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자기 부정’없는 개혁은 없다

< 강준만·전북대 교수>

최근 국세청의 세무조사 및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내부거래 조사 결과 발표와 그 파장에 대해 말이 많다. 나는 여러 의견 가운데 정부가 모든 걸 법대로 한다는 데 대해 원칙적인 찬성을 하면서도 그로 인해 언론 자유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의견에 주목한다. 전반적인 여론의 큰 흐름도 이 의견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견은 분명히 타당한 면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 우리 사회의 개혁을 원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변화를 촉구할 때에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을 즐겨 쓴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는 걸까? 뼈대를 바꿔 끼고 태(胎)를 빼앗는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엄청난 고통과 시련 없이 큰 변화가 가능한가?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은 개혁으로 인한 고통과 시련의 감내가 강압적인 방식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민심이라고 하는 ‘시장 논리’에 의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최소한의 부작용과 역기능조차 없는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러한 부작용과 역기능을 소화해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조차 돼 있지 않다. ‘개혁’이라는 구호는 정권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구두선(口頭禪)으로 전락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기 부정’이 아닐까? 그러나 자기 부정을 감행하는 집단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모두 다 ‘자기 긍정’을 하면서 개혁을 하자고 외쳐댄다. 그러니까 “나는 옳지만 너희들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간 신문들은 그런 위선에 앞장섰다. 신문들이 한국 사회에 기여한 공은 매우 크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불신(不信)이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다른 장점들을 죽일 정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점일 게다. 신문들은 그 어떤 사회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집단으로서 한국 사회에 ‘불신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주범이거나 공범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 신문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스스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건 이미 지난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물론 법의 개입은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다. 또 그로 인한 신문사의 경제적 타격이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참된 언론상은 기업으로서의 규모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신뢰다. 신문은 특권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신문들만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야당의 행태를 보자. 나는 정치 집단에 정략은 필요악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본말의 전도가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그러나 야당엔 오직 정략뿐인 것 같다. 야당은 김대중 정권의 실정과 김정권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는 걸 아예 정강정책으로 삼은 듯이 보인다. 대안과 비전 제시엔 별 뜻이 없거니와 모든 게 구태의연하다. 야당엔 스스로 부정하고 결별해야 할 구태는 없는 건가?

김정권도 다르지 않다. 김정권은 자기 긍정을 하면서 정권 재창출도 해보겠다는 터무니없이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거야 정권의 문제이겠지만, 그로 인해 양산될 정치권의 소음(騷音)을 생각하면 그걸 견뎌내야 할 국민들의 귀가 안쓰럽다. 도대체 정권이란 게 무언가? 정권은 ‘책임’ 빼놓으면 쓰러지는 것이다. 설사 억울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바로 정권이다.

국민은 여야의 정쟁 구도에 별 관심이 없다. 국민이 원하는 건 새로운 변화다. 기존 질서와 관행을 긍정하면서 어찌 새로운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한국 사회의 내로라하는 힘 있는 집단들이 앞다투어 ‘자기 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해외에 살고 있는 지인 한명이 얼마 전 한국을 다녀 가면서 남긴 말이 여전히 필자의 가슴 한 구석을 아프게 한다. 그이는 “웬만하면 이제, 한국을 다니러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너무나 숨이 막혔다고 그는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너무나 ‘막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금의 품위라곤 찾아 볼 수 없이, 그저 생존에만 급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이 다시 이땅에 돌아 올 수 있을까를 염려했다고 한다. 국내의 또 다른 친구 한명도 그 엇비슷한 얘기를 필자에게 전했다. 얼마 전 미국에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조카 두명이 우리나라에를 왔는데, 시내를 다닐 때마다 아이들은 ‘도무지 즐길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황량하고 이상한 도시’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하루 빨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외국으로 돌아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풍요로운 외국의 삶과 비교해서 우리의 처지를 지나치게 비루한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겠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으며 그같은 외부의 시선은 반대로, 우리가 그만큼의 가혹한 생존 조건을 나름대로 잘 버텨 온 얘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들이 지적했던 것이 단순히 물질적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 혹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얘기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에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김창완씨와 두개의 방송 프로그램을 같이 한다. 하나는 텔레비전 영화 프로그램인데 둘이서 같이 진행하고 있고, 또 하나는 그가 매일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한번씩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그는 요즘 방송계에서 알게 모르게 엄청 상종가를 치고 있는데 앞서 얘기한 두개의 프로그램말고도 또 다른 공중파 방송의 주간 프로그램의 MC를 맡아 진행하고 있고 심지어 일일 어린이 드라마에도 출연중이다. 간간히 뮤지컬도 하고, 얼마 전에는 동요집이긴 하지만 새 음반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또, 그 와중에 개인 콘서트까지 열기도 했다. 더 열거할 것이 남아 있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가히 슈퍼 맨 수준이다. 도데체 이 많은 일들을 그는 어떻게 다 해내고 있는 것일까?

콘서트장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머리는 완전히 ‘번개 머리’ 스타일로 꾸몄는데, 콘서트 제목이 아무리 ‘록 글라디에이터’라고 한들, 그래서 자신을 검투사로 변신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들, 이건 좀 ‘심하다’하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에고, 머리가 워낙 흉해서..”를 연발해 좌중을 웃겼다. 머리 모양이 어떻든, 그는 이날 콘서트 무대에서 매력적인 멘트를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이다. “후배들하고 이런 얘기를 종종 해요. 내가 이젠 록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잖니? 그건 나도 잘 아는데, 그렇다고 또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잖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그러니까 죽기에 아까워서라도 록을 해야 돼,라고 말이죠”. 또 이런 말도 있다. “콘서트 제목에 왜 글라디에이터란 말을 넣은 줄 아세요. 공연을 할 때마다 늘 느끼는 건데요, 무대밖에서 공연이 시작될 때를 기다릴 때면 꼭 콜로세움에 끌려 들어가기 전의 검투사같은 느낌이 들어요. 저 안에는 무시무시한 사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참 무섭고, 외롭고 그렇지요.” 등등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참 말의 성찬을 즐길 줄 아는 사람같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필자는 세상사에 대한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맞는 말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으니까, 지나 온 과정들이 너무 아까우니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 특히,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혹은 그런 류의 한국형 블록버스터급 영화보다 < 오! 그레이스>같은 ‘작은’ 영국 영화들에게 더욱 마음이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요즘의 영국 영화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삶의 피곤함과 또 이를 이겨낼 줄 아는 공동선의 지혜가 담겨 있다. 남편이 자신에게 남겨 준 것이라곤, 엄청난 빚밖에 없는 여주인공 그레이스의 한심한 현실은 지금의 우리 현실을 닮아 있다. 정치는 저자 거리의 아우성과 다를 바가 없고 꽤나 잘난 체 해온 일부 언론은 알고 보니 그동안 세금 떼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주노총의 위원장은 5공때나 6공때나, 문민정부 시절이나 지금의 국민의 정부 시절이나 쫓겨 다니기는 매한가지다. 비가 안오면 안 와서 난리다가 조금만 비가 내려도 이번엔 너무 많이 와서 힘겹다고 한다. 그 와중에 우리들 호주머니에는 찬바람만 쌩쌩 분다. 영화속 그레이스마냥, 남들 몰래 대마초라도 재배해 돈도 벌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위선투성이의 구겨진 세상을 통렬하게 꾸짖고 싶지만 그건 그냥 영화로만 만족해 할 얘기다. 우리들 주변에서는 그레이스마냥 그녀를 이해해 줄 착한 청년 매튜나 그의 애인, 혹은 그녀의 비리를 모르는 척 눈감아 줄 마을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희망과 삶의 끈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다고 필자는 믿는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아침 7시부터 나와 일을 찾아 나서는 후배들이 있고, 방학이 되도 학교에 나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특강을 듣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들이 비록 세상의 비루한 때를 덕지덕지 묻히고 살아가고 있다 한들,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다음 세대 앞에서는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라고.

2001.06.25 / 오동진

“성형수술 쿠폰”이 백화점 경품에까지 등장했다는 말을 들었다. “보편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품의 목록에 성형수술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상품권이나 김치냉장고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성형수술권을 주는 행위는 모든 사람들이 성형수술의 잠재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서 “자연적인 몸”은 불완전하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의 몸은 의학이라는 문명의 질서를 거쳐야 하는 미개한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다이어트를 하지 않은 “가꾸지 않은 몸”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인 동시에 남의 미감을 해치는 시각적 테러 행위이다.

한국에서 “끈 나시”를 입을 수 있는 체형은 정해져 있다.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은 여성이 이것을 입는 행위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 “저런 몸매에 어딜 감히….” 한국사회에서 냉소의 눈길과 측은한 표정, 그리고 큰 소리로 “소근”거리는 입들을 무시하고 몸이 드러나는 패션을 감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는 면전에서 남의 몸을 평가하는 무례함이 허용된다. 언론매체에서조차 남의 배가 나왔네 들어갔네, 턱이 기네 짧네, 가슴이 크네 작네 하며 상대방을 조롱하는 가학행위가 “재치”로 통용된다. 피부는 화장으로 지우고, 골격은 깎거나 보형물을 삽입하여 다듬고, 몸의 지방은 굶거나 호스를 집어넣어 끄집어 낸다 하더라도 비난의 여지는 언제나 남는다. “어이 숏다리, 다리는 왜 그렇게 짧아?”

이영자가 처음 텔레비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이미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녀의 다이어트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녀가 지금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살들”이 바로 애초에 그녀를 “성공”으로 이끈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영자를 유명하게 해 준 것은 그녀의 몸매도 아니고 특유의 재치도 아니다. 그 정도 몸집을 가진 사람이야 이영자 말고도 많다. 그 정도 위트야 웃음으로 먹고 사는 다른 연예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성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바로 그녀의 “대담함”이다. 뚱뚱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식”에 가까운 대범함. 그녀가 한국인들에게 제공한 즐거움은 < 전국 노래자랑> 무대에서 막춤을 추는 “촌놈”들로부터 발견하는 “세련”되고 “우아한” 시청자들의 가학적인 즐거움, 바로 그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영자는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성공은 “우리”를 닮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만 보장된 것이다. 결국 그녀의 인기란 우리가 지닌 치부의 한계 영역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이영자가 우리를 닮고 싶다고 말했고, 어느 정도 우리와 닮은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우리는 다소 배가 뒤틀렸지만, 다이어트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 싫은 내색을 최대한 감추고 환영했다. 그녀는 우리의 강박인 동시에 희망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그녀에게 금전적 성공을 눈 감아주는 대신에 우리의 열등감만을 먹고 살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영자의 “컴백”은 명백히 배신인 동시에 계약위반이었다.

뜻밖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영자의 다이어트가 가짜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미웠던 참에 일이 쉽게 풀린 것이다. 그녀는 우리 앞에 나와 울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사람 중에 “그 년이 쇼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수술이 별로 효력이 없었으며, 대부분 운동으로 살을 뺐노라고 변명했다.

우리는 성형수술이 보편화된 한국 사회에 살면서도 “다이어트”와 “수술”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수술이 다이어트보다 “의지”보다는 “돈”에 더 가까운 사치행위라는 윤리의식이 작동해서일까? 그러나 다이어트를 둘러 싼 수천억원의 시장을 생각해 보라. 돈 안들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다이어트라면 누가 그 많은 돈을 들이고 있겠는가? 아직 유교적 관습이 남아 “몸에 칼을 대는” 게 조상님께 죄송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쌍꺼풀 수술에 코 높이고 턱 깎는 게 드물지 않은 우리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고생은 사서도 하는 “의지의 한국인”이기 때문에 편하게 누워서 기계로 지방을 뽑는 게으르고 나약한 행태에 분개하는 것일까?

이영자는 가짜 다이어트로 도덕성에 (왜 우리나라의 도덕성은 연예인들에게만 요구되는 걸까?)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었고, 비디오를 사서 헛땀을 뺀 우리들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신나는 건 언론이다. 언제는 이영자가 뚱뚱하다고 놀리면서 장사를 하더니, 또 얼마 전에는 살 빠진 이영자를 보여주며 돈주머니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제는 이영자의 사기극을 특집으로 내보내며 물건을 판다. 2조원씩이나 해 처먹은 천하의 뚱보들인 주제에 말이다. 정작 다이어트가 필요한 건 한국의 언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