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95년 2학기 서강대 이정우 교수가 강의한 현대프랑스철학 중 푸코부분을 역시 그가 번역하고 해설을 한 < 담론의 질서> (새물결)로 보완해서 정리한 노트입니다.moraz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 푸코 철학의 특징

푸코의 철학은 동성애 성향을 지닌 자신의 삶의 문제의식을 투영한 것으로서 타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느 사회에든지 사물을 나누는 체계(system)가 존재하는데 그 체계에서 타인으로 분류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즉 남과 여의 구분처럼 객관적으로 나눠지는 세계가 있는 반면에 한편 성인(20세 이상), 범죄자(또는 합법성), 광기 등과 같이 비객관적 기준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푸코는 바로 이러한 비객관적 기준–즉 그러한 분류체계, 가치체계의 근원과 역할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푸코는 전통철학에서 다루지 않던 대상을 다룸으로써 파격적인 새로운 철학을 개척한다. 그 대상은 ‘존재론적 분절’의 문제이다. 모든 가치체계는 항상 동일자와 타자를 구분한다. 예를 들어 정상인이 있으면 정신병자가 있고, 선한 자가 있으면 악한 자가 있다. 전자는 대우를 받는 반면, 후자는 멸시 받고 소외된다. 푸코는 이러한 ‘존재론적 분절’을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는 타자의 문제를 철학화한다.^1) 즉 문학적 방식이 아닌 철학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따라서 푸코의 철학은 그 대상에 있어서 파격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엄밀함을 갖추고 있다. 푸코의 철학은 어떤 담론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가능성의 조건을 드러내는 철학, 다시 말해 ‘선험철학’이다. 칸트(I. Kant)는 의식의 구조를 다룸으로써 인식이 가능한 조건(선험적 주관)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가 다룬 의식이란 곧 시공을 초월한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의식을 말하며 따라서 칸트의 철학은 총체론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푸코는 실제의 역사 속에서 변해가는 담론의 조건을 다루는 개별적 접근 방식을 취한다. 즉 그는 특정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조건을 다루는 것이며 이는 그를 철학자인 동시에 역사학자이게끔 만든다.^2)

푸코의 철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바슐라르(G. Bachelard) 등의 프랑스 인식론의 메타과학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메타과학들이 그러한 것처럼 ‘타자의 논리’를 만들어낸 지식들의 밑바탕을 다룬다. 다시 말해 타자의 존재론이 지식의 인식론의 변형되어서 다루어진다. 타자는 담론분석이라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다뤄지는 것이다.

2. {고전시대의 광기의 역사}

담론의 기본적인 성립요건은 ‘대상의 존재’와 ‘대상의 정의,’ 이 두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과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신의학.병리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이라는 대상이 존재해야만 한다. 즉 ‘정신이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정의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광기란 그것 자체로서는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상인과 비정상인(광인)은 다른 세계에 살기 때문에 정상인이 광기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광인에 대한 정의는 정상인에 대한 정의로부터 파생된다. 즉 ‘광인은 A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인은 B’이고 ‘광인은 B가 아니다’라고 정의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고전시대에 신흥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인 합리성으로부터 먼 사람들은 광인으로 분류되었으며 감호소에 수용된다. 따라서 이 고전시대의 감호소는 동질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보통의 공간(야구장에는 야구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고 수영장에는 수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과 달리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 혼재공간이었다. 한편 이 감호소는 오늘날의 병원과 달랐으며 의사는 의사라기 보다는 행정감독관이며 사제였다.

광기는 시대가 바뀌면서 죄의 범주가 아니라 병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즉 광기는 새로운 대상으로서 등장했으며, 이 새로운 대상의 등장은 정신의학을 탄생시킨다. 서구의 근대사는 이렇게 새로운 담론들이 계속 생겨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 사회에서는 새로운 대상들(새로운 나눔의 선들)이 계속 창출되어 온 것이다.

정신의학의 탄생은 담론이 하나의 지배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에는 폭력이 지배의 주요한 수단이었다면 근대는 담론이 인간 지배의 주요 수단이다. 예를 들어 정신의학에서 히스테리에 관한 논의는 그 본질을 정의하는데 목적이 있다기 보다 그 히스테리를 가진 자들을 인간 사회에서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느냐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기독교 문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비밀을 끄집어 내는 기술인 고백의 문화이다.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는 그 교구의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푸코는 정신분석학이 기독교의 고백문화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푸코에 따르면 지식과 권력이 결탁하는 현대 사회는 훈육(discipline)의 사회이다. 정보는 지배에 필수적이다. 정보가 없이는 분별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지배가 불가능하다. 또한 정보에 대한 갈구에는 지배욕이 숨어 있다. 심지어 정의, 박애, 평등 등 근대적 가치와 담론도 인간과 사회를 정교히 지배하기 위한 음모라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며 이것은 그의 근대 인간관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다.

3. 에피스테메(episteme): 담론 형성 조건들의 집합

1) 근대적 인간관의 비판

{임상의학의 탄생}은 19세기초의 임상의학이라는 담론이 어떤 에피스테메를 가지고 등장했는지를 보여주며 {말과 사물}은 생물학, 언어학, 경제학, 이 세가지 인간과학의 고전시대(18세기)로부터 근대(19세기)에 걸친 변화를 인식론적으로 다루면서 인간 주체의 문제를 형이상학적으로 다룬다. 이 두 저작을 꿰뚫고 있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사물의 표면과 시각을 일대일로 대응되게끔 분류하려는 것이 17, 18세기 고전시대(l’age classique)의 과학(생물학, 언어학, 경제학)의 야망이었다. 즉 사물의 가시적 모습과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관념간의 일대일 대응을 추구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분류표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생물학은 계통학을, 언어학은 일반문법을, 경제학은 부의 분석을 다룬다. 따라서 이 시대의 과학은 공간적이고 비역사적이며 표면적이고 계통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의 과학은 사물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생물학은 해부학을, 언어학은 언어사를, 경제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메커니즘을 다루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과학은 전 시대와 달리 시간적이고 내면적이며 역사학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 1부에서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이란 그림을 분석한다. 화가는 그가 그린 그림속에 들어가 있고 거울속에 비춰서 나타나는 왕과 왕비는 화가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즉 그림을 그리는 주체, 모델, 그림의 시선이 모두 한 그림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과 분리되어 대상을 파악하는 선험적 주체의 개념이 고전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한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적인 섬험적 주체, 즉 근대인의 개념은 근대라는 시대와 그에 따른 담론과의 관련속에서 등장했다. ‘주체’ 개념의 등장과 그에 따른 주관주의 철학의 등장은 그전까지는 없었던 19세기적 사건이다.

앞에도 언급했듯이 고전시대는 사물, 기호, 관념의 일대일 대응을 추구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하얀색의 사물은 하얀색이라는 말과 그것에 대한 관념과 대응한다는 진리상응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즉 인식론적 정초를 마련하기 ‘사물-관념(인간)’간의 대응관계를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뉴튼(I. Newton)의 역학은 사물들의 관계의 질서를 발견한 반면 흄(D. Hume)의 관념 분석 철학은 관념들의 관계에 아무런 보편성이나, 필연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해 내어 사물과 관념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일어나 일대일 대응의 논리는 부정되게 된다. 칸트는 인간과 사물의 대응을 환상이라고 보고 우리가 사물안의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인간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정신의 질서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제 주관과 객관은 연결될 필요가 없다. 칸트에 의해, 뉴튼에 있어서의 사물의 질서와 흄에 있어서의 감각의 다발(bundle of impression)로서의 우리의 의식은, 구조화되고 질서지워진 의식으로 통합된다.

푸코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주체로서의 인간관에서 벗어나자는 것으로 이미 구조주의에서 주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 타자의 논리, 그리고 인식론적 차원을 고려함으로써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나 라캉(J. Lacan)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칸트가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을 종식시키고, 대신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을 구축하였다면 구조주의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 푸코의 서구 담론사를 통해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을 종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객관성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3) 인간이 장을 형성한다는 것은 환상이며, 오히려 인간은 장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만약 인간이 이 장속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면 그 장을 인식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장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그 장으로부터 일정정도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완전한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성은 주관성을, 주관성은 객관성을 매개할 수 밖에없으며 따라서 구조주의의 무시간성은 거부되고 역사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후기 구조주의는 이렇게 구조주의가 무시하는 역사성, 권력, 욕망을 어떻게 비전통적 방법으로 다룰 수 있을까를 주제로 삼고 있다.

2) 푸코의 언어철학: {지식의 고고학}

권력은 담론을 통해 작용하고 담론은 권력을 통해 비담론과 접촉한다. 특히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푸코의 언어철학은 명제화된 고급 언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일상언어나, 전통적 인식론이 다룬 언어영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도 않다. 푸코는 그 중간에 초점을 둔다. 왜냐하면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결탁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는 어중간한 과학들, 다시 말해 담론에서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공모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차원의 언어, 사회를 규율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로 하는 담론들, 예를 들어 신문의 논설, 정치가의 연설, 범죄학, 정신 의학 등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또한 푸코는 담론을 이루는 언표에 관심을 둔다. 언표는 명제나 파롤이 아니라 그 영역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푸코의 언표이론의 뼈대는, 인간사회에는 담론이 형성되는 규칙성이 있다는 것이다.

언표란 규정성이 부여되기 이전, 코드화 되기 이전의 언어, 다시 말해 형상이 부여되기 이전의 질료상태의 언어를 말한다. 음악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이해가 편하다. 이 세상에는서 가능한 모든 소리들의 집합은 음악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형성한다. 이 중에서 듣기 싫지 않는 소리를 코드화, 다시 말해 소리에 규정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차례로 옥타브나, 화음, 멜로디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코드화를 통해 생성된 가능성의 장들은 음악을 형성한다. 언표도 마찬가지다. 언표에 어떤 규정성이 부여되면 그것은 각각의 담론을 이룬다. 문법적 코드화를 통해 문법을, 과학적 코드화를 통해 과학적 담론을, 시적 코드화를 통해 시적 담론을 형성한다.

과거의 인식론에서 다룬 언어들은 깨끗이 정화된, 진위의 검증이 가능한 명제들 뿐이었다. 즉 당시 언표에 부여된 규정성은 수학적, 과학적 규정성으로 무척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푸코는 그러한 규정성이 부여되기 이전의 언표, 다시 말해 문화, 사회, 권력이 복잡하게 얽혀진, 정화되기 이전의 언어에 관심을 가진다. 푸코의 관심영역은 언어로 다듬어지기 이전에 존재하는 경험세계로부터 정제된 이론까지의 사이에 존재하는 언표 수준의 코드화의 규칙성이다. 푸코에 따르면 경험이 이론화되는 과정을 통제하는 어떤 법칙과 규칙성이 있다. 예를 들어, 사과를 검은 색으로 표시하는 것은 미술적 담론에서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생물학적 담론에서는 그런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사과, 즉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담론이 여러가지 있다는 것은 곧 경험을 이론화 하는데 있어 여러가지 상이한 다른 법칙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규칙성에는 네가지가 있다. 이것은 언표의 조건을 이루는 장이다. 첫째, 담론, 언표는 비담론, 비언표와 여러 상관관계 (correlation)를 갖는다. 예를 들어 만약 “황금산은 캘리포니아에 있다”라는 말이 틀렸다면 그것은 그 지시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이 말을 지시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상관관계 속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공상과학소설의 맥락에서 이 말은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푸코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언어철학은 특정한 상관관계를 전제하고서 그렇지 않은 언어는 문의미하다고 판단해왔다. 이렇게 푸코는 그것을 무조건 무의미하다고 하지 말고 그 언어적 표현이 어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가 살필 것을 제안한다.

둘째, 어떤 언표든지 주체의 위치(position of subject)를 점하고 있다. 모든 말은 그 말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없는 주체를 전제한다. 언어는 그 발화 주체와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상구 박사의 건강에 대한 담론은 누구나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그가 인간의 신체관련 담론에 대해 권위가 있는 의사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것이다.

셋째, 언표와 담론은 고립된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공간(correlated space)이 있다. 주체가 어떤 말을 하려면 어떤 언어적 공간에 자리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표와 담론은 언표, 담론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장에서 형성된다. 예를 들어, 경상대에 속해 있는 서강대 경제학과의 담론과 사회과학대에 속해 있는 서울대 경제학과의 담론은 다르다.

넷째, 언표는 물질성(materiality)의 장속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물질이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물질, 다시 말해 ‘물질적(경제적) 생활’이라고 할 때의 그 물질이다. 예를 들어 책은 출판기술의 제약을 받고 팜플렛은 정치적 제도의 제약을 받는다. 언표는 정제된 것이 아니라, 권력과 특정한 목적 속에서 생성, 소멸, 매매되는 것이다.

언표는 앞서 말했듯이 가능성의 장으로서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여러가지 담론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 담론을 이루는 명제는 지칭이라는 비언표, 학자, 과학자라는 주체, 논문이라는 공간, 출판 및 매매라는 물질적 장과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 인식론이 집착한 수준의 언어이다. 그러나 푸코는 그 이전의 갖가지 가능성을 살펴 볼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스승과 제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관한 어떤 윤리학적 담론(그 관계가 x라고 하는)이 ‘가’ 시대에 존재한다면, 그 시대 이전의 그 가능성의 공간을 살펴 보는 것이다. 또한 ‘나’ 시대의 변화된 코드화를 살펴 봄으로서 ‘가’와 ‘나’ 시대의 간극을 살펴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왜 하필 언표가 x로, y로 코드화가 되어 그러한 담론이 되었을까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가능성의 공간 가. 스승-x-제자 나. 스승-y-제자

:

w

스승-x-제자

y

z

:

이러한 탐색은 푸코의 지식의 차이에 대한 정적인 고고학적 연구가 결국 권력에 관한 동적인 계보학으로 나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가’와 ‘나’ 시대의 윤리학적 담론에 생기는 차이의 동인은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4. {성의 역사}

푸코의 전기철학은 인간을 주관주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바라 본 것이었다. 즉 주체, 세계가 모두 담론의 장안에 흡수되는 범언어주의적 양상을 띠고 있었다. 반면 그의 후기철학에서는 ‘경험’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미 ‘주체’를 전제하고 있는 개념으로서 푸코가 담론의 장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인간을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권력, 담론, 주체가 비로소 균형을 잡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신체가 권력의 시발점인 동시에 저항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신체는 주체화의 시발점이다. 사람은 신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때문이다. 신체는 바로 역사의 주동력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이익인 것이다. 푸코의 주체화 분석의 뼈대는 네가지이다. 첫째, 윤리의 실체(대상)에 따라 역사속에서 다르게 주체화가 이루어진다. 그리스인들에게 주체화의 대상은 곧 쾌락이었다. 둘째, 윤리는 규칙을 전제한다. 즉 나 자신의 주체화를 위해서는 관습, 법, 규율, 규범, 도덕등의 틀과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셋째, 한없는 쾌락은 고통과 자기 파괴를 가져오므로 절제의 기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주체의 행동은 일련의 행위들의 목적론적 계열들 속에서 고유한 완성을 지향해야 한다.

1) 존재론적 분절의 문제는 그 이전에는 주로 문학.종교에서 다루어졌다. 예를 들어 종교의 경우에 불교와 기독교는 약자의 구원을 목표로 하였고, 문학의 경우엔 19세기 이후에 카프카(Kafka)나 도스토예프스키(Dostoyevsky)등이 폭력, 광기, 감성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2) 역사학계에서 푸코는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한 변형으로 다뤄진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8)

감독 : 정지영

출연 : 독고영재, 최민수

 현실이라는 대척점을 벗으로 삼지 않은 이상 속에서 한 인간이 파멸하는 과정은 끔찍하지만 슬프다.

 명길과 현숙이 병석을 떠나지 못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현실의 반대편을 병석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병석이 악마인 이유는 병석이 현실과 가상이라는 두 축 사이의 균형을 너무나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강한 빛은 강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듯이 참혹한 현실은 더욱더 찬란한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빛이 꺼져 버리면 그림자도 소멸하듯이 이상은 현실에서 발을 땔 때 자연히 소멸한다.

 그것은 죄악일 것이나 나약한 인간의 슬픈 운명일 수도 있다.

 비참의 한가운데서 영화가 선물하는 가상의 상찬에 메달리는 병석을 쉽게 비난할 수 없듯이. 악마임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듯이.

 그나저나 나는 시네필이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병석 일당만큼도 영화를 모른다.

김규항씨 ‘B급 좌파’ 펴내…

 

보수란 사상이 아닌 욕망일뿐

김규항은 ‘글잡이’다. 그는 글을 ‘칼’처럼 쓴다. 그의 글에선 군더더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디 하나 흐리멍덩한 구석없이 숫돌에 갓
갈아낸 칼처럼 날이 서 있다. 그는 칼 대신 글로 세상과 싸운다. 그와 버성긴 ‘세상’이란 “아이에게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세상”이며, “인간이 만든 모든 부끄러운 것들로 가득 찬, 그래서 끝없이 내게 긴장을 선사하는 조국”이다.

그가 지난 3년 동안 영상 주간지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란 칼럼난에 격주 또는 3주에 한 꼭지씩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란 이름으로 묶어냈다. (야간비행 펴냄, 1만원) 재생지로 만든 이 책은 잘 마른 짚단처럼 가볍지만, 초심의 긴장은 책장을 다
넘기도록 팽팽한 현처럼 떨고 있다.

그 스스로 고백하듯, <씨네21>의 칼럼을 시작하기 전 그는 다른 글쓰기의 이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의의 습격”처럼
다가온 글쓰기는 그를 “B급 좌파”로 만들었다. 먼저 왜 아직껏 ‘좌파’인지 들어보자.

“보수는 오늘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 극우는 오늘의 이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 쓴다면 모를까,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있는가. 물론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렵다. 왜냐하면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B급’인가. “좌파로 살기로 결심은 했지만, 사회를 요령있고 짜임새있게 설명할 대단한 대안은 없다. 아마 그런 게 가능해야
‘A급’ 좌파일 것이다. 나는 원칙적으로 자본주의에 찬성하지 않는다. 대안이 뭐냐고? 그건 ‘A급’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전근대의 암흑기에 살던 노예와 농노들이 도대체 ‘근대’라는 개벽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혁명의 시대가 거꾸러진 뒤
캄캄한 반동의 세기가 백여 년씩 지속될 때, 사람들은 다시 혁명의 파도가 도래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칼끝은 단호하게 세상을 자른다. 가령 그는 보수와 진보를 이렇게 가른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도 사상인가. 보수 사상이 진보 사상과 대립한다 해서 보수 사상을 진보 사상과 같은 층위에 놓는 일은 터무니없다. 보수란
순수한, 매우 순수한 욕망이다.”

칼날의 단호한 나눔은 더러 경계선상에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 이 ‘B급 좌파’의 칼은 그러나 공정하게도 세상만을 겨누고
있지 않고 스스로의 목젖에도 날을 대고 있다. 그는 한국 지식인의 위선에 대해선 가혹하리만치 무섭게 칼을 들이대지만,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 또한
그 이상으로 매섭다. “배운 사람들은 아마도 실제 필요한 양보다 터무니없이 많은 지식을 갖고 있거나 꼭 필요하지 않은 종류의 지성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나 같은 건달도 아는 그런 소박한 이치를 도저한 지식과 장구한 글쓰기 이력을 가지고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된
사정일까.”

글은 이제 그의 삶의 무기가 됐고, 그의 삶은 자신의 글에 조회하기만 하더라도 싸움에서 한걸음도 물러설 수 없도록 묶였다. 이런 무덕을
갖춘 문사는 옆에 두고 보는 일만으로도 즐겁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