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봐. 하늘에 띠를 두른 듯 흐르는 구름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가장 검은 부분이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검고 흐린 부분은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 깊은 공간은 이 구름의 산기슭과 계곡에서 시작해서 무한한 허공 속으로 잠겨드는데, 바로 거기에서 별이 반짝이고 있지. 엄숙하고, 우리 인간에게는 명철함과 질서의 최고 상징으로서 별이 반짝이고 있는 거야. 세계와 그 신비의 깊이는 검은 구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고 밝은 부분에 있네. 부탁일세. 자기 전에 잠시 별이 가득 찬 항만이나 해협을 바라보게. 그리고 그때 어떤 생각이나 꿈이 떠오르면 그것을 물리치지 않도록 하게.” 고통인지 행복인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짜릿한 느낌이 플리니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옛날, 발트첼에서의 학생시절의 상쾌하고 명랑한 어느 날 아침, 처음으로 명상연습에 대한 권유를 받았을 때에도, 역시 이와 똑같은 말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한마디만 더 말하겠네.”: 유리알 유희의 명수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명랑성에 대해서, 별의 명랑성과 정신의 명랑성에 대해서, 그리고 또 우리 카스탈리엔적인 명랑성에 대해서 자네에게 좀더 말하고 싶네. 자네는 명랑성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어. 아마 쓸쓸한 길을 걸어야만 했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모든 명랑성과 쾌활한 기분, 특히 우리 카스탈리엔의 그것을 자네는 천박하고 유치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네는 현실의 두려움이나 심연을 피해 단순한 형식이나 공식, 또는 단순한 추상이나 세련됨의 명석하고 정연한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쓸쓸한 친구여, 그러한 도피도 있을테지. 단순히 공식만을 가지고 노는 비겁하고 겁많은 카스탈리엔 사람도 없진 않겠지. 아마도 그런 사람이 우리들 사이에서는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거야……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명랑성, 하늘의 명랑성, 정신의 명랑성이 그 가치와 빛을 잃는 것은 아니야. 우리들 중에서 쉽게 만족하거나, 겉으로만 명랑한 사람에 대해서 유희나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각하고 깊이가 있는 명랑성을 가진 것 같은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어. 그러한 깊이를 가진 한 사람을 나는 알고 있네. 그분은 전 음악의 대가이셔. 전에 자네도 발트첼에서 가끔 만난 적이 있는 분이지. 이 사람은 만년에 명랑성의 미덕을 매우 풍족하게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태양에서 빛이 나오듯이 명랑성이 그에게서 빛나며 호의와 생명의 기쁨으로서, 유쾌한 기분으로서, 신뢰로서, 확신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비춰주며, 그 빛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섭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빛나고 있었지. 나도 그 빛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서 섭취한 사람중의 하나야. 그분은 나에게도 명랑성과 마음의 빛을 조금 나누어주셨지. 우리 페로몬테나 그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이야. 이러한 명랑성에 도달하는 것이 나에게나 또는 나와 같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목표 가운데서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한 목표인 거야. 종단 본부에 있는 장로 가운데도 그러한 사람이 몇 사람 있네. 이 명랑성은 희롱도 자기 만족도 아니고, 최고 인식이며 사랑이요, 온갖 현실에대한 긍정이야. 모든 심연의 기슭에 서 있으면서도 자각을 갖는 것이지. 그것은 성자와 기사 덕분이야.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며, 나이 들고 죽음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더욱더 맑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 그것은 미덕의 비밀이며 모든 예술의 본연의 자세야. 인생의 화려함과 두려움을 시구의 춤추는 걸음걸이로 찬양하는 시인이나 또는 그것을 순수한 현실로서 들려주는 음악가가 처음에는 눈물과 괴로운 긴장상태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해도, 그것은 빛을 더해 주는 것이며, 지상에 있는 기쁨과 명랑성을 더해 주는 것이네. 그러한 시구는 우리 마음을 도취케 하지만, 시인은 쓸쓸한 고독자이며 음악가는 우울한 몽상가일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그 작품은 모든 신과 별의 명랑성에서 힘입은 거야.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미 그의 어두움과 괴로움과 불안이 아니라, 순수한 빛이나 영원한 명랑성의 한 방울이네. 모든 민족과 언어가, 신화나 우주 생성설이나 종교로써 세계의 심오한 부분을 탐지하려고 애쓰는 경우에도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가장 높은 것은 이 명랑성이네. 자네는 고대 인도 사람을 기억하겠지. 우리들 발트첼의 선생님이 고대 인도 사람에 대해서 재미있는 말을 해준 일이 있지. 다시 말하면, 그 민족은 고통을 겪으며 심사숙고하고, 속죄하며 금욕하는 민족이지만, 그 정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해 온 것은 맑은 명랑성이지. 속세의 정복자나 부처님의 미소의 속성은 명랑성이야. 의미가 깊은 신화의 인물은 명랑한 사람이지. 이러한 신화가 표현하는 세계는 그 처음에는 엄숙하고 행복하고 광휘에 찬 봄날의 아름다움을 보이며 황금시대로서 시작되지. 그러나 머지않아 세계는 병들고 타락하며 거칠어지고 처참하게 되어, 결국 더욱 기울어져가는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웃고 춤추는 시바에게 짓밟히고 파멸되기에 알맞게 되지……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비슈누(우주를 유지하는 신)의 미소로써 다시 시작되네. 비슈누는 능란한 솜씨로 새롭고 젊고 아름답게 빛나는 세계를 창조하네. 놀라운 일이지. 비할 데 없이 총명하고 고뇌를 이겨내는 이 민족은 전율과 부끄러움으로써 세계사의 두려운 운영이나 영원히 회전하는 욕망과 고뇌의 수레바퀴를 바라보았던 것일세. 피조물의 연약성과 인간의 욕망, 악마성, 그와 동시에 순수성과 조화에 대한 깊은 동경심을 보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했지. 그리고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비극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훌륭한 비유를 발견하고 우주와 피조물의 붕괴와의 비유를 발견했네. 타락한 세계를 춤으로 부수어버리는 강대한 시바의 비유, 옆으로 드러누워 자면서 훌륭한 신들의 꿈속에서 희롱하며 새로운 세계를 성립시키고 미소짓는 비슈누의 비유를 발견했지. 그런데 우리 자신의 카스탈리엔의 명랑성에 대해서 말하면, 이 훌륭한 명랑성의 마지막 변종인 보잘것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정통적이라고 할 수 있지. 학문은 명랑해야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명랑한 것은 아니야. 우리 고장에서는 학문, 다시 말하면 진리의 예찬은 미의 에찬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게다가 명상적인 영혼의 배양과도 연결되어 있지. 따라서 명랑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어. 우리 유리알 유희는 학문과 미의 예찬과 명상의 세 가지 원리가 전부 그 내부에 결합되어 있어. 그래서 진정한 유리알 유희자는 익은 과일이 감미로운 과즙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랑성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야. 그는 무엇보다 마음속에 반드시 음악의 명랑성을 지니고 있어. 그러한 명랑성은 무엇보다 용감성, 다시 말하면 세상의 두려운 것이나 화염 속을 명랑하게 미소지으며 뚫고 지나가며 춤추고 가는, 그렇게 즐겁게 희생을 바치는 것을 뜻하는 거지. 이러한 명랑성을 학생시절에 다소나마 이해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지.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을 거이네. 아무리 불행한 처지에 놓이고 고통에 빠지는 일이 있더라도 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면 이제 자기로 할까. 자네는 내일 아침 떠나야 할 테니 말일세. 조만간 다시 찾아오게. 자네 이야기를 좀더 해 주게. 나도 자네한테 얘기하지. 발트첼이나 명수의 생활에도 여러 가지 의아스러운 점과 환멸, 더구나 절망과 악마의 힘이 있다는 것을 자네는알게 될 거야. 그러나 이제는 음악에 가득 찬 귀를 가지고 꿈나라로 가야 해.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귀를 음악으로 가득히 채우는 것은 자네가 먹는 어떤 수면제보다 더 나을 거야.” 그는 자리에 앉아 신중하고 조용히 퍼셀의 소나타 제1장을 연주했다. 야코부스 신부가 즐기는 곡이었다. 그 음향은 황금빛 광채의 방울처럼 정적 속에 울렸다. 너무나 고요했기 때문에 그 동안 안뜰에 흐르는 옛 샘터의 노랫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부드러운 음악소리는 아득하면서도 엄숙하고 감미롭게 부딪치며 서로 얽히기도 하고, 시간과 무상의 허무 사이를 씩씩하게 누비면서 명랑하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윤무를 끝없이 만들어냈다.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공간과 밤의 시간이 세계와 같이 확대되었다. 요제프 크네히트가 손님과 헤어질 때 손님은 그때까지와는 달리 아주 명랑한 얼굴을 보이는 동시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년도:] 2001년
순종주의 제거만이 – 이명원(우리모두)
마을 어귀의 성당을 지나가다가, 성 프란체스코의 시에 곡을 붙인 < 평화의 기도>를 듣는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익숙한 가사로 시작되는 이 성가를 따라 부르면서,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운 이타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유장한 하모니의 합창소리가 반가운 단비가 내리는 저녁 거리를 밀도 높게 고양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자주, 그것도 대담하게, 게다가 정면으로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어느 날, 혼혈아인 한 아이는 같은 반 아이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어느 날, 촉망받던 젊은 개그맨이 동성애자인 것이 밝혀지자, 방송사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그를 퇴출시킨다. 어느 날, 한 외국인 노동자는 동료인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유없이 집단 폭행을 당한다. 어느 날, 입사원서를 제출했던 한 장애인은 휠체어에 기대고 있는 자신의 두 다리가 시험탈락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이를 방관한다.
프란체스코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능한 실천의 출구를 얻기 위해서는 이른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각별히 요청된다. 우리들은 어른들의 파괴적인 `아동학대’에 대해 분노하지만, 그것을 `아동인권’이라는 좀더 근본적인 범주에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소리를 높히지만, 외국인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권리에 대해서는 많은 경우 무감하다. 우리들은 여성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하고자 하지만,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멸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우리 사회에는 거시적인 것은 물론 미시적인 억압의 범주들을 해체하고,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수호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을 소명으로 삼는 많은 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실천이 현실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대중의 폭넓은 관심과 통념의 변화 역시 동반되어야 한다. 통념의 변화라니?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한국사회를 그 근저로부터 규정짓는 차별적인 통념이 `순종주의’에 있으며, 소수자의 인권뿐만 아니라 인간 일반의 존엄을 수호하기 위한 실천의 출발점이 `순종주의’라는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의 제거로부터 가능해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우리 사회의 순종주의는 성·계급·인종과 같은 거시적인 범주로부터, 학연·지연·혈연이라는 미시적인 범주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억압구조를 작동시키고 있다. 순종주의가 문제인 것은 강자에 의한 약자의 억압을 합리화하는 현실에서 더 나아가, 약자에 의한 또다른 약자의 억압을 당연시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가령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에 직면해 있는 일부 노동자들이, 더 강도 높은 착취에 노출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또 다른 억압과 차별의 주체로 간혹 등장하는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인종이라는 범주에서의 순종주의가 발생시키는 억압의 한 사례인 것이다. 이때, 한국사회의 순종주의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는 홉스의 싸늘한 명제를 현실화시킨다.
다시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로 돌아가자면, 나는 그의 기도가 아름답기는 하되, 더욱 근본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화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꿈꿀 권리를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동일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할 의무를 감당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꿈꾼 만큼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명원
자본주의 안에서의 기계에 대한 맑스 할배의 한 말씀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강도를 높이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들며,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자본론’ p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