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자 체험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본질을 인간이 지닌 단절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극복하고 일체감을 획득함으로써 해방의 국면에 가 닿기 위한 시도로서 보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삶의 무도회에 참여하여 서로를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며 어떨 때 기뻐하고 어떨 때 슬퍼하는지, 그/그녀의 웃음 뒤에 숨겨진 근원적인 슬픔이나 두려움을 말없이 감지해 내는 것, 에리히 프롬 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한 그 어떠한 근원적인 의미 독해와 철학도 이처럼 개인의 노력과 삶에의 의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 고유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사랑에의 갈망은, 그러나 다른 어떤 시대들보다도 유별나다. 이 개인적 차원의 사건들은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윤리에 의해 죄악시되기도 하였으며, 놀랍게도 그들은 사랑 –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친밀감에의 욕구, 신비스럽기까지 한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 열망, 그리고 성욕 등을 떠올리게 하는 – 없이도 거뜬히 일생을 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그 어느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성스러운 요새이며 존재의 의미가 되었다. TV와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찬미는 단지 헐리웃 영화의 상술이나 자본주의의 계략으로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사랑을 갈구한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부부가 공저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이 사랑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망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와 현상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책 제목 그대로 사랑은 혼란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사랑이라는 성소에 존재의 의미를 내걸지만 종종 좌절하고 종종 다시금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개인들간의 감정적 교류에 기반하고 있다.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용서해줄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며 모든 것이 신비 그 자체일 수 있는 경이감 어린 감정적 교류는 그러나 그만큼이나 배신감과 좌절감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사랑과 증오는 때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랑의 감정에 현대인들이 그토록 메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그 이유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조명한다. 매번 남녀들이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을 했다가도 가사 노동의 분담, 생계 유지를 위한 책임 분배, 대화 부족이나 육아와 관련한 문제로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급기야는 이혼에까지 이르는 이 피곤하고 힘겨운,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행로에 대해 사회는 종종 개인적 차원의 진단을 내리고는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직장에서의 고되거나 비자발적인 노동은 그들간에 대화할 여유를 주지 않으니 여기에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가 분명히 개입된다.

그러나 사실 더 근본적이게는 산업주의·자본주의 사회가 인간들의 지속적인 개인화를 추동하고 있다는 것이 사랑에 대한 현대인들의 빈번한 좌절과 지나친 기대의 요인이라 볼 수 있다. 산업주의·자본주의 사회는 개인들이 자본과 노동의 부름에 충실히 움직일 수 있도록, 언제나 이동가능하고 언제나 자신의 구매욕에 장애물 없이 헌신할 수 있도록 가족의, 동네의, 그 어떠한 공동체의 소속에서 개인들을 떼어내려 한다. ‘네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라’는 자본주의의 전언은 실로 이윤적 동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스 베버의 저작에서 보는 바와 비슷하게, 이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야기한다. 점점더 개인화될수록 개인들은 자신의 실존적 문제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되고 그 어떠한 것에도 조종되지 않는 나의 고유한 주체성과 새로운 사고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강렬한 인간적 욕구의 출현에 자본주의는 일면 당혹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화의 추동과 맞물려 현대사회는 그 어떠한 가치나 규범에도 기댈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나의 시작, 나의 행위 준칙, 심지어 나의 존재 의미까지 그 모든 것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더이상 아니게 되었다. 힘겨운 노동이 더이상 자신의 삶을 나타내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개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계속 내몰리게 되었으며 이 축복받은 자유는 만사를 새롭게 선택하고 정당화해야 하는 당혹스러움으로 나타났다.

이 상반되는 자본주의의 결과물들이 결합된 것이 사랑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노동하고 소비하는 기계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나만의 고유성을 찾고자 그리고 모든 불확실성의 위험들 속에서 안식처를 찾고자 현대인들은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사랑을 욕구하는 것은 사회적 결과물이다. – 사랑은 현대인의 유일한 희망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사회는 개인들의 사랑의 일대기에 협조적이지 않다. 언제나 노동 현장의 요구가 사랑의 현장을 따라다닌다. 게다가 이제는 그저 나와 너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독립적인 영역을 유지하기까지 해야한다. 이처럼 사랑마저 혼란스러운 것은 자아 찾기와 타인과 공유하는 삶이라는 모순적인 욕구를 사회의 제약이라는 척박한 조건에서 동시에 충족하고자 하는 현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이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시험해 보고 나름의 대안들을 찾아내고자 하는 힘겨운 사적·공적 투쟁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의 관점은 독특하다.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이 책에서는 새로운 각도로 조명된다. 자본주의에 적합한 인간형을 의도하였던 개인화는 오히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새로운 요소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 예컨대 사랑이라는 종교도 모든 외적 규율들을 거부하고 오로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자발적인 규칙들에 입각한 행위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질서에 대한 저항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부르주아적 핵가족이라는 낡은 가족의 전형도 쉽게 부정되고 새로운 가족 형태를 시험한다. 물론 사랑도 규격화되는 조작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 현대인은 자본주의가 소외시켜온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다시금 상기한다. 사랑에 관한 신화가 단지 헛된 망상으로만 치부될 수 없는 것은 그것에서 발견되는 근원적 욕구에 대한 상기 때문이며 지금의 사회 질서가 그 욕구와 일으키는 파열음은 우리로 하여금 은밀한 변화의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는 중이다.

역사를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것으로 본다면, 인간 역사의 진보는 물질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정도에 상응한다. 맑스도 자본주의가 지니는 생산력에 일말의 희망을 내비치고 있듯이, 이 책의 저자들도 이 왜곡된 물질 사회에 내재한 가능성들이 현대인들의 자기 모순에 대한 은밀한 반성을 통해 기어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의 일방적인 통제가 무용할만큼 벌어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개인들의 내적인 실험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리듬들은,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나아가고자 하는 변화를 암시한다. 이것이 그들이 인간의 죽은, 그러나 은밀히 살아 움직이는 정신에 내비치는 진보에의 소박한 희망이다.

 

“…예를 들어 22세기 사람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전환하고 있는 우리의 중기 산업시대를 되돌아본다면 아마 웃음을 지으며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정치적 압력 집단이 너무나 많구나, 사람들은 투표도 하고 제안하고 연합하고 음모를 꾸몄구나. 모든 것이 대 미디어들에 의해 속속들이 까발려졌구나. 하지만 막상 진정 새로운 시대는 관심밖으로 밀려나 그저 무시되기만 했을 뿐이구나. 하루하루가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가운데 은밀하게 진행된 이러한 변화가 각종 위원회에서 유권자 모임까지 바쁘게 돌아다닌 정치인들은 거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결과를 초래했구나. 사람들이 계속 정부와 정치인들만 쳐다보고 있을 때 막상 결정적인 요인들은 슬쩍 뒷문으로 스며 들어와 세계를 뒤엎은 것은 얼마나 희한한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를 찾으려면 산업 사회가 강변해온 몇 가지 확실성을 옆으로 제쳐두어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달리는 기차에서 좌석의 재배치 문제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이 설사 기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놀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우리는 변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무엇이 실행 가능한가에만 집중함으로써 – 좌석을 이동함으로써 – 더 큰 차원이 있다는 것을 잊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기묘한 것은 이런 것이다. 즉 단지 좌석을 재배치하고 있을 뿐인데도 기차가 어디로 갈지, 어디를 돌아갈지, 어디서 설지를 결정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

P. 254 ~ 255

바넷 뉴먼

모더니즘

대공황과 2차대전의 경험. 그러나 이런 위기 앞에서도 서구 회화는 “가장 깊은 경험을 묘사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시대의 황폐함과 도덕적 충격을 표현하려면 유럽의 전통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예술의 본질은 교조의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저항에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뉴먼은 모더니스트다. 유럽의 전통과 단절하고 그것과 구별되는 미국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학적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여기에서 뉴먼은 ‘미’를 거부하고 ‘숭고’의 범주를 내세우게 된다. 이를 위해 Longinus, Burke, Kant, Hegel의 숭고론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결론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려고 함.

내용과 형식

뉴먼의 추상회화는 형식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형식의 추상성은 사유의 추상성과 관계, 즉 “추상적 사유”와 관련이 있다.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subject matter)다.” 주제의 우선권. 그에게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예술은 추상적 사유, 즉 형이상학적 진리를 추구한다.

추상과의 싸움

‘시각적 사실의 형식적 추상’이 아니라 숭고한 감정을 실어나르는 “살아 있는 물건”, “살아있는 매체”를 만들어내려고 함.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형태는 묘사의 수단이 아니라 일종의 마술적 수단이다. 그것은 논리적, 수학적 추상의 결과가 아니라 인디언 회화에서 비롯된 형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몬드리안을 비판한다. “그의 기하학(=완성)이 그의 형이상학(=exaltation)을 삼켜버렸다.” 뉴먼의 작품은 동시대의 색면회화(color field)나 옵아트와 달리 주제가 있는 회화이다. 하지만 이것이 미학이론의 시각화, 형상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학과 예술의 관계는 조류학과 새의 관계와 같다.”

숭고의 체험

그에게는 어떤 체험이 있었다. 언젠가 그는 자기의 그림에 스스로 압도당한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그것과 함께 살았다.” 후에 그는 “나는 내게 감명을 주는 진술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내 현재 삶의 출발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상징주의가 아니다. 언어로 번역될 수 없고, 연상을 통한 지시로부터 해방된, 그 자체가 절대적인 예술적 진술이었다. 그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로서 “현전”으로서 체험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동’, 즉 ‘사건’의 체험이다. 뉴먼은 자신을 추상화가라기보다는 액션 페인터에 가깝게 보았다. 한 마디로 뉴먼에게 회화는 숭고를 위한 심벌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숭고 그 자체를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료타르는 이를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불렀다. 흔히 큰 그림은 먼 거리에서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뉴먼의 그림은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 뉴먼의 그림 앞에 서면 관찰자는 열광을 경험하게 된다. 혹은 감정, 감각의 물결을 뒤집어 쓰게 된다. 뜨거운 숭고와 차가운 시각적 사실 사이의 동요가 뉴먼의 캔버스의 제의적 효율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주제영역

(1) 창조의 행위와 사건(창세기=Genesis의 연출).
(2) 위치함의 행위와 성스러운 장소(“내 목적은 환경이 아니라 장소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장소는 ‘공간’이 아니라 ‘장소’, 즉 유태교적 의미의 Makom이다.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알라.”)
(3) 영웅적, 숭고한 인물들.
(4) 빛.
(5) 존재의 상태.

zip

이러한 형이상학적, 영웅적 경험이 바로 매체를 변형시키려는 예술의 투쟁, 예술가 자신의 투쟁. 예술적 창조=신적 창조라는 유비. 바로 이것을 통해 숭고함에 ‘참여’하게 된다. 굳이 이를 위해 높은 산, 넓은 바다의 묘사가 필요하지 않다. 화면을 거의 무(無)로 돌림으로써 창조를 위한 신의 공간을 만들려 함. 이를 료타르는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름.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수직선(“zip”)은 어떤 초자연적인 가르침, 즉 oneness와 placeness의 영적 긴장을 표현한다.

숭고의 부정적 묘사

숭고는 노랗지도 파랗지도 빨갛지도 않다. 그는 예술에서 자연을 배제하려고 했다. 색채는 “사고의 복합체” 속에서 파괴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색으로 이루어진 부분들이 아니라 전체성과 그것의 효과였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 하랴> 다양한 색채-> 3원색->이윽고 전체 속에서 사라지는 영점. 형이상학적 기능을 위해서 형태와 색채는 사라진다. 크기, 모양, 색채, 재료에 관계 없이 ‘일자'(Oneness)가 되는 것, 그 일자성(oneness)를 전달하는 것이 회화. 따라서 emptiness가 필수불가결한 배경이 된다. 총체성과 공허함의 모순적 결합. 존재와 부재의 결합. 세속예술을 통한 종교예술의 효과. 이를 위해 체->면->선->점… 이윽고 모든 형상은 점이 되어 사라진다.

가난한 사랑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두 점을 치는 소리./방법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되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이다. 우리 잠시 두 손을 모으고 이 시가 그려보이는 슬픔에 동참해 보자.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 많은 시들을 보았으나 나는 가난의 슬픔을 이토록 가슴아프게 그린 시를 쉽게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아름다운 시가 이번 수능시험 언어영역의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그러므로 감동을 잠시 유보하고 긴장해 보시라. 혹시라도 정답과 다르게 감동하면 안 될 것이므로.

시험문제는 박재삼 시인의 `추억에서’와 이용악 시인의 `그리움’을 같이 제시한 후 세 시의 “공통점으로 알맞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아무런 상관 없이 씌어진 다른 시인들의 시를 두고 공통점을 찾으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몰상식한 폭력이다. 칸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시는 보편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라고. 그러니 어떤 시도 다른 시와 공통적이지 않다. 물론 같은 것이 있다. 지문에서 주어진 시들이 모두 우리말로 씌어진 시라는 것. 그러나 이런 공통점이 하나의 시를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더 당황스런 것은 문제에 딸린 보기들이다. ① 자연친화적인 삶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② 화자 자신의 과거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있다. ③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④ 화자는 자신의 현재상황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드러나 있다. 잠시 머물러 생각해 보시라, 과연 이 시가 말하려는 것이 이 다섯가지 가운데 어떤 것인지. 여기에 답이 있는가? 하지만 이 가운데 답이 있든 없든, 학생들은 이 다섯가지의 한계 내에서 답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섣부른 상상력은 금물이다. 우리는 이 부자유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불만을 감추고 정답을 골라 보시라.

정답은 5번이다. 이리하여 신경림 시인의 시는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표현한 시라고 규정되고 말았다. 이 시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웃 젊은이의 서러운 가난을 노래한 시가 졸지에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박재삼의 시의 제목은 `추억에서’이고 이용악 시의 제목은 `그리움’이다. 그리하여 신경림 시인의 시도 추억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로 함께 이해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12년 동안 끊임 없이 이런 식의 시험을 위해 시를 읽어야 한다면 과연 시가 주는 감동에 편안히 빠져들 수 있겠는가? 시를 혐오하게 만드는 국어교육, 역사를 혐오하게 만드는 역사교육, 수학을 싫어하게 만드는 수학교육, 도덕을 냉소하게 만드는 도덕교육. 도대체 언제까지인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이 비극은 끝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