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Wim Wenders  
출연 :  Harry Dean Stanton, Nastassja Kinski, Dean Stockwell, Aurore Clement, Hunter Carson, Bernhard Wicki

영화의 첫장면을 보자. 주인공 트래비스는 황량한 사막 벌판 가운데에서 정처없이 걷고 있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물을 한 모금 들이킨 트래비스는 이 피곤하고 하릴없는 여행길을 재촉한다. 사방은 각진 바위산과 끝모를 사막의 평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무더운 공기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트래비스, 그를 주시하는 독수리 한마리. 지친 발걸음을 계속 옮기는 트래비스를 지켜보는 한켠의 독수리는 앞으로 건조하게 부식한 그의 인생 한토막을 관조하게 될 나이자 빔 밴더스의 눈이 된다.
이 유쾌하지 못한 도입부에서는 이 영화의 전체 맥락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황량함, 정처없는 부유, 방향성의 부재 등으로 다가오는 도입부의 이미지는 이 영화가 지니는 외양을 요약하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이 황폐한 벌판의 도입부에서 포착되는 이미지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는 이미지들을 현대인이라는 우리 자신의 대변자적 이미지들로 묶는다. 나에게 이것은 타당한 발상인데 왜냐하면 서울의 번화가와 그 속에 붐비는 군중들의 익명성, 그리고 이 곳에 유학온 나 자신의 상황이 출구없이 쫓기는 듯, 안식처를 잃어버린 트래비스의 부유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작품을 몇몇 대표되는 단어나 개념으로 응축하거나 정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내가 포착한 영화의 이미지들은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성격의 일부일 뿐이며 그 각 부분들은 유기적인 총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단층들로 접합되어 있음을 주의한다. 이 주의사항은 한 작품이 평자의 글로 새롭게 구축됨으로써 생략된 그것의 잊혀진 모습을 떠올리자는 개인적인 다짐이기도 하다. 이런 단상들을 상기하면서도 나는 앞에서 기술한 몇몇 이미지들을 주된 축으로 이 영화가 나에 의해 일관적 체계로 엮이어야 함을 아쉽게 생각하지만, 이는 인간에게 불가피한 모순성일 것이다. 이렇게 서설이 길어지는 것은 이 영화를 접한 나의 체험과 이 글이 다만 나만의 이해 방식일 뿐이며 그 단층들의 접합은 새로운 지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요컨대 나 자신에 대한 변호의 포석일 따름이다.

길, 사막, 표지판
이 영화에는 유난히 길이 많이 나온다. 길은 흔히 인생에 비유되고는 하는데 여기서의 길은 그러한 인생의 무방향성을 강조한다. 동생 월터가 트래비스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오는 길에서 트래비스는 운전 중 고속도로를 벗어나 길을 잃는다. 표지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길은 어딘가를 향해 나 있고 – 그 끝은 종착지·목적지이자 죽음일 것이다 – 어딘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자에게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함이지만 인생의 행로에서 우리는 목적지를 알 수 없고 길을 따라 차를 달리는 나 자신이 왜 이 길 위에 내던져져 있는지 이유도 알 수 없다. 따라서 표지판의 부재는 확실성의 상실이자 존재에 대한 끝모를 회의와 당혹감이다. 트래비스는 표지판이 없는 길 위에 내버려진 가련한 나그네이며 길은 차라리 길 없는 사막과 닮아 있다.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사막.

파리, 어머니, 아내
제목이기도 한 파리, 텍사스는 프랑스의 파리와 이름만 같은 모조품이다. 실제 텍사스에 있는 파리는 전통도 문화도 없는 황무지일 뿐이며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곳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이루어진 곳, 파리는 트래비스에게 많은 사연이 간직된 곳이다 파리는 자신이 시작한 곳이며 스페인계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허영심이 만들어낸 거짓 고향이다. 어머니의 거짓 고향으로 굳어진 것처럼 원본 파리가 아닌, 모조품이자 볼품없는 황무지인 텍사스의 파리는 트래비스의 시작이 지니고 있는 비원본성을 의미한다. 모조품들을 자신의 고향과 어머니로 지닌 트래비스의 근원적인 한계성은 그에게 시작, 원형, 모태의 확실성에 대한 갈구를 조건짓는다.
자신의 시작마저 원형이 될 수 없는 트래비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원형이자 분명하게 자신과 관련된 확실한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아내인 제인에게 투사된다. 제인을 자신의·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구속하려는 트래비스의 욕구는 이 확실성에 대한 욕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 시도마저 실패한다. 자신이 시작한 곳,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곳, 자신이 사랑하는 것, 그 모두는 트래비스에게서 원천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이 때문에 트래비스는 머물려 하면 금새 어디론가 떠나기를 추동받으며 그의 부유성은 여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형제, 집
트래비스의 동생 월터는 돌아온 형에게 이제는 평균적인 삶을 살 것을 권유한다. 그의 아들 헌터를 위해서도 그는 어딘가에 안착해 생계를 꾸려가야 한다고, 집을 마련하고 아들과 함께 정상적인 삶을 살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동생 월터의 집은 그리 포근하지 않다. 공항에서 수시로 뜨고 앉는 비행기의 기계적인 소음이 월터의 집을 포획한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월터의 집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푸근함과 거리가 멀며 오히려 매일매일의 노동과 기계적인 생활 방식만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의 삭막한 비자연성과 닮아 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집들은 이처럼 기계 문명에 장악된 비자연적 인간 조건의 표상이거나 잠시 묵고 가는 여관·모텔인 경우가 전부이다.
현대인은 사회로부터 개인화의 추동을 받는다. 산업화의 막바지에 다다라 새로운 이윤의 보증자를 물색중인 – 정보·문화 등 –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산업의 부름에 충실히 응답할 수 있는 기동력 있는 개별자들을 원하며 가족·지역 등의 집단을 위해 희생하거나 양보할 인간이 아닌,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 자본주의적으로 길들여진 구매욕 – 건전한 소비자로서의 개인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것이 그 중심축으로부터 떨어져 나갈수록 오히려 개체들은 이 혼돈을 불식시켜 줄 해결자이자 휴식처를 갈구한다. 그러나 이 고독과 혼돈을 해결해 줄 최종 안식처에 인간은 결코 닿을 수 없다. 이 두 현상의 화해될 수 없는 모순이 형상화되는 공간이 바로 월터의 집이며 여관과 모텔인 것이다. 땅의 인력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떠 다니는 비행기를 트래비스가 두려워 한다면, 그리고 땅의 인력을 느끼기 힘든 높은 곳을 싫어한다면 이 역시 자신이 처한 이 근원적인 모순성을 두려워하고 고뇌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주하고자 하여도 정주할 수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은 곳, 그래서 언제나 풀었던 짐을 싸고 다시 길을 나서도록 추동받는 트래비스의 운명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집의 이미지들이다.

창녀, 유리벽, 소통
트래비스는 아들 헌터와 함께 아내인 제인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어렵사리 찾아낸 아내는 성적 욕구를 금전으로 거래하는 향락 업소에서 일한다. 아내는 창녀와 매한가지가 되어있고 아내에 대해 트래비스는 더이상 그 어떤 애정도 지니고 있지 않다. 아니, 현재 그녀의 모습을 보기 이전부터 이미 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들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트래비스의 일방적인 애정이었고 이는 남자 쪽에서만 상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고안된 유리벽의 형상으로 표상된다.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둘러싼 벽을 쉽게 통과할 수 없는 곤란함을 유리벽은 말하고 있다. 이 유리벽은 제인과 트래비스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트래비스를 둘러싼 다른 인물들 사이에 형성된 몰이해의 측면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잃고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서 헤어나올 수 없도록 고안된 비투과성의 유리벽.

소통, 아들
이 영화에서 읽히는 모든 유쾌하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 그러나 이 소통의 곤란함은 한가닥 빛을 간직한다. 그 빛은 다른 어둠의 이미지들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그렇게 주어진 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반짝인다. 트래비스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로 안고 부유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아들 헌터에게 그 운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트래비스가 아들 헌터와 유일하게 나누는 소통도, 거짓 엄마인 앤과 헌터 사이의 사랑도 이 복원할 수 없는 원본, 시작, 확실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트래비스의 절망과는 매우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이 적극성은 축으로부터 떨어져 버리는 분산작용을 더 넓게, 더 활기있게 움직이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에 역점을 둔다.
트래비스의 아들 헌터는 그런 의미에서 이 황폐한 현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형이며 새로운 인간적 삶의 통로를 간직한 존재의 가능성을 대표한다. 그에게 아버지는 트래비스이며 월터이다.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에 대한 강박을 떨쳐내고 오로지 자신을 길러준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기억만을 반길 줄 아는 헌터는 자신의 실존적인 상황을 정확히 직시하면서도 그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대변한다. 헌터가 친어머니와 재회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혼돈의 추가라기보다는 오히려 혼재하는 실존적 조건들 속에서 이루어낼 소통의 또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 트래비스에게 이는 자신이 못다한, 아니 할 수 없는 부재와 장벽의 극복을 아들을 통해 대리 충족하려는 시도인 것으로 파악된다. 아니면, 자신의 운명이 아들에게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는 허무주의자 트래비스는 아들의 삶을 통해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다.

희망과 나그네의 저주
라이 쿠더의 무덥거나 냉랭한 기타 선율과 함께 그려지는 무수한 부재와 부유의 이미지들 속에서 나는 현대인들이 처한 조건들을 감지한다. 무언가 부여잡을 만한 확실성이 없고 공유되는 가치와 목표도 사라진 채, 존재하여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주위의 사람들 속에 파묻힌 현대인. 이 산업사회의 풍성한 물질 세례 가운데 오히려 무언가 빈곤함을 느껴야 하는 현대인은 스스로 파국의 위기를 찾고 있는 듯 보인다. 빔 밴더스는 그 파국의 위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현대의 대제국 미국으로 건너와 그 가운데 구원의 한 가닥을 추출해 내려는 듯하다. 어디까지나 트래비스는 첫장면과 같이 표지판 없이 황량한 사막과 같은 혼돈 속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나 자신에 대한 의문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나’의 세계를 구축하도록 내적·외적으로 추동받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과 정박지를 제공해 주지 않는 이 불안정한 세계,
그리고 이로부터 야기되는 지속적인 소외의 악순환이 어떠한 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트래비스와 헌터의 인생 유전은 밴더스의 희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 트래비스에게서 느껴지듯,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그 어딘가에서는 그러했을 안식처의 세계로 회귀하고픈 갈망과 그럼에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음을 직시하면서 우리의 실존적인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우리가 희망을 내걸 수 있는 것은 내던져진 혼란을 적극적으로 취하는 것에서일 뿐이라는 밴더스의 전망. 그러나 질문과 혼란의 공세는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매순간의 혼란을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견디면서 생성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등대 없는 바다 한가운데서 방황하는 수많은 섬들이 어떻게 다른 섬들과 조우하고 생성의 지난한 고통과 기쁨의 체험에 진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주어지지 않은 채, 도로 한켠에서 인간들을 저주하는 나그네의 목소리가 나에게는 신의 음성이 되어 괴롭힌다.

난니 모레티는 요란한 수다쟁이가 아니다.
진솔한 수다와 몸짓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끌어내는 진리치는 그리 녹녹치 않다.
극장에서 격렬한 구호를 외치며 사회의식을 실천하던 젊은 시절은 가고 부패한 중년이 된 자신들을 한탄하는 영화의 한 장면에 불평을 늘어놓는 모레티는, 그의 말대로 아직 살아있는 40대이다.
나도 그처럼 요란하지 않게, 무관심하지 않게 살아있는 40대를 맞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