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위하여

대학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4월혁명 기념일 앞에 옷깃을 여미며 던지는 물음이다. 흔히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상징으로 불린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그랬다. 대학이 없었다면 과연 대한민국이 민주화되었을까. 학살극을 벌인 전두환 육군소장이 10년도 안 돼 백담사로 쫓겨간 것도 대학이 살아있어서였다.

하지만 예서 묻고싶다. 이때 대학이란 무엇을 이르는가. 젊은 학생들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교수들은 침묵했다. 아니 되레 학생운동을 `통제’했다. 언론권력의 추악한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한가지 의문을 끝내 떨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언론이 추한 보도를 일삼았을 때 언론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분명히 증언한다. 추악은 언론인들의 고유한 상표가 아니었다. 비금비금한, 아니 한술 더 뜬 학자들이 즐비하다.

젊은 꽃들이 목숨을 던지며 민주주의를 외칠 때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에 찬가를 불러댄 교수들은 오늘도 건재하다. 비판적 후학들에겐 교수자리를 주지 않는 행태로 그들은 학계에서 권력을 휘둘러왔다. 뿐만인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며 `명성’을 얻고 서부렁섭적 장차관·국회의원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교수들에게 신문이 지니는 매력도 거기에 있다. `출세’는 물론 원고료도 쏠쏠하다. 진보적 교수들조차 극히 일부는 원고료가 많은 신문을 위해 <한겨레> 기고를 사양하는 서글픈 풍경마저 일어나고 있다. 비단 과거만이 아니다. 보라. 오늘을 서슴지 않고 `내전상태’라 부르대는 언론을. 그리고 그 언론에 꾀는 학자들을 보라.

그나마 현장 언론인들의 투쟁이 끊어지지 않았기에 언론개혁 운동이 예까지 올 수 있었다. 과문한 탓인가. 언론이 군부독재에 재갈 물릴 때 언론학자들이 언론 자유를 주창한 글을 본 기억이 감감하다. 오히려 독재권력에 부닐던 교수들의 추태는 지금도 생생하다. 언론의 한 모퉁이에서 현장을 20여 년 지켜온 기자로서 묻는다. 우리 언론과 사회가 이 정도나마 민주화하기까지 이 땅의 학자들은 얼마나 기여했는가. 겸허하게 성찰하기 바란다. 젊은 언론학자들의 비판적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대다수 언론학자들은 언론인들의 언론개혁 운동을 외면해왔다.

오해 없기 바란다. 외면한 과거를 들어 굳이 교수들을 타박할 뜻은 없다. 그러나 언론개혁 여론이 퍼져가자 곰비임비 글을 쓰며 진실을 왜곡하는 야바윗속마저 눈감아주기란 역겹다. 현장 언론인들이 망라된 전국언론노동조합과 한국기자협회가 추진하는 언론개혁을 `상아탑’에 앉아 타율이라 사박스레 주장하는 것은 기실 얼마나 큰 오만인가.

심지어 어떤 교수는 언론개혁 운동을 비난하며 언론학 교육만이 개혁의 길이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럴까. 언론개혁 운동을 타율과 헐뜯기로 왜곡하는 언론학 교수들이 강단에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은 현장 언론인들에겐 절망이다. 하여 왜 언론개혁이 절실한지를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단순하다. 이 땅의 민중들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다. 아주 작게는 기자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언론자유를 마련해주고 싶어서다. 신문사를 세습한 언론권력의 틀에 갇혀 기자로서 쓰고 싶은 대로 못 쓰는 좌절과 아픔은 오늘의 언론인들로 충분하다.

언론개혁을 호도하는 언론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변변한 연구물조차 내놓지 못하면서 `존경’받는 것까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권력이 정말 언론탄압에 나설 때 투쟁에 나설 이들은 누구일까. 과거에 그러했듯이 바로 전국언론노동조합과 한국기자협회다. 제발 언론인들의 언론개혁 운동을 근거 없이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말기 바란다. 언론현장도 제대로 모르면서 현장 언론인들이 애면글면 진전시켜온 언론개혁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수고는 아껴달라. 그럴 `열정’이 있다면 일선 언론인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몸담고 있는 학계의 썩은 곳에 칼을 들이미는 용기를 보여주길 권한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부디 학문을 닦는 데 정진할 일이다.

호사스런 학문의 전당, 그러나 가난한 우리 시대의 학문을 위하여.

손석춘/ 여론매체부장songil@hani.co.kr

이 글은 씨네21에서 무단으로 퍼왔습니다.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지독한 고발

숏컷 | 김봉석 칼럼

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끈질긴 ‘삶의 투쟁’을 보았을 때도, 별반 감동하지 않았다. 꼭 그렇게 힘들여 살아야만 하나? 나이가 들어 ‘제국주의적’인 야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근대정신의 수호자라는 것을 안 뒤에는 씁쓸했다. ‘생존’을 위하여 야생의 섬과 원주민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 드는 건 분명 고약한 심성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백인들의 휴양지처럼 만들어버렸다. 물론 한 개인으로서의 생존본능까지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생존은 그 자체로 의미있을 수도 있다. 나 같으면 게을러서 얼마 안 가 죽어버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거나 Q채널에서 지난해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서바이버>를 방영한다고 했을 때, 별 관심이 없었던 건 그런 배경 탓이었다. 수만명의 지원자 중에서 16명을 오지로 보내고, 그곳에서 투표를 통해 하나씩 탈락되어 마지막에 남은 ‘최후의 1인’이 100만달러를 챙긴다. 거칠게 말하자면 TV의 퀴즈쇼나 별다를 것 없고, 거기에 ‘야만’의 포장을 덧씌운 것 정도밖에 더할까. 그게 내 선입관이었다. 하지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만난 <서바이버>는 꽤 흥미로웠다. 출연자들은 두개의 부족으로 나뉘고, 함께 의식주를 해결한다. 그들 사이에서 협동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경쟁자다. 처음에는 집단간의 경쟁이다. 부족간의 게임이 벌어지고 진 팀은 한명을 내부투표로 탈락시켜야 한다. 한 부족이 연달아 게임에 지자, 부족원들은 ‘약한 사람’을 먼저 탈락시킨다. 게임에서 진 이유가 그의 ‘약함’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지던 부족이 각성을 하고 하나로 뭉치자, 마침내 게임에서 이긴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친다. 합치기 전에는 각 부족이 신경전을 벌인다. 어쨌거나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정이 들었고, 그들은 상대 부족원에게 적개심까지는 아닐지라도 경쟁심은 확연하게 드러낸다. 하나의 부족으로 합쳐 투표를 하게 되자, 그들은 상대방 부족의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표를 던진다. 결국 수의 우세를 확보한 부족이 소수를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바이버>를 조금씩 보다보니, 정말 흥미로웠다. 이건 야생에서의 생존게임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생존게임이었다. 부족간의 대립이 치열하다가, 점차 수가 줄어들며 개인간의 경쟁이 전면에 드러나자 타깃은 ‘개인’으로 바뀐다. 한 흑인여자는 너무 체력이 좋기 때문에,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일찌감치 탈락된다. 전체의 화합을 해치는 사람도 탈락된다. 능력이나 인간성이 너무 뛰어나도, 너무 처져도 ‘최후의 1인’은 될 수 없다. <서바이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문명이란 옷을 벗겨내자 드러난 맨얼굴과 똑같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다, 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건 언제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내치는 것, 집단의 힘으로 소수를 밀어내는 것, 결국은 ‘최후의 1인’을 향하여 눈돌리지 않고 뛰어가는 것. 그냥 쿨하게, ‘산다는 게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서바이버>는 아주 흥미로운 게임이다. 하지만 조금 사선으로 비껴나면, <서바이버>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지독한 ‘고발’이다. 인간은 타인을 짓밟지 않고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존재다.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또 모를까.

lotus@hani.co.kr

이 글은 씨네21에서 무단으로 퍼왔습니다.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장진구에게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김규항/ 출판인 drumbeat@hananet.net

오삼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가 화제의 드라마가 된 건 주로 장진구 덕이었다. 사람들은 장진구인 사람들과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로 나뉘어, 장진구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장진구와 다름을 증명하느라 내내 땀을 흘렸고,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은 그 장진구와 현실 속의 장진구의 유사함을 확인하느라 내내 재미를 봤다. <아줌마>는 막을 내렸고 <아줌마>적 논의는 막을 내리지 않았다.

장진구를 자처하는, 소설가 김영하는 ‘내가 <아줌마>를 싫어하는 두세 가지 이유’를 제출했다. 나는 <아줌마>가 싫다, 나는 장진구다, 지식인이란 장진구다, 지식인은 본디 노는 사람이며 사회의 잉여다, 소크라테스만한 장진구가 있었는가, 공자도 유비도 예수도 장진구였다, 우리를 미워해라, 그러나 우리를 씹으려면 좀더 세련되시라…. 김영하의 자기모멸은 얼핏 지성적이지만, 결국 김영하는 <아줌마>를 오독하고 지식인을 모욕했다. 지식인이 먹물이라는 대체어로 즐겨 불리는 데서 보듯, 비지식인들의 지식인 혐오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비지식인들은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생각은 현실 속에서 대체로 근거있고 사실이지만, 얼마간은 오해다. 지식인에겐 노는 사람이나 사회의 잉여로 오해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 지식인은 여느 노동들처럼 몸을 움직여 분명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세상의 정신 부문을 담당하는, 세상을 분별하여 세상에 알리는, 매우 추상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갖는 그런 추상성은 종종 비지식인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며, 종종 지식인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디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곤 한다. 김영하의 경우다.

제 노동의 결과를 아카데미즘이니 인문주의니 딱지가 붙은 궤짝 속에 쌓아두기만 하는 부류는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게 중 나은 편이다. 훨씬 많은 지식인들은 백날 천날 놀면서 각종 실물 정치와 각종 실물 경제에만 집착하는 순수한 잉여들이다. 그런 잉여들의 유일한 노동이란 비지식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오삼숙의 모델이 된 친구가 그랬다. 자기 남편은 아내가 저 하는 말 절대로 알아 듣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고. 또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말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고….”(<아줌마>의 작가 정성주) 김영하는 소크라테스에 공자에 유비에, 급기야 예수까지 끌어들여 <아줌마>를 공격한다. 그 논리적 해괴함(장진구가 십자가에 달린 까닭은?)은 덮어두고라도, 그런 시공 초월적 지식인론은 <아줌마>라는 과녁과는 거리가 멀다. <아줌마>는 섬뜩할 만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80년대를 밑천 삼아 90년대에 백가쟁명을 과시하였으되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2천년대 정신적 공황기를 도래케 한 사람들이다.”(정성주) <아줌마>의 그런 분명한 설정은 그런 설정 바깥 또한 분명히 한다.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만 자신의 노동을 기억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지식인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김영하는 장진구 같은 지식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했는데, 김영하는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를 착각했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건 장진구가 아니라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다. 그 장치를 걷고라면,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 않는가.) 그들이 바로 2천년대의 정신적 공황기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그들의 성실한 노동 덕에 세상에 차고 넘치는 장진구들의 죄가 사함 받는다. 추신 김영하는 ‘오삼숙과 그의 일당들 같은 순결한 민중들’은 1930년대 소비에트 선동극에나 존재한다고 했다. 소비에트 선동극 속의 민중들은 생으로 지어낸 인물들이 아니다.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순결해진다. 어떤 졸렬한 인간도,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가장 순결해지는 것. 우리가 사람인 이유이자 역사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