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다사다난했던 8월이었다
보름동안 알바를 하고 보름동안 외할머니의 상과 대면해 있었다
죽음도 의지로써 유보할 수 있을까…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강한 정신력으로 병을 이기며 슬하 6남매의 성장을 지켜보고는 기어코 사위, 며느리와 2명씩의 자녀를 포함한 24명의 자손들을 온전히 보고 돌아가셨다
동산병원에서 고통을 호소하시던 할머니가 산소호흡기를 차면서 군에 있는 외손자 한 명을 제외한 23명의 자손들과 외할아버지가 모두 모였고 의사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 했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할머니는 이틀후 새벽에야 돌아가셨다
의사가 최후통보한 그날마저도 이틀을 유보해낸 할머니는 예정된 날에 돌아가시면 미어터지는 동산병원 영안실의 좁은 분향소에서 힘겹게 장을 치렀을 자식들에게 마지막 배려를 하는 듯했다

외할머니는 꼼꼼히도 자식들을 배려하시던 분이었다
손자가 수발 들라치면 할머니는 대소변 가리는 일이 힘듦에도 손자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써 스스로 처리하곤 하셨다
통증의 흔적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시는 모습이 역력한 할머니 앞에서 손자는 미안하고 머쓱함을 참지 못했다
그리 넉넉지 않은 6남매가 틈틈이 할머니께 드린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아뒀던 500만원 남짓으로, 할머니는 생전에 자식들에 대한 마지막 선물로써 김치 냉장고를 똑같이 사주기를 애타게 바랬다 한다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할머니 앞에서 자식들은 애써 그것을 거부했고 할머니께는 할머니 건강을 위해 써야 할 돈이라고 돌려댔다
그 500만원 남짓이 할머니 사후에 문제로 남았다
큰외삼촌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바램이었으며 이 돈은 유산이니 당신의 소원대로 고르게 분배하여 6남매 자식들이 나누기를 바랬고 맏사위인 아버지는 그 돈을 외할아버지의 봉양에 쓰라 하였다
가족회의를 통해 결국은 일부의 돈을 5등분하여 나누고 나머지를 큰외삼촌이 외할아버지 봉양에 쓰기로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장을 치르는 내내 미안함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셨을 게다
6남매 자식들이 유독 어머니인 외할머니에게 각별함을 보이고 외할아버지는 뒤로 밀려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의 병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천석군이라 불리던 집안의 자산을 도박으로 탕진하고 몸 고생, 마음 고생 시키며 힘들게 6남매를 키우게 했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은근히 뇌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원망을 6남매는 외할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씻어내려 노력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매정한 자식들이 아니었으며 사려깊은 외할머니를 보내고 난 이후 가슴에 사무치는 후회를 더이상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밑으로 다섯 명의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먹여 살리느라 고생 많았던 장녀인 어머니에게 외할머니가 당신이 끼시던 금가락지를 남겼다는 말에 울컥 쏟아지는 어머니의 눈물에서 나는 싸하게 저며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결혼 이후로도 단 한번도 여유를 느끼지 못하고 자식들을 남들만큼이라도 키워내려 궁핍과 싸워야 하는 고단한 생활만을 계속하였다
어머니의 희생 아래에서 잘 자라 영화도 즐기고 대학에서 학문이랍시고 편하게 앉아 머리 굴리는 일마저 귀찮다 하는 자식은 언제나 쫓기는 듯 물질에 얽메여 조금의 여유도 보이지 않던 어머니의 어두운 얼굴 앞에다 격려와 감사의 표정을 그리 보이지 않았다
외려 그렇게 당신의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희생하지는 말라며 정치적인 포석마저 깔아놓으려 했다
후레자식도 때로는 잠시나마 부모님을 생각하기는 하는지, 잠시 자성을 해 본다
죄송합니다

요즘은 한창 열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4-24 21:22)


감독 : 곽경택

사람에게 맹세는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리라 다짐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만 영원할 따름. 조오련과 바다거북이를 두고 일없는 내기를 걸던 꼬마 사총사 일당의 든든한 한울타리도 영원할 수 없다. 도대체 우정은 무엇이며 친구는 무엇인지, 그 단어에서 떠오르는 알 수 없는 든든함을 허무는 것은 무엇인지 이 영화는 말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다. 준석과 동수를 축으로 그들과 다른 세상에서 관망하는 아니 그보다는 그들의 삶에 조금은 발을 담근 상택의 나레이션으로 풀어내는 친구 단상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찡하지도 않았고 공허감마저 느껴진다. 사시미 담그는 소리에 소름 돋는 움찔함의 감각만이 남는다.

우선 든든한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그들을 제압하는 현실인 것 같다. 아버지를 부정하려 하나 끝까지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꿇은 삶을 사는 준석과 동수는 아버지로부터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결핍과 억압의 굴레를 고스란히 안고 서로 갈등한다. 그들의 우정이 무너지는 것은 이러한 아버지의 윤리가 우스꽝스러운 작태로 나타나는 깡패 세계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이며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습득하면서부터이다. 부정의 의지는 있으나 끝내 이겨낼 수 없는 대상, 그것에 굴복한 나약함을 애써 감추려는 것이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깡패 친구들의 강인한 외면이다.(상택에게서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나 두려움의 징후를 찾을 수 없다. 차라리 그는 잘 길들여진 순종적인 아들이다. 준석이 상택의 삶을 동경함이 아버지가 가리키는 길로 군말없이 잘 따라가는 천성이나 순종할 수 있는 아버지를 갖추고 있음에 있다면 상택이 그들의 삶에 대한 화자가 되는 것은 탐탁치 못할 뿐더러 가능치도 않은 얘기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한 남자들의 세계의 이 무뚝뚝하고 짜세잡힌 면면에서 무언가 뜨거운 친근감을 이끌어낼 이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럼 든든한 울타리를 엮어 내는 질료는 무엇인가. 그들 사총사의 우정은 어떤 내용인가. 나는 그것의 정체를 찾을 수 없는 모호함을 느낀다. 어릴 적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던 육질의 정감 말고 그들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그것만이 시원이자 기반으로 내세워질 뿐 서로간의 소통에서는 실패한 사이가 아닌가. 어머니의 자궁 같은 저 먼 기억의 푸근함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도 현재의 너와 나 사이에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야’ 따위의 대사는 일상 언어에서 가장 닭살돋는 말 중의 하나이다. 그 말은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영원불멸하게 친구로서 고정시켜 버리는 악수이다. 이 고정된 상태에서 더이상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은 없다) 상택에 대한 준석의, 준석에 대한 동수의 일방향적인 컴플렉스가 극복될 기회를 놓쳐 버린 이들 사총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애석함 뿐이다. 이 애석함을 곱씹을 겨를 없이 교복과 사투리, 흑백 사진 같은 70년대로 치장해 버리고는 곧바로 사시미질을 해대는 통에 이 영화에서 제목의 의미를 드러내 줄 주제어가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화해는 나 자신의 수줍은 노력에서 시작되듯이 우정은 나 자신의 힘겹지만 진지한 대화의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대화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나와 너 사이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언제나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 중에 있어야 친구이며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서 나와 충돌하고 있는 사람이다…뭔소리 하는 거여…졸려서 원…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