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유사와 상사-

실패한 칼리그람

“칼리그람은 우리의 알파벳 문명의 가장 오래된 대립들, 그러니까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그리기와 말하기, 복제하기와 분절하기, 모방하기와 의미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들을 놀이로 지워버리려고 든다. (…) 자기가 말하는 것을 이중으로 몰아가면서, 칼리그람은 가장 완벽한 덫을 설치한다. 이중의 통로에 의해서, 그것은 말이나 그림만으로는 불가능한 포획을 확실하게 성공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공간 속에서 서체가 부릴 수 있는 꾀들을 통해 말들에 그들이 지시하는 대상의 모습을 또렷하게 부여함으로써, 본래 말들이 결코 이길 수가 없는 그 완강한 부재를 쫓아낸다.” (S.35)

‘칼리그람’은 ‘현전의 형이상학’의 은유다. 중세에 사물과 기호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의 차원에 속했다. 그 시절 사물은 기호였고, 사물은 기호였다. 하지만 근대의 철학은 세계를 현실의 세계와 표상의 세계로 이중화한다. 이때부터 철학은 현실과 표상, 원본과 모상을 일치시킬 과제를 갖게 된다. ‘칼리그람’은 사물의 세계와 기호의 세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극복하고, 둘이 눈앞에서 합류하는 것을 보는 생생한 현전의 체험이다. 하지만…

“우리를 낭패시키는 것, 그것은,  텍스트를 그림과 관련시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 단언이 사실이라거나 거짓이라거나 모순된다거나 등등을 말할 수 있도록 해줄 바탕을 결정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내 생각으로는 하나의 칼리그람이 만들어졌다가 해체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칼리그람이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과 그 실패가 남긴 아이러니컬한 잔해들이다.” (S.33)

마그리트에게서 칼리그램은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말은 사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물은 말로 명명되지 못한다. 이는 곧 현전의 실패, 재현의 실패, 지시의 실패를 의미한다. 언젠가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듯이, 바벨의 언어로 현전의 체험, 아담의 언어의 체험에 도달하려는 근대철학의 형이상학적 열망 역시 결국은 좌초하고 만다. 바로 이 철학적 사건을 현대예술에서는 대상성과 재현성의 포기로써 예고한다.

클레, 칸딘스키, 마그리트

“내 생각으로는 두 개의 원칙이 15세기 이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그림을 지배해 왔다. 첫 번 째 원칙은 조형적 재현(유사를 함축한다)과 언어적 지시(유사를 배제한다) 사이의 분리를 단언한다. 우리는 유사를 통해 보며 차이를 통해 말한다. 그래서 구 개의 체계는 교차하거나 용해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종속이 있어야 한다. 텍스트가 이미지에 의해 규제되거나 (책이나 비명, 문자, 한 인물의 이름이 재현되어 있는 화폭들에서처럼) 혹은 미지가 텍스트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그림이란 오직 좀 더 지름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듯, 말로 재현해야 할 것을 그림으로 마무리하는 책에서처럼). (…) 본질적인 것은 언어기호와 시각적 재현이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의 질서가 형태에서 담론으로 혹은 담론에서 형태로 가면서 그것들을 위계화한다.” (S.51-52)

클레는 그림과 기호를 동일한 공간에 병존시킴으로써, 사물과 기호의 근대적 이분법을 폐기한다. 중세에는 기호와 사물이 하나의 존재론적 공간에 존재했다. 근대의 환영주의 회화의 등장과 함께 사물과 기호는 이제 각각 다른 존재론적 공간에 위치하고, 양자 사이에는 ‘회화적 재현을 통한 지시’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오랫동안 회화를 지배해 온 둘째 원칙은 유사하다는 사실과 재현적 관계가 있다는 확언 사이의 등가성을 제시한다. 하나의 형상이 어떤 것(혹은 어떤 다른 형상)과 닮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게, 회화의 게임 속으로 <당신이 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라는 분명한, 진부한, 수천 번 되풀이된 그러나 거의 언제나 말이 없는 언표가 끼어 들어온다. 여기에서도 어느 방향에서 재현관계가 제기되었는지, 다시 말해, 회화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 귀속되는지, 아니면 회화가 스스로 그와 닮은 비슷한 것을 창조하는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S.54)

칸딘스키의 작품은 재현을 통한 지시 관계를 파괴한다. 이제 회화는 기호로서의 잃고 자기지시적인 사물, “동일자의 예술”로 변화한다. 이제 회화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현시(presentation)으로서의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 현대 회화는 파울 클레의 표현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한다.’

이렇게 파울 클레와 칸딘스키에게서 근대 환영주의 예술을 지탱해주던 두 개의 원리는 파괴된다. 클레는 말과 그림을 위계질서 없이 하나의 질서 속에 배치함으로써 양자가 지시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봉쇄하고, 칸딘스키의 작품은 “유사”, 즉 현실의 재현이기를 포기하고,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예술의 본질로 여겨져온 ‘재인식’, 즉 ‘확언’의 기능을 파괴한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속에는 아직 3차원의 환영이 존재하고, 재인식이 가능한 대상성도 들어있다. 게다가 그 대상성은 교과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상할 정도로 자연주의적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칼리그람을 통해 말과 사물의 만남을 방해하고, 이를 통해 어떤 의미에서는 더 급진적으로 대상성과 공간의 환영을 파괴한다. 철학적으로 이는 현전의 불가능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과 같다.

유사와 상사

“내가 보기에 마그리트는 유사(ressemblance)와 상사(similitude)를 분리해 내고, 후자를 전자와 반대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유사’에게는 주인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반복에 쓰이며, 반복은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전범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전범을 다시 이끌고 가 안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시물라크르를 순환시킨다.”(S.72-73)

마그리트에게서 현전은 파괴된다. 이제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의 동일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유사성은 한갓 상사성으로, 원본이 없는 복제, 원본과의 일치를 요구하지 않는 시뮬라크르로 전락한다. 의미는 탈동일화한다. 의미는 소쉬르가 말하듯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동일시, 즉 현전이 아니라, 시물라크르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의 놀이 속에서 구성된다.

“이 전사술 덕분에 우리는 유사에 대한 상사의 우위를 알게 되었다. 유사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재인식하게 하지만, 상사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어 못 보게 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한다. 유사는 유일한, 언제나 똑같은 단언을 내포한다. ‘이것, 그것, 또 저것. 그것은 저것이다.’ 상사는 함께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겹치는 상이한 단언들을 (여러 겹으로) 배가시킨다.”(S.76)

이 차이의 놀이를 통해 의미는 열려진다. 그리고 한번 열려진 의미는 이제 생산적,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서로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포개짐으로써 단언의 의미를 다변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세계의 질서가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을 우리에게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캠벨, 캠벨, 캠벨.” (S.89)

김현의 독해 비판

15세기 이후의 서양의 환영주의 회화의 두 원리에 대한 푸코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 곰브리치가 말하는 ‘아는 대로’와 ‘보이는 대로’의 대립은 15세기 환영주의 회화의 원리가 아니라 미술사 전체에 적용되는 개념. 추상의 수준을 달리하기에 경쟁개념이 될 수 없다. ‘아는 대로’와 ‘보이는 대로’는 서로를 배제하는 개념쌍이지만, 푸코가 말하는 두 개의 원리는 서로 배제하는 게 아니라 상보적이다.

김현의 글에는 정작 푸코가 말하려는 바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유사성과 상사성의 대립이 의미하는 푸코의 언어철학적 전제를 그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푸코의 책에서 지적하는 것은 현대회화에서 대상성의 파괴와 근대적 현전의 형이상학의 파괴 사이에 존재하는 homologie이다. 아울러 대상성과 재현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푸코의 초현실주의 속에서 실은 대상성과 재현성의 파괴가 가장 급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이다. 책의 주제를 이루는 이 부분이 그의 평론 속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벨라스케즈와 마그리트를 연결시키는 논리도 비약이 너무 심하다. ‘주체 없는 표상’은 17세기 합리주의의 표상론의 엠블렘으로, 탈근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주체의 죽음’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첫째, 고전주의자들의 ‘표상론’은 18세기에 인간학주의적 전도가 이루어진 후의 표상론과는 달리 주관적 관념론이 아닌 객관적 관념론의 형태를 띤다.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표상론은 어디까지나 근대의 형이상학 테두리 내에 있는 반면, 마그리트는 이 ‘표상’ 자체를 파괴한다. 둘째, 푸코의 마그리트론 역시 ‘주체의 죽음’이라는 주제와 그다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주체의 소멸이라는 주제로 벨라스케즈와 마그리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넌센스다.

팬텀과 매트릭스

-귄터 안더스의 미디어 이론

태어날 때부터 텔레비전을 보고 자란 세대는 그 물건이 창세 이래 세계에 속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텔레비전이 있는 삶은 절대적 세계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주위를 공기가 감싸고 있듯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는 텔레비전이 그렇게 옆에 있다. 우리가 공기의 존재를 당연히 여기듯이 그들도 텔레비전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다르다. 어렴풋이나마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이 처음으로 세계 속에 도입되던 창세기의 기억을 갖고 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가족들이 함께 저녁을 먹던 분위기는 텔레비전이 생긴 이후의 저녁 분위기는 분명히 다르다. 이런 변화를 우리는 몸소 겪은 바 있다. 요즘 세대에게 텔레비전이 없는 삶이 상상이 안 되겠지만, ‘텔레비전이 없는 삶’을 잠시나마 살아보았던 우리는 적어도 ‘텔레비전이 있는 삶’을 여러 가지 가능한 삶 중의 하나로 상상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우리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텔레비전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들어가 살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주간지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기자가 일정 기간 텔레비전 없이 사는 모험(?)을 하며, 그 체험을 수기로 기록한 것이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여튼 이러 엉뚱한 실험이 의미를 가질 정도로, 어느 새 텔레비전은 우리의 삶의 본질적 요소가 되어버렸다. 텔레비전 없이 지낸다는 것은 이미 우리 세대에게도 그저 집안에 있는 물건 하나를 내다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삶 전체를 바꿔야 하는 실천적 번거로움을 의미한다. 가령 당장 집에서 텔레비전을 들어내면, 지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어머니는 당장 어떻게 무료한 하루를 보내실 것이며, 나는 그 무료함을 달래드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화제를 준비해야 하는가.

흔히 우리는 텔레비전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한다. 또 ‘도구’는 인간의 필요에 복무하는 종이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가령 내 주머니에는 핸드폰이 들어 있다. 이것으로 연락을 하고, 만남을 약속하고, 택시를 부른다. 나는 이 ‘도구’의 주인이 되어,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그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다.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는 나는 모든 사람에게 도달 가능한 거리에 있게 된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 호출에 응해야 할 처지에 빠지게 된다. 내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들이 이 조그만 ‘도구’가 촘촘히 쳐놓은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에 걸린 벌레의 신세가 되는 것이다. 과연 이래도 인간이 ‘도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간이 ‘주체’라는 것은 근대철학의 신화, 한갓 소망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역시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빈 그릇, 즉 ‘전달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미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도 수정되어야 한다. 미디어는 메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머리 속의 관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삶 자체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미디어는 한갓 인식론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현상이다. 그것은 한갓 정보전달의 수단, 특정 이념이나 가치관의 메시지라는 차원을 넘어서 그 자체가 현대인의 삶을 조직하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이 초래한 생활세계의 변화를 개념화할 새로운 이론적 틀이 있을 법도 하다. 그 이론은 매체의 특성을 논하는 데에 그치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차원을 넘어, 미디어가 초래한 지각방식의 변화, 습속의 변화, 나아가 현실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의 변화를 포착하는 철학의 수준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환영의 세계

그 요구에 응한 최초의 시도가 바로 귄터 안더스의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다. 금방 눈에 들어오듯이 이 논문의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방송’이라는 미디어가 낳은 새로운 세계의 존재론을 구성하려는 그의 철학적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글의 곳곳에서 자신의 미디어론이 동시에 미디어 시대에 대한 철학적 고찰임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철학자의 명제를 인용하여 자신의 것과 대비를 시킨다. 그에게 글의 제목을 빌려준 쇼펜하우어에게 이 세계는 “표상의 세계”였다. 이는 칸트가 말하는 ‘현상의 세계’를 불교에서 말하는 “사바세계”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패러디한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일종의 사바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니체는 “모든 위대한 철학자는 진정한 세계란 이 세계 위에 드리워진 베일 뒤에 감추어져 있다는 예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런 위대한 각성에 도달하지 못한 범인들에게 유일한 세계란 ‘사바세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철학 따위에 아무 관심 없이 살아가는 산업사회의 평범한 대중들에게 경험가능한 유일한 세계는 방송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사바세계’일 뿐이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간 이 독일 비평가가 이 거창한 철학적 각성에 도달하는 데에 필요로 했던 실제 TV시청의 경험은 불과 7, 8분이었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우리 나라에서도 그랬듯이, 미국에서도 50년대에는 텔레비전이 종종 길거리 전파상의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저자는 길거리에 잠시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을 구경하고 돌아와 이 방대한 철학적 기획에 돌입했다고 한다.

그렇게 씌여진 논문이 오늘날 미디어 이론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면 거기에 철학적 성찰이 뒤따르는 법이다. 미디어의 발전 단계에 맞추어 미디어의 철학 역시 몇 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 단계는 영화와 사진의 미디어론이다. 둘째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이론이다. 그리고 셋째는 최근에 등장한 인터넷에 관한 이론들이다. 오늘날 모든 영화이론이 벤야민에게서 출발한다면, 방송에 관한 모든 이론은 귄터 안더스에게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세 단계로 발전해 온 모든 종류의 미디어론에 개념적 틀을 제공한 것은 역시 벤야민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다. 둘째 단계를 이루는 안더스의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 역시 벤야민의 논의에 빚진 바가 매우 크다. 따라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벤야민에 미디어론에 대해 살펴보는 게 좋겠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벤야민이 ‘모던’이라는 시대에 새로 등장한 경향으로 주목한 것은 ‘기술복제의 가능성’이었다. 여기서 그는 물론 당시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사진과 영화기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실 예술의 복제는 예술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이다. 하지만 벤야민이 유독 현대만을 “기술복제시대”라 부르는 것은, 현대에 이르러 예술작품의 복제기술의 발전이 단지 예술을 베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역으로 예술적 생산 그 자체에 영향을 끼칠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이 제기한 명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기술복제가 현대인의 세계를 바라보는 지각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술복제가 현실의 존재론적 위상 자체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셋째는 기술복제가 ‘대중’이라는 이름의, 과거와는 다른 미디어 수용자를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복제기술의 등장은 현대인의 지각, 즉 그들이 세계를 보는 눈 자체를 변화시켰다. 카메라라는 복제의 수단은 ‘시각적’이었던 전통적인 지각의 방식을 ‘촉각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령 근접 확대촬영을 하는 카메라는 마치 외과의사처럼 대상의 내부로 육박해 들어가며, 뤼미에르의 영화실험처럼 카메라의 영상은 보는 이에게로 사정없이 달려든다. 벤야민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이 지각의 변화가 새로운 지각이 대중의 비판의식을 고양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물론 오늘날 이 견해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미디어의 등장이 현실체험의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는 그의 명제만큼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모든 미디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의 “지금, 여기”, 즉 작품이 속한 장소와 결부된 현존성을 파괴한다. 유일무이한 대상으로서 예술작품이 갖고 있는 성스런 분위기. 이를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현상”한다. 가령 루브르의 모나리자 앞에 서 보자. 바로 그림 앞에 서 있어도 그 그림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아우라는 예술작품이 태초에 갖고 있던 종교적, 제의적 기능의 흔적이다. 그런데 복제기술, 즉 사진과 영화예술은 바로 이 아우라를 파괴한다. 가령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개봉되는 영화를 생각해 보자. 그 중에서 ‘원본’은 어느 것인가?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영화예술에는 ‘원본’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렇게 원본, 즉 유일무이한 대상이 복제물의 시물라크르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진보적 현상으로 보았으나, 이 견해는 오늘날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유일무이한 사물의 세계가 다수의 복제물의 세계로 해체되는 것을 ‘현대’의 징후로 본 것만은 오늘날의 미디어론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나아가 벤야민은 ‘대중'(=mass)이라는 이름의 단자들이 미디어(=media)의 집단적 수용자로 대두하는 것을 ‘현대(=modern)의 시대적 징후로 꼽았다. 과거 예술의 수용자가 관조하는 고독한 개인이었다면, 영화라는 미디어는 새로운 예술수용자를 등장시켰다. 영화의 감상자는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집단이다. 나아가 이들은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작품 속에 고요히 침잠하던 고전 예술의 감상자와는 달리 찰리 채플린의 관람자처럼 예술을 오락처
럼 가볍게 즐긴다. 벤야민은 이 속에서도 혁명을 보았다. 관객이 극중현실에 몰입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거기에 늘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게 하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영화 속의 영상은 정지된 그림에 몰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영화 속의 사건에 늘 비판적 거리를 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가 요구하는 이 “산만한” 지각이 대중의 비판적 의식화에 기여하리라고 본 이 견해 역시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예술의 수용자로서 ‘대중’에 주목한 것은 그의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에 대한 비판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도르노에게서 나왔다. 아도르노는 미국에서  대중예술의 자본주의적 상업화를 목격했기에 매스 미디어에 대해 벤야민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었다. 그는 매스 미디어가 초래한 세 가지 변화 모두에 지극히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한다. 가령 헐리우드 영화는 대중의 비판적 의식을 각성하기는커녕, 해피엔딩의 구조로 대중들의 극중 몰입을 완전히 보장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체제순응적인 존재로 길들이고 있었다. 아울러 영화가 파괴한다던 아우라도 ‘스타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아우라의 생산기제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아울러 아도르노는 복제예술이 인간의 지각방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가령 음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정으로 음악을 듣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음악의 지각방식을 특정한 패턴에 고정시킴으로써 인간의 듣기능력을 “퇴행적”으로 고착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한 마디로 아우라의 파괴가 자본주의하에서는 진보가 아니라 진보의 왜곡으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벤야민이 그 논문에서 제시한 대부분의 견해는 오늘날 아도르노의 지적대로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텍스트는 아직까지도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과 그것의 미래에 대한 담론에서 여전히 전범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내세운 개별명제들은 모두 폐기되었으나, 그가 만들어낸 분석틀만큼은 여전히 살아서 이론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미디어론은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가령 귄터 안더스의 미디어론 역시 현상의 분석을 위해 벤야민의 패러다임을 빌어다 쓰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매체의 잠재력에 대해서 그는 아도르노처럼 대단히 비관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세계, 방안으로 들어오다  

“마치 물이나 가스나 전기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손동작 하나에 의해 멀리서부터 우리들 집으로 와서 우리들에게 시중을 들 듯이, 우리는 조그만 손동작 하나로 하나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는 곧 또다시 사라져버리는 그런 영상이나 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이 인용하는 발레리의 말이다. 벤야민은 조금 성급하게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영상을 보여주는 영화예술에서 이 예언의 실현을 보았다. 물론 우리에게 발레리의 말은 인터넷의 예언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1950년대를 살았던 귄터 안더스에게 “그런 영상이나 소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였다. “하나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 곧 또 다시 사라져버리”게 하는 그 “조그만 손동작”은 우리에게는 마우스 클릭을 의미하겠지만, 그에게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고 끄는 동작을 의미했다. 발레리가 말한 것처럼 영상이나 소리가 마치 물이나 가스처럼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렇게 전기나 가스를 끌어오듯이 이미지를 집안으로 끌어오는 것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을 통해 가능해졌다. 즉 “수상기의 대량생산을 통해 집단적 소비가 불필요”해졌던 것이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집단적으로 관람을 하나,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굳이 집단을 이룰 필요가 없다. 집안에 수상기가 들여놓으면 언제라도 수돗물이나 전기를 쓰듯이 영상을 소비할 수 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함께 새로 등장한 새로운 관객은 가족이다. 가족은 ‘미니 관객'(Publikum en miniature)이 되고, 가정은 점점 더 조그만 극장의 모습을 닮아간다. 텔레비전은 가족들 사이의 시선의 교환을 앗아가고, 그들 사이의 대화마저 앗아간다. 이제는 텔레비전은 가족을 구성하는 원리가 되어, 이제 그것을 틀어놓지 않으면 가족끼리도 같이 있는 것이 서먹서먹해질 정도가 된다.

오늘날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시청자는 돈을 주고 영상과 소리를 사는 이미지의 소비자다. 그들은 영상을 집에서 개인적으로 소비한다. 오늘날 영상의 “대중적 소비”는 이렇게 “유아론적”으로 이루어진다. 유아론적 소비자는 집안으로 들어온 현실의 조각을 소비하는 가운데 “관념론자”가 된다. “세계는 더 이상 우리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외부세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속류 관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이나 우리의 뇌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총체가 되어버린다. 즉 “나의” 세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나는 형상의 형태로 방안에서 소유할 수 있다. 그 세계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세계, 내가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세계다. 그 세계를 갖기 위해 나는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렇게 “세계”라는 말에 “나의”, “너의”, “그의”와 같은  소유격이 붙을 때, 그 세계는 관념이 아닌 관념이 된다. 그것은 머릿속의 주관적 관념이 아니라 환영, 즉 머리 밖에 형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관념이다.

펜텀으로서의 세계

텔레비전 매체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전통적 대립을 무너뜨린다. 가령 불타고 있는 쌍둥이 타워를 비추는 CNN의 화면을 보자. 브라운관에 뜬 저 현실은 내 앞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기 어렵다. 지금 나는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쌍둥이 빌딩에는 실제로 지금 불이 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우리 집 안방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아니다. 우리 집에는 화재가 나지 않았고, 그 이전에 쌍둥이 빌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저 영상은 “존재하지도 않고 부재하지도 않는” 사건이다. (S.129) 이렇게 현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를 “사물로서 등장하는 형태”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팬텀이란 마치 진짜 사건이나 사물인양 등장하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이렇게 팬텀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허구이면서 동시에 사실로 등장하는, 그리하여 존재하면서 실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과거에 모상은 원본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nach) 제작되었다. 가령 역사화는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그려진다. 텔레비전의 영상 역시 역사화처럼 원본(原本)의 모상(模像)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영상은 역사화와는 달리 사건의 발생과 모상의 제작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우리 앞에 모상도 아니고 원본도 아닌 형태로 “실시간으로”(synchron) 나타난다. 여기서 원본과 모상의 존재론적 차이는 사라지고, 모상 자체가 현실의 직접성을 가지고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현상한다. 모상, 그것은 곧 현실이다. “삶이 꿈으로 간주되는 곳에서는 꿈이 삶으로 간주되듯이, 모든 현실이 팬텀으로 등장하는 곳에선 모든 팬텀이 현실이 된다.”(S.143)

이처럼 모상이 현실로 여겨지는 곳에서는 구조적 기만의 메카니즘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모상의 진리성은 원본과의 일치 여부에 있다. 그리하여 모상에 대해서 우리는 늘 원본과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모상이 모상으로 여겨지는 한, 우리는 여전히 진리요구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모상이 곧 원본으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진리요구를 할 수가 없다. 텔레비전이라는 도구는 그저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실의 미리 선정된 측면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을 암암리에 미리 내포한다. 가령 얼마 전 CNN은 미국의 테러 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지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비추었다. 그때 카메라는 사건의 본질에서 보여주지 않고 다분히 인종주의적 발언을 했다. 하지만 브라운관 위에서는 정말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환호를 하고 있었다. 누가 이를 거짓말이라 부르겠는가? 이처럼 원본과 모상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상이 원본과 같은 시간에 현실과 똑같은 생생함을 갖고 나타날 때, 거짓말도 곧 생생한 진리로 현상한다.

오늘날 TV 영상은 소비되는 상품으로 제공된다. 백화점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을 보자. 상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상품을 ‘x’ 라고 하자. 그 ‘x’ 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듯이 보인다. 즉 그것은 아직 술어가 달리지 않은 주어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가? 실은 그렇지 않다.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화자찬인 것이다. 즉 상품 ‘x’ 는 인간들이 술어를 붙여야 할 주어에 불과한 게 아니라 이미 자체 내에 술어를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존재 안에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판단은 의식되지 않는 상태로 소비자에게 강요된다. 소비자는 상품이 스스로 내린 그 판단을 마치 자기가 주체적으로 내린 판단인 양 착각을 하게 된다. TV 영상이라는 상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소비자로 하여금 점점 더 이 이미 내려진 판단에 의존하게 만들고, 나아가 이 의존성을 꿰뚫어 볼 가능성조차 앗아간다.

대중, 유아론적 관념론자

텔레비전은 팬텀의 세계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낸다. 이를 안더스는 “은둔자 대중”(Massen-Eremiten)이라 부른다. 가령 외부환경과의 일체의 접촉을 끊고 집에서 TV나 비디오를 보며 지내는 일본의 ‘오다꾸’ 혹은 최근의 예로 인터넷 중독자를 생각해 보라. 사실 TV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은둔자 대중”, 즉 일종의 ‘오다꾸’다. 벤야민에게 영화 대중이 잠재적인 민주적 집단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안더스에게 이런 기대는 “비정치적인 영역으로의 민주주의의 무의미한 확장”일 뿐이다. TV 대중은 그저 뿔뿔히 흩어져 자기 집안의 감옥에 틀어박혀 자기만의 세계를 소비하는 세속적 수도승일 뿐이다. 설혹 “라디오 수신기와 텔레비전 수상기가 세계를 향한 창을 열어 줄지는 모르나, 그것은 동시에 세계의 소비자를 ‘관념론자’로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관념론자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환영의 세계다. 그것은 세계가 아닌 세계, 현실이 아닌 현실이다.

벤야민은 말한다. “영화가 등장함에 따라 이러한 감옥의 세계가 10분의 1초의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됨으로써 우리는 사방으로 흩어진 감옥세계의 파편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모험에 가득찬 여행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를 ‘인터넷 서핑’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를 상찬하기 위해 우리 역시 이와 똑같은 수사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전달해주는 파편적 영상들 사이를 여행할 때 우리는 실은 결코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독일어에서 ‘배우다, 경험하다’는 말(erfahren)에는 ‘(자동차나 마차를 타고) 떠나다'(fahren)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따라서 텔레비전이 우리 안방에 배달해주는 세계의 조각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모험에 가득찬 여행”을 하는 것이 실은 진짜로 여행하는 것(fahren)이 아니라면, 그 여행을 통해서 우리가 외부세계를 경험(erfahren)하는 것도 실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데카르트는 <제2성찰>에서 인간의 정신은 몸과 달라서 분할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뜨게질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신문을 보거나 혹은 그 밖의 일을 한다. 텔레비전을 볼 때에 인간의 영혼은 분열되고, 그의 몸은 이렇게 파편화한 행동의 집산으로 전락한다. 벤야민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산만한” 지각이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관조와 집중보다 진보적이라고 보았지만, 때로 산만함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떨어뜨리는 산만함에 불과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인간은 자신을 ‘대중-인간’으로 전화시킨다. 아도르노가 대량복제된 음반이 진정한 듣기의 능력을 퇴화시킨다고 본 것처럼, 안더스에게도 텔레비전이 매개하는 지각은 감각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의 지각은 더 이상 그리스적 의미의 ‘시각’도 아니고 헤브라이 전통의 ‘청각’도 아니고, 그저 ‘먹는 것’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인간은 엄마가 떠서 입안에 넣어주는 밥을 먹는 어린아이가 된다. 한 마디로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정신적 ‘구강기’로 퇴행하는 것이다.

이 어린이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텔레비전은 부지런히 현실의 파편들을 방안으로 배달한다. 아이의 입맛을 맞추려면 날로 새로운 그림, 더욱 더 충격적인 그림, 한 마디로 센세이셔널한 그림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세계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노출증 환자로 전락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세계의 볼거리를 훔쳐보는 절시증 환자, 관음증 환자가 된다. 최근 몇몇 나라에서 유행하는 ‘리얼리티 쇼우’란 실은 텔레비전 자체에 내재한 이 노출증과 절시증의 결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사물의 권위

텔레비전은 이상하게 친숙감을 만들어낸다. 연속극에 나오는 저 여배우는 개인적으로 본 적이 전혀 없어도, 이상하게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게 느껴진다. 텔레비전 스타들에 대해 팬들이 느끼는 친밀감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전혀 친분 관계가 없는 사람의 사생활까지 꿰고 스타들을 마치 자기의 가족이나 친구나 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리하여 그들의 불행을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그들의 기쁨을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그들에 대한 공격을 마치 자기에 대한 모욕인양 느낀다. 하지만 현실의 스타는 어떠한가? 실제로 그들은 모든 면에서 대중들과 너무나 먼 곳에 있다. 스타의 신분은 비루한 대중들과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 그들의 세계는 대중에게는 전혀 낯선 세계이고, 그 세계로부터 대중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외를 대중들은 소외로 느끼지를 않는다. 텔레비전은 이렇게 먼 것을 가깝게 함으로써 “소외를 친숙화”한다.

텔레비전은 또한 수용자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지운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텔레비전은 그것을 우리의 안방에 옮겨놓음으로써 가깝거나 먼 사물들 사이의 공간적 차이를 지워버린다. 이때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여지는 사물이나 사건의 고유한 가치는 지워진다. 원래 그 사건은 특정한 장소에 귀속되는 유일한 사건이리라. 하지만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 그 사건은 그 장소에서 풀려나와 대량으로 복제된다. 이로써 여기서 사물들은 고유의 가치, 고유의 의미를 상실하고 “중립화”한다. 이 순간에 벤야민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다.”(<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물이 가진 아우라의 파괴를 벤야민은 진보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귄터 그라스에게 이것은 상찬해야 할 진보적 현상이 아니라 우려해야 할 심각한 사태였다.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개념이다. 귄터 안더스의 견해의 바탕에는 바로 이 아우라의 개념이 깔려 있다. 텔레비전은 아우라를 파괴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말하는 텔레비전 영상의 규정은 정확하게 이 아우라 개념을 뒤집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 영상은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어떤 가까운 것의 반복적인 나타남’이다. 귄터 안더스에게 이는 벤야민에게서와는 달리 “제의적 가치”의 파괴라는 진보적 현상이 아니라 사물의 위기, 나아가 세계의 위기이다.

매트릭스의 세계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텔레비전을 통해 배달되는 세계의 파편들을 마음대로 조립하여 자기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는 마음대로 세계를 껐다가 킬 수가 있다. 이를 통해 그는 팬텀으로 이루어진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결코 그렇지가 않다. 과거에 사람들은 사진이나 영상을 조작함으로써 현실에 반대하여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현실을 수단으로 하여 거짓말을 한다. 과거처럼 “어떻게”만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거짓말을 하는 수단이 된다. 시청자가 세계의 파편들을 조립하여 자기의 세계를 구성하기 전에, 그 세계는 이미 판에 박힌 형태로 그에게 전달된다. 텔레비전이 배달해주는 영상의 파편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총체성으로서 후에 시청자가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선험적 조건”이 된다. 세계는 통채로, 총체성으로 주어진다. 시청자라는 자기 세계의 주인은 실은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계의 수인(囚人)인 셈이다.

“대중-인간에게 세계가 매트릭스의 총체성 속에서 배달될 때, 세계를 대신하여 표상의 총체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세계는 오직 그것이 그(=시청자)에게 각인된다는 의미에서만 “그의 세계”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세계다.” 매트릭스를 생산하는 자의 의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여기서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가 귄터 안더스 미디어론의 디지털 버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팬텀과 매트릭스는 그저 관념적인 현상에 불과한 게 아니다. 벤야민의 복제기술이 예술을 베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예술창작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듯이, 텔레비전은 현실의 팬텀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팬텀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어떤 사건의 사회적, 정치적 중요성을 ‘그것이 텔레비전에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떤 사건의 복제형태가 원본의 형태보다 사회적으로 더 중요할 때, 이때 원본은 복제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제 텔레비전이 현실을 닮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 자체가 텔레비전 속의 가상의 모델에 맞추어 자신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서구의 어느 방송사는 마피아와 계약을 맺고, 그들이 은행을 습격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화면에 담아 방송했다. 그런 예는 우리 나라에도 존재한다. 이번 선거전에서 몸싸움을 벌였던 여야의 운동원이 병원에 입원했다. 물론 진짜로 부상을 당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텔레비전 쇼였다. 귄터 안더스는 팬텀과 매트릭스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매체가 꼭 방송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논문의 말미에서 그는 오늘날 다른 매체들도 다소간 텔레비전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며, 자기 이론을 일반화한다. 실제로 오늘날의 언론은 점차 매트릭스를 닮아가고 있다. 어느 야당의원은 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하는 가운데 각 일간지의 신문을 차례로 들어 보였다. 다음날 모든 신문사의 1면에는 질의를 하는 그 의원이 자기 신문을 들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1. 우리가 세계로 가는 게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세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게으른 소비자가 된다.
2. 세계가 우리에게 오되, 그저 그림으로만 올 때, 그것은 반은 존재하고, 반은 부재하면서 환영과 같은 것이 된다.
3. 우리가 (TV를 통해 배달되는) 세계를 언제라도 인용할 수 있을 때 (설사 지배까지는 하지 못해도, 적어도 키거나 끌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적인 힘의 소유자가 된다.
4. 세계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우리가 세계에 말을 걸 수는 없을 때, 우리는 벙어리가 되도록, 말하자면 자유롭지 못하도록 심판을 받는다.
5. 우리가 세계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하지만 거기에 작용을 가하지 못하고 오직 듣기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엿듣는 자 혹은 관음증 환자가 된다.
6. 특정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중계가 되고 “방송”으로 다른 모든 장소에 전송될 수 있을 때, 그 사건은 거의 모든 곳에 편재하는 상품이 되고, 개별화 원리로서의 자기의 공간적 위치를 상실한다.
7. 그 사건이 운반가능하여 수많은 복제들로 등장할 때, 그것은 대상의 성격상 대량생산된 물건이 된다. 그 대량생산품의 배달될 때 대가가 지불될 때, 그 사건은 상품이 된다. 8. 그 사건이 복제의 형태 속에서, 말하자면 그림으로서 비로소 중요하게 여겨질 때, 존재와 가상, 현실과 그림 사이의 차이는 사라진다.
9. 그 사건이 원본의 형태보다 복제된 상태에서 사회적으로 더 큰 중요성을 띨 때, 원본은 복제를 닮아가고, 사건은 그것의 복제의 매트릭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10. 지배적인 세계체험이 그런 대량 복제에 가까워질 때, (우리가 “세계”라는 말로써, 그 안에 우리가 들어가 사는 그것을 의미하는 한) “세계”의 개념은 폐기된다. 세계는 사라지고, 방송을 통해 생성된 인간의 태도는 “관념론적”으로 된다. (S.111)

이제까지의 얘기를 귄터 안더스는 이렇게 요약한다. 현대의 호러비전이다. 이 사태의 끔찍함을 히틀러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한 문장 안에 요약한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세계다.
그가 꾸는 꿈이 곧 우리의 세계라고 한다. 우리를 가둔 이 거대한 매트릭스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누구일까? 알 수 없다. 20년 전 기독교를 가장한 공산주의자로 보도되었던 ‘도시산업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그때 시민들은 공안당국이 꾼 꿈을 현실로 알고 살아야 했다. 그때 신문과 방송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던 어느 목사는 지금도 TV의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오직 연속극만 본다고 했다. 왜? “드라마는 허구라는 게 분명하니까. 현실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뉴스는……”

물론 오늘날 이렇게 뻔뻔한 조작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텔레비전의 속성이 변하겠는가? 오늘날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표상을 세계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누구의 표상일까? 나는 누구의 꿈을 살고 있는 것일까? 벤야민의 유토피아가 귄터 안더스의 디스토피아가 되었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디스토피아일까? 벤야민의 유토피아와 안더스의 디스토피아는 어쩌면 미디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G nter Anders, ‘Die Welt als Phantom und Matrize’ in : Die Antiquiertheit des Menschen Bd. I, M nchen 1956
Walter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1936),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Frankfurt a.M. 1974
Konrad Paul Liessmann, Philosophie der Modernen Kunst, Wien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