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각본 : 장 피에르 주네

출연 : 오드리 토투, 마티유 카소비츠, 도미니크 피뇽

‘아멜리에’는 인간의 자폐성을 확대하여 판타지를 만들고 인간의 엉뚱함과 설레임을 확대하여 소통과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주네의 세계에서 자폐성이 비정상적이지 않은 만큼 –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현실의 우리에게도 차라리 ‘당연한’ 상황이다 – 아멜리의 요상한 ‘작전’은 전혀 회괴하지 않다.

온갖 우연은 필연이 되며 개별 인간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이 판타지라는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다루어진다.

이 영화를 통해 주네의 이해되지 못할 판타지는 대중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의 메세지가 이제 긍정성을 띄는 만큼 우리가 그에게 바라는 달콤한 사탕의 개수는 늘어날 것이다.

아멜리가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 그녀에 대해 더 사랑스러운 행동들을 기대하듯이.

주네의 세계가 이제 납득이 간다는 듯이 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 달라는 요구를 해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네의 세계는 아직도 우리의 일그러진 어두움이 고스란히 베어 나오는 공간이다.

(나는 이 어두움이 간직된 아멜리를 단지 비범한 개성으로만 파악해 버릴 것이 걱정된다)

더욱더 어두운 공간으로 침잠할 수 없을지라도 그의 감성이 이 암흑을 간직한다면, 뭇 사람들의 요구로 쉽게 밝은 빛을 말해 버리지만 않는다면…

만인에게 드러난 아멜리를 아직은 사랑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것, 죽어 있지만 살아있는 것
     

        

    김인규는 죽어 있는 것을 살려내면서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죽이면서 죽어있음을 경고한다
     

        

    무섭고 슬프다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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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http://user.chollian.net/~marishin/politics/h24hour.html 입니다

밤을 식민지화하기
(Colonising the night)
레드페퍼(Red Pepper) 2000년 5월호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

제이 그리피스가 24시간 사회라는 자본주의적 열반의 뿌리를 따져보고, 이것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날 곧 노동자들과 무정부주의자와 이교도의 기념일 메이데이에 이에 반항할 것을 촉구한다.

입맞춤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밀레니엄돔의 놀이지역에 있는 ‘입맞춤’ 놀이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입장객들이 신나거나 – 입맞춤에 열광하거나 – 하면 안되니까, 놀이지역 입구에 우습게도 무표정한 지시사항 팻말이 놓여있다. ‘놀이지역에서 뛰지 마시오. 이용객 앞을 가리지 마시오. 신발끈이 확실히 매여있는지 확인하시오. 전기 의자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시오.’ 그래드그라인드씨가 여기 왔다가 갔다.(Gradgrind woz ere; Gradgrind는 챨스디킨스의 소설 Hard Times의 주인공 이름이고, 주로 냉혹안 자본가의 상징으로 쓰여짐. ‘was here’ 를 발음나는 대로 적은 듯함. 양정언 님께서 알려주신 겁니다.: 옮긴이) 놀이지역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조적으로 노동지역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새로운 노동교를 밀어붙이는 지경까지 가고 있다. 먼저 노동의 판에 박은 문구들이 등장한다. 가짜 햄스터 100마리가 100개의 플라스틱 쳇바퀴에서 움직이고 있고, 9시에서 5시까지를 기록하는 출퇴근 자동기록 장치가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끝장났고 노동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밀레니엄체험 회사의 열성 안내원은 말하면서 ‘선택’과 관련된 ‘새로운’ 노동세계를 어슴푸레하게(‘눈을 번뜩이며’ 라고도 해석될 수 있을듯: 옮긴이) 언급한다. 자신의 작품집을 들고 다니는 전문직, 자유, 유연성. 이 모두가 24시간 사회 때문에 가능해진 것들이다.

24시간 사회를 보급하는 이들은 (정확하게) 두 가지 서로 다른 근대적 삶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달래질 수 없게 되어있는 소비적 갈망이며, 다른 하나는 과도하게 바쁜 사회 깊은 곳에 있는 시간 향수병 곧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없다’ 증상이다.

’24시간 사회’의 저자 리온 크레이츠먼(Leon Kreitzman)과 ‘미래주의자 잡지'(퓨처리스트 매거진)에 글을 쓰는 마이클 헤이거(L Michael Hager) 같은 옹호론자들은 24시간 사회가 물건 구매와 서비스 이용의 오후 5시 마감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을 부드럽게 해주고, 노동의 자유직화 경향에 도움을 주고 ‘영원한 임시직’의 전문직 노동자를 고무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산업연합회(CBI)는 24시간 사회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벌들은 24시간 사회라는 개념을 밀어붙이고 있다. 공간적 영역이 소모되자 그들은 시간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해 밤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Tesco)는 말 그대로 하룻밤만에 몇몇 체인점을 24시간 운영체제로 바꾸면서 경쟁자들을 살그머니 앞질렀다.) 주당 노동시간 제한을 깨면서 ‘선데이 비즈니스’ 신문은 홍보에 열을 올렸다. ‘일요일, 근무의 첫번째 날’이라고. 전문직 노동자 그래드그라인드는 밀레니엄체험 회사에서 일하지 않을 때 교육부에서 부업을 하면서, 5살 어린이에게 숙제를 꼭 부과해야하고 학교를 저녁 늦게까지 운영해야 한다고 자문한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건 말이 안된다.)

크레이츠먼 말대로 라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이’는 영국의 일하는 어머니들이다. 부부가 밖에서 똑같은 시간을 일한다면, 부인은 남편보다 집에서 일주일 평균 9시간을 더 일한다. 잔업이 문제라면, 24시간 사회가 그 답이다.

그렇게 빠르지 않다. 해결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황을 악화하는 것이다. 일하는 어머니를 한번 보자. 하루 종일 직장 일을 한 뒤에 새로 집안일 전체를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아마 하게될 것)이 정말 더 나은가? 남녀의 잔업 형태를 바꿔서 집안 일을 무시무시하게 싫어하는 남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더 건강한가? (시키지도 않는데 설거지를 하는 남성의 모습보다 더 사랑스런 광경은 거의 없다.) 언제 일할지, 일하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최절정기의 전문직 노동자와 자유직 노동자들만 이익을 볼 것이다. 그러나 덜 자리가 잡힌 전문직, 자유직 노동자들은 훨씬 더 끔찍한 경험 곧 언제나 대기해야 하는 운명인 자영업자가 겪는 자신을 갉아먹는 불안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학교를 늦게까지 열라는 압력은 이중적인 교육체계 곧 부유한 아이는 낮에 학교에 가고 가난한 집 아이는 밤에 가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

시간은 언제나 권력의 활동 중심이며, ‘무정치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24시간 사회야말로 정치적이다. 이 사회는 계급간, 인종간, 성별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24시간 사회는 ‘속박을 제거한다’고 크레이츠먼은 말한다. 무슨 말씀. 이 사회는 한 부류에 속박을 가함으로써 다른 부류의 속박을 없애는 것이다. 24시간 사회 옹호자들은 절대 다수가 부유한 중산층 백인 남성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3교대의 철야근무’ 덕분에 – 직접 또는 간접으로 – 가장 이득을 볼 사람들이지, 자신들이 철야근무를 할 가능성은 가장 적은 이들이다. 시장조사는, ‘시간이 넘치는’ 사람들은 24시간 사회를 반대하는 반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고? 시간이 많은 이들은 돈이 없고 이런 변화로 가장 피해를 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4시간 사회를 반대할 환경 차원의 확고한 이유도 있다. 이 사회는 의도적으로 소비와 낭비를 부추길 것이다. 또 도시인들에게 밤하늘의 별을 볼 권리를 빼앗는 도시의 불빛 공해를 증가시키는 주 요인이다. 24시간 사회는 같은 시간에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공동체의 사회적 결합력을 깨뜨린다.

건강 문제도 있다. 미국과 핀란드의 의사들은 최근에 유방암과 24시간 사회의 인공 광선의 상관 관계를 조사했다. 사람의 몸에는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하도록 맞춰진 복잡한 내부 시계가 있다. 이를 심하게 흔들면, 소화불량 궤양 당뇨병 등에 걸린 가능성이 높고, 정신도 불행해질 여지가 크다. 야근 때문에 인간관계가 파괴될 가능성이 높으며, 야근은 성욕을 감퇴시킨다는 보고서도 있다. 미국의 앞서가는 외환거래자인 마이클 마커스(Michael Marcus)는 1980년대 중반에 자신의 생활 형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매일밤 두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홍콩, 취리히, 런던의 외환시장이 열리는 데 맞춰 상황을 점검해야 했다. (효과? ‘결혼 생활을 파탄냈다.’ 입맞춤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 일을 시작한 이들은 수도승들이었다. 죄처럼 어두운 6세기의 밤은 교회 시계의 노예가 됐다. 530년께 성 베네딕트는 새로운 시간 관리를 주장하고 시간과 인간 본성 통제 수단으로 밤에 종을 치라고 주장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새롭고 아주 강력한 태도를 주창했다. 수도승을 깨운 바로 그 자명종이 그 이후 계속 울리기 시작했고, 마이클 마커스를 밤에 두 시간마다 깨우고 있다. 효과 또한 같다. 20세기의 결혼생활을 망친 바로 그것이, (전복을 시도하고 더럽고 어두운) 섹스가 가장 왕성한 때인 밤의 즐거움을 6세기 사람들에게서 빼앗았다. 종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욕에 반하는 금욕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도구였다. 입맞춤은 ‘문란한 것’이라고 선언됐다.

EP 톰슨(Thompson) 등은 개신교의 시간에 대한 평가 – 시간 엄수, 시간관리, 생산적인 시간 사용 – 를 산업혁명을 이끈 돈벌이 욕심과 연결시켜왔다. 산업혁명의 이 시기야말로 다양한 이념의 특이한 융합 속에서 노동시간이 영원히 바뀐 때다.

이 때 무엇을 잃었나? 보통 사람들의 두르르 말려있고, 사랑스러우며 자연스럽고 탄력이 있으며 다채롭고 농촌적인 시간이 사라졌다. 대신 황량한 공장의 동시성이 자리잡았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하드 타임스(Hard Times)’에 나오는 ‘코크타운(Coketown)’에서는 ‘모든 날이 어제와 똑같고 내일도 차이가 없다. 코크타운에서 시간은 기계처럼 지나간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산업계가 매일 밤낮없이 문을 열면서 낮과 밤의 ‘시간 구분’을 오염시키고 여름과 겨울의 계절적 차이를 없애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항의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시간 착취를 정확하게 예견했다. ’24시간 내내 노동을 전유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고유한 경향이다.’ 1820년대와 1830년대 영국 섬유업계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에 대한 권한을 훔쳐간 공장 문 위의 시계를 부쉈다. 노조는 – 곧 바로 불법화했지만 – 가장 먼저 시간 착취를 문제삼아, 1847년 10시간법을 쟁취했다. 1848년 혁명은 (말하자면) 시간을 중심으로 삼았다. 8시간 노동, 8시간 취침, 8시간 놀이.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1886년 메이데이의 수많은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테스코는 ‘개명(또는 계몽, enlightenment)’과 무슨 관련이 있나? 잠도둑들은 누구인가? 또 24시간 사회는 암묵적인 인종차별과 무슨 관련이 있나?

수요일 새벽 3시. 나와 함께 24시간 운영하는 근처의 테스코 체인점에 가서 상징적인 모양의 네스카페 커피 한 병과 퍼실 세제 한 봉지, 마즈다 전구를 사보자. 빛이 어두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성경에서 테스코까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은 바로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의 ‘어두운 면’을 뿌리깊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밤으로 접어든 (Benighted, ‘미개한’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것은 저주이다. 사탄은 어둠의 왕자이며 빛의 왕자(인 동시에 빛의 원칙)의 도전을 받는다.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밤을 혐오하고 낮의 특권을 확보하고, 어둠을 악마와 연결시켰다. 이는 빛의 신 마즈다를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개 전구의 절묘한 상징 마즈다에 놀랐을 것이다.) 근대의 가장 더러운 정치학은 성차별과 인종주의에 깔려있는 어둠에 대한 빛의 지배와 관련되어 있다. 계몽은 빛, 가시성, 합리성, 남성의 ‘과학’을 존경하며, 여성의 ‘신비’의 어둡고 직관적이며 여성적인 방식을 비방한다. (남성 성기는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로서 빛 속에 서있다. 여성의 질은 사랑스러운 촉촉함과 비밀스런 어둠 속에 겹쳐져 있다.)

서구사회는 인종차별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이런 어둠에 대한 급진적인 혐오를 이용해왔다. 악랄한 비난에 쓰이는 말인 (niger 곧 검정에서 온) 니거 (깜둥이라는 뜻 : 옮긴이) 또는 다키(darkies, 깜둥이라는 뜻 : 옮긴이) 라는 말을 보라. 또 끌어내리는 것은 ‘까맣게 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denigrate’ (검게하다, 모욕하다라는 뜻 : 옮긴이) 같은 말의 과잉을 보라. 게다가 어둡거나 성행위처럼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것은 ‘불결하고’ ‘더러운’ 반면, 깨끗함은 경건함과 성적인 냉담함을 따라 다닌다. (또 퍼실 세제는 더 하얗게 해준다.) 잠은 정치적인 문제이다. 결근보다는 출근(presenteeism, presentee는 받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결근이라는 뜻의 absenteeism과 함께 씀으로써, 임금을 받는 것은 출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중적 의미로 이 표현을 쓴 듯함 : 옮긴이)이 오늘날 노동력의 병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거의 자지 않는 것이 말이다. 또 오전 3시에 네스카페 커피를 사는 것이 말이다. ‘잠도둑들’의 저자 스탠리 코렌은, 우리는 잠을 빼앗기고 있으며 우리가 자는 평균 시간인 7시간30분보다 더 많은 9시간30분에서 10시간은 잠을 자야한다고 했다. 잠은 ‘유약한 이들’ 예를 들어 소녀들을 위한 것이다.

시간의 성정치학에선 강한 남성이 되려면, 몇시간만 잠을 자라고 주장하며 하루종일 여는 슈퍼마켓식 시간을 밀어붙이는 책임을 떠맡은 윈스턴 처칠이나 마거릿 새처(대처)처럼 잠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잠을 제대로 못자면 육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가 줄줄이 이어진다. (새처는 미치지 않았다. 음미해보라.)

야근을 하면 잠자는 흐름이 깨진다. 24시간 사회 옹호자들은 기술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한다. 적절하게도, 인라이튼드 기술(Enlightened Technologies)이라는 회사는 빛을 이용해 생리적 리듬을 다시 맞추는 장치를 써서 ‘잠을 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새벽 3시에 일한다면 이것을 명심하시라. 이 사업은, 당신을 착취해 돈을 버는 다른 사업 때문에 당신이 겪는 잠부족을 이용해 돈벌이하는 것이다. 곱빼기의 마법이라고? 에스프레소 커피 곱빼기로 마시기겠지.

24시간 사회는 한 개념의 대립된 개념 지배를 강화시키는 빛의 가장 심오한 문화정치학을 표현한다. 도시의 자연 지배, 빛의 어둠 지배, 남성의 여성 지배, 백인의 흑인 지배, 법인의 일반인 지배, 노동의 놀이 지배, 부자의 가난한 이 지배, 이익의 자연 지배, 기독교의 토속종교 지배, 깨끗함의 세속 지배를 강화시키는 문화정치학을 말이다.

24시간 시계의 반대는 무엇일까? 입맞춤이다. 24시간 사회의 반대 개념은 무엇인가? 메이데이다. 24시간 사회가 그래드그라인드같은 이들의 세계의 맞바꿀 수 있는 시간을 대표한다면, 메이데이는 달콤하게 특정한 순간 곧 ‘특별한’ 시간을 대표한다. 지구적 기업들은 24시간 사회를 후원하고, 지구적 시위자들은 메이데이를 지지한다.

‘런던 거리 되찾기(Reclaim The Streets in London)’가 낸 책자는 2000년 메이데이가 ‘자본주의에 맞서는 전지구 행동의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세계를 가로질러, 메이데이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다. 메이데이는 국제 노동절로서는 빨갛고, 1886년 처형된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까맣고, 고대 풍요의 메이데이 축제인 벨테인(Beltane) 축제날로서는 푸르다. 이 날은 평범한 사람들의 날이다. 공통의 시간에 한 장소에서 공통의 목적을 이루는 평민들의 날이다. 또 농민들의 반란날이다. 시간 : 오전 11시. 장소 : 런던 의사당 광장.

이 행사의 핵심은 ‘기습적인 씨뿌리기’다. 농민들처럼 ‘삽과 씨앗과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사방팔방에 씨를 뿌리자는 기획이다’. ‘런던 거리 되찾기’의 책자는 ‘저항은 생산적이다’고 주장한다. 모든 씨는 발아한다. 맞다. 벨테인 축제는 이교도 축제 가운데 가장 관능적이고 알몸의 생산력이 왕성한 축제다. 5월제 기둥의 ‘더러운 춤’이 이 관능적인 날의 핵심이다. 퍼실 세제는 금지된다. 선전 책자는 ‘더러워질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그렇다. 정말로 더러워지자. 진짜로 거리에서 성교를 하자. 사랑을 만들지 돈을 만들지 말자. 땅을 갈자. 그렇다. 세속적인 것을 되살리자. 입맞춤은 무질서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이날의 질서다. 바로 ‘그렇다’라고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