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학기, 한글 맞춤법의 이해라는 전략 교양과목(결과적으로는 최악의 성적이 나왔지만)을 들을 때 메뚝 군은 이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었다.
꿋꿋이 버틴 메뚝 군.
쓸데없는 데 권위와 권력을 과시하는 행태는 보기 싫당…
p.s : 스노우캣 아저씨…이런 누추한 홈페이지에서 저작권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으시겠지…ㅡ.ㅡ;;;
p.s : 스노우캣 아저씨…이런 누추한 홈페이지에서 저작권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으시겠지…ㅡ.ㅡ;;;
뻔한 말이지만, 세상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서점에는 처세술 책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는 살지 마라, 저렇게도 살지 마라, 등등의 충고들로 행간은 빽빽하다. <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처럼 노골적으로 돈 많이 벌자고 부추기는 책들도 있지만 역으로 돈 많이 벌어봐야 헛거고 열심히 살아봐야 자본가들 배만 불리니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아니하고 느리게, 그리고 다르게 살자고 속삭이는 책들도 있다. 후자도 넓게 보자면 처세술 책이다. 결국 ‘사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세술이라는 장르는 자본주의 세상과는 찰떡궁합이다. 봉건시대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처세가 필요치 않다.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농사를, 장인의 자식으로 나면 장인으로, 뭐 그런 식이다. 마을의 대장장이는 처세술보다는 철과 불의 성질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귀족이나 정치계급은 처세나 사교, 혹은 넓은 의미의 정치에 관심이 있었겠으나 그런 사람들이 어디 그걸 책 사보고 배우겠는가.
그렇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선 다르다. 정말이지 자본주의 세상에선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다. 돌잔치 상에서부터 우리는 선택을 강요당하며 그 의무는 대체로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선택 하나하나가 일생에 작게 혹은 크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는 피곤하다. 도대체 어떤 놈을 사귀고 어떤 놈은 잘라야 되는지, 주식은 사야 되는 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 돈을 모아야 되는 건지, 땅을 끼고 있어야 되는 건지, 저 자식이 나한테 개기는데 저걸 밟아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꾹 참고 살면서 성불을 노려봐야 되는 건지, 여하튼 우리 삶은 선택의 지뢰밭이며 그 하나하나가 결코 간단치 않다. 이래서 처세술 책은 잘 팔린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처세술이란 선택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처세술 책을 다 읽어도 선택은 난망이다. 책 밖 세상,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책 속에선 그토록 분명했던 것들이 책을 덮자마자 흐물거리며 불투명한 점액질로 변해 버린다. 책을 읽고 있을 때만 해도 새로운 세계에서 멋지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처세술 책이 기본적으로 단순화, 그리고 유형화라는 논리적 기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세술의 저자들이 제일 먼저 착수하는 일은 세상을 몇 개의 블록으로 구획하는 작업이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 친구와 적, 자산과 부채 등등의 대립항들이 동원된다. 물론 인간 유형도 대략 서너개의 부류로 친절하게 구분해 준다.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될 상황도 아무개형, 아무개형, 아무개형 따위로 나누어 준다. 일단 그렇게 분류해 놓은 뒤에 저자들은 각각의 유형마다 ‘적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대체로 처세술 책에는 ‘그래 이게 바로 나야’라는 인물 유형이 하나쯤은 반드시 있으며 ‘그래 김 부장이 바로 이런 놈이야’라고 무릎을 치게 되는 인물 유형도 빠지지 않는다. 이러니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이 바둑판처럼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쯤에서 독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정도라면 나로서도 해볼 마하지 않을까?” 이 순간 처세술 책은 피로회복제처럼 일시적이고 휘발성 강한 각성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건 진정한 의미의 ‘처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잘 알고 있듯)세상도 처세술 책들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조감도가 아니다.
어쨌든, 피로회복제처럼 소비되는 것. 그게 처세술 책이 계속해서 팔려나가게 되는 원리다. 피로회복제가 피로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듯 처세술 책 역시 궁극적으로 처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팔린다. 성공의 꿈, 생존의 희망, 탈락의 불안을 먹고사는 불가사리. 그게 작음의, 아니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처세술 교본들이다. 그럼 어디에서 인생의 참된 지혜와 올바른 선택의 기술과 깊이있는 인간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어디라고, 자신있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 자가 사기꾼일 것이다. 대신 여전히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릎걸음으로 더듬거리며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정답일 것이며 그게 바로 우리가 멋진 영화와 좋은 책을 찾아 어두운 극장과 서점에서 금쪽 같은 시간을 탕진(?)하는 이유일 터이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8)
다음은 최장집 교수가 정리한 ’98년 조선일보 사상검증 사건’이다.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앞부분 약 A4 1페이지는 대학생에게 보내는 답장이자 서문이고, 이후 7페이지는 논문체를 사용한 최교수의 분석이다. 뒷부분은 모두 9개 단락으로 구성돼 있으며, 최교수는 각 단락마다 모두 번호(1-1·2, 2-1·2·3·4, 3-1·2·3·4)를 붙였다.
이글은 약 한달 전에 작성됐지만 아직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는 최장집 교수와 손승연 씨의 동의를 받아 전문을 최초로 공개한다. — 편집자 주
수신 : 동국대학교 신방과 손승연 君
발신 : 고려대 정외과 교수 최장집
일시 : 2001년 5월 31일
내용 : “조선일보의 최장집 사상검증 사건” 관련 질문에 대하여
손승연 군에게
먼저 이미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되었지만 이른바 “조선일보의 최장집 사상검증 사건”으로 알려진 나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 탐구’의 주제로 삼아준 데 대해 감사하고 싶습니다.
두 개로 이루어진 질문은 ‘사건’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질문 자체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를 제대로 대답하려면 문제의 전체 구조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매우 복잡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시에 두 질문은 그간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의문의 의미로서든 아니면 나에 대한 질타의 의미로서든 직간접적으로 내게 제기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미뤄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질문은 의도했든 안했든 문제의 전체 구조를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아 ‘사건’은 세 차원을 갖습니다.
하나는 조선일보가 나를 공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관련 정치 사회세력들이 반응하고 개입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내가 대응하고 선택한 것입니다. 질문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세 측면 중에서 나의 선택이라고 하는 한 차원에 국한된 것으로, 내 문제를 전체 구조 속에서 객관화하여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한 나의 어떠한 대답도 ‘또 다른 변명’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손군이 학문적 동기로 질문을 했고, 나 역시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의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강의준비 및 논문쓰는 일 등 보다 우선순위를 두어 내가 해야할 여러 일과 이로 인한 시간제약 때문에 지금부터의 나의 답변이 기대만큼의 충분한 내용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손군이 충분히 양해해 주어야 합니다.
시간을 절약하고 문제를 보다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논술체를 사용하겠습니다. 나의 답변이 손군의 연구와 발표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최장집 씀
1-1) 이른바 “조선일보의 최장집 사상검증 사건” (이하 ‘사건’ 혹은 ‘내사건’으로 부르겠음)과 관련하여 손승연군이 제기한 질문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내가 왜 폭력적인 사상공세에 정면으로 당당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사실과 다르다’는 변명의 태도로 대응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일보에 대한 명예훼손소송을 왜 중도에 포기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질문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 전제되어 있다. 즉 조선일보는 나를 이념적으로 색칠하려 하였고, 이에 대해 나는 많은 사회적 지원에 힘입어 일차로 가처분신청에서 승소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반론 및 정정보도, 명예훼손 관련 소송을 통해 조선일보에 더욱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으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도에서 상황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해는 당시에 내가 선택한 방식이 아닌 다른 선택이 가능했고 또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갖는다. 즉 진보적 역사해석을 전면에 드러내고 조선일보에 대해 그것이 왜 문제냐 하는 식의 보다 당당한 자세로 법률적 책임을 끝까지 추궁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1-2) 6 25전쟁을 포함하여 한국현대사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인 측면을 안고있는 것만큼이나 내 사건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복합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복합적인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설사 오늘의 시점에서 하나의 시각이 완벽하고 올바른 듯 보인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한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와 관점들이 변하면서 그에 대한 이해와 해석 또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이 사건의 중심인물 중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성격 때문에 사건은 곧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 사건은 수 많은 사람들이 개입하여 그들 역시 중심적인 행위자로서 역할을 하게됨에 따라 엄밀한 의미에서 ‘내 사건’을 넘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 사건과 관련해 나만이 알고 있는 어떤 비밀이 있다거나, 나의 말만이 진실이고 반드시 꼭 내 말을 들어야 사건을 정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내용이 비판적이든 아니든, 사건에 대한 해석과 정리가 여러 시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2-1) 첫번째 질문은 나의 대응방식과 관련된 것이다. 우선 한국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갖는 언론매체인 조선일보는 한국전쟁에 대한 나의 논문에 대해, “김일성의 남침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단정하여 미제의 식민지인 대한민국을 해방시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으로서 자리매김”, “일관되고 유기적인 반(反)대한민국적 시각”, “수정주의 이론보다 더 친북적이고 좌파적”, “중공군의 개입을 변호”, “대한민국과 국군이 미국의 식민지이고 괴뢰라는 북한식 인식” 등의 내용을 갖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처럼 명백한 사실왜곡과 이념적 ‘색깔칠하기’에 대해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대응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내가 법률적 방식의 대응을 결정했을 때, 초점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규명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일보의 공격을 ‘사실 혹은 이념 왜곡사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 즉 한국전쟁과 한국현대사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수적 해석과 나의 진보적 해석과의 이성적 논쟁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그래야 했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한국전쟁을 접근하는 시각, 조선일보가 내 시각을 문제삼는 방식, 그리고 6 25전쟁과 같은 소재들이 여론에서 다뤄질 때 만들어지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2-2) 한국전쟁은 두 수준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의 한 당사자로서 보는 방법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자들과 공산당이 대적하는 오로지 적(敵)과 아(我)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남북한관계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 증오와 적대의 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아방(我方)을 수호하고 상대를 증오하는 것은 신념이자, 도덕적 정당성이며, 나아가 역사와 현실을 보는 비전이며 이데올로기라 하겠다. 그것은 또한 매우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역사이해의 방법으로서 전쟁에 대한 이해와 교훈을 전쟁의 경험 자체로부터 도출하고, 이 산 경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의 자료로 삼으려한다.
다른 하나의 접근은, 6 25전쟁을 보다 객관화시켜 전쟁경험의 정서적 감정적 응어리로부터 떨어져서(detached) 보는 방법으로, 여기에서 전쟁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 삼촌이 전쟁으로 죽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전쟁에 연결된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객관적 관찰자로서 느끼고 사고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큰 전쟁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학술적 방법이다. 역사에 대한 연구결과나 논문이 그 학자가 어느 편 혹은 어느 편의 이데올로기에 서서 썼느냐를 검열하는 소재로 읽힌다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두번째 방향에서의 전쟁이해는, 증오와 적대를 벗어나 탈냉전과 평화를 위한 역사이해의 방법과 비전을 열어야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자의 냉전반공주의적 역사이해의 방법은 6 25전쟁과 전쟁발발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증오와 적대를 항구화하려는데 관심을 두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과거 1950년의 6 25와 지난날의 냉전에 그 준거를 두는 과거지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후자의 평화지향적 방법은 아픈 상처를 들추기보다는 이해하는 방법, 객관화하는 방법으로 과거를 극복하고 평화와 화해로 남북한관계를 전환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갖는다. 적어도 내가 한국전쟁에 관해 썼던 글의 내용은 이 두 번째의 문제의식을 가진 것이었다.
2-3) 내 사건의 중요한 맥락은 냉전반공주의가 헤게모니를 갖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극우적 해석’이라고 부르는 한국현대사 특히 전쟁과 북한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러한 냉전반공주의 헤게모니의 산물이다.
앞에서 말한 첫 번째 냉전반공주의의 이해방법을 ‘A’라고 하고, 문자그대로 친북적인 어떤 이해 방법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을 ‘Z’라고 하기로 하자. 그러할 때 앞에서 말한 두 번째의 비(非)냉전반공주의적 관점, 또는 객관적인 방법, 또는 평화지향적 혹은 미래지향적 관점 등 무어라고 부르든 그것들은 와 양자(兩者)사이의 광범한 스펙트럼 위에서 ‘B’ ‘C’ ‘D’… 등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가 나를 공격할 때 취했던 극우 냉전반공주의 논리는 ‘A’가 아닌 모든 것을 ‘Z’라고 규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말하자면 양극화(兩極化)의 논리가 그 핵심인 것이다.
극우의 논리는 ‘A’가 아닌 모든 것을 ‘Z’와 동일시하면서, ‘Z’와 공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과 공존하지 않는 것이다. 반공십자군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와 같은 사고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적(敵)으로 간주하고 나아가 이를 쳐부수는 공격적 태도와 행태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사건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사상공세가 취해진 방법의 폭력성이다. 그것은 전쟁과 같은 역사적 대사건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학술적 방법에 기초하여 관련자료와 문헌을 충분히 검토한 뒤 학술논문이라는 형식으로 서술된 글에 대하여, 개인의 인권 같은 것에는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은 채 이데올로기적 선입관을 투영, 한국 최고 발행부수를 가진 신문의 지면상에서 사상폭력을 가했던 방법의 공격성이 그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내 사건이 진행된 이러한 조건에서 좌-우의 이성적 대화가 가능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적 현실과는 다른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어떤 상황을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손승연 학생이 묻는 것처럼 “당신이 옳다면 왜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그들을 설득하지 않느냐”고 신문지상을 통해 나를 압박했다. 그 주장은 일견 옳은 듯 보이지만 나의 글을 올바로 전달하기란 그러한 헤게모니의 상황에서 그리고 이미 색깔칠해진 상황에서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나 자신을 논리적으로 방어하기 이전에 그리고 그것이 이성적 대화의 장(場)에서 논의되기 이전에 이미 “불온한 사상”이라는 판단이 먼저 내려진 것이다. 논의과정의 전후순서가 바뀐 것이라 하겠다.
당시 나의 법적 대응을 비판하면서 진보-보수간의 합리적 이념토론을 권유하는 내용의 칼럼을 신문에 썼던 사람들은 내 스스로 좌파임을 인정하고 좌파가 왜 문제가 되는가 식으로 대응하기를 기대했을런지 모른다. 이미 여론매체의 장에서 전사회적 논쟁으로 확대된 내 문제가 설사 합리적으로 논의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우리사회에서 좌파와 친북, 또는 용공은 제대로 구분되고 있지 못할 뿐더러 그것이 합리적 토론의 소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는 헤게모니하에서 이데올로기적 용어, 개념이 왜곡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일보와의 공방과정에서 나는 문제된 글과 나의 사상이 ‘친북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대답을 강요받는 상황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친북(親北)이 아니라면 반북(反北)이라는 것인가? 이런 구분과 사람에 대한 분류 자체가 폭력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과 남북한 문제가 이성적인 토론이 되기위해서는 친북(親北), 반북(反北)의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에 의한 양분법(兩分法)이 아니라 먼저 그러한 사건, 또는 사태를 탈(脫)이데올로기화(化)하고, 객관화해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4) 해방이후 분단, 좌우이데올로기투쟁, 6 25 전쟁, 그리고 이후 오랜기간 동안의 남북한 적대관계는, 전 냉전시기를 통하여 그리고 냉전이 실제로 해체된 이후에 있어서도 남북한관계를 세계에서 가장 적대적인 관계로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
한반도에 있어서 냉전질서는, 적대와 증오의 남북한관계를 형성, 지속시켰을 뿐 아니라, 남북한 각각의 사회내부에 적대관계를 사회질서의 중심에 놓는 냉전반공주의의 기득구조를 만들어냈다. 한국사회에서 이 질서를 가장 전투적으로, 가장 도덕십자군적으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지, 온존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부문을 보통 극우라고 말할 때 조선일보는 그 중심에 위치한다.
극우적 냉전반공주의는 공산주의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이념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 집단, 부문, 세력을 용공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적 힘이다. 사회 다수가 다른 어떤 사회적 가치에 우선하여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영향받고 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든, 집단이든, 또는 어떤 이론이든 공산주의라고 하는 악(惡)의 절대적 가치와 접맥된다면 그것은 쉽게 악(惡)이거나 악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있고, 이러한 조건하에서 “빨갱이 딱지붙이기” 또는 “색깔칠하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반공적 무드가 극도에 달했던 1950년대 미국에서도 맥카시선풍 같은 것이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문제는 이러한 사태가 항상적으로 존재해왔고 가능할 수 있으며 탈냉전이 시작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사회든 이념적 스펙트럼이 공산주의와 그렇지 않은 “건전한” 사상-내용적으로는 극우보수주의를 의미하는-으로 양분될 수 없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극우적 냉전반공주의와, 이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찾는 공산주의의 양자(兩者)사이에는 상당히 넓은 중간영역이 존재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극우적 헤게모니란 넓은 중간영역을 ‘사적(私的) 사상심판관’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개인, 집단, 또는 사상, 이론, 신념을 공격의 목표로 선정하여 색깔칠하기와 그것이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정신적, 정치적, 이념적, 문화적 힘 내지는 토양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한국사회는 양극화되고 중간영역은 허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동력이 이 중간영역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한국사회 정신적 풍토의 황폐화와 더불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반은 근본에서부터 약화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러한 맥락위에 나에 대한 조선일보 사건이 위치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3-1) 조선일보에 대한 법적 소송을 왜 중단했나 하는 두 번째 문제 역시 여러 측면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당시 나의 신분은 대학의 교수였지만 동시에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공직자이기도 했다. 나의 위치가 ‘위원장’이 아니었던들 이런 문제는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내 사건은 후자(後者)의 역할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맡고있는 공직자로서의 역할을 고려하는 문제는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점에서 끝까지 가는 법적 투쟁을 중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나는 공직자로서 결코 이성적 논의가 불가능한 문제를 중심으로 장기적 싸움을 벌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몸담고 있었던 정부에 대한 고려였다.
다른 하나는 내 사건이 논의되고 있었던 차원이 앞에서 말했듯이 헤게모니의 장(場)이었기 때문이다. 즉 문제의 성격이 해답이 명쾌하게 내려질 만큼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많은 비극적인 측면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논의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고 감정적, 정서적인 문제를 안고있는 매우 복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법원에서 판단한다고 해서 자잘못이 그 판단 하나로 가려지기는 어렵다. 법원의 판결이 팽팽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얽힌 복잡한 갈등을 전부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사퇴’ 이후 나는 “목숨바쳐 북한과 싸운” 6 25 참전용사 등이 제기한 명예훼손 민사소송건과, “북한을 이롭게 하는” 논문을 쓴 혐의로 국가보안법에 피소되었으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객관적으로는 현재까지 “사건번호 98형제133622호 및 99형제17944호 국가보안법위반” 혐의의 피의자의 위치에 있다. 요컨대 종결된 것은 나와 조선일보와의 법적 다툼의 차원에 국한되어 있을 뿐, ‘사건’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한국사회의 구조와 조건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듯이 내가 법률적 다툼을 끝까지 밀고 갔더라면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사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태진행의 한 측면이었을 뿐 실제로 내가 대면했을 더욱 큰 차원의 문제는 ‘한국전쟁’, 즉 관련당사자와 피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는 한국현대사 당대 최대사건에 관한 문제이다.
나의 논문으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상이군경, 6 25참전 예비역, 전몰유가족 등 전쟁의 피해자들의 주장만큼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조선일보가 나를 공격했을 때 내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한 사람의 정치학자로서 나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제도와 조직, 관계들에 의해 인간이 고통받는 현실과 가능성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나의 논문은 민중적 시각, 즉 전쟁의 수많은 희생자로부터의 시각을 유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생각해왔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만큼 남북한간의 적대와 증오는 큰 것이었나? 동일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과 평화구축의 과제를 위해 한국전쟁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논문을 이끄는 이러한 질문들은 잠재적 전쟁의 희생자들을 막기 위해 학술연구자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의 경험 그리고 여기로부터 생경험적 정당성을 찾는 적대와 증오의 냉전반공주의적 시각이 여전히 지배적인 현실에서 내 논문의 문제의식과는 정반대의 대응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내 사건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논의가능한 차원의 문제로 이해하거나, 사건의 예상경로를 조선일보에 대한 나의 법률적 승소 여부의 문제로 치환해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 사건을 냉전후 시기로 이행하는 탈냉전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자, 냉전반공주의와 평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탈냉전적 가치간의 힘의 관계가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변하면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3-2) 내 사건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은, 극우적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논리와 관련된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와 조선일보와의 싸움이 중도에 끝났다하더라도 내가 공직자이기 때문에 검증해야 된다는 당시 조선일보에 의한 사상검증의 정당화의 변(辯)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의 그러한 변은 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조선일보와 같은 언론이 정부공직자의 적격여부를 판단할 수 있고, 나아가 그렇게 해야할 사명감을 가졌다고 하는 발상은, 사회의 극우적 여론을 대변하는 사적 판단이 사상적 테러의 방법을 통하여 공적영역의 심판관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분명 충돌한다고 할 수 있다.
내 사건을 일으켰던 조선일보의 역할은, 마치 15세기 이후 수세기 동안 공포의 대상으로서 양심과 지식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이단”의 도전을 물리치며 정통카톨릭주의를 옹호하고 기독교교리에서 뿐만 아니라 그에 기반했던 세속권력으로서의 전제군주권력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던,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종교재판에서 대심문관(大審問官, Grand Inquisitor)의 역할에 유사한 어떤 것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종교재판은 일반 재판과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심문관은 판사가 아니라,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의 역할에 가깝기 때문이다. 흥미있는 것은 종교재판에서 고해성사의 목적은 신체를 벌주려는 데 있기보다 자비를 구하여 영혼을 구원하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반법의 유죄판결보다 더 가혹하고 대규모적인 억압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이단을 심판하려는,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처럼 보였던 종교재판은 그 어떤 것보다도 정치적인 목적에 봉사했다. 유죄로 판명될 경우, 참회의 형식을 빌어 공직추방을 포함, 해외추방, 체형, 투옥, 재산몰수, 노예봉사 등과 같이 고백한 죄에 합당한 형벌을 부과했다.
만약 손군이 문학작품을 좋아한다면, 스페인의 종교재판을 다룬 두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Book 5, 5장)이고 다른 하나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돈 카를로스』이다. 두 작품이 모두 종교재판의 해악성을 말하고 있지만, 앞의 작품이 보다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데 반해, 뒤의 것은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쉴러는 스페인의 전제군주와 대심문관이 어떻게 공화파 왕자(王子) 돈 카를로스와 그의 영원한 친구 후작(侯爵) 로드리고를 파멸시키는가 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쉴러의 희곡을 대본으로 삼은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에서 대심문관의 역할은 더 극적으로 표현된다. 쉴러-베르디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테마는 전제군주와 대심문관이 정치적 반(反)자유주의에 대한 영원한 동맹자라는 사실이다.
내 사건을 통하여 조선일보가 주장하고, 그 주장을 수용하거나 그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강조했던 것은, ‘최장집은 조선일보가 색칠한바와 동일하거나 가까운 사상을 가졌다’고 전제하면서 ‘그러한 사상을 가진 당신은 공직자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반(反)민주적이냐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극히 보수적 편향성을 갖는 한 신문이 민주적 절차와 법적 절차가 아닌 여론몰이의 방법으로 누가 공직자의 자격을 가지며, 누가 시민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가 하는 자격부여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고 사회에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라면, 극우적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에 가까운 사람 이외에는 공직자의 자격요건을 갖기 어렵다. 그것은, 냉전반공주의의 이념 이외의 다른 이념을 갖는 개인, 그룹, 부문은 정치과정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배제의 이념이며 가치로서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3-3) 내 사건과 관련하여 대두된 또 하나의 이슈는 민주주의하에서 언론의 역할문제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하여 여기에서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다.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데 있어서, 정치사회의 여론형성기능과 함께 이슈 및 의제를 만들면서 정치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그리고 민주적 가치와 같은 사회의 기본적 규범을 가르치는 교육기능을 통하여, 또한 시민들이 특정의 정치적 정향 내지는 가치, 비전을 갖도록 함으로써, 과거보다 언론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언론의 역할이 너무 커진 나머지 그동안 민주정치의 기본 메카니즘이었던 정당의 역할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그 나라 언론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의 역할은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이 저발전 상태에 머무는 동안 다른 어떤 민주주의 사회에서보다도 크게 성장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언론은 소수의 거대 언론기업의 성장과 더불어 이상비대화하고, 여론의 시장은 이들 소수 언론대기업에 의해 독점화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민주화와 더불어 국가의 억압적 장치들이 해체되거나 또는 언론-권위주의국가와의 유착관계가 소멸하면서, 거대언론은 민주주의가 보장해주는 언론자유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언론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만큼, 한국의 거대언론이 민주주의하에서 정당성을 갖기 위해 첫째,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와 규범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내 사건을 통하여 나타냈던 것은 이성적 토론, 민주적 방법을 통한 토론과 비판이 아니라 개인의 인권을 크게 훼손하는 사상적 폭력 이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언론자유를 가졌다고 하지만 한 언론이 자신과 상이한 사상, 관점을 가졌다고 해서 한 시민에 대한 기본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권리는 없다.
나는 그 신문이 권위주의하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그 신문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이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의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묻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어떠한 이념적 지향을 갖고 있든 그것들이 민주주의의 규범과 가치를 존중하고 실천한다는 조건하에서, 즉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언론자유라고 해서 한 언론사의 사상적 준거 또는 가치기준으로 개인의 인권을 공격적으로 훼손할 권리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다.
둘째로 우리사회의 거대언론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익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엄밀하게 보면 언론은 한 사기업으로서 언론사의 생산물이다. 그러나 이 언론의 역할이 공적기능을 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의 거대언론이, 소유-경영-편집이 분리되지 않고 족벌적 위계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유주의 전권 하에서 운영되고 있음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논의의 핵심은 소유-경영-편집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언론개혁의 중심내용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말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대언론은 공익성의 규범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언론사 내지는 언론사주의 사익을 전(全)사회화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고, 그러할 경우 언론자유는 한낱 여론, 담론, 언론의 독점적 영향력을 통하여 사익을 실현하는 사익실현의 자유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거대언론은 사회에 대해 책임성(accountability)을 가져야할 것이다. 이 책임성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의 크기에 대한 비용이며, 대가라 할 수 있다. 힘이 큰 만큼 책임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하다.
조선일보가 한국 최대의 신문임을 자임한다면 더더욱 그 만큼의 큰 책임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조선일보가 극우적인 편향을 보인다면, 그것은 조선일보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극우가 커다란 사회적 비중, 강고한 결집력을 가지며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사회의 다수가 극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의 비극임에 분명하다. 냉전이 해체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지난날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그에 속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없으며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와 같은 대신문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지나치게 사적이익, 사적가치와 비전을 사회화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사익을 전사회의 일반이익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때, 그리하여 언론의 자유가 공공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 못할 때, 언론자유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불가침의 언론자유라는 주장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이념의 사회적 교육자로서의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널리 주어야 할 것이다.
3-4) 조선일보 사상검증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가 끝까지 싸워 극우주의의 힘에 대항하여 이데올로기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이를 통해 남북한간 적대관계를 평화공존, 화해협력관계로 바꾸고, 한국사회 내부의 냉전해체에 기여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일보가 나를 이념적으로 공격했을 때 내가 한 것은 당시 주어진 여러 조건이 내게 허용했던 최선의 저항을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원과 함께 내 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분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늘 나에게 큰 책임감으로 남아있다. 그 책임감은 내 본령인 연구와 지적, 교육적 활동을 통하여 분단과 전쟁이 몰고 왔던 증오와 극단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작업에 헌신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의 세대를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탈냉전과정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극우냉전적 헤게모니의 지형은 서서히 바뀔 것이고, 이성적 대화의 공간이 넓어질 것을 희망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