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사건을 꼽는다면 어떨까? 어디서 묻든 간에 선두에 등장할 사건 가운데 하나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일 것이다. 더불어 1990년대의 사회주의 붕괴 역시 상위권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것이면 그 탄생을 통해서나 그 붕괴를 통해서나 사회주의 체제는 20세기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온갖 영역에 파고든 강력한 파급력

사상사를 쓴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유사한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레닌, 룩셈부르크, 크로포트킨, 루카치, 그람시, 블로흐, 벤야민, 라이히, 르페브르, 알튀세르,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 일부에 불과한 이들 이름만으로도 20세기 사상의 풍요함에 마르크스주의가 행사한 영향력의 폭과 깊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연구하든 간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혹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학문이 있을까? 대체 무엇이 마르크스주의로 하여금 이토록 광범위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마르크스의 이름을 이처럼 반복하여 등장하게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인류의 삶에 대체 무엇을 남긴 것일까?

가장 먼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은, 적어도 국가적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사무실(office)에 앉아 지키던 ‘공식적(official)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더불어 그들과 함께 공식적 입장의 수호를 직업으로 삼던 ‘당’ 주변의 이론가들을 제외한다면, 한마디로 근본적―비판적 사유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근본적(radical)이라는 말뜻 그대로 뿌리로 캐 들어가 그것을 뒤집어버리는 그런 비판적 사유.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이는 어떠한 불변적인 것, 항상적인 것, 영원한 것도 거부한다.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나 신학적 실체인 신은 물론,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영원성의 이름으로 서구의 사유를 지배해온 모든 것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확고하고 불변적인 듯이 보이던 모든 것이 그 전복적 사유를 통과하면서 뒤집히고 깨지며, 그 깨진 자리에 혁명의 꿈이 인도하는 새로운 길들이 나타난다. 흔히 ‘공산주의’라는 경제주의적 단어로 번역되는 코뮨주의(communism)는 그 자리에 다시 들어서는 새로운 영원성의 표상이 아니라,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꿈들의 이름이요 희망들의 이름이다.
이다.

둘째, 마르크스주의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는 모든 것을 ‘관계’로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빈번히 인용되는 것이지만,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이러한 사고방법을 간명하게 알려준다. 가령 가치란 상품과 화폐, 혹은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의 관계(가치관계)이고, 자본은 특정한 관계 속에 들어간 화폐이며, 특정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자본관계)이다. 나아가 그는 그 이전에 누구도 의심한 적 없는 ‘인간’이라는 말에 대해서조차 비판적 사유의 칼을 들이댄다. 즉 인간이라는 어떤 불변적인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방금 말했듯이 ‘특정한 관계 속에서’ ‘노예’ 나 ‘농노’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집합이, 혹은 ‘자본가’ 내지 ‘임노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집합”일 뿐이다. 어디 생산관계 뿐일까? 가령 르네상스 시절 거리를 활보하던 광인들은 19세기에는 치료받아야 할 정신병자로 간주되어 감금당한다. 마르크스의 어법을 빌리자면, “광인은 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들은 정신병자가 된다.”

모든 것을 관계적인 것으로 보는 이러한 사유는, 모든 종류의 불변적인 것을 비판하는 반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부된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모든 것을 그 역사적 변환 속에서 사유하고 연구하는 역사적 사유와 결부된 것이기도 하다. 보통 ‘역사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이런 태도는, 불변의 본질을 묻는 ‘무엇인가’(what)라고 질문하는 대신, ‘어떻게’(how)라고 질문한다. 예컨대 하나의 물건이 어떻게 생산되는가가 바로 그 물건의 ‘본질’에 대해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되는 방식―어떻게 생산되는가―이 달라지면 그 ‘본질’ 역시 달라진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방식’이나 ‘양식’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생산양식, 노동방식 등등). 또한 역사적으로 사유하려는 사람들―그들이 역사가든 철학자든―이 마르크스주의를 우회하기 힘든 것도,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와 가까워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셋째,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에 관한 사유를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사물을 생산하는 능력,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 사람들이 생산하는 방식, 그리고 그러한 생산이 유통이나 소비와 같은 다른 활동을 생산하는 양상 등이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관심사다. 하지만 여기서 ‘생산’이라는 말은 단지 경제적 생산에 한정되지 않는다. 철학은 개념을 ‘생산’하는 문제를 연구한다. 조직은 운동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종류의 활동을 ‘생산’하는 방식의 문제다. 혁명이란 새로운 종류의 관계, 새로운 사회를 ‘생산’하는 문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란 모든 종류의 생산, 혹은 생산적 능력에 관한 사유다. 이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구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사유다. 물론 이는 불행히도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효율성을 뜻하는 ‘생산력’으로 대체되곤 했지만 말이다.
생산적 능력에 대한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산적인 능력을 억압하고 무력화하는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의 생산능력을 무력화하면서 시작한다(이른바 ‘본원적 축적’). 이제 사람들은 일정한 임금을 대가로 자본에게 자신의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팖으로써만 생산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에 팔린 생산능력을 ‘노동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생산에 관한 자신의 의지를 자본의 의지로 대체함을 뜻하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한에서만 생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본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을 ‘노동’이라고 한다. 이제 생산자는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는 자본의 의지가 자신을 더욱더 옭아맬 수단을 생산하려는 것인 경우에도 그 의지에 따라 생산해야 한다. 이 경우 생산과정에서 생산적 능력이 증가하리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생산물은 생산한 자의 능력을 증식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자본의 능력을, 그 착취능력을 증식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생산력’은 발전시킬 지 모르지만, 생산적 능력을 축소시키는 체제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에서 생산적 활동이 해방된 사회, 노동 아닌 방식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생산적 능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있다면 바로 그것일 거다.

마지막으로 추가할 것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실천을 축으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모든 종류의 사상에 공통된 것이다. 어느 사상도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자 하며, 그것을 제한하는 조건들을 변혁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을 생산하는 자 자신이 스스로 실천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또한 기존의 낡은 습속을 전복하는 혁명적 방식으로 수행해야 할 문제로 제기한다는 점이다. 어떤 강력한 권위나 초월적인 권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산적인 능력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를 하나의 집합적 신체로 만들어내는 강렬함과 스스로 정하고 스스로 바꾸어가는 규칙들에 의해, 요컨대 내재적인 힘과 능력, 그리고 자율주의적 원칙에 의해 스스로의 낡은 습속부터 외부의 낡은 제도와 권력에 이르기까지 혁명적 변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변혁의 꿈은 오래 지속된다.

이러한 특징은 삶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서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사유방식을 형성한다. 물론 그 각각은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상과 이론들이 그 각각의 특성들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교차하고 겹쳐진다. 그곳은 다른 사상이 마르크스주의로 침투하는 장소이고, 또한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사상 속으로 침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기서 서로가 섞이면서 새로운 유착물을 만든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에도,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사람들이 거꾸로 마르크스주의에 손을 내미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또 한번의 붕괴가 우리의 역사를 휩쓸고 간다고 해도 마르크스주의가 인류의 삶과 사유에서 반복해서 되살아나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거북이알

영국에서 출판된 많은 책들이 우리보다 문명수준이 낮은 나라에 가면 분명히 해악을 끼칠 것이다. 그런 저자나 출판업자들은 사람의 악한 면에 호소해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려고 한다. 그 악은 심각하고 위험한 것이며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의 인생관에 깊은 해악을 남길 것이다.(<드라큘라> 작가 브람 스토커, 1895)
나는 부모님이 내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내역을 틈틈이 검색하고, 검토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받아드린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나를 불신하여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터넷을 좀더 안전하고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인터넷 사용 규칙’, 2000)

2000년 7월18일, 한국 판사 김종필은 2년 전 미성년자보호법(현재의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도덕주의자들은 이미 무혐의 처리된 영화 <거짓말>도 재론해야 한다며 기세를 올리고 작가 이현세를 비롯한 만화가들은 비탄에 빠졌다. 한국 사법부가 만화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는 건 분명해 보인다. 김종필은 이현세가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작가라서 유죄 판결한다 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관대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무조건적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모양을 한 범죄의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여과장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여과장치의 역할을 공권력이 맡는 건 봉건사회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과장치는 전체 일반인의 의견이 공정하게 반영되는 민간의 것이어야 한다. 김종필은 “음란성은 작가 같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정서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 했는데 그가 말한 일반인이란 실은 (앞의 인용문을 남긴) 도덕주의자 일반이다.
그런 도덕주의자들이 매우 특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건 그들 스스로 쉴새없이 증명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조리퐁이라는 과자는 여성 성기이고 가수 이정현이 꼽고 나온 비녀는 남성 성기이며 테트리스 게임은 삽입성교이고 거북이알이라는 과자는 콘돔이다. 그들의 ‘음란성’은 놀랍지 않은가.
그들의 눈에 온세상은 성기와 닮은 것들이다. 나는 그들이 총각김치나 조개구이를 먹는지가 정말 궁금하다.
(이견을 존중하는 근대인의 자격을 잃고 싶지 않기에) 나는 온세상을 성기를 닮았는가로 판단하는 그들의 특별한 생각을 하나의 생각으로 인정한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 그들이 거북이알 불매운동을 벌이든 테트리스 거부운동을 벌이든 그건 그들의 삶이다. 문제는 그들 도덕주의자들의 이해가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이해와 일없이 성교한다는 점이다. 검찰이 <천국의 신화>에서 처음 문제삼았던 집단성교와 수간 장면이 이번 판결의 대상이 된 청소년본에는 삭제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한국 사법부와 그들 도덕주의자들의 만족스런 성교다.
한 사회의 성인들이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을 염려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염려의 목적이 아무것도 모르는 앙상한 인간을 기르는 게 아닌 풍성한 정신을 가진 균형잡힌 인간을 기르는 일이라 할 때, 청소년을 성인세계의 ‘나쁜것들’에서 무조건 차단하는 시도는 어리석다. 완벽한 차단은 완벽한 통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청소년들의 사생활을 완전히 박탈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할뿐더러, 그런 차단은 그런 ‘나쁜것들’을 음지로 옮겨놓을 뿐이다.
고길섶이 짚었듯 청소년보호법은 국가보안법의 우량한 자식이다. 국가보안법이 국가보안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당위를 내세웠듯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보호라는 거스를 수 없는 당위를 내세운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이적성이라는 칼로 마녀사냥을 일삼았듯 청소년보호법은 유해성이라는 칼로 마녀사냥을 일삼는다.(청소년을 보호하는 데 표현의 자유가 대순가!) 가까스로 정치적 파시즘을 벗어난 한국사회는 바야흐로 문화적 파시즘을 맞고 있다.

김규항/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drumcom@shinbiro.com

사티의 살롬시네마에서 퍼옴

톨스토이와 차이코프스키

지금 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에 관한 유명한 일화.

1876년 12월 톨스토이를 위해서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실내악과 성악곡으로 짜여진 음악회를 열었다.
이때 이곡 ‘안단테 칸타빌레’를 들으면서 톨스토이는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이때 톨스토이가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낸편지-
“그리고 나의 최근 모스크바 체재는
나로서 가장 좋은 추억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 멋진밤과 같은 고귀한 상을 받은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나는
귀하의 재능에 온통 반해버렸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답장-
“귀하는 작품뿐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작가의 한분이십니다.
나의 음악이 귀하를 감동시키고 매혹시켰던 것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또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던가는
도저히 귀하에게 말할수가 없습니다(1876년 12월 24일)”

다음은 1886년 7월 1일의 차이코프스키의 일기
『 레프 톨스토이가 나와 나란히 앉아서
내 제1 현악4중주 안단테 칸타빌레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때 만큼 기쁘고 작곡가로써 자랑스러웠던 적은
내 생애에 다시 없을것이다 』

그때 톨스토이는 48세
차이코프스키는 아직 36세 였다

그런데 왜 예술가들의 삶은 언제나 비극적이었을까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던
차이코프스키를 생각하는 아침.