111년 전에제정된 셔만 반독점법이다.

혹세무민하는 거짓 선지자들

그동안 한국의 신문시장에는 대규모 무가지와 경품 공세, 강제투입 등온갖 약탈적인 불공정행위가 난무해왔다. 신문끊기가 담배끊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부수 확장을 위한 피투성이의 판매전쟁을 치르면서 살인까지 저질렀다. 무가지의 대량살포로 인한 자원낭비가 연 4천억원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하는 시장이라면 정부의 과다한 규제는 잘못된 것이며, 당연히 시장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시장실패’ 정도가 아니라 시장이 황무지처럼 폐허가 돼버린 한국의 신문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할리 만무다.

신문고시 부활을 전후하여 조선·중앙·동아일보, 한나라당,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성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지식인 무리들이 공동전선을 편채 자율규제니, 시장경제 논리에 맡겨야 한다느니 하면서 연일총공세를 퍼붓고 있다. 대자본을 바탕으로 온갖 약탈적 방법을 통해 신문시장을 독과점한 족벌신문들이 여론의 흐름을 왜곡시켜온 언론상황을 개혁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의 측면은 젖혀 놓고, 단순히 시장경제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이런 논리는 어거지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에 대한기본이해조차 없는 무지에서 빚어진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런 미숙한 지식인들의 모습이 마치 혹세무민하는 거짓 선지자들처럼 보인다.

논설주간 jung4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