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노라 에프론
출연 : 탐 행크스, 멕 라이언, 그렉 키니어

근 한달 반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영화 감상을 할 기회가 없었다. 방학을 맞아 꾸준히 영화를 볼 것을 다짐하며 그 장정의 첫 테이프를 끊을 영화를 무지 고민했다. 우선 첫 영화는 이후의 식욕을 돋구어줄 수 있는 애피타이저가 되어야 했다. 애피타이저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생각없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볍거나 그와 반대로 대단한 집중을 요하는 묵직한 영화가 적당했다. 그러나 비디오 대여점에 무작정 들어가 이것저것 고르는데 이거다 싶은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런 날이 있다. 막연히 영화는 보고 싶은데 썩 내키는 영화들은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 날 말이다. 그렇게 대여점 안을 방황하다 잡힌 건 유브 갓 메일. 왜 이 영화가 나의 영화 감상 애피타이저가 되어야 하는지 마땅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나 한때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멕 라이언 표 영화는 그런대로 눈감아줄 만한 면죄부를 품고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로 잘 알려진 에프론 자매의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케슬린 켈리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뉴욕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애정이 담겨 있는 ‘길모퉁이 서점’이 대형 체인점 폭스 서점으로 인해 문을 닫을 위협에 놓인다. 케슬린이 남자친구 몰래 이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버 남자친구 NY152는 케슬린의 마음을 점점 사로잡게 되지만, 실은 NY152는 폭스 서점의 사장 조 폭스이다. 원수지간처럼 지내던 케슬린과 조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익명의 공간인 온라인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앙숙이지만 온라인에서 SHOPGIRL과 NY152로 만날 때에는 더없는 조언자이자 사랑스런 친구이다. 결국은 폭스 서점에 밀려 길모퉁이 서점은 문을 닫지만 케슬린은 온라인의 사랑으로 오프라인의 조에게 화해를 구하고 사랑에 골인한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대자본가에게 소규모 자영업자가 무릎을 꿇는 씁쓸한 얘기라는 점이다. 그나마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상점은 박리다매로 승부를 걸 수 있는 공룡의 발에 뭉개진다. 처참하게 뭉개지지만 영화는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일말의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그저 쇼맨쉽에 불과하다. 케슬린은 결국 가게를 잃고 개인적인 동화 집필에 들어간다. 폭스 서점은 승리를 구가하고 조는 케슬린에게 사랑이라는 선물로 그녀에 대한 자신의 폭력을 희석시킨다. 도식적으로 보건대 점점더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내미는 공격적·폭력적 대자본의 승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일관되게 관철된다.

그러나 멕 라이언의 귀여움은 여전하다. 그녀의 총총 걸음과 장난끼 섞인 천진한 미소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랑스러운 요소이다. 에프론 자매의 손에서 나온 걸쭉한 대사들도 한몫을 한다. 얼굴에 난 152개의 점을 뽑고 생긴 곰보 자국 152개 있는 남자…(조), 나에게 152가지의 길을 알려주는 남자(케슬린) 등의 대사는 달콤한 사랑스러움을 이 영화에 심어준다. 거기다 길모퉁이 서점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과 추억들은 감상적인 애잔함마저 가볍게 불러 일으킨다.

아, 하지만 그러한 달콤함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친절한 얼굴을 한 대자본의 승리를 위해 연출된 가식에 불과할지니. 케슬린은 어떻게 자신의 생계 기반을 파괴한 남자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조는 공적 영역에서의 냉정함과 사적 영역에서의 다정다감한 인간미를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이중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가.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판타지 속에 스며든 메시지란 것이 단지 누추하고 비루한 현실 원칙의 당연함을 설파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찌 이 영화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랑은 들러리에 불과하고 냉혹한 현실이 주가 되어 버린 이 영화는 에프론 자매의 영화가 실은 별 얘기, 별 생각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추악함을 사랑스러움으로 가리고 있는 유브 갓 메일은 미국 온라인계의 대기업 AOL사의 홍보용 영화로서 최적격이다. 라이언의 사랑스러움을 나는 그저 겉모습만 즐길 뿐이다.

1.
빨갱이는 우리 사회에서, 일본에서 극우파적 역사 교과서, 미국에서 (국가) 미사일 방어체계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나치 시대 독일의 유태인의 역할도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빨갱이라는 호명은 가상적에 대한 안티로서 국가나 민족 또는 정치체계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는 친북세력일 수도 있고, 극우 기득권 세력에 약간의 타격이라도 될 수 있는 개혁적인 움직임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 사회의 정체성, 조갑제의 표현을 빌면, 보수 주류세력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빨갱이로 이름지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2.
빨갱이는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양민이 빨갱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켰듯, 빨갱이는 선량한 시민 밖의 어떤 존재를 가리킨다. 맑스레닌주의 신봉자나 주체사상 추종자만으로는 빨갱이의 외연을 채우기에 충분하지 않다. 변화되는 정세 속에서, 기득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이든 빨갱이라는 호칭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빨갱이는 건전과 불온, 안정과 불안, 전진과 혼란으로 경계지워진 우리시대를 특징짓는 총체적인 상징이다. 빨갱이는 빨갱이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는 ‘선량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해 만들어진, 체제 존속에 꼭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3.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근친상간으로 나누었다. 근친상간은 문화의 출발점이고, 문화 내에서 자연과 인간을 나누었던 이분법은 지속된다. 이를테면, 날것과 요리된 것,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하는 식으로.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많이 읽지 못했지만, 오늘 이곳 일기장에서 읽은 세진님의 글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대한) 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4.
빨갱이 사냥에 대한 대응책은 아마도, “그 사람은 빨갱이가 아니라 건전한 사고를 가진 개혁적인 지식인이야!”라고 외치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한완상은 자유주의자다!” 라고 조선일보에 대해 방어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대응책은 아니다. 그러한 대응책은 한완상은 자유주의자이지만, ‘빨갱이’에 틀림없는 그 누구는 사냥당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전제로 하므로. 중요한 점은 ‘빨갱이’는 왜 나쁜가 하는 질문을 자동적으로 배제하는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여전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5.
근친상간을 통문화적인 특징이라고 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은 무엇보다, 근친상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배제하고 있다. “근친”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문화에서 사촌은 근친이 아닌 것으로, 다른 문화에서는 모자, 부녀도 근친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다시 한번, 사촌이나 부, 모의 개념 역시 문화마다 다르다) 만약 근친상간이 어떤 문화에서건 볼 수 있는 특징이라면, 여기서 문화는 상간해서는 안될 근친이 무엇인가를 각각 다르게 구성하는 힘이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알제리 한 부족에 대한 연구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문화의 규칙은 꼭 지켜져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의 경향성이다. 여기서 근친은 근친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 이분법을 위해 만들어진 상징이다.

6.
전제를 의심하자. 맑스의 이야기처럼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은 사물의 뿌리를 본다는 뜻이다. 빨갱이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고, 왜 빨갱이인가 아닌가로 판단하려 하는가를 문제삼자.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고, 왜 성별을 능력의 차이를 재는 척도로 삼는가를 따져보자. 호남 사람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깔려 있는, 사람이 출신지역으로 평가되는 경향을 드러내자.

7.
나는 여전히 특정한 이분법이 내적으로 왜 일관성이 없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들의 유용성을 부정하지 않는다.자유주의자 한완상이 왜 부당하게 비난받는가, 여성의 사회기여도는 왜 저평가되는가, ‘좋은’ 호남 사람도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분법과 배제의 논리를 통해서만 지탱되는 낡은 체제의 허약성을 공격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전복을 위해서, “생각”의 근본성은 언제나 놓지 말아야 할 끈으로 생각한다.

forzapak : 레비스트로스는 이항대립적인 사고체계가 (인간의 두뇌작용에서 비롯되는) 인류의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이항대립의 구체적인 현상은 개개의 사회의 몫이다. < 빨갱이-양민>이라는 이분법의 조야함은 한국사회의 수준에 상응한다. 더욱이, 빨갱이 소리 듣기도 이제 지겹다.–;

테크놀로지의 목적은?

김봉석 칼럼

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별다른 두려움이 없다. < 블레이드 러너>나 < 터미네이터> < 코드명 J> 등의 암울한 SF영화들에서 종종 드러나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든가, 기계의 반란 같은 것에 크게 괘념하지 않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희미해지고, 기계가 인간의 위에서 모든 것을 관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정체성의 혼란은, 아마도 태초의 인간부터 겪은 것이 아닐까.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면 선악과(혹은 지혜의 과실)를 먹고, 신의 대지로부터 쫓겨난 순간부터 비롯된 것일 게다. 혹은 인간이 ‘동물’에서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은 각 개인에게도 끊임없이 되풀이된 질문이다. 굳이 종의 발견만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늘 자신을 의심하게 되어 있다. 그 의심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퇴화할 것이다.

기계의 반란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늘,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게 속박당하고 지배되어왔다.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같은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성이 없는 기계들에 지배된다한들, 절대화된 ‘국가’에 지배당하는 것과 또 무엇이 다를까. 물론 거기에도 수많은 층과 결이 존재하겠지만, 그건 내가 넘본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그런 거창한 문제는,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사회학자가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야 할 과제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법,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렵지는 않지만 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때로, 귀찮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휴가중이다. 휴가중에 회사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 시킨다고 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휴가를 보내는 내가.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휴대폰이 있고, 도처에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지금은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 ‘가능’이 싫다.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굳이 개입하거나 실행하게 만드는 간섭이 싫다. 나는 그것이 지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한다면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있다. 이번 경우만 하더라도 나의 불찰은 분명 있다. 연락처를 남겨두는 실수를 왜 저지른 것일까. 살다보면 해이해지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없이 살아간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제, 컴퓨터 없이는 전혀 글을 쓰지 못한다. 과거 원고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연이어 파지를 만들어내던 일이 마치 석기시대처럼 느껴진다. 사냥을 하기 위해 도구가 필요했듯이,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스스로건, 타인의 의지로건 ‘도구’에 얽매이는 순간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린다. 목적을 잃어버리고 형식이나 시스템에 매달리는 순간 인간의 얼굴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잃어버린 무수한 ‘목적’ 때문은 아닐까. 행복이라든가, 자유라든가, 믿음이라든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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